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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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015년 5월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6주기가 되는 날이다.

몇 년 전(아래 글 본문에 서거 2년후에 읽은 책이라고 쓴 부분이 있는 걸 보니 2011년인 모양이다) 노무현 자서전<운명이다>를 읽고 작성한 글 한편이 있어 업로드한다. 이 글에 담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은 벌써 4년 전이라 지금의 내 시각과는 좀 다르지만 전혀 고치지 않는다. 생각의 족적을 그대로 두고 다시 되짚어 본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고..

 

 2002년 대선 때, 나는 멋도 모르고 노사모를 응원하고 시험 직전의 강의실을 돌며 학과 후배들에게 명계남과 문성근이 주도한 희망돼지 저금통 후원을 부 탁 하는 전단지를 돌리곤 했다. 그때 내가 무슨 명확한 정치의식과 경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노무현, 그를 지지하고 응원해야 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하고 사회진보가 이루어 질 것 같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퇴임 후, 자신의 고향에 내려와 주민들과 자전거 타는 그의 모습을 보 는 것은 그의 정치적 공과와 관계없이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으면서 노무현과 관련된 내 기억의 대부분은 극히 피상적이고 부정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대통령 재임 시절, 나는 거듭되는 실업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내 관심은 좋은 직업을 찾는 것에만 몰려 있었고 실업자 신세를 벗어나는 것을 인생최대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으니 그의 대통령 임기동안 일어났던 사건들과 정치, 경제적 문제들은 내 기억의 피질에 스며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정치인이자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도, 한 인간으로서의 노무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일상에 지친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뿐이다.

 

이 책<운명이다>로 인해 비로소 나는 정치인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노무현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대통령 임기시절에 앓았던 그에 대한 나의 기억상실증도 뒤늦게 치유할 수 있었다. 그의 서거 이후, 2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뒤늦게 그의 자서전을 다시 읽게 된 것도 그저 운명 같기만 하다. 이 책을 보면서 그의 서거 때 느꼈던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막연한 슬픔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서야 인간 노무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에 대한 무성한 소문과 세간의 이야기들은 이 책으로 인해 이제 안개가 걷히듯 모두 사라졌다.

 

 노무현 자서전<운명이다>는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육필로 쓴 자서전은 아니다. 나도 이 점이 아쉬웠다. 이 책은 문재인 이사장의 노무현 재단이 자서전과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유시민 전 장관이 리라이트(rewrite)작업을 해서 나온 사후 자서전이다. 그러나 이 책은 노무현 자신이 바라본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고, 자료수집이나 리라이트 작업을 맡은 문재인, 유시민 두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존 시절 때 가장 가까웠던 정치적 동반자였음을 상기한다면 이 자서전은 분명 정본 자서전이라 할 만하다.

 

 책은 여타 자서전처럼 노무현의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다. 그의 정치적 도전과정은 그대로 한국현대정치사의 대서사시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소외받고 억압받던 약자와 노동자들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부터 정치에 입문하여 청문회 스타가 되기까지, 그리고 김영삼 전대통령의 3당 야합에 실망하여 지역주의와 야권분열 구도를 극복하기 위해 독자적 정치행보를 걷다가 김대중 전대통령의 평민당 입당, 그리고 대선후보자가 되어 정몽준과의 극적인 후보 단일화를 거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통령 당선까지의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유시민의 담백하고 빼어난 글 솜씨도 생전의 노무현을 재현하는데 한 몫하고 있다. 그의 대통령 재임시절의 공과도 치우침 없이 공정하게 서술된다.

 

 이 책이 보여주는 인간 노무현은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 초라한 흙집에서 태어나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장관, 그리고 한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런 이력만 보면 분명 누구나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 어느 누구든 그를 실패한 대통령으로만 여길 뿐이다. 이 자서전은 분명 영광과 성공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시행착오와 좌절과 실패의 회고록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의 치열했던 삶은 결코 패배자의 인생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표면적으로 자살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지만 그 외피를 벗기고 나면 비로소 정치적 타살의 흔적을 역력히 발견할 수 있다. 그 흔적들을 이 책<운명이다>에서 분명히 나는 보았다. 그가 생전에 싸웠던 것은 특혜와 특권, 반칙, 기회주의, 지역주의, 노동탄압과 인권탄압, 정경유착 등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쥐고 흔드는 거대 보수 언론과의 싸움이었다. 이 언론과의 싸움은 외롭고 힘든 싸움이었다. 그는 원칙과 신뢰, 투명과 공정, 분권과 자율, 대화와 타협을 무기로 수구보수 언론과 승산이 없는 싸움을 벌이다 패했다. 그래서 그를 바보 노무현이라 하지 않던가.. 그 싸움의 결과는 참담했다. 언론과 검찰을 개혁하려던 그는 퇴임 후 언론과 검찰에게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보복을 당했다.

