-
-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 박홍규, '에세'를 읽으며 웃다
박홍규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미셸 드 몽테류를 발견한 것은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라는 대중 철학서를 읽으면서다. 그 때까지 수상록이 뭔지도 모르면서 (재미 더럽게 없을 거 같은) 수상록의 저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알고 싶었다. 복도에 드리운 긴 그림자만 보고도 키다리 아저씨를 좋아하게 된 쥬디 아보트처럼 단 몇 줄만의 문장으로 나는 그만 "에세" 라는 작품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런데 세상에는 나와 달리 호기심이 생기면 직접 발로 뛰어서라도 알아내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의 저자 박홍규가 바로 그런 용감한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 문학 전공자도 아니면서 "에세" 해설서를 내게 된 까닭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60년대에 번역된 엉텅리 "에세" 말고는 제대로 된 번역서가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라는 제목처럼 완전한 번역서도 아니고 깊이 있는 해설서도 아니다. 그 대신 박홍규라는 열혈 가이드의 안내로 산책이라도 하는 것 처럼 여유롭게 '에세' 라는 거대한 숲을 가로지르는 초심자 코스다. 물론 저자의 안내가 기대했던 것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판국에 이 정도라도 어딘가! 그리하여 마침내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생활의 르네상스인' 몽테뉴의 영혼까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미셸 드 몽테뉴는 누구이고 "에세"는 어떤 책인가?
미셸 드 몽테뉴는 1533년 2월 28일 프랑스의 보르도 부근 몽테뉴 성에서 태어나 (이럴수가! 나와 생일이 똑같다) 고등법원 판사를 지내다 은퇴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몽테뉴 성에 은거하면서 20년 동안 평생의 역작 "에세"를 쓰기 시작한다. 그 사이 중요한 사건으로 결혼을 하고 두 차례 시장직을 역임하며 지병을 이유로 일년 정도 유럽 여행을 다녀온 바 있다.
그런데 프로필로 짐작컨대 일생이 평온무사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그의 일생은 불행한 멜로드라마와도 같다. 수십년간 계속된 신구교도 간의 전쟁으로 삶은 긴장의 연속이었고 부인은 동생과 바람을 피웠으며 아이들의 대부분은 일찍 죽었다. 유일한 친구라 여긴 라 보에티는 그보다 수십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여기까지 보면 참 불쌍한 사람이고 외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책에서는 그런 어두운 그림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대신,
'몽테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그의 모토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능력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이성으로 구별하여 인간의 한계를 안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그는 역사상 최초로 자기 자신에 대해 쓰기 시작한 사람이다. "에세"는 1571년 말 전후부터 그가 죽는 1592년까지 20년간에 걸쳐 쓰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란 놀라울 정도로 공허하고 다양하며 변하기 쉬운 대상이고 인간에 대해서는 언제나 변치않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는 간단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평생 화두를 붙잡고 매달린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는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나 국가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더 큰 회의를 불러왔다. 그리하여 16세기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의 바람을 타고 그는 인간존재의 다양성을 부르짖었고 삶을 둘러싼 모든 것에 다양한 가치를 인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몽테뉴는 종교전쟁 와중에 그 자신이 카톨릭이면서 신교도와 구교도의 잘못을 공정하게 비판하였고 그 어떤 사람보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원주민의 삶의 방식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자유로운 르네상스인, 바로 그 전형이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선구자였고, 민중문화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었다. 또한 과학적인 사회학과 심리학의 창립자였고, 서양중심주의에 반대한 최초의 문화상대주의자로서, 인류학과 민속학 그리고 비교법학의 선구자였다. 동시에 자유교육을 주장하고 자연의 보호와 회귀를 주장한 상태주의의 아버지였다. 또한 당대의 전쟁과 부정부패에 대한 신랄한 고발자였다.'
그러나 박홍규가 몽테뉴에게 매료된 까닭은 다른 데 있다. '박홍규, 에세를 읽으며 웃다' 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그는 이 비범한 르네상스인의 일기에서 그 어떤 위대한 사상 보다 생활의 유머를 먼저 발견하였다.
'몽테뉴는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높은 경지에 오른 자의 고고한 웃음이 아니다. 언제나 타인과 같은 눈높이에서 타인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이어 자신도 같은 부류라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이 '겹눈'이 몽테뉴 웃음의 고갱이다. 그래서 서글프다. 언제나 쓴웃음이 난다. 그는 웃는 모랄리스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모럴리스트가 없다. 굳이 찾는다면 김형석, 안병욱, 이어령, 김동길, 이태규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들에겐 웃음이 없다. 최근의 박노자나 강준만에게도 웃음은 없다. 그들 역시 도덕 선생이다. 몽테뉴처럼 웃는 모럴리스트는 도덕 선생이 아니다. 그가 도덕 선생과 다른 점은 자기동일성이 없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에세'를 읽으면서 자유롭다. 도덕 교과서가 아니고 사상서가 아닌 몽테뉴가 말한 것 처럼 아무 것도 아니기에 지극히 편안하다. (물론 담고 있는 내용은 절대 만만치 않다) 어느 정도냐면 평생 책 속 둘러쌓여 산 책벌레가 이런 자기부정까지 하고 있으니 낄낄거릴 수 밖에. '책을 통한 공부는 활기 없고 무기력하다. 따라서 우리의 정신에 단번에 자극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대화는 단번에 우리의 정신을 일깨워 주고 단련시켜 준다. 이렇게 책을 부정하기에 그를 읽는 것이 더욱 즐겁다.'
나는 철학에는 아는 바 없지만 전적으로 박홍규의 정의에 동의하는 바다. 인류가 짊어지고 가야할 무거운 사상에 깃털처럼 가벼운 유머를 입힌 다음 날려버릴 수 있다는 것, 나는 그런 것들이야말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속에서 웃음을 발견할 수 있는 여유.. 미셸 드 몽테뉴는 평생을 통해 천착한 '에세'를 통해 우리에게 그런 삶을 시사하고 있다.
'그들은 인생을 흘려보내고, 피하고, 빠져나가고, 죽이고 교묘하게 피하고, 또한 인생이 고달프고 경멸해야 하는 것인양, 가능한 한 무시하고 회피하는 것만큼 멋진 삶의 방식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지금 내가 그것을 잡고 있는 최후의 노경에 와서도 인생은 가치가 있으며, 쾌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박홍규라는 중간자를 통해 바라 본 몽테뉴는 진짜 몽테뉴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전공자로서 감히 몽테뉴는 누구라고 '에세'는 어떤 책이라고 정의를 내릴 자신도 없다. 그러나 나는 그 거대한 영혼의 숲에서 길을 잃고 참으로 오래도록 황홀하였다. 16세기 한 르네상스인의 내실의 철학이 마침내 우리를 자유롭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몽테뉴의 말을 빌어 이렇게 리뷰를 끝맺음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도 경박하고 부질없는 일이니 그대로 한가하게 시간을 허비할 거리도 못 된다. 그럼 안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