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다치바나 다카시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책을 읽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무모한 용기를 가진 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이 책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의 1부에서 저자는 자신이 책을 더 읽기 위해 그 유명한 일본 최대의 잡지사 문예춘추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한마디로   말해서 “책을 더 읽고 싶다” 는 것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직업을 가진 저자는 마음껏 책을 읽던 학생시절의 생활환경으로부터 ‘책을 읽고만 있을 수는 없는’생활환경으로 갑작스럽게 떼밀려 버렸을 때의 정신적 기아감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안정된 수입과 정년을 보장하는 유망한 잡지사를 그만두고 닥치는 대로 읽고 쓰는 생활을 이어나간다. 생활비는 영어 실용문 번역을 통해 벌어들이고 가끔 잡지사에 가명으로 논픽션 기사나 글을 투고하여 문필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인생편력을 자칭“수수께끼의 공백시대”라 칭하는데 대략 1966년부터 1974년에 걸친 9년간의 시간이다. 이 시기에 저자는 지적인 입 출력비를 최대한 높여 엄청난 지적 자산을 축적한다. 이 시기야말로 저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독서가 이루어진 시기라 고백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책을 걸신들린 듯 읽어대고 친구와 토론하고 영화와 미술작품에 탐닉했으며 자유시간의 대부분을 여행하는데 썼다고 한다.

 

 

  50세가 넘어서 늘어나는 책을 감당하지 못해 서고 비슷한 빌딩을 지어, 그 측면에 고양이 그림을 그리고 고양이 빌딩이라 칭한다(위 사진 참조). 그런데 이 빌딩도 얼마가지 않아 수 만권(약 3만 5천권)의 책으로 가득 차게 되고 결국 고양이 빌딩 주변에 방을 빌려 책을 보관하게 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지금까지 거의 100권의 책을 쓴 모양인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책 한권을 쓰기 위해 10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는 저자의 외침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입출력비가 100대 1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깊이 동감한다. 요즘 스님, 신부, 목사, 교수, 연예인들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한 달콤한 힐링약 주입하는 수준이하의 책들이 많은데 노골적인 상업성으로 무장한 이러한 책들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그 내용은 책값이 아까울정도로 허술하고 부실하다. 한마디로 독자들을 우롱하는 책들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추구하는 높은 입출력비야말로 독자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다치바나 다카시는 인간의 지적인 욕망이 바로 살아있음의 증거라고 하면서 만약 그 지적 욕망이 사라진다면 그 사람은 이미 지적으로 죽었다고 해도 좋다는 다소 과격한 표현을 한다. 또 그는 지적인 인간을 영원히 갈증을 해소할 수 없는 숙명에 처한 탄탈로스 같은 존재에 비유하면서 지적 욕구의 무한함 속에 생명의 진정한 본질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인간의 ‘더 알고 싶은 욕구’는 바로 생명체의 생명활동을 떠받치는 ‘생의 원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러한 지적인 욕구는 바로 문명세계를 떠받치는 원리이고 이 욕구가 사라지면 인류문명이 멸망하게 된다는 다소 과장 섞인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없어 회사를 사직한다는 식의 행동은 이러한 생명원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연한 행동이라고 하는 저자의 생각은 다소 낭만적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책에 파묻힌 그 시절은 일본경제의 황금기였다. 실제로 다치바나의 고백을 보면 그는 먹고 살 문제로 고통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의 장기불황에 허덕이는 일본이 아닌 것이다. 그는 경제적 호황에 기대어 너무 마음 편히 책을 읽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물론 다치바나를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리고 그가 많은 책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노력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 책에 탐닉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가 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책을 읽고 글만 써서도 살 수 있는 일본사회의 문화 덕택이라 생각한다. 내가 부러운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먹고 사는 일이 일치되는 것이 용납되고 허용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책을 많이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아직 일본처럼 성숙한 독서문화가 정착되지 못한 것 같다. 마음 놓고 좋아하는 책만 읽고 있다가는 생존경쟁에서 도태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덤도 얻게 된다.

 

 그런데 다치바나 다카시의 고양이 빌딩을 보고 있노라면 부러움을 넘어 기괴한 광기마저 느껴진다. 마치 일본 오타쿠 문화의 정점을 보는 듯하다. 지적 욕망이 생명원리와 마찬가지라는 점, 그것이 우리 문명을 떠받치는 힘이라는 사실에는 분명히 동의하지만 다치바나의 책을 읽고 나면 책을 더 많이 봐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책을 많이 보는 것이 과연 나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은 왜 생기는지 모르겠다.

 

  이 무시무시한 독서광을 만난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많은 책을 읽을 물리적 시간도 확보할 수 없고  수 만권의 책을 사 모을 여력도 없지만 그가 딱히 부럽지는 않다. 픽션을 전혀 보지 않는다는 다치바나 다카시는 내게 너무 극단적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읽어가겠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피가되고 살이 되는 500권 목록에 좋은 책이 많다.
국내에 번역된 책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독서방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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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5-30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때 다치바나처럼 사는 게 꿈이었습니다. ㅎㅎㅎ

파트라슈 2015-05-31 08:57   좋아요 1 | URL
자아실현과 밥벌이가 일치하는 직업은 누구나 꿈꾸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사는 건 너무 어렵죠. 그렇게 살려면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미친척하고 결단을 내지 않으면 안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