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최소원칙
도정일 외 지음 / 룩스문디(Lux Mundi)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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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의 스킬을 알려주기보다는 우리시대에 있어 글쓰기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생각, 철학을 14명의 사회 각계전문가들에게서 들어보는 책이다.

 

 물론 글쓰기의 기술과 스킬을 알려주는 내용도 빠지지 않지만 이 책이 지향하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담론의 형성이다. 수천 년 간 글을 쓴다는 것은 한자와 한문에 능통한 지배층과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훈민정음이 발명되었지만 글쓰기 행위의 주체가 일반 민중과 대중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 높았던 종이와 먹의 위세는 사라져 문맹률은 거의 제로가 되었고 스마트 폰과 인터넷SNS로 소통하는 시대에 있어 글쓰기의 주체는 모든 사람들로 확대되었다. 또 글 쓰는 일반민중이 바로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가 된지 오래다. 그래서 옛날에는 글 그 자체가 귀하고 소중했지만 요즘엔 너무 많은 글이 넘쳐나는데다가 인문학적, 이성적 성찰과 인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글이 너무 많아 도리어 좋은 글 한편 찾아내는 것이 희귀한 일이 되어 버렸다. 특히 인터넷매체나 웹상에 올라오는 수많은 글들의 대부분은 한글 맞춤법조차 준수하지 못한 비문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이 소개하는 글쓰기의 최소원칙들은 오늘날 모든 대중들이 거의 강압적으로(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지 않고는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다) 직면하고 있는 글쓰기의 현실적 필요 속에서 글쓰기의 방향과 방법을 몰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된다.

 

 평론가 도정일 씨는 책읽기와 글쓰기의 교육이 성숙한 시민사회의 뿌리가 된다고 하면서 우리도 하루빨리 제대로 된 글쓰기 교육을 시작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작가 김 훈은 소설, 에세이, 칼럼의 글쓰기 형태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김훈 특유의 편견?을 읽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처세, 경영, 주식, 경제, 자기계발 서적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출판시장과 독서현실에서 고전읽기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는 영산대 배병삼 교수의 ‘고전, 현재형으로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할 오래된 미래’ 라는 글은 혼자 읽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글이다. 고전읽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문재 교수의 ‘정확해야 아름다울 수 있다’ 라는 글은 글쓰기의 실제적 스킬과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훈련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실용적이다. 이 교수는 정확한 문장이 생명인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미덕을 칭찬한다. 그리고 개성적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 다지기는 바로 정확한 문장의 구사임을 주장하면서 정확하고 개성적인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는 자신만의 체험적 방법을 소개한다. 나도 멋과 기교를 부린 글보다는 한글 맞춤법을 준수한 정확한 문장으로 서술된 차분하고 간결하며 논리적인 글이 좋다. 문예 응모작을 심사하는 심사위원들은 작품을 심사할 때 한글 맞춤법을 지키지 않은 비문으로 된 작품을 먼저 골라낸다고 한다. 비문작품을 골라내고 나면 남는 작품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니 정확한 문장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문재 교수는 먼저 정확한 문장쓰기 훈련의 일환으로 좋은 작가들의 작품을 필사하라고 한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몇 몇 좋은 작가들이 떠오른다. 먼저 문학 평론가 도정일 씨의 글은 잘 짜여진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긴장감과 질서 속에서 생각의 정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데 그는 정말 글 하나만큼은 미끈하게 잘 쓰는 것 같다.


 계간잡지 녹색평론의 김종철 씨의 글은 평이하면서도 호소력이 있는 문장이라 자주 찾아 읽는 편이다. 평론가 겸 작가인 고종석씨의 글은 매우 논리적이고 읽을수록 감칠맛 나는 문장을 구사한다. 작가 김훈의 글은 주어와 술어만으로 된 문장이 대부분이고 대나무를 칼로 벤 듯한 날카로움 속에 도도히 흐르는 삶의 서사를 적확하게 오려내고 추수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김훈의 글을 처음 읽는 사람 대부분은 이런 그의 글을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하게 여기지만 결국 그의 글이 풍기는 묘한 매력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김 훈의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의 글을 흉내 내기는 쉽지 않다. 김 훈의 에세이를 구성하는 문장하나 하나에는 이 십년이 넘게 저널리스트로 살아온 기자로서의 관록과 삶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 그리고 인간적 성찰이 깊게 배어들어 우러나오고 있고 이런 점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문장들을 종이에 정성껏 필사해보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개성적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 다지기 방법으로 자신이 쓰는 글에서 나쁜 버릇을 찾아 낼 것, 항상 새로움을 찾아 볼 것, 사물과 일을 자세히 관찰할 것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는 주저하지 말고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하면서 메모의 유용함도 강조한다. 요즘 나도 좋은 생각이나 문구가 떠오르면 열심히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내 기억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글은 머리가 아닌 메모지에서 나온다는 이문재 교수의 조언은 매우 의미심장하고 실용적이다. 메모지가 바로 상상력의 발전소이다.