 

 그는 왜 이런 삶을 살아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그는 승률도 좋았고 수임률도 높았다. 3당 합당의 주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라 권력의 중심으로 갔더라면 그의 앞날은 출세와 성공, 부와 명예의 탄탄대로였을 것이고 오늘날 그의 실패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야합과 기회주의, 지역분열을 낳았던 김영삼을 떠나 지역분열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항했다. 그는 화려한 학력도 없고 재산도 없었고 힘있는 빽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 반칙을 자행하는 자에 대한 분노, 정의의 대한 열정 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 노무현의 정신이다. 그가 만들려고 했던 세상은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특권과 반칙이 통용되지 않는 상식과 원칙, 민주적 질서로 굴러가는 세상 말이다.

 

 그는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 물론 그의 주변에서 정당치 못한 자금이 흘렀고 그 돈을 그의 주변인물들이 떳떳하지 않게 사용한 정황은 분명히 있다. 특권과 반칙, 부정과 타협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주변인들이 저지른 잘못까지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누가 그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지키려 했고 잔인한 언론과 검찰의 보복의 순환 고리를 끊으려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증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구차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런 길을 택한다면, 자신을 버리지 않을 사람이 너무 많을 것이고 그 사람들이 받을 고통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먼저 자기 자신을 버렸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했다.

 

재임 중 수천 억 원 대의 비자금을 불법으로 조성하여 챙기고 권력을 위해 무고한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이들도 일말의 양심과 도덕조차 버리고 버젓이 산송장처럼 추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삶에 비해 그의 죽음은 과연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옳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옳을까?

 

그의 선택을 지탄하는 사람들은 양심과 도덕을 버린 자들의 삶을 겉으로는 비난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도 그들처럼 살 기회가 오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런 추한 삶의 길을 걸으려 할 것이다. 지독한 이중적, 위선적 태도로 물든 우리 삶의 현실이다. 이 현실은 서글픈 자화상이다. 노무현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있는 이 서글픈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경제를 파탄 낸 장본인으로,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받아 챙긴 파렴치한 범죄자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모든 실패를 변명하지 않고 말없이 인정했다.

 

 

이 책은 실패와 좌절의 회고록이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정신과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더 이상 봉하 들판에서 자전거 타는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하여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비록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정신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분명 승리할 날이 올 것이다.

 

 

노무현을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을 때 손수건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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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치오 카쿠의 신작이다.

 마음과 의식을 다뤘다고 해서 주저없이 구입했다.

 목차를 대충 훑어보니 의식과 마음에 대한 관점이

 물리주의에 충실한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미치오

 카쿠는 물리학자가 아닌가..

 미치오 카쿠도 역시 레이 커즈와일 처럼

 인간의 의식을 컴퓨터에 다운로드 할 수 있다는

 가정에 추호의 의심도 없고 그런 작업에 대한

 기술적 기반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정말 인간의 의식을 컴퓨터에 다운로드

 할 수 있을까? 최근 개봉한 헐리우드 영화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에도 인공지능이 등장

 하는데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공포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의식을 시간의 산물이라고 본다.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듯이 인공지능이나

의식을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인간이 의식을 갖기 위해 보낸 수십억년의 세월을 생각해보라.

그 억겁의 세월은 의식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의식을 다운로드 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전혀 없을까..

철학계에서는 복제오류라는 사고실험이 있다.

관련 책을 다시 한번 들춰볼 생각이지만 한 인간의 의식을 컴퓨터에 다운로드

할 수 있다면 컴퓨터 한 대가 아닌 여러 대, 아니 수십, 수백대의 컴퓨터에도

다운로드 가능할 것이라는 개연성이나 가능성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그렇게 복제된 수십 개의 의식에 대한 정체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의식이 수십, 수백개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까?

 

어찌됐든간에 의식을 컴퓨터에 다운로드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시간이 지나보면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다운로드 할 수 있다면 냉각팬이 윙윙 돌아가는 후덥지근한

cpu와 메모리 안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지만

나라면 컴퓨터안에 들어가 살고 싶지는 않다.

