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버트 하일브로너 & 윌리엄 밀버그 지음, 홍기빈 옮김 / 미지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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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사회의 형성(the making of economic society)이라는 원제를 가진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서.

 

  무려 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책인데 교양경제학 서적 중에 이 책만큼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은 처음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주요개념 과 역사적 형성과정에 대한 지식 습득은 물론이고 자본주의의 과거, 현재, 미래   에 대한 통찰과 혜안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 책은 1968년 초판 출판 이래 2008년까지 무려 12번의 개정을 거친 12판의 역사를 자랑하는 책답게 인간역사의 새벽에 등장한 최초의 시장(물물교환시장)에서부터 2008년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한 미국발 금융위기까지 다룬 인간경제의 대서사시이다. 바로 이점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다룬 다른 어떤 저서와도 다른 독특한 성격과 매력을 이 책에 부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1960년대 이후 40년간은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적 성격이 극적으로 변했고 자본주의가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극도로 확대된 시기인데, 이러한 최근의 중요한 변화까지 놓치지 않고 자본주의 역사에 편입시켜 분석한 책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자본주의의 역사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저자인 하일브로너는 미국의 진보경제를 대표하는 학자답게 이 책에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해 시종일관 냉혹하고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시선을 유지한다. 그러나 하일브로너의 이러한 분석태도는 자본주의와 시장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과 시장을 정확하고 제대로 보기위한 도구적 틀로서 이해해야 된다. 과거와 현재의 자본과 시장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분석해야 미래의 자본주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저자의 분석적 틀과 시선은 날카롭고 냉혹하지만 자본주의의 공과에 대한 서술은 치우침 없이 공평하다.

 

 다시 말해, 하일브로너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그 자체를 악덕 혹은, 미덕으로 보지 않는다. 부유함이 악덕이 아니며 가난과 빈곤 또한 미덕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하지 않는다. 하일브로너의 이러한 치우침 없는 공평하고 냉혹한 시선은 요즘 우리나의 일부 진보언론 매체가 쏟아내는 자본주의와 시장에 대한 이유 없는 극도의 증오심과 적대감으로 무장한 기사와 글들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솔직히 보수언론들의 자본과 시장에 대한 짝사랑보다 일부 진보매체의 극단적인 자본주의 혐오(시장경제가 곧 망해야 될 것 같은 논조들)가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조선, 중앙, 동아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의 시장경제 예찬과 일부 진보언론의 극단적인 시장경제 증오 편향 가운데서 적절한 균형을 잡는 게 필요하다. 바로 이런 적절한 균형적 시각을 하일브로너에게서 읽을 수 있다.

 

  이 책에서 하일브로너는 인간사회가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세 가지 방식을 전통, 명령, 시장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전통은 원시적 물물교환과 자급자족적 경제, 명령은 강력한 왕권으로 통치되는 경제, 그리고 시장은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조율하는 시장메커니즘이 주도하는 경제체제이다. 저자는 이 세 가지 큰 틀로 유사 이래 전체 인간경제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를 설명한 부분도 흥미롭지만, 1929년 미국 대공황을 분석한 하일브로너의 독특하고 정확한 견해와 사유를 읽고 나면 당시 미국대공황의 여러 원인들이 결코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무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대공황의 근본적 원인은 바로 ‘대박에 대한 광적인 열망’이었던 셈이다. 이윤과 투기를 불리기 위한 극단적이고 비도덕적 조작들이 무분별하게 횡횡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경고메세지도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다.

 

 또 하일브로너는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제공한다. 케인즈 경제학이 비록 스태그플레이션을 해결하지 못했지만 그의 경제학이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미래가 반드시 시장경제체일 필요도 없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모색이 필요한 이유를 이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경제학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고 경제사 교과서의 용도로도 유용하다. 어떤 용도로 이 책을 선택하든 간에 모두 자신이 원하고 기대했던 이상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참모습과 변화의 궤적, 그리고 미래에 대한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더 크고 더 넓게 보고 싶은 분에게 이 책을 추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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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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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읽은 <현의 노래>를 끝으로 김 훈이 쓴 책은 모두 완독하게 되었다. <현의 노래>는 김 훈의 첫 역사소설 <칼의 노래>와는 느낌이 많이 다른데 <칼의 노래>가 거칠고 날카롭다면 <현의 노래>는 부드럽고 유약한 느낌이 나는 소설이다. 나는 김 훈의 역사소설 3부작 중에서 <남한산성>을 제일 좋아한다. <칼의 노래>는 여름의 치열함이 느껴지고 <남한산성>에서는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 사람들의 민중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며, <현의 노래>는 봄과 여름사이에 약동하는 생명이 떠오른다.