 이문재 교수는 개성적인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다지기에 이어 세부지침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먼저 자신의 이야기부터 써볼 것, 같은 내용과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말 것, 접속사를 쓰지 말 것, 문장을 쓸 때 병치를 조심할 것 같은 아주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문재 교수의 글쓰기 비법하나만 제대로 실행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변호사 차병직씨의 ‘글쓰기 작업으로 구성되는 법의 세계’ 라는 글도 읽을 만하다. 법의 세계는 법을 언어로 만들고 다시 언어로 해석해서 그 결과를 다시 언어로 표현한다. 결국 법이라는 것도 언어와 글쓰기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법의 세계에서는 읽고, 생각하고, 그 결과를 써내는 작업으로 법의 의미를 창출하고, 또 그것을 적용해 이상적 질서에 가깝게 이끌어가는 일이 계속되는데 법의 세계 그 자체가 이미 글쓰기 작업으로 구성되는 세계인 셈이다.

 

 특히 법원의 판결문은 승자보다 패자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패자들 설득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이 가능해져야 법 자체 또는 사법제도 전반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차병직씨의 의견에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한다.
 법조계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한자어 표현들로 도배된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문이 아닌 패자와 사회를 설득시킬 수 있는 글쓰기를 시도했으면 좋겠다. 헌법재판소가 공개하는 판결문을 들여다보면 주어와 술어사이가 너무 길어 질리는 문장이 보이고 박근혜대통령도 앞뒤가 맞지 않아 구글번역기로 돌린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문체를 구사한다. 대통령의 그런 문장은 따라하기도 어렵다.  아래 박근혜대통령이 구사하는 문장이다. 우리가 모르는 4차원의 세계를 향해 발언하시는 듯..

 

 글쓰기에 있어 최소원칙이 있다면 최대의 원칙은 무엇일까? 아마 글쓰기에서 최대 원칙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의 외연은 무궁하게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원칙도 없는 글들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정보를 소비하는데 집중한다. 정보를 창조, 생산하는 자가 되고 싶다면 적어도 글쓰기의 최소원칙은 최소한으로 갖추어야 할 미덕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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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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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중반 유럽의 어느 평온한 마을에서 비단의 원료가 되는 누에알을  사다 파는 남자 에르베 종쿠르. 그리고 그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  엘렌.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어느 날, 유럽에 누에 전염병이 돌아 에르베 종쿠르는 미지의 땅 일본으로 누에알을 구하러 떠난다. 에르베 종쿠르가 일본에서 구해 온 것은 누에알뿐만이 아니었다. 은거하고 있던 영주 하라 케이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하라 케이의 곁에 있던 미지의 여인과의 만남이었다.

 

  그녀는 지방세도가 하라 케이의 애첩이었던 것이다. 에르베 종쿠르와 이름 모를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에르베 종쿠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범상치 않은 미묘한 몸짓을 펼쳐 보인다. 에르베 종쿠르가 누에알을 구하러 유럽대륙과 러시아 대륙을 가로 질러 두 번째로 일본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에르베 종쿠르에게 작은 쪽지하나를 전한다. 에르베 종쿠르는 그녀가 건네준 작은 쪽지를 누에알만큼 소중하게 간직해서 돌아온다.


 한편, 에르베 종쿠르의 아내는 엘렌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는 남편인 에르베 종쿠르가 머나먼 미지의 땅 일본까지 가서 누에알을 구하러 떠날 때 마다 남편의 안위를 걱정한다. 남편은 가을에 떠나 늦봄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인내하는 아내 엘렌. 그러나 남편인 에르베 종쿠르의 손에는 미지의 여인이 건네준 일본어로 씌어진 쪽지가 들려있고...