 

<마음의 미래>를 마저 읽고 나면 생각해 볼 거리가 많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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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분자
프랜시스 크릭 지음, 이성호 옮김 / 궁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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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왓슨과 함께 1953년 인간 DNA구조가 이중나선임을 규명한 생명공학자 가 바로 프랜시스 크릭이다. 사실 제임스 왓슨의 <이중 나선>이라는 책은 좀 실망이었다. <이중 나선>은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구조를 규명해 나가는 과 정을 그린 책인데 병원 입원 기간 중 극심한 통증을 참으며 읽은 책이라서 그런지 내용도 머리에 별로 남지 않고 특별한 감흥도 없었다. 다만, 이 책에서 계속 언급 되는 왓슨의 연구동반자 프랜시스 크릭과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두 인물에 대한 호기심은 잊혀지지 않았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X선 회절연구로 DNA 구조규명에 공헌한 여성물리학자로서 요절하였고 프랜시스 크릭은 DNA구조 규명이후에도 활발한 연구활동을 펼치다 지난 2004년 세상을 떠났다. 제임스 왓슨의 <이중 나선>에서 프랜시스 크릭은 늘 활달하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으며 때로는 괴팍한 성품의 소유자로 묘사되어 있는데 크릭의 저서<인간과 분자>에서도 크릭의 그러한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인간과 분자>는 지난 2010년에 궁리출판사에서 이성호씨에 의해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궁리출판사에서 나온 과학책들은 모두 믿을만하고 특히 번역이 훌륭하다. 상업성이 떨어지는 이런 책들을 열심히 만드는 이런 출판사들이 있어 행복하다.

 

<인간과 분자>는 프랑스의 생화학자 자크모노의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을 떠오르게 한다. 둘 다 생기론(生氣論:생명현상의 발현이 비물질적인 생명력이며 자연법칙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원리에 지배되고 있다고 보는 이론)에 반대하고 생기론을 타파하기 위한 논의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과 필연>을 읽은 사람이라면 프랜시스 크릭의<인간과 분자>가 마치<우연과 필연>의 축약본처럼 느껴질 정도로 두 책의 내용과 관점은 거의 흡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현상을 이 우주와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인 물리, 화학현상과 구분되는 독특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위에서 말한 생기론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생명현상을 “생명의 신비”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신비가 바로 생기론의 핵심인 셈이다. 인간의 의지와 자연법칙을 뛰어넘어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현상에

“신비” 현상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프랜시스 크릭은 이 책에서 주장한다. 우리가 신비한 현상이라 부르는 것들은 다만 아직까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마땅한 이론과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며, 또 이미 생명현상분야에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또 무엇이냐며 크릭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인다.

 

 크릭의 이러한 자신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양자물리학과 분자생물학의 성과에 힘입은 바가 크다. 크릭은 당시의 양자역학과 생화학 지식이 이 책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반생기론적인 생물학의 확실성의 기반을 제공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당시의 생물학, 화학의 이론적 기반이 언젠가는 다소 부정확한 것으로 드러날 수 도 있지만 과학자들은 그러한 가능성에 얽매이지 않음에 주목하라고 한다.

 

 과학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느껴지기도 하는 대목이지만 과학적 방법에 회의를 가졌다면 오늘날의 현대문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크릭의 주장이 일개 생물학자의 기고만장한 과학예찬으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크릭은 물리학과 화학에 대한 현재 우리의 지식이 이 세계를 바라보는 대단히 견고한 기반으로 작용하는데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다. 과학적 지식이 아니었다면 종교적 세계관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자신감은 충분한 근거가 있고 억지스럽지 않다.

 

 

 크릭은 사람들이 생기론적 세계관을 원하는 이유로 생명현상에서 관찰되는 고도로 복잡한 패턴이나 현상들이 인간의 직관과 이성으로 아직까지 잘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통 무기물에서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러한 믿음은 이미 오래전에 실험으로 반증되었다. 무기물로 유기분자의 합성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고집스런 일부 종교인들은 여전히 인간들을 신의 피조물로 여기는 확고한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크릭은 이러한 믿음이 엄연한 실재적 지식인 물리, 화학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고 이 종교적 도그마를 깨부수는 작업을 당시의 분자생물학적 연구 성과에 기대어 진행한다. 생명현상에서 분자생물학이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다는 점, 그리고 생명현상에서 생기론이 자리 잡을 곳은 전혀 없다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자연선택과 진화론이 우리의 새로운 문명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크릭의 주장은 단호하고 명쾌하다. 크릭은 생기론은 죽겠지만 그 유령은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생기론의 유령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것 같다. 크릭이 타파하고 싶었던 것은 생기론과 이와 관련된 기독교 사상의 일부였고 그는 공립학교에서의 종교교육에도 반대했다. 물론 나도 크릭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과학적 방법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절대적으로 배제하지 않았으면 한다. 과학이 또 다른 종교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2011년 7월 1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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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물고기
고형렬 지음 / 바다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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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연어가 있을까?

