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찾아올 적엔 창비시선 224
하종오 지음 / 창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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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종오의 시는 시 읽기의 재미를 준다.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창조해 낸 이미지에 탄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시인이 그려내는 이야기와 서사에 몰입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종오의 시가 빚어낸 사라져 가는 농촌 고향의 이야기와 그 사라져가는 시골 태생으로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는 도시인들의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일상과 호흡을 같이 한다. 


  그래서 그의 시들은 농촌과 도시, 그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영원한 떠돌이 같은 우리 삶을 차근차근 성실하게, 세밀하게 성찰한 뒤 매끄러운 서사 운문으로 빚어내어 놓는다. 그의 시들에 나오는 시어들은 책상물림의 관념적인 메마른 시어와는 거리가 멀다.
 또 그의 시는 시골에 계신 늙으신 부모님들의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의 깊이만큼 우리마음 깊숙이 골을 내면서 출세와 성공, 돈에 익숙한 도시인들의 마음에 작지만 쓰라린 상처를 낸다.

 

  사람은 반드시 도시가 아니면 시골에서 태어난다. 근대화 이후 도시로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골정서를 보물단지처럼 가지고 살아가며 언젠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근근이 도시생활을 이어간다. 시인 하종오도 아마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도시 생활을 한 모양이다. 


   그는 상사에게 불려가 매출 낮은 이유를 추궁 당하고 종일 사표를 끼고 있으면서도 벗어나기 어려운 도시적 삶에 기민하게 적응할 수밖에 없다. 도시생활은 까칠하지만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적응하면 극도로 편할 수 있다.
<편안한 擬態>라는 시는 이러한 도시적 삶의 절정을 이룬다.
 
 고층빌딩의 매일매일은 의태로 시작한다.
 비엠더블유 타고 온 오너는 운동 삼아 계단을 오르지만
 소나타를 타고 온 간부는 눈치 삼아 계단을 오르고
 지하철을 타고 온 사원은 시늉 삼아 계단을 오른다.
 사무실이 같고 책걸상이 같고 유니폼이 같아서
 상사가 알아서 기면 부하도 알아서 기고
 부하가 빙그레 웃으면 상사도 빙그레 웃는다
 여자직원은 남자직원만큼 수치스러워하고
 남자직원은 여자직원만큼 감격스러워한다.
 중심을 가졌거나 안 가졌거나
 내 것을 적게 주고 남의 것을 많이 받아내려는 즐거움도
 똑같아서 불평하거나 감사하는 말투도 서로 똑같다.
 고층빌딩은 유리창이 모조리 사람들과 똑같아서
 안에서는 밖이 보여도 밖에서는 안이 안 보인다.
                                -<편안한 擬態>


 시인은 비록 도시적 삶을 무서워 하지만 남을 따라하면 편안해 질 수 있다는 성찰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 편안한 성찰의 이면에는 도시의 불편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 중심이 있어도 중심이 없어도 본능적인 이기심은 똑같아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고층빌딩의 유리창처럼,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고 타인을 훔쳐보려는 관음증 같은 심리도 일상적이다. 이 모든 것이 도시인들의 편안한 태도이고 이런 습속에 길들여져도 누구하나 불편한지 모른다.

 

~중략~
환율과 주가와 부동산 중 뭐가 폭등하는지 폭락하는지
누가 더 가난해지고 누가 더 부자가 되는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만 잘 남겨두고 잘 죽는다는 건가
                                -<모르는 것>부분


  편안한 의태를 서로 따라하면서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가는 삶이 도시적 삶의 미덕일지도 모른다. 이런 미덕이 찬양되는 도시를 떠나 시인은 시골 고향에 이른다. 그러나 귀농한 시인 앞에 예전의 그 풍족했던 농촌정서는 찾아 볼 길이 없다.

 

 민둥산을 사들인 도시인들
 측량하여 경계마다 말뚝을 박는다
 두세 마지기씩 나누어가진 뒤
 산등성까지 포크레인으로 밀어 붙인다
 걸어 다닐 밭둑 만들지 않고
 양식 거둘 두둑과 고랑 일구지 않고
 먼저 널찍하게 찻길부터 닦는다
 ~중략~
 승용차 타고 올라가서 눈 내리깔고 본다
 두 마지기 부재지주 세 마지기 부재지주
 도시인들 킬킬대다가 돌아간다
 민둥산에 비 와서 흙탕물이 말뚝을 쓸어버리면
 잡풀들이 지주가 되고 벌레들이 지주가 되어
 ~후략~
                              -<지주>부분
 