 에르베 종쿠르는 아내 엘렌을 사랑했다. 이 소설에서 에르베 종쿠르의 외도는 결코 추하게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일본여행에서 거부할 수 없는 지독한 사랑의 밀어를 얻어왔기 때문이다. 그가 얻어온 사랑의 밀어에 취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 취하지 않을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솔직히 말하겠다. 에르베 종쿠르가 얻어온 그 쪽지에 씌어진 그 한마디가 바로 남자들의 로망이었던 것이다.


“돌아오시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예요”


하라케이의 여인이 쪽지에 남긴 이 한마디에 에르베 종쿠르는 또다시 일본행을 택하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 엘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에르베 종쿠르는 그 쪽지의 밀어에 취해버린 것이다. 그 쪽지에 씌어진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라케이의 미지의 여인의 진심은 무엇일까?

 

 마침 유럽에서는 파스퇴르가 누에 전염병을 해결할 연구를 거의 마무리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에르베 종쿠르는 또 다시 그 여인을 보기 위해 내전으로 치닫은 혼란하고 위험한 일본으로 떠난다. 이제 에르베 종쿠르는 하라케이의 그 여인을 만날 수 없다. 하라케이가 에르베 종쿠르와 그 여인과의 관계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에르베 종쿠르는 목숨만을 겨우 부지한 채 천신만고 끝에 다시 유럽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누에알은 모두 죽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일본의 그녀로부터 장문의 편지가 도착한다. 이 편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감히 꿈에도 상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나는데...


 결국 이 소설은 우아한 에로티시즘으로 묘사된 지독히 슬픈 사랑이야기였던 셈이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은 에르베 종쿠르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의 심장을 아프게 찌른다.

 

남자들의 로망은 그저 어리석고 헛되고 헛된 것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시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예요” 라는 쪽지는......... 여전히, 무척이나.... 관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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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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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치바나 다카시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책을 읽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무모한 용기를 가진 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이 책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의 1부에서 저자는 자신이 책을 더 읽기 위해 그 유명한 일본 최대의 잡지사 문예춘추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한마디로   말해서 “책을 더 읽고 싶다” 는 것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직업을 가진 저자는 마음껏 책을 읽던 학생시절의 생활환경으로부터 ‘책을 읽고만 있을 수는 없는’생활환경으로 갑작스럽게 떼밀려 버렸을 때의 정신적 기아감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안정된 수입과 정년을 보장하는 유망한 잡지사를 그만두고 닥치는 대로 읽고 쓰는 생활을 이어나간다. 생활비는 영어 실용문 번역을 통해 벌어들이고 가끔 잡지사에 가명으로 논픽션 기사나 글을 투고하여 문필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인생편력을 자칭“수수께끼의 공백시대”라 칭하는데 대략 1966년부터 1974년에 걸친 9년간의 시간이다. 이 시기에 저자는 지적인 입 출력비를 최대한 높여 엄청난 지적 자산을 축적한다. 이 시기야말로 저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독서가 이루어진 시기라 고백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책을 걸신들린 듯 읽어대고 친구와 토론하고 영화와 미술작품에 탐닉했으며 자유시간의 대부분을 여행하는데 썼다고 한다.

 

 