 

 <현의 노래>에는 멸망해 가는 가야의 예인 우륵과 그의 부인 비화, 우륵의 제자 니문, 가야를 배신한 대장장이 야로, 가야왕의 죽음에 순장되기를 거부하고 도망친 궁중시녀 아라,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의 군주 이사부 등이 등장하는데 소설적 구성은 복잡하지 않고 비교적 단순하다. 등장인물 외에 소설을 이끌어 가는 것은 가야의 쇠와 금이다.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 야로와 금을 다루는 예인 우륵은 공통적으로 망해가는 가야를 배반하지만 그 둘의 마지막 운명은 엇갈린다. 둘 다 쇠와 금은 가야의 것도 신라의 것도 아니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지만 쇠는 언제든지 병장기로 변할 운명을 타고난 것이어서 쇠를 다루는 야로는 살아남지 못한다. 금은 소리를 만들어내는데 이 소리는 가야를 멸망시키지도 않고 신라를 공격하지도 않는다. 소리는 국경도 주인도 없는 이 땅위의 생명의 흐름과도 같아서 신라 장군 이사부와 진흥왕은 우륵의 가야금 소리와 더불어 자족한 모양이다.
 
 이 작품은 제목처럼 현의 소리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도무지 알듯하면서도 모를 듯한 소리에 대한 작가의 수많은 말들은 너무나 정제되어 있어서 눈과 가슴에 잡아두기 어렵다. 작품은 김 훈의 다른 작품들처럼 주어와 술어 사이에 한 두 개의 간단한 수식어만 달린 짧은 문장들로 짜여진다. 그러나 이 <현의 노래>의 문장들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아름답고 현란하고 생생하다.

 

 감정의 묘사는 극도로 절제하는 대신에 감각에 대한 묘사는 극단적이라 할 만큼 정교하고 치밀하다. 감정을 포기하고 감각묘사에 치중함으로서 작가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진한 살 냄새 나는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가야왕의 시녀 아라가 오줌 누는 장면을 묘사한 글이 그러하고 우륵의 아내 비화의 생김새를 시각적 인상을 버리고 오로지 냄새로만 묘사해 내는 대목이 그러하다. 김 훈에게 있어 오줌을 누는 행위는 단순한 생리적 배설현상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그 행위는 생명의 원리라는 면에서 숭고하게 느껴진다.

 

 작품속의 주인공들은 저절로 만나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자석처럼 끌려 서로 몸을 섞고 바람처럼 헤어지고 두려움 없이 죽어간다. 이러한 삶의 과정과 운명에 대해 사람들은 비난도 원망도 하지 않으며 기쁨도 슬픔도 느끼지 않고 분노도 절망도 하지 않는다. 김 훈은 아마도 고대인들의 삶이 현대인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현대인들이 가공할 무한경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의 익숙한 상식으로 여기듯이 고대인들은 흥망성쇠하는 왕들의 운명에 제 고을과 제 몸을 두려움 없이 의탁한다.

 

 그러나 그들이 오로지 거대한 운명에만 몸을 맡긴 것은 아니리라. 작품 중 궁중시녀 아라와 우륵의 제자 니문의 인연은 안타깝다. 작가는 그 미완의 인연에 비로소 감각이 아닌 감정을 엮어 놓았다. 궁중시녀 아라와 니문의 인연이 자아내는 슬픈 감정의 카타르시스는 이 소설의 백미다. 김 훈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의 다음 작품의 배경은 19세기 초 조선이라고 한다. 역사소설이 또 나오겠다.

 

                                                                                            2010년 가을 작성

김훈 작가는 2011년에 장편<흑산>을 마지막으로 장편작품을 더 이상 내지 않고 있다. 위의 본문에 언급된 19세기 초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바로 <흑산>이다. 그동안 계간잡지 <문학동네>에 몇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그의 단편을 찾아 읽는 것으로 김훈의 새 작품에 대한 갈망은 약간 해소 할 수 있었지만 내가 기다리는 건 김훈 작가의 다음 장편소설.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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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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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15년 5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6주기가 되는 날이다.

몇 년 전(아래 글 본문에 서거 2년후에 읽은 책이라고 쓴 부분이 있는 걸 보니 2011년인 모양이다) 노무현 자서전<운명이다>를 읽고 작성한 글 한편이 있어 업로드한다. 이 글에 담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은 벌써 4년 전이라 지금의 내 시각과는 좀 다르지만 전혀 고치지 않는다. 생각의 족적을 그대로 두고 다시 되짚어 본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고..