나는 연어를 한번도 내 육안으로 직 접 본 적이 없다. 텔레비젼 방송의 동물의 왕국이나 자연다큐멘터리 프 로그램에 나온 연어의 모습이 내가 아는 전부이다. 알래스카나 동시베 리아의 캄차카 반도 같은 머나먼 이 국, 설산과 침엽수림의 광활한 숲, 시리다 못해 피부를 에는 듯한 맑고 깊은 이국의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 그리고 그들을 사냥하는 북국의 거대한 갈색 곰들.. 북국의 곰들이 알을 낳기 위해 소상하는 연어들을 잡아먹는 광경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서유럽이나 일본에서는 연어요리가 최고급 요리에 속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비록 내가 한번도 맛 본적은 없지만 말이다. 이런 것들이 연어에 대해 내가 겨우 떠 올릴 수 있는 영상들이다. 내게 있어 연어는 그저 머나먼 이국, 북국에 서식하는 신기한 물고기, 혹은 야생곰과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음식 가운데 하나라는 정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연어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연어가 있다고 한다. 외국의 동물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었던 연어를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이나 경북 울진의 왕피천에는 지금도 연어가 10월경이 되면 알을 낳기 위해 소상한다. 놀라운 일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1950년이후 급속한 산업화 이전)의 낙동강에도 연어가 소상했다고 한다. 상상하기 어렵다.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연어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 책은 바로 양양의 남대천에서 태어나고 생을 마감하는 연어들에 대한 서사수필이다.

 

 고형렬의 산문 ‘은빛 물고기’는 우리나라 연어의 생태에 대해 쓴 최초의 글이다. 비록 에세이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이건 에세이가 아니라 한국에 찾아오는 연어에 대한 한편의 장엄한 대서사시라 할 만하다. 고형렬의 글은 산문 이상이 아닌 거대한 서사의 감동을 안겨준다. 일생동안 3천2백 킬로미터를 회유한다는 연어.. 그리고 그 연어들은 십여 년 간 끈질기게 그들을 추적해온 한 시인.. 고형렬은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연어의 일생을 풀어내고 해설한다. 고형렬의 문장은 짧은 호흡으로 숨을 쉰다. 그 호흡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의식도 하지 못한 채 허투루 쉬는 숨이 아니라 단전호흡을 하는 숙련된 기공사의 숨처럼 날숨과 들숨 하나하나마다 정성과 진실이 충만하다. 그의 문장에는 군더더기 없다. 그 이유는 1999년에 출간되었던 초판을 원고지 700매 정도로 줄여 재출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여타의 에세이처럼 그의 문장을 가볍게 타고 넘어가기 어렵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는 와인처럼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좋다. 책에는 비록 연어 그림, 삽화, 사진 한 장 없지만 글의 묘사만으로도 연어의 생태와 연어의 세계를 상상하는데 지장이 없다.

 

 고형렬의 글은 1990년 가을, 강원도 삼척에서 시작된다. 삼척의 오십천은 작가 어머니의 고향이다. 삼척 신기리에서 젊었을 때 연어를 잡던 팔순의 고인봉 옹을 저자가 찾아간다. 고옹은 1944년을 기억해 낸다.

 

“ 연어요? 그해 무지 들어왔소. 엄청났소. 허, 그 이상한 놈들. 왜 알을 낳고 죽고 마는 건지. 알을 낳은 연어들은 며칠 못 가서 몸이 상합니다. 나무뿌리나 돌바위에 걸려서 눈을 뜬 채로 죽지요. 자기들이 무슨 일로 이렇게 죽어가는지를 어찌 알겠소. 날짐승들이 지 새끼 낳아 비바람 속에서 같이 살아내는 것 보면 거 눈물겹소.”