  50세가 넘어서 늘어나는 책을 감당하지 못해 서고 비슷한 빌딩을 지어, 그 측면에 고양이 그림을 그리고 고양이 빌딩이라 칭한다(위 사진 참조). 그런데 이 빌딩도 얼마가지 않아 수 만권(약 3만 5천권)의 책으로 가득 차게 되고 결국 고양이 빌딩 주변에 방을 빌려 책을 보관하게 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지금까지 거의 100권의 책을 쓴 모양인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책 한권을 쓰기 위해 10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는 저자의 외침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입출력비가 100대 1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깊이 동감한다. 요즘 스님, 신부, 목사, 교수, 연예인들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한 달콤한 힐링약 주입하는 수준이하의 책들이 많은데 노골적인 상업성으로 무장한 이러한 책들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그 내용은 책값이 아까울정도로 허술하고 부실하다. 한마디로 독자들을 우롱하는 책들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추구하는 높은 입출력비야말로 독자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다치바나 다카시는 인간의 지적인 욕망이 바로 살아있음의 증거라고 하면서 만약 그 지적 욕망이 사라진다면 그 사람은 이미 지적으로 죽었다고 해도 좋다는 다소 과격한 표현을 한다. 또 그는 지적인 인간을 영원히 갈증을 해소할 수 없는 숙명에 처한 탄탈로스 같은 존재에 비유하면서 지적 욕구의 무한함 속에 생명의 진정한 본질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인간의 ‘더 알고 싶은 욕구’는 바로 생명체의 생명활동을 떠받치는 ‘생의 원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러한 지적인 욕구는 바로 문명세계를 떠받치는 원리이고 이 욕구가 사라지면 인류문명이 멸망하게 된다는 다소 과장 섞인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없어 회사를 사직한다는 식의 행동은 이러한 생명원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연한 행동이라고 하는 저자의 생각은 다소 낭만적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책에 파묻힌 그 시절은 일본경제의 황금기였다. 실제로 다치바나의 고백을 보면 그는 먹고 살 문제로 고통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의 장기불황에 허덕이는 일본이 아닌 것이다. 그는 경제적 호황에 기대어 너무 마음 편히 책을 읽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물론 다치바나를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리고 그가 많은 책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노력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 책에 탐닉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가 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책을 읽고 글만 써서도 살 수 있는 일본사회의 문화 덕택이라 생각한다. 내가 부러운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먹고 사는 일이 일치되는 것이 용납되고 허용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책을 많이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아직 일본처럼 성숙한 독서문화가 정착되지 못한 것 같다. 마음 놓고 좋아하는 책만 읽고 있다가는 생존경쟁에서 도태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덤도 얻게 된다.

 

 그런데 다치바나 다카시의 고양이 빌딩을 보고 있노라면 부러움을 넘어 기괴한 광기마저 느껴진다. 마치 일본 오타쿠 문화의 정점을 보는 듯하다. 지적 욕망이 생명원리와 마찬가지라는 점, 그것이 우리 문명을 떠받치는 힘이라는 사실에는 분명히 동의하지만 다치바나의 책을 읽고 나면 책을 더 많이 봐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책을 많이 보는 것이 과연 나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은 왜 생기는지 모르겠다.

 

  이 무시무시한 독서광을 만난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많은 책을 읽을 물리적 시간도 확보할 수 없고  수 만권의 책을 사 모을 여력도 없지만 그가 딱히 부럽지는 않다. 픽션을 전혀 보지 않는다는 다치바나 다카시는 내게 너무 극단적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읽어가겠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피가되고 살이 되는 500권 목록에 좋은 책이 많다.
국내에 번역된 책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독서방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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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5-30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때 다치바나처럼 사는 게 꿈이었습니다. ㅎㅎㅎ

파트라슈 2015-05-31 08:57   좋아요 1 | URL
자아실현과 밥벌이가 일치하는 직업은 누구나 꿈꾸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사는 건 너무 어렵죠. 그렇게 살려면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미친척하고 결단을 내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 궁리하는 과학 4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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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물질과 생명과의 관계를 다룬 책이라면 <정신과 물질>은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궁리 출판사에서 나온 책에는 이 두 글이 하나의 단행본 속에 편집되어 있지만 <정신과 물질>은 <생명이란 무엇인가>와 달리 과학자인 슈뢰딩거의 철학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에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생명이란 무엇인가>보다 이 <정신과 물질>이라는 책을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지만 결코 소설처럼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게다가 만연체 문장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2번 정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어려운 책이다. 물론 번역은 훌륭한 편이다. 다만 번역자가 좀더 세심하게 정확한 한국어 문장으로 다듬었더라면 훨씬 더 완벽한 번역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느껴진다.

 

 어찌 보면 다분히 신비주의적 색채로 가득한 이 책은 독자에게 적지 않게 깊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바로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공리가 과연 이 세상과 우주, 그리고 인간을 설명하는 유일무이한 원리가 될 수 있느냐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과 반성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인 것이다.