 

 2002년 대선 때, 나는 멋도 모르고 노사모를 응원하고 시험 직전의 강의실을 돌며 학과 후배들에게 명계남과 문성근이 주도한 희망돼지 저금통 후원을 부 탁 하는 전단지를 돌리곤 했다. 그때 내가 무슨 명확한 정치의식과 경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노무현, 그를 지지하고 응원해야 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하고 사회진보가 이루어 질 것 같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퇴임 후, 자신의 고향에 내려와 주민들과 자전거 타는 그의 모습을 보 는 것은 그의 정치적 공과와 관계없이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으면서 노무현과 관련된 내 기억의 대부분은 극히 피상적이고 부정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대통령 재임 시절, 나는 거듭되는 실업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내 관심은 좋은 직업을 찾는 것에만 몰려 있었고 실업자 신세를 벗어나는 것을 인생최대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으니 그의 대통령 임기동안 일어났던 사건들과 정치, 경제적 문제들은 내 기억의 피질에 스며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정치인이자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도, 한 인간으로서의 노무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일상에 지친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뿐이다.

 

이 책<운명이다>로 인해 비로소 나는 정치인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노무현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대통령 임기시절에 앓았던 그에 대한 나의 기억상실증도 뒤늦게 치유할 수 있었다. 그의 서거 이후, 2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뒤늦게 그의 자서전을 다시 읽게 된 것도 그저 운명 같기만 하다. 이 책을 보면서 그의 서거 때 느꼈던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막연한 슬픔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서야 인간 노무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에 대한 무성한 소문과 세간의 이야기들은 이 책으로 인해 이제 안개가 걷히듯 모두 사라졌다.

 

 노무현 자서전<운명이다>는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육필로 쓴 자서전은 아니다. 나도 이 점이 아쉬웠다. 이 책은 문재인 이사장의 노무현 재단이 자서전과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유시민 전 장관이 리라이트(rewrite)작업을 해서 나온 사후 자서전이다. 그러나 이 책은 노무현 자신이 바라본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고, 자료수집이나 리라이트 작업을 맡은 문재인, 유시민 두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존 시절 때 가장 가까웠던 정치적 동반자였음을 상기한다면 이 자서전은 분명 정본 자서전이라 할 만하다.

 

 책은 여타 자서전처럼 노무현의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다. 그의 정치적 도전과정은 그대로 한국현대정치사의 대서사시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소외받고 억압받던 약자와 노동자들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부터 정치에 입문하여 청문회 스타가 되기까지, 그리고 김영삼 전대통령의 3당 야합에 실망하여 지역주의와 야권분열 구도를 극복하기 위해 독자적 정치행보를 걷다가 김대중 전대통령의 평민당 입당, 그리고 대선후보자가 되어 정몽준과의 극적인 후보 단일화를 거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통령 당선까지의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유시민의 담백하고 빼어난 글 솜씨도 생전의 노무현을 재현하는데 한 몫하고 있다. 그의 대통령 재임시절의 공과도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서술된다.

 

 이 책이 보여주는 인간 노무현은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 초라한 흙집에서 태어나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장관, 그리고 한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런 이력만 보면 분명 누구나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 어느 누구든 그를 실패한 대통령으로만 여길 뿐이다. 이 자서전은 분명 영광과 성공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시행착오와 좌절과 실패의 회고록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의 치열했던 삶은 결코 패배자의 인생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표면적으로 자살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지만 그 외피를 벗기고 나면 비로소 정치적 타살의 흔적을 역력히 발견할 수 있다. 그 흔적들을 이 책<운명이다>에서 분명히 나는 보았다. 그가 생전에 싸웠던 것은 특혜와 특권, 반칙, 기회주의, 지역주의, 노동탄압과 인권탄압, 정경유착 등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쥐고 흔드는 거대 보수 언론과의 싸움이었다. 이 언론과의 싸움은 외롭고 힘든 싸움이었다. 그는 원칙과 신뢰, 투명과 공정, 분권과 자율, 대화와 타협을 무기로 수구보수 언론과 승산이 없는 싸움을 벌이다 패했다. 그래서 그를 바보 노무현이라 하지 않던가.. 그 싸움의 결과는 참담했다. 언론과 검찰을 개혁하려던 그는 퇴임 후 언론과 검찰에게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보복을 당했다.