귀향한 시인의 눈앞에서는 부재지주들의 땅 잔치가 벌어지고, 
 
~중략~
 들판을 얻어 살아간 이는 아버지였지만
 들판을 버려 살아가는 이는 자식이었다
 ~중략~
 날마다 저녁이 오면 들녘에 안개 내래는 소리를 들으며
 농업 박물관 문을 잠그고 집에 돌아가
 먼 나라서 가져온 쌀밥과
 먼 나라서 가져온 소고기를 구워먹었다
                                  -<농업박물관>부분

 

 한평생 들판을 일구었던 아버지는 늙어 사라져 가고 자식은 그 아버지가 일구었던 들판을 버려야 산다. 도시를 떠도느라 농사짓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사는 농업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로 변하고 아들은 수입쌀과 수입고기로 배를 채워야 한다.

 

 ~중략~
 끝까지 물려주지 않아야 똥오줌이나 받아준다고
 논밭에 일찍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곤 하더니
 끝까지 왔는데도 안 물려주고 똥오줌이나 먼저 받으라는가,
 잠시 아버지를 뵈러 온 자식은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자식은 떠날 것이다
 아버지가 해마다 심어먹었던 잡곡과 채소
 아버지가 날마다 길어먹었던 뒤란 찬 우물물마저
 몸에서 다 비워내고 나면 아버지를 묻어버리고
 자식은 논밭을 팔아먹을 것이다
 그래도 거름 만들려고 정랑 파내듯 아버지는
 온몸에 남은 기운이란 기운 모두 끌어서
 논두렁 다지던 발걸음과 새 쫓던 팔매질도
 씨앗 꾸러 온 이웃에게 해대던 손사래마저 모아
 자식에게 조용히 내주고 맥놓는 것이었다
                               -<슬픈 유산>부분

 

  슬픈 자화상과 같은 이런 시들을 마음 편히 읽을 수 없다면 우리는 도시와 시골 그 어디에서도 쉬지 못하고 영원히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해매야 하는 이방인이 틀림없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농촌엔 농사짓지 않는 부재지주들이 땅값 오르기를 기다리며 킬킬거리고 농사지을 줄 모르는 도시인도 아닌 농부도 아닌 어중간한 시인들이 남은 슬픈 유산을 갖고 어찌해야 할 줄 모른다. 이렇게 하종오의 시들은 수월한 이미지와 시적 재미를 가지고 독자들을 시 읽기의 즐거움에 이르게 하지만 그의 시들을 읽다가 지키지 못하는 땅과 늙어가는 부모님 생각에 다다르면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해서야 될 것인가 하는 반성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종오의 시에 귀를 기울이면 더 이상 여기 앉아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2010년 8월 14일

                                                                                                                  patr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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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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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시절, 여름날 밤 마루대청에 누워 누나와 함께 바라본 밤하늘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새카만 공간에 눈이 시리도록 신비롭게 빛나는 갖가지 별들과 은하수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내 상상력과 희망의 원천이었다. 우주의 시작과 끝이 너무 궁금해서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어쩌면 다른 생명체의 세포 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상상까지 하게 되었다. 아마 초등학교 4~5학년 정도였으리라. 마루에 누워 같이 밤하늘을 바라보던 누나는 대학생이 되어 내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을 사다 주었다. 나는 <코스모스>를 겉장이 너덜 하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태양과 지구가 멸망해 한 점의 먼지가 될 운명임을 알고는 이유 없이 그저 삶이 슬퍼지기도 했다.

  다시 책을 꺼내 보니 겉장은 사라지고 속지에 붓으로 제목을 다시 써 놓았다. 

 옛날  한문책처럼 보인다.

 

 

 

 세포내의 모습을 그린 그림과 지구 최후의 날 상상도를 거의 매일 들여다 보았다.