 

 그렇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그렇겠지만 삶이라는 것, 혹은 생명이라는 것은 경이롭다 못해 그저 눈물겹다. 연어같은 미물, 날짐승뿐만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다.

 

 고옹이 연어를 잡던 하천에는 이제 더 이상 연어가 오지 않는다. 그 하천의 중류에는 거대한 보가, 그리고 하류에는 연어를 잡는 채포장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고옹은 죽을 때까지 연어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낙동강에도 과거에 연어가 소상했다고 한다. 지금의 낙동강은 환경오염으로 연어의 치어가 살 수 없는 불임의 강이 되어 버렸다. 정부가 건설하고 있는 낙동강의 거대한 보가 완성되면 낙동강은 아무리 물이 맑아져도 영원히 연어가 돌아오지 못하는 실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낙동강 임해의 공업지대와 낙동강의 거대한 보를 없애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고형렬은 이런 상황을 두고 비극이라 하였다. 연어를 볼 수 없는 것도 비극이고 공업지역을 없앨 수 없는 것도 비극이다. 아마 그 비극은 소수의 사람들만 느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비극이 존재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연어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돌아갈 수 없는 모천의 하구에서 헤매는 연어와 일생을 해매는 인간들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과거엔 남해안의 낙동강, 섬진강 같은 큰 하천에 연어들이 나타났지만 지금은 연어의 소상이 거의 중부 동해 이북으로 북상했다고 한다. 1983년 이후 경남의 해안 하천은 연어 소상이 완전히 끊어졌다. 그리고 경북 울진의 왕피천은 강의 하구가 토사에 막혀버렸다. 연어회귀의 남방 한계선은 점점 북상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남한에서 연어를 볼 수 있는 날도 없어질지 모른다.

 

 연어는 10월경에 모천으로 소상하여 알을 낳는다.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에서 연어의 알이 수정되어 난황흡수를 마치는 기간은 10월부터 1월까지 4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난황흡수란 것은 물고기의 치어들이 불룩한 배를 달고 다니다가 온전한 치어로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난황에는 어미로부터 받은 온갖 영양분이 들어있다. 연어의 치어는 난황을 먹고 자란다.

연어 수정란들의 사란율(알이 죽는 비율)은 약 1.4퍼센터 정도인데 묘하게도 어미 연어들의 모천 회귀율과 비슷하다. 연어알 100개중에 1~2개만 죽고, 또 연어 100마리 중에 1~2마리만 고향을 찾아 올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상수는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1820년 조선조 서유구가 어류에 관해 저술한 책 난호어묵지는 연어를 年魚, 혹은 季魚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매년 모천으로 소상하는 연어의 습성을 보고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이런 우리나라의 연어와는 달리 외국의 연어명칭이나 문화는 차원이 다르다.

 

 연어를 영어로 salmon이라 하는데 인터넷 영어사전에서 이 단어를 검색해 보면 연어에 대한 영어 이름이 한 두개가 아님을 알게 된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모천에서 알에서 깨어난 연어의 치어를 영어로 alevin(앨러번)이라 한다. 그리고 모천에서 한해를 넘긴 2년생 연어는 smolt(스몰트)라고 부른다. 연어는 스몰트로 불릴 때 봄에 바다로 나간다. 바다로 나간 연어가 다시 알을 낳으러 고향으로 돌아올 때 쯤이면 연어의 이름은 grilse(그릴스)가 된다. 그릴스가 모천으로 돌아오면 이때부터의 연어는 비로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salmon(샐먼)으로 불린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산란후의 연어는 또 kelt(켈트)라고 한다. 북유럽의 켈트족은 연어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영미문화권에서 연어의 이름은 연어의 생애별로 다양하다. 연어 문화는 영미권에서 훨씬 더풍부하고 다채롭다. 이런 다채로운 연어의 이름이 영미문화권에 존재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영미인들에게 있어 연어는 아득한 과거부터 생활의 일부였으리라..

 

 가을에 모천에서 탄생하여 겨울을 보낸 연어 새끼들은 봄이 되면 바다로 나간다. 그리고 해류를 타고 지구의 북쪽으로 올라간다. 연어들의 목적지는 북태평양이다. 연어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북태평으로 가는 움직임과 이유는 불가해한 비밀이다. 많은 학자들이 연구했고 지금도 연구하고 있지만 연어가 바다로 나가고 다시 모천으로 돌아오는 이유를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다.