 

 그는 왜 이런 삶을 살아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는 승률도 좋았고 수임률도 높았다. 3당 합당의 주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라 권력의 중심으로 갔더라면 그의 앞날은 출세와 성공, 부와 명예의 탄탄대로였을 것이고 오늘날 그의 실패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야합과 기회주의, 지역분열을 낳았던 김영삼을 떠나 지역분열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항했다. 그는 화려한 학력도 없고 재산도 없었고 힘있는 빽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 반칙을 자행하는 자에 대한 분노, 정의의 대한 열정 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 노무현의 정신이다. 그가 만들려고 했던 세상은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특권과 반칙이 통용되지 않는 상식과 원칙, 민주적 질서로 굴러가는 세상 말이다.

 

 그는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 물론 그의 주변에서 정당치 못한 자금이 흘렀고 그 돈을 그의 주변인물들이 떳떳하지 않게 사용한 정황은 분명히 있다. 특권과 반칙, 부정과 타협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주변인들이 저지른 잘못까지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누가 그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지키려 했고 잔인한 언론과 검찰의 보복의 순환 고리를 끊으려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증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구차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런 길을 택한다면, 자신을 버리지 않을 사람이 너무 많을 것이고 그 사람들이 받을 고통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먼저 자기 자신을 버렸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했다.

 

재임 중 수천 억 원 대의 비자금을 불법으로 조성하여 챙기고 권력을 위해 무고한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이들도 일말의 양심과 도덕조차 버리고 버젓이 산송장처럼 추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삶에 비해 그의 죽음은 과연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옳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옳을까?

 

그의 선택을 지탄하는 사람들은 양심과 도덕을 버린 자들의 삶을 겉으로는 비난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도 그들처럼 살 기회가 오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런 추한 삶의 길을 걸으려 할 것이다. 지독한 이중적, 위선적 태도로 물든 우리 삶의 현실이다. 이 현실은 서글픈 자화상이다. 노무현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있는 이 서글픈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경제를 파탄 낸 장본인으로,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받아 챙긴 파렴치한 범죄자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모든 실패를 변명하지 않고 말없이 인정했다.

 

 

이 책은 실패와 좌절의 회고록이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정신과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더 이상 봉하 들판에서 자전거 타는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하여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비록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정신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분명 승리할 날이 올 것이다.

 

 

노무현을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을 때 손수건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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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치오 카쿠의 신작이다.

 마음과 의식을 다뤘다고 해서 주저없이 구입했다.

 목차를 대충 훑어보니 의식과 마음에 대한 관점이

 물리주의에 충실한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미치오

 카쿠는 물리학자가 아닌가..

 미치오 카쿠도 역시 레이 커즈와일 처럼

 인간의 의식을 컴퓨터에 다운로드 할 수 있다는

 가정에 추호의 의심도 없고 그런 작업에 대한

 기술적 기반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정말 인간의 의식을 컴퓨터에 다운로드

 할 수 있을까? 최근 개봉한 헐리우드 영화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에도 인공지능이 등장

 하는데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공포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의식을 시간의 산물이라고 본다.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듯이 인공지능이나

의식을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인간이 의식을 갖기 위해 보낸 수십억년의 세월을 생각해보라.

그 억겁의 세월은 의식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의식을 다운로드 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전혀 없을까..

철학계에서는 복제오류라는 사고실험이 있다.

관련 책을 다시 한번 들춰볼 생각이지만 한 인간의 의식을 컴퓨터에 다운로드

할 수 있다면 컴퓨터 한 대가 아닌 여러 대, 아니 수십, 수백대의 컴퓨터에도

다운로드 가능할 것이라는 개연성이나 가능성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그렇게 복제된 수십 개의 의식에 대한 정체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의식이 수십, 수백개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까?

 

어찌됐든간에 의식을 컴퓨터에 다운로드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시간이 지나보면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다운로드 할 수 있다면 냉각팬이 윙윙 돌아가는 후덥지근한

cpu와 메모리 안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지만

나라면 컴퓨터안에 들어가 살고 싶지는 않다.