아래쪽의 지구 최후의 날 상상도를 보면서 난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 가면서 밥벌이에 열중하느라 밤하늘을 쳐다볼 기회와 여유는 점점 사라졌다. 한마디로 “별 볼일 없는 인생”이 되어 버린 것이다. 며칠 전, 새벽근무를 마치고 우연히 새벽의 밤하늘을 보게 되었다. 그곳엔 여전히 어린 시절에 신비롭게 빛나던 별들이 밤하늘 가득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 별들이 보내오는 빛들의 파장은 짧게는 수 광년에서부터 길게는 수백만, 수 억, 수십 억 광년의 세월을 여행해 오고 있었다. 지금 바라보는 저 별들은 어쩌면 빛으로만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빛들은 내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득한 과거의 우주 저 편에서도 여전히 지금 내가 보는 빛과 동일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새벽에 나는 빛의 장구함과 공간과 시간의 막막함과 차가움, 그리고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의 유한성과 나약함에 몸서리쳤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현대 양자역학과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을 일반대중을 상대로 쉽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쉽게 소개하고 있다는 수식은 다분히 상대적이다. 사실 이 책은 일반인들이 쉽게 읽고 이해하기엔 매우 어려운 책이다. 이 책의 후속작인<우주의 구조>가 어쩌면 이 책보다 읽기가 더 수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쉽지만은 않지만 온갖 고등물리수학과 방정식으로 난무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수식하나 사용하지 않고 이 책만큼 일상적 언어로 서술하고 있는 책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저자 브라이언 그린의 장점은 바로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최첨단 이론물리학의 진수를 일상적 언어로 끊임없이 번역해낸다는 것이다.

 

 이 책의 도입부에서는 브라이언 그린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명쾌하게 풀어내고 해설한다. 물론 단 한 줄의 수식도 사용하지 않고 말이다. 상대성이론은 특수상대성 이론과 일반상대성 이론으로 나누어지는데 특수상대성 이론은 빛과 시간에 관한 것이고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에 관한 것이다. 브라이언 그린이 설명하는 상대성이론은 어렵지 않다. 그의 설명을 잘 따라가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인 곳이 아님을 알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거시적 세계에 통용되는 법칙이지만 인간의 직관으로는 결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상대성이론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막스플랑크의 양자가설로부터 시작해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실험, 토마스 영의 이중슬릿 실험, 드브로이의 물질파, 슈뢰딩거의 파동함수 확률, 리처드 파인만의 경로합 등에 대한 브라이언 그린의 설명을 듣고 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와 자연은 완전히 우리의 상식에 벗어나고 만다. 우리의 직관과 상식은 양자역학에서 아무 소용도 없고 오히려 본질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자연 자체가 인간의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만물의 이론이라는 초끈이론 부분으로 들어가면 이제 과학이 아니라 오묘한 신비주의 철학에 다다른 것 같이 느껴진다. 초끈이론이란 만물의 근원이 두께가 없는 극도로 작은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물리이론이다. 물론 이 이론은 아직 과학적 실험으로 검증된 적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이론 물리학자들은 초끈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매끄럽게 통합해줄 만물의 근원 이론인 통일 이론의 후보로 여기는데 이론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 초끈이론으로부터 유도되는 우주의 근원과 참모습은 경이적으로 우아하고 아름답다. 이 책은 어렵지만 삶과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을 더할 나위 없이 풍부하게 해줄 이성과 감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다시 바라보는 새벽 밤하늘의 별빛과 시공이 그저 막연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힘이 아닐까?

the elegant universe!

 

 

                                                            

                                                                                     2010년 여름이 오는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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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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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유명한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
  그는 1978년, 20대 초반에 알래 

  스카로 이주해 1996년 캄차카반

  도에서 불곰의 습격을 받아 목숨

  을잃기까지 20여 년간 알래스카

  에머물며 알래스카의 자연을 담 

  아낸 세계적인 야생 사진가이다.

 

  호시노 미치오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자주 찾는 사이트 지리산 닷컴   (www.jirisan.com)의 주인장이 이 책을 읽고 쓴 글을 본 후였다. 지리산 닷컴 이라는 사이트의 주인장도 역시 사진작가이다. 지리산 닷컴이라는 홈페이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먼저 이곳부터 방문해보시길... 아름다운 지리산의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순박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를 보고나서 사진에 대한 나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진이 엄연한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진에 대해 잘 몰랐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사진은 그저 멍하니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책의 표지를 넘기면 압도적인 알래스카의 풍경과 야생동물 사진이 펼   쳐지고 40 여 년간 알래스카의 툰드라에서 에스키모가 되어 살아온 백   인 밥 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밥 율은 원주민 에스키모 여인인 캐리와 결혼해서 평생을 알래스카의 혹한에서 사냥과 채집으로 자급자족하며 살아왔다. 밥과 호시노는 오랜 친구이다.

 

 책의 중간 중간에 알래스카의 풍광과 야생동물을 담은 사진이 펼쳐지는 가운데 알래스카에 불어 닥친 거대한 화폐경제의 물결에 휩쓸려가는 에스키모와 내륙 원주민들의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이어진다. 알래스카의 위대한 자연에 이끌린 호시노의 문장은 단순하고 경쾌하면서도 담백하다.