 

 이 책에서 슈뢰딩거는 조심스럽고 겸손한 문체로 “과연 인간의 정신은 물질세계의 어디에 존재하며 정신과 물질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슈뢰딩거가 제시하는 대답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아무리 물질세계(인간의 감각과 뇌를 포함하여)를 연구하고 탐구해 들어가도 결코 의식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의식과 물질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우주 그 자체가 물질이며 정신이다. 또 객체와 주체의 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과 물질>부분- 

 

 사실 슈뢰딩거가 주장하는 이러한 일원론적인 세계관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서양철학에서는 플라톤 이래 물질과 정신, 현상과 실재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철학이 주류를 이루면서 서양문명을 이끌어 왔으며 그러한 문화적 토대에서 근대과학이 탄생한 것이 사실이지만 스피노자 같은 범신론적인 일원론철학 또한 분명히 존재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동양적 세계관에서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이원론은 설자리가 없었다. 인도철학과 불교가 그러하고 유교와 도교에서조차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지 않는다. 유교 문화권의 제사 같은 의식을 물질세계와 별개로 존재하는 영혼이나 정신에 대한 미신적 숭배로 이해하는 것은 동양적 세계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어 생기는 오해에 불과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제사는 귀신 숭배가 아니다.
 
 아무튼 슈뢰딩거가 물질과 별개로 존재하는 정신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크게 놀랍지 않지만 양자 물리학자였던 슈뢰딩거가 일원론적 세계관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현대 과학이(특히 물리학)발견한 사실들 때문이라는 점은 매우 놀랍고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슈뢰딩거는 신(인격신이 아닌)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을 그 근거로 내걸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분자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슨은 자신의 저서<만들어진 신>에서 신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한 근거로 과학과 생물학을 들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과학은 신의 부재도 증명하지만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중의 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 독자들은 이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비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내가 신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슈뢰딩거는 결코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 신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의 정신과 의식이 물질세계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음을 외치고 있을 뿐이다. 과학과 영원한 평행선을 달리는 종교가 아니라 과학적 연구 성과의 지원을 받는 종교의 가능성을 슈뢰딩거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원론적 세계관을 지원하는 과학적 연구 성과는 어떤 것일까? 

 

  제3장 “객관화 원리” 라는 글에서 슈뢰딩거는 실재세계가설을 검토 한다. 이 세계는 인간의 인식과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는가, 혹은 인간의 인식과 관계없이 이 우주가 유의미한가 라는 문제에 대한 답변을 당대 양자물리학이 발견한 성과를 토대로 설명하고 있다. 이 장에서 슈뢰딩거는 하이젠 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를 근거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기존의 과학적 세계상에서 자연의 영역에서 인식의 주체인 인간의식을 배제함으로서 얻어졌고 실재세계는 인간의 의식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다. 이것을 ‘실재세계가설’ 이라고 하는데 슈뢰딩거는 이 가설이 무한히 까다로운 자연의 문제를 정복하기 위해 우리가 채택한 일종의 단순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과학의 세계가 너무 끔찍하게 객관화되었기 때문에 정신과 정신의 직접적인 감각들이 설 자리가 없어져 버렸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이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의 정신과 감각이 물질적 세계를 떠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궁극적인 과학적 탐구와 연구를 진행하더라도 결코 이 세계에서 의식과 정신은 그 구성물 속에 주소를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공간 속에서 정신이 사는 곳을 지적할 수 없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인간의 인격과 정신이 각각의 몸속에 있다는 착각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물학과 생리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는 우리의 감정(喜怒哀樂)의 구체적 실체를 우리 신체 속에서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슈뢰딩거는 확언한다. 우리의 인체에 존재하는 것은 다만 신경다발과 그 신경 속을 오고 가는 전기펄스 뿐임을 확인한다면 슈뢰딩거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우리가 느끼는 각종 감정들은 과연 전기 신호에 불과한가? 형광등에 흐르는 전자들의 흐름과 동일한 전자 신호가 인간의 감정임을 인정하기 싫다면 우리는 슈뢰딩거의 주장에 설득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모순은 이제 주관과 객관의 문제로 귀결된다. 현대 양자물리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알다시피, 어떤 대상을 관찰할 때 그 대상은 관찰자와 절대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양자물리학에서는 공공연한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것은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가 증명한다. 물론 슈뢰딩거가 살았던 당시에 이 사실은 최신의 물리학적 발견이었을 것이다. 대상을 관찰할 때 항상 그 대상은 관찰자의 관찰행위를 통해 변형되고 변질된다는 것이다. 대상이 관찰자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역발상도 당연히 성립한다.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를 가르는 경계선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진 것이다. 슈뢰딩거는 일상에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주관과 객관의 구별은 받아들여야겠지만 철학적 사고에서는 그 구별을 버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과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은 동일함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로 제3장을 끝맺는다.

