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지만 행복하게 - 자연과 공동체 삶을 실천한 윤구병의 소박하지만 빛나는 지혜
윤구병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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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과 행복은 양립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보통 행복해지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유일무이하게 돈과 부를 꼽을 것이다.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돈과 물질적 부를 대체할 다른 조건을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전직 국립대 철학 교수였던 윤구병은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가난을 당당히 말한다. 과연 우리는 윤구병의 말대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거리낌 없이 가난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부유함이 아닌 가난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가난과 행복의 융합을 시도하는 윤구병은 국공립공대인 충북대 철학과 교수를 15년간 지내다가 지난 1995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을 하는‘변산교육공동체’를 설립했다. 안정된 수입과 정년이 보장되는 국공립대 교수직을 그만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힘든 결정이다. 그 결정의 배경을 윤구병은 이 책의 앞날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다 좋다 쳐도 가난은 지긋지긋하다고요? 강요된 가난은 그렇겠지요.

  그러나 스스로 선택하는 가난한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학 교수직을 사퇴하고 윤구병은 부안에서 논 삼천여 평과 밭 만여 평에 직접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삶이 정말 행복한 삶임을 실천하고 증명한다. 그러나 윤구병은 일머리도 트이지 않고 서툴고 굼뜨기 짝이 없는 풋내기 농사꾼 주제에 몇 년간 제 앞가림을 하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귀농을 했지만 근 5년간 제대로 된 소출(그는 주로 주곡인 쌀과 보리, 밀등을 생산한다)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은 비료와 농약의 사용이 아닌 철저한 유기농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구병은 그동안의 살림살이는 빚으로 꾸려온 셈이라고 겸허하고 부끄럽게 반성하지만 그 반성의 배경엔 주곡농업만으로 자급하기 어려운 한국의 농업현실, 즉 국가의 잘못된 농업정책이 있음을 암시한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 주곡 자급률이 25퍼센트 밖에 안 되는데도 독립국가 행세를 할 수 있다고 믿고, 비교생산비 우위설을 내세워 값비싼 공산품을 내다 팔아 값싼 농산물을 사서 먹는 게 더 경제적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나라 살림을 맡고 있는 한, 농민들이 아무리 바둥거려보았자 주곡 농사로 이 상품경제 사회의 거센 물결을 헤쳐 살아남기가 불가능하다고 윤구병은 따끔한 비판의 일침을 가한다. 그러면서도 윤구병이 절대로 돈이 안 되는 주곡농업중심의 유기농에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유기농과 주곡이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윤구병의 글을 읽다 보면 우리농업, 우리 쌀, 우리 보리, 우리 밀을 지키는 것은 자본과 시장의 논리로는 절대 이해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는 5년간의 농사꾼 체험으로 현재 우리 농업과 농촌의 현실과 문제점, 대안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제시한다. 농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흉년이 아니라 풍년이라고 역설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정말 제대로 된 농사꾼이 된 모양이다.

 

  주곡이 아닌 환금작물에 깊이 의존하는 한국농업의 특성상, 과잉 생산은 농산물 가격의 폭락을 의미하고 높은 시설비, 인건비를 필요로 하는 환금작물 농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농촌 환경의 다원적 가치’에 주목한다. 생존은 기본이고 사람들의 인성과 덕목, 사회의식을 길러낼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생활형태로서 농촌의 소규모 공동체들의 활성화를 윤구병은 지향한다.(일부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농촌의 소규모 공동체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개인적으로 '공동체' 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낀다. 개인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공동체 조직은 위험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가난하게 사는 길, 좀 더 힘들게 사는 길, 좀 더 불편하게 사는 길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길임을 그는 몸소 실천해 보이고 있다. 그것이 공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가난하게 살면 그만큼 이웃이 가난을 덜고, 자신이 좀 더 힘들게 일하면 그만큼 이웃의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이 걷힌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가난은 이제 더 이상 당장 끼니가 걱정되는 그런 절대적 가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난, 혹은 불편함이 결코 행복의 반대편에 있지 않음을 여실히 실천하고 증명해 보임으로써 우리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가볍게 듣고 넘기기 어렵다. 적어도 그는 아무런 행동과 실천도 없이 입으로만 녹색과 환경을 운운하는 환경근본주의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를 환경근본주의자들과 차별화시켜주는 것은 바로 그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윤구병이 생태와 환경근본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의 농법은 우리 조상들이 수천 년 간 해온 전통적 경작방식을 따른다. 물론 이러한 농법은 결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환경을 해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맹목적인 유기농법의 고수는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지배되기 쉽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변질되기 쉽다. 아니, 벌써 유기농은 자본, 시장에 충실한 하나의 고가 농산품으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는가? 대형 마트나 할인점 유기농 코너에 진열된 유기농 농산물이나 식품들은 소득이 충분치 못한 서민들이나 저소득 계층에겐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현재의 유기농이 생산성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윤구병은 과학기술에 대한 이 근원적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인간이 과학과 이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과학의 지배력은 중세 유럽의 교회의 지배력과 비교조차 어렵다.


유기농을 돈벌이로 여기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유기농 또한 화학, 비료농업 만큼 지속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농민들이나 기업농이 고소득을 기대하여 유기농에 매달린다면 우리는 우리 농업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현재 우리나라의 농업이 망해가고 있는 이유는 농사가 돈벌이기 안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휴대폰 팔아 쌀 사먹자는 주장만 설득력을 얻고 있다. 농업이 돈의 문제를 떠나 생존과 문화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골에 전원주택 짓고 텃밭 가꾸며 사는 것만이 진정한 생태적 삶에 가까운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모든 사람이 그런 삶을 살수도 없고 또 그런 삶이 우리사회의 주류적 흐름이 될 수도 없다. 직접 유기농 농사를 짓지 않아도, 시골로 귀농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지속가능한 생태적 삶을 살 수 있다. 바로 자기 자신과 우리문화를 바꾸는 것으로서 그러한 삶이 가능함을 윤구병은 몸으로 직접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삶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법은 윤구병이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삶의 언저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7월 9일 patr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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