 

 그는 자연만을 담는 사진가는 아니었다. 그 아름답고 위대한 대지에서 소용돌이치는 다양한 인간들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다. 바로 자본주의 경제화의 물결이 알래스카에도 불어 닥친 것이다. 화폐경제가 추구하는 개발과 파괴의 바람이 알래스카에 불고 있었고 호시노는 자신의 사진작업이 아직 파괴되지 않은 순수한 알래스카의 마지막 모습을 담는 행위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필사적으로 알래스카를 사진에 담았다. 불과 43세의 나이에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에서 사진 작업 중 불곰의 습격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도대체 왜 그는 그런 죽음을 맞아야 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생전 호시노의 말이 그 의문에 대한 답이리라. “자연은 인간의 삶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마저 포괄하는 것임을.. 자연은 아름답고 잔혹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강하고 연약하다.”
 
  책을 펼치니 알래스카의 아름다운 풍경사진이 나를 압도했다. 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책과 사진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다. 사진이 많아서 그런지 책은 단숨에 읽혀지는데 근래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장을 덮은 경험은 처음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가보지 못한 알래스카의 풍경이 아른거리는데 불현듯, 이 답답한 곳에 앉아 책과 씨름하고 있는 순간이 숨이 막혀온다. 갑자기 여행이 미치도 록 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

 

 

무더운 여름, 시원한 청량감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이 제격이다. 때로는 수 백페이지의 글보다 단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더 큰 감동을 주기도 한다. 바로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들이 그러하다.


 그가 찍은 사진은 피사체를 억지로 고정시켜 찍어 낸 흔적이 없다. 사진이 아니라 그 피사체 앞에 내가 그냥 서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의 글도 마찬가지.. 글 중간 중간에서 자연과 삶, 생명에 대한 놀라운 철학적 성찰과 사유를 엿볼 수 있다. 그 철학적 사유의 폭은 깊고 넓고 날카롭다. 마치 생명의 정수만을 쥐어짜낸 에센스 같기도 하고 삶에 통달한 선승들의 오도송 같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호시노 미치오의 이 아름다운 사진을 보고 바람 같은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그 누구든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과 글에 매료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책만큼 말과 글로 그 느낌을 표현하기 어려운 책은 처음이다. 더 이상의 언어는 필요 없을 것 같다. 먼저 이 책을 읽고 보라. 빌려볼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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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
존 R. 설 지음, 정승현 옮김 / 까치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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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빠르고 쉽게 읽히는 책.

설 교수의 자신감에 찬 설득력 있는 어조와 약간의 유머감각이 섞인 문체가 좋았다.

그리고 유물론과 이원론에 오염된 철학을 정화하는 논변이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성과이다.

한 번 읽을 가치도 없는 책이 난무하는데 이 책은 단연코 두 번 이상 읽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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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행복하게 - 자연과 공동체 삶을 실천한 윤구병의 소박하지만 빛나는 지혜
윤구병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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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과 행복은 양립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보통 행복해지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유일무이하게 돈과 부를 꼽을 것이다.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돈과 물질적 부를 대체할 다른 조건을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전직 국립대 철학 교수였던 윤구병은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가난을 당당히 말한다. 과연 우리는 윤구병의 말대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거리낌 없이 가난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부유함이 아닌 가난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가난과 행복의 융합을 시도하는 윤구병은 국공립공대인 충북대 철학과 교수를 15년간 지내다가 지난 1995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을 하는‘변산교육공동체’를 설립했다. 안정된 수입과 정년이 보장되는 국공립대 교수직을 그만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힘든 결정이다. 그 결정의 배경을 윤구병은 이 책의 앞날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다 좋다 쳐도 가난은 지긋지긋하다고요? 강요된 가난은 그렇겠지요.