 

“ 세계는 내게 단 한 번 주어진다 !."

 

 슈뢰딩거의 이 인상적이고 강렬한 한마디! 이 한마디는 인간의 윤리와 도덕, 철학, 역사, 과거와 미래가 융합된 도가니 같다. 슈뢰딩거가 말하는 “한 번”은 삶이 한번뿐이라는 생명의 유한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한 번”을 “한 개”, 혹은 “하나”로 치환해 보면 이 인상적인 구절의 해석이 훨씬 더 풍부해진다.

 

 이제 정신과 물질,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은 이 세상을 설명하는 힘을 상실한 것이다.

 

  제4장 “산술적인 역설, 정신의 단일성” 이라는 글은 <정신과 물질>에서 가장 신비로운 색채가 강하다. 주관과 객관을 구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감각하고 지각하고 생각하는 자아를 과학적 세계상 속의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이유를 슈뢰딩거는 자아(의식, 정신) 그 자체가 곧 세계상이라는 대담하고도 놀라운 주장을 제기한다. 더 나아가 인간들 각각의 정신의 다수성은 다만 현상일 뿐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정신뿐이라는 더욱더  놀랍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인도의<우파니샤드>철학과 셰링턴의 안구실험에 근거하여 펼치고 있다. 우리의 신경계에는 오로지 각각의 감각을 담당하는 신경계로만 구성되어 있다. 비유를 들자면 지방정부만 있고 중앙정부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중앙정부(정신과 의식)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낀다.


 슈뢰딩거는 정신은 본성적으로  ‘단수’ 임을 강조한다. 다른 표현으로 정신에게 붙을 수 있는 수는 오직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 정신은 물질적 세계과정이 일어나는 유일한 무대 혹은 세계과정 전체를 담고 있는 그릇이나 통이라고 한다. 이것을 슈뢰딩거는 ‘정신의 이중성’이라고 했다.

 

 정신은 이 세상이라는 작품 전체를 만든 작가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이라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나의 인물 혹은 부속물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세계상을 만든 장본인인 우리 자신의 정신을 세계상에서 제거하지 않고서는 납득할 만한 세계상을 구성하지 못했다는 이율배반성이 바로 정신의 이중성 이라는 이야기다.

 

 정신과 감각을 배제한 과학적 세계상에는 색깔도, 소리도, 냄새도, 맛도, 고통도, 즐거움도 없다. 인간의 신체를 아무리 분해하고 분석해 보아도 그 곳엔 오로지 원자와 전자들의 이합집산만이 존재할 뿐 우리가 느끼는 감각과 감정의 자리와 존재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과 인식 없이 이 세상을 의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인간의 정신과 의식과 감정은 분명히 이 물질적 세계에 존재한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정신과 물질>의 제4장은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몇몇 문장들 때문에 슈뢰딩거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없었다. 아무튼 이 4장은 슈뢰딩거가 말하는 신비주의의 정점이라 할만한다. 그러나 과학을 떠난 신비주의가 아니라 과학의 지원을 받는 신비주의다.


 내 나름대로 정리해보자면 제4장에서 슈뢰딩거는 “정신이 곧 우주!”임을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혹시 과학이 밝혀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종교적 가르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하는 글이다.


 제5장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제6장은 인간 감각의 신비로움을 다루고 있다. 과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 중에는 종교에 귀의한 사람이 적지 않다. 슈뢰딩거는 결코 종교와 인격신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양자물리학을 통해서 바라본 세계의 실체가 우리의 직관과 상식을 뛰어넘는 신비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것은 아직 인간이 과학의 정점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슈뢰딩거의 말처럼 과학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과학은 더 어리석고 무의미해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11년 작성

 

 

 

 

어쩌면 미래에 뇌과학과 인지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제거주의와 물리주의가 옳은 것으로 판명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뇌와 정신의 모든 정보를 수량화, 데이터화, 객관화하여 컴퓨터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면 슈뢰딩거가 <정신과 물질>에서 주장했던 것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인가.. 양자역학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슈뢰딩거가 인도 베단타 철학에 매료된 이유는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2015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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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5-2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2011년에 읽었는데 제대로 읽은 듯한 느낌이 나지 않습니다. 내용이 어려웠습니다.

