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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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읽은 <현의 노래>를 끝으로 김 훈이 쓴 책은 모두 완독하게 되었다. <현의 노래>는 김 훈의 첫 역사소설 <칼의 노래>와는 느낌이 많이 다른데 <칼의 노래>가 거칠고 날카롭다면 <현의 노래>는 부드럽고 유약한 느낌이 나는 소설이다. 나는 김 훈의 역사소설 3부작 중에서 <남한산성>을 제일 좋아한다. <칼의 노래>는 여름의 치열함이 느껴지고 <남한산성>에서는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 사람들의 민중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며, <현의 노래>는 봄과 여름사이에 약동하는 생명이 떠오른다.

 

 <현의 노래>에는 멸망해 가는 가야의 예인 우륵과 그의 부인 비화, 우륵의 제자 니문, 가야를 배신한 대장장이 야로, 가야왕의 죽음에 순장되기를 거부하고 도망친 궁중시녀 아라, 가야를 멸망시킨 신라의 군주 이사부 등이 등장하는데 소설적 구성은 복잡하지 않고 비교적 단순하다. 등장인물 외에 소설을 이끌어 가는 것은 가야의 쇠와 금이다.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 야로와 금을 다루는 예인 우륵은 공통적으로 망해가는 가야를 배반하지만 그 둘의 마지막 운명은 엇갈린다. 둘 다 쇠와 금은 가야의 것도 신라의 것도 아니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지만 쇠는 언제든지 병장기로 변할 운명을 타고난 것이어서 쇠를 다루는 야로는 살아남지 못한다. 금은 소리를 만들어내는데 이 소리는 가야를 멸망시키지도 않고 신라를 공격하지도 않는다. 소리는 국경도 주인도 없는 이 땅위의 생명의 흐름과도 같아서 신라 장군 이사부와 진흥왕은 우륵의 가야금 소리와 더불어 자족한 모양이다.
 
 이 작품은 제목처럼 현의 소리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도무지 알듯하면서도 모를 듯한 소리에 대한 작가의 수많은 말들은 너무나 정제되어 있어서 눈과 가슴에 잡아두기 어렵다. 작품은 김 훈의 다른 작품들처럼 주어와 술어 사이에 한 두 개의 간단한 수식어만 달린 짧은 문장들로 짜여진다. 그러나 이 <현의 노래>의 문장들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아름답고 현란하고 생생하다.

 

 감정의 묘사는 극도로 절제하는 대신에 감각에 대한 묘사는 극단적이라 할 만큼 정교하고 치밀하다. 감정을 포기하고 감각묘사에 치중함으로서 작가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진한 살 냄새 나는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 가야왕의 시녀 아라가 오줌 누는 장면을 묘사한 글이 그러하고 우륵의 아내 비화의 생김새를 시각적 인상을 버리고 오로지 냄새로만 묘사해 내는 대목이 그러하다. 김 훈에게 있어 오줌을 누는 행위는 단순한 생리적 배설현상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그 행위는 생명의 원리라는 면에서 숭고하게 느껴진다.

 

 작품속의 주인공들은 저절로 만나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자석처럼 끌려 서로 몸을 섞고 바람처럼 헤어지고 두려움 없이 죽어간다. 이러한 삶의 과정과 운명에 대해 사람들은 비난도 원망도 하지 않으며 기쁨도 슬픔도 느끼지 않고 분노도 절망도 하지 않는다. 김 훈은 아마도 고대인들의 삶이 현대인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현대인들이 가공할 무한경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의 익숙한 상식으로 여기듯이 고대인들은 흥망성쇠하는 왕들의 운명에 제 고을과 제 몸을 두려움 없이 의탁한다.

 

 그러나 그들이 오로지 거대한 운명에만 몸을 맡긴 것은 아니리라. 작품 중 궁중시녀 아라와 우륵의 제자 니문의 인연은 안타깝다. 작가는 그 미완의 인연에 비로소 감각이 아닌 감정을 엮어 놓았다. 궁중시녀 아라와 니문의 인연이 자아내는 슬픈 감정의 카타르시스는 이 소설의 백미다. 김 훈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의 다음 작품의 배경은 19세기 초 조선이라고 한다. 역사소설이 또 나오겠다.

 

                                                                                            2010년 가을 작성

김훈 작가는 2011년에 장편<흑산>을 마지막으로 장편작품을 더 이상 내지 않고 있다. 위의 본문에 언급된 19세기 초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바로 <흑산>이다. 그동안 계간잡지 <문학동네>에 몇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그의 단편을 찾아 읽는 것으로 김훈의 새 작품에 대한 갈망은 약간 해소 할 수 있었지만 내가 기다리는 건 김훈 작가의 다음 장편소설.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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