  그러나 스스로 선택하는 가난한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학 교수직을 사퇴하고 윤구병은 부안에서 논 삼천여 평과 밭 만여 평에 직접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삶이 정말 행복한 삶임을 실천하고 증명한다. 그러나 윤구병은 일머리도 트이지 않고 서툴고 굼뜨기 짝이 없는 풋내기 농사꾼 주제에 몇 년간 제 앞가림을 하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귀농을 했지만 근 5년간 제대로 된 소출(그는 주로 주곡인 쌀과 보리, 밀등을 생산한다)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은 비료와 농약의 사용이 아닌 철저한 유기농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구병은 그동안의 살림살이는 빚으로 꾸려온 셈이라고 겸허하고 부끄럽게 반성하지만 그 반성의 배경엔 주곡농업만으로 자급하기 어려운 한국의 농업현실, 즉 국가의 잘못된 농업정책이 있음을 암시한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 주곡 자급률이 25퍼센트 밖에 안 되는데도 독립국가 행세를 할 수 있다고 믿고, 비교생산비 우위설을 내세워 값비싼 공산품을 내다 팔아 값싼 농산물을 사서 먹는 게 더 경제적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나라 살림을 맡고 있는 한, 농민들이 아무리 바둥거려보았자 주곡 농사로 이 상품경제 사회의 거센 물결을 헤쳐 살아남기가 불가능하다고 윤구병은 따끔한 비판의 일침을 가한다. 그러면서도 윤구병이 절대로 돈이 안 되는 주곡농업중심의 유기농에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유기농과 주곡이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윤구병의 글을 읽다 보면 우리농업, 우리 쌀, 우리 보리, 우리 밀을 지키는 것은 자본과 시장의 논리로는 절대 이해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는 5년간의 농사꾼 체험으로 현재 우리 농업과 농촌의 현실과 문제점, 대안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제시한다. 농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흉년이 아니라 풍년이라고 역설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정말 제대로 된 농사꾼이 된 모양이다.

 

  주곡이 아닌 환금작물에 깊이 의존하는 한국농업의 특성상, 과잉 생산은 농산물 가격의 폭락을 의미하고 높은 시설비, 인건비를 필요로 하는 환금작물 농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농촌 환경의 다원적 가치’에 주목한다. 생존은 기본이고 사람들의 인성과 덕목, 사회의식을 길러낼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생활형태로서 농촌의 소규모 공동체들의 활성화를 윤구병은 지향한다.(일부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농촌의 소규모 공동체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개인적으로 '공동체' 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낀다. 개인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공동체 조직은 위험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가난하게 사는 길, 좀 더 힘들게 사는 길, 좀 더 불편하게 사는 길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길임을 그는 몸소 실천해 보이고 있다. 그것이 공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가난하게 살면 그만큼 이웃이 가난을 덜고, 자신이 좀 더 힘들게 일하면 그만큼 이웃의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이 걷힌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가난은 이제 더 이상 당장 끼니가 걱정되는 그런 절대적 가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난, 혹은 불편함이 결코 행복의 반대편에 있지 않음을 여실히 실천하고 증명해 보임으로써 우리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가볍게 듣고 넘기기 어렵다. 적어도 그는 아무런 행동과 실천도 없이 입으로만 녹색과 환경을 운운하는 환경근본주의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를 환경근본주의자들과 차별화시켜주는 것은 바로 그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윤구병이 생태와 환경근본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의 농법은 우리 조상들이 수천 년 간 해온 전통적 경작방식을 따른다. 물론 이러한 농법은 결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환경을 해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맹목적인 유기농법의 고수는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지배되기 쉽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변질되기 쉽다. 아니, 벌써 유기농은 자본, 시장에 충실한 하나의 고가 농산품으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는가? 대형 마트나 할인점 유기농 코너에 진열된 유기농 농산물이나 식품들은 소득이 충분치 못한 서민들이나 저소득 계층에겐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현재의 유기농이 생산성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윤구병은 과학기술에 대한 이 근원적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인간이 과학과 이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과학의 지배력은 중세 유럽의 교회의 지배력과 비교조차 어렵다.


유기농을 돈벌이로 여기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유기농 또한 화학, 비료농업 만큼 지속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농민들이나 기업농이 고소득을 기대하여 유기농에 매달린다면 우리는 우리 농업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현재 우리나라의 농업이 망해가고 있는 이유는 농사가 돈벌이기 안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휴대폰 팔아 쌀 사먹자는 주장만 설득력을 얻고 있다. 농업이 돈의 문제를 떠나 생존과 문화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골에 전원주택 짓고 텃밭 가꾸며 사는 것만이 진정한 생태적 삶에 가까운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모든 사람이 그런 삶을 살수도 없고 또 그런 삶이 우리사회의 주류적 흐름이 될 수도 없다. 직접 유기농 농사를 짓지 않아도, 시골로 귀농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지속가능한 생태적 삶을 살 수 있다. 바로 자기 자신과 우리문화를 바꾸는 것으로서 그러한 삶이 가능함을 윤구병은 몸으로 직접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삶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법은 윤구병이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삶의 언저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7월 9일 patr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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