파트라슈 2015-05-29 06:47   좋아요 0 | URL
문장이 좀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 좀 어려워도 참고 읽어 봤습니다. cyrus님, 서재 둘러보니 대구분이시네요. 저도 대구 삽니다.
 
리스본行 야간열차 문학과지성 시인선 34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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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이미지와 정서를 어떻게 유기적으로 조화시키는가 하는 것은 시를 읽을 때마다 늘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황인숙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에서 보여주는 도시적 이미지와 도시 정서간의 융합은 독자에게 도시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시인은 도시적 이미지를 주로 도시 고양이들로 만들어낸다. <리스본行 야간열차>에서 고양이가 중요한 도시적 이미지로 등장하는 시는 모두 12편이다. 이정도면 도시 고양이 연작시라 할 만하다.


 이 도시의 고양이들은 시인과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제3자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눈을 대신한 관찰자로 기능하기도 하고, 삭막한 곳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연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황인숙이 그리는 도시고양이들은 도시에 인간 말고도 고양이들의 세계가 있음을 증명하는 존재이다.

 

 도둑 고양이, 길고양이, 골목고양이,
 노숙묘라고도 하지요.
 ‘커다란 고양이와 어린 고양이가
 말라비틀어진 닭 뼈다귀를 두고
 사투를 벌이는 곳에서 삽니다.
 어떤 사람은 침을 뱉고 발로 찹니다.
 시끄럽다, 더럽다, 무섭다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느 편이 진짜 그런지)
 굶주린 고양이한테 약 섞은 밥을 줍니다.
 엄마고양이를 쫓아버리고, 갓 태어난 새끼고양이들을
 쥐 잡는 끈끈이로 둘둘 말아 내버리기도 합니다.
  

 

                  ~중략~

 

 잔인하고 무정한 이 거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가는 고양이들.

 고양이들이 사라진 동네는
 사람의 영혼이 텅 빈 동네입니다.
 이만저만 조용한 게 아니겠지요.
 그러면, 좋을까요?
                                                                            -<고양이를 부탁해> 부분

 

 고양이들은 말라비틀어진 닭 뼈다귀를 놓고 사투를 벌여야 하고 약을 먹이고 쥐 잡는 끈끈이로 자신들을 없애려는 인간들과도 싸워야 한다. 시인은 고양이들이 사는 공간과 인간이 사는 공간의 겹침을 포착해내고 고양이들이 사라진 공간에 사는 사람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자문해 본다.

 

 귀찮고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 도시인들의 영혼 깊숙이 자리 잡은 고양이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고양이가 없는 도시는 황폐하다. 시인은 사람이 아닌 고양이로부터 황폐한 도시생활에 대한 위안을 얻는다.

 

저 空中空簡의 활용자인 고양이들
고양이의 몸 안에서 뻗치는 기운이
고양이를 위로위로 올려 보내서
광활한 이 영토를 발견하게 했으리라


                  ~중략~


말하자면 기우뚱함에, 그리고 지붕과 지붕 사이의
허공에 너희는 환장을 하지


                  ~중략~


뒤안길도 사라진 이 도시에서
지붕 위의 뒤안길, 말하자면 위안길에
살풋 호흡을 얹어본다.
                                                                                -<지붕 위에서> 부분

 

 고양이들은 인간과 삶의 영역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근원적 삶의 공간은 인간의 몸이 닿지 않는 “저 空中空簡”의 광대한 3차원이다. 이제 도시에는 작고 포근한 인간의 뒤안길은 사라지고 지붕위의 고양이가 다니는 뒤안길만 남았다. 고양이의 뒤안길은 시인에게 우리에게 위안길이 된다. 고양이에 대한 시인의 상상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우리 도시인들의 위안이자 상상의 원천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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