 

<마음의 미래>를 마저 읽고 나면 생각해 볼 거리가 많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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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분자
프랜시스 크릭 지음, 이성호 옮김 / 궁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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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왓슨과 함께 1953년 인간 DNA구조가 이중나선임을 규명한 생명공학자 가 바로 프랜시스 크릭이다. 사실 제임스 왓슨의 <이중 나선>이라는 책은 좀 실망이었다. <이중 나선>은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구조를 규명해 나가는 과 정을 그린 책인데 병원 입원 기간 중 극심한 통증을 참으며 읽은 책이라서 그런지 내용도 머리에 별로 남지 않고 특별한 감흥도 없었다. 다만, 이 책에서 계속 언급 되는 왓슨의 연구동반자 프랜시스 크릭과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두 인물에 대한 호기심은 잊혀지지 않았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X선 회절연구로 DNA 구조규명에 공헌한 여성물리학자로서 요절하였고 프랜시스 크릭은 DNA구조 규명이후에도 활발한 연구활동을 펼치다 지난 2004년 세상을 떠났다. 제임스 왓슨의 <이중 나선>에서 프랜시스 크릭은 늘 활달하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으며 때로는 괴팍한 성품의 소유자로 묘사되어 있는데 크릭의 저서<인간과 분자>에서도 크릭의 그러한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인간과 분자>는 지난 2010년에 궁리출판사에서 이성호씨에 의해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궁리출판사에서 나온 과학책들은 모두 믿을만하고 특히 번역이 훌륭하다. 상업성이 떨어지는 이런 책들을 열심히 만드는 이런 출판사들이 있어 행복하다.

 

<인간과 분자>는 프랑스의 생화학자 자크모노의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을 떠오르게 한다. 둘 다 생기론(生氣論:생명현상의 발현이 비물질적인 생명력이며 자연법칙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원리에 지배되고 있다고 보는 이론)에 반대하고 생기론을 타파하기 위한 논의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과 필연>을 읽은 사람이라면 프랜시스 크릭의<인간과 분자>가 마치<우연과 필연>의 축약본처럼 느껴질 정도로 두 책의 내용과 관점은 거의 흡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현상을 이 우주와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인 물리, 화학현상과 구분되는 독특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위에서 말한 생기론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생명현상을 “생명의 신비”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신비가 바로 생기론의 핵심인 셈이다. 인간의 의지와 자연법칙을 뛰어넘어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현상에

“신비” 현상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프랜시스 크릭은 이 책에서 주장한다. 우리가 신비한 현상이라 부르는 것들은 다만 아직까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마땅한 이론과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며, 또 이미 생명현상분야에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또 무엇이냐며 크릭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인다.

 

 크릭의 이러한 자신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양자물리학과 분자생물학의 성과에 힘입은 바가 크다. 크릭은 당시의 양자역학과 생화학 지식이 이 책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반생기론적인 생물학의 확실성의 기반을 제공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당시의 생물학, 화학의 이론적 기반이 언젠가는 다소 부정확한 것으로 드러날 수 도 있지만 과학자들은 그러한 가능성에 얽매이지 않음에 주목하라고 한다.

 

 과학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느껴지기도 하는 대목이지만 과학적 방법에 회의를 가졌다면 오늘날의 현대문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크릭의 주장이 일개 생물학자의 기고만장한 과학예찬으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크릭은 물리학과 화학에 대한 현재 우리의 지식이 이 세계를 바라보는 대단히 견고한 기반으로 작용하는데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다. 과학적 지식이 아니었다면 종교적 세계관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자신감은 충분한 근거가 있고 억지스럽지 않다.

 

 

 크릭은 사람들이 생기론적 세계관을 원하는 이유로 생명현상에서 관찰되는 고도로 복잡한 패턴이나 현상들이 인간의 직관과 이성으로 아직까지 잘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통 무기물에서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러한 믿음은 이미 오래전에 실험으로 반증되었다. 무기물로 유기분자의 합성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고집스런 일부 종교인들은 여전히 인간들을 신의 피조물로 여기는 확고한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크릭은 이러한 믿음이 엄연한 실재적 지식인 물리, 화학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고 이 종교적 도그마를 깨부수는 작업을 당시의 분자생물학적 연구 성과에 기대어 진행한다. 생명현상에서 분자생물학이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다는 점, 그리고 생명현상에서 생기론이 자리 잡을 곳은 전혀 없다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자연선택과 진화론이 우리의 새로운 문명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크릭의 주장은 단호하고 명쾌하다. 크릭은 생기론은 죽겠지만 그 유령은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생기론의 유령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것 같다. 크릭이 타파하고 싶었던 것은 생기론과 이와 관련된 기독교 사상의 일부였고 그는 공립학교에서의 종교교육에도 반대했다. 물론 나도 크릭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과학적 방법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절대적으로 배제하지 않았으면 한다. 과학이 또 다른 종교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2011년 7월 1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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