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2015년 5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6주기가 되는 날이다.

몇 년 전(아래 글 본문에 서거 2년후에 읽은 책이라고 쓴 부분이 있는 걸 보니 2011년인 모양이다) 노무현 자서전<운명이다>를 읽고 작성한 글 한편이 있어 업로드한다. 이 글에 담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은 벌써 4년 전이라 지금의 내 시각과는 좀 다르지만 전혀 고치지 않는다. 생각의 족적을 그대로 두고 다시 되짚어 본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고..

 

 2002년 대선 때, 나는 멋도 모르고 노사모를 응원하고 시험 직전의 강의실을 돌며 학과 후배들에게 명계남과 문성근이 주도한 희망돼지 저금통 후원을 부 탁 하는 전단지를 돌리곤 했다. 그때 내가 무슨 명확한 정치의식과 경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노무현, 그를 지지하고 응원해야 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하고 사회진보가 이루어 질 것 같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퇴임 후, 자신의 고향에 내려와 주민들과 자전거 타는 그의 모습을 보 는 것은 그의 정치적 공과와 관계없이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으면서 노무현과 관련된 내 기억의 대부분은 극히 피상적이고 부정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대통령 재임 시절, 나는 거듭되는 실업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내 관심은 좋은 직업을 찾는 것에만 몰려 있었고 실업자 신세를 벗어나는 것을 인생최대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으니 그의 대통령 임기동안 일어났던 사건들과 정치, 경제적 문제들은 내 기억의 피질에 스며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정치인이자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도, 한 인간으로서의 노무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일상에 지친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뿐이다.

 

이 책<운명이다>로 인해 비로소 나는 정치인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노무현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대통령 임기시절에 앓았던 그에 대한 나의 기억상실증도 뒤늦게 치유할 수 있었다. 그의 서거 이후, 2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뒤늦게 그의 자서전을 다시 읽게 된 것도 그저 운명 같기만 하다. 이 책을 보면서 그의 서거 때 느꼈던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막연한 슬픔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서야 인간 노무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에 대한 무성한 소문과 세간의 이야기들은 이 책으로 인해 이제 안개가 걷히듯 모두 사라졌다.

 

 노무현 자서전<운명이다>는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육필로 쓴 자서전은 아니다. 나도 이 점이 아쉬웠다. 이 책은 문재인 이사장의 노무현 재단이 자서전과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유시민 전 장관이 리라이트(rewrite)작업을 해서 나온 사후 자서전이다. 그러나 이 책은 노무현 자신이 바라본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고, 자료수집이나 리라이트 작업을 맡은 문재인, 유시민 두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존 시절 때 가장 가까웠던 정치적 동반자였음을 상기한다면 이 자서전은 분명 정본 자서전이라 할 만하다.

 

 책은 여타 자서전처럼 노무현의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다. 그의 정치적 도전과정은 그대로 한국현대정치사의 대서사시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소외받고 억압받던 약자와 노동자들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부터 정치에 입문하여 청문회 스타가 되기까지, 그리고 김영삼 전대통령의 3당 야합에 실망하여 지역주의와 야권분열 구도를 극복하기 위해 독자적 정치행보를 걷다가 김대중 전대통령의 평민당 입당, 그리고 대선후보자가 되어 정몽준과의 극적인 후보 단일화를 거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통령 당선까지의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유시민의 담백하고 빼어난 글 솜씨도 생전의 노무현을 재현하는데 한 몫하고 있다. 그의 대통령 재임시절의 공과도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서술된다.

 

 이 책이 보여주는 인간 노무현은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 초라한 흙집에서 태어나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장관, 그리고 한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런 이력만 보면 분명 누구나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 어느 누구든 그를 실패한 대통령으로만 여길 뿐이다. 이 자서전은 분명 영광과 성공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시행착오와 좌절과 실패의 회고록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의 치열했던 삶은 결코 패배자의 인생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표면적으로 자살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지만 그 외피를 벗기고 나면 비로소 정치적 타살의 흔적을 역력히 발견할 수 있다. 그 흔적들을 이 책<운명이다>에서 분명히 나는 보았다. 그가 생전에 싸웠던 것은 특혜와 특권, 반칙, 기회주의, 지역주의, 노동탄압과 인권탄압, 정경유착 등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쥐고 흔드는 거대 보수 언론과의 싸움이었다. 이 언론과의 싸움은 외롭고 힘든 싸움이었다. 그는 원칙과 신뢰, 투명과 공정, 분권과 자율, 대화와 타협을 무기로 수구보수 언론과 승산이 없는 싸움을 벌이다 패했다. 그래서 그를 바보 노무현이라 하지 않던가.. 그 싸움의 결과는 참담했다. 언론과 검찰을 개혁하려던 그는 퇴임 후 언론과 검찰에게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보복을 당했다.

 

 그는 왜 이런 삶을 살아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는 승률도 좋았고 수임률도 높았다. 3당 합당의 주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라 권력의 중심으로 갔더라면 그의 앞날은 출세와 성공, 부와 명예의 탄탄대로였을 것이고 오늘날 그의 실패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야합과 기회주의, 지역분열을 낳았던 김영삼을 떠나 지역분열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항했다. 그는 화려한 학력도 없고 재산도 없었고 힘있는 빽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 반칙을 자행하는 자에 대한 분노, 정의의 대한 열정 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 노무현의 정신이다. 그가 만들려고 했던 세상은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특권과 반칙이 통용되지 않는 상식과 원칙, 민주적 질서로 굴러가는 세상 말이다.

 

 그는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 물론 그의 주변에서 정당치 못한 자금이 흘렀고 그 돈을 그의 주변인물들이 떳떳하지 않게 사용한 정황은 분명히 있다. 특권과 반칙, 부정과 타협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주변인들이 저지른 잘못까지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누가 그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지키려 했고 잔인한 언론과 검찰의 보복의 순환 고리를 끊으려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증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구차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런 길을 택한다면, 자신을 버리지 않을 사람이 너무 많을 것이고 그 사람들이 받을 고통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먼저 자기 자신을 버렸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했다.

 

재임 중 수천 억 원 대의 비자금을 불법으로 조성하여 챙기고 권력을 위해 무고한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이들도 일말의 양심과 도덕조차 버리고 버젓이 산송장처럼 추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삶에 비해 그의 죽음은 과연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옳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옳을까?

 

그의 선택을 지탄하는 사람들은 양심과 도덕을 버린 자들의 삶을 겉으로는 비난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도 그들처럼 살 기회가 오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런 추한 삶의 길을 걸으려 할 것이다. 지독한 이중적, 위선적 태도로 물든 우리 삶의 현실이다. 이 현실은 서글픈 자화상이다. 노무현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있는 이 서글픈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경제를 파탄 낸 장본인으로,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받아 챙긴 파렴치한 범죄자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모든 실패를 변명하지 않고 말없이 인정했다.

 

 

이 책은 실패와 좌절의 회고록이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정신과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더 이상 봉하 들판에서 자전거 타는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하여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비록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정신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분명 승리할 날이 올 것이다.

 

 

노무현을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을 때 손수건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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