고형렬은 이렇게 말한다

 

“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공부하고 행동하고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 답을 알지 못할 뿐이지 그 답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어떤 비밀 속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연어들이 회유하는 비밀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그 비밀 밖의 문지방에 서 있는 천진무구한 아이들일 뿐이다.”

 

 연어는 냉수어종이다. 그들은 동해의 수온을 따라 회귀를 시작한다. 동해안은 여름이 다가올수록 수온이 상승한다. 한여름엔 수온이 26도까지 올라가는데 이런 수온에서는 연어가 살 수 없다. 차가운 해류는 북쪽으로 이동한다. 연어는 차가운 수온과 해류에 몸을 맡긴다.

 

 “강원도 남대천 앞바다에서 떠나온 그들이 북태평으로 향하고 쿠릴열도를 벗어나 알류산 열도에 진입할 때면 이미 그들중 9할은 죽고 백에 대여섯 마리만 살아남는다. 이 살아남은 일부의 연어들이 대를 잇는 특별한 존재들이다. 그들 중에 살아서 고향에 돌아오는 연어는 100마리에 1.4마리꼴, 그러니까 200마리에 3마리 정도만 살아남아 돌아갈 뿐이다. 성냥개비만한 연어 치어들이 살아남아서 베링해까지 도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이동하는 곳마다 먹이는 풍부하지만 그야말로 천신만고의 여정이 아닐 수 없다.”

 

 연어의 생존률은 기적같은 일이다. 연어의 삶 자체가 기적같은 일이고 그 기적같은 연어에게는 또 한가지 불가해한 일이 있다. 연어가 북태평양의 베링해에서 2년정도를 보내고 나면 자신의 고향인 모천으로 돌아온다. 너무나아득하고 멀고 험한, 그리고 그 연어들의 피조차 얼려버릴 듯한 혹한의 북해에서 무려 3천2백킬로미터를 다시 아래로 여행하여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으로 정확히 찾아오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것보다 더 불가해한 일은 모천으로 회귀한 연어는 그 순간부터 절대로 먹이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이다. 마치 자신들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듯이 말이다. 연어는 산란을 위해 모천에 돌아온 날부터 오직 물만 삼켜서 아가미 쪽으로 내보낸다. 암수가 똑같이 굶는다. 마치 먹는 일을 잊어버린 것처럼..

 

연어가 소상하여 먹이를 먹지 않는 시점부터 연어들은 짝짓기를 하고 부부가 되고 산란을 한다. 짝을 찾지 못한 수컷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다. 암컷들은 하천 바닥의 모래와 자갈을 파내고 자신들의 아랫배가 다 찢어져 너덜거리게 될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산란을 한다. 물고기를 잡아서 알을 짜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물고기가 알을 낳을 때 그들의 아랫배 피부는 작고 가는 구멍이 되고 그 피부가 파열되어 알들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수컷들은 암컷이 낳아놓은 알 위에 정액을 뿌린다. 부모가 된 연어들에게 남은 일은 죽음밖에 없다.

 

 연어는 한번 알을 낳으면 다시 알을 갖지 못하고 모천에서 죽는다. 이것을 연어의 일생일란一生一卵이라고 한다. 산란을 마친 연어에게 남은 건 죽음이다. 연어는 아비와 어미가 되면 물 속 세상에서의 인연은 끊어진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연어들에게서 죽음의 두려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연어가 산란하기 전부터 먹이를 전혀 먹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의 후손을 남기는데 있어 부모의 생명에너지를 온전히 후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고형렬은 연어 아비와 어미의 마지막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그도 인간이고 인간이란 부처처럼 탈속의 경지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상 희노애락과 감정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연어에 대한 마지막 묘사는 비록 담담해 보이고 무심한 카메라의 렌즈같이 투명하고 중립적으로 읽혀지지만 그 이면에는 연어 부부의 애틋한 인연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이 배어있다. 그러나 고형렬은 연어의 생과 사를 불교적 세계관으로 다음과 같이 풀어낸다.

 

“ 연어 부부는 죽을 때 동시에 출생한 것처럼 같은 시간에 생명이 끊어진다. 켈트들은 물살에 밀리기 시작한다. 살은 허옇게 되면서 연어의 목에 붙은 생명의 끈은 극명한 한계에 다다른다. 속살의 다홍색도 다 빠지고 푸석푸석해졌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아름답던 은빛 비늘은 뽑혀나가고 한쪽 눈은 빠져서 덜렁거린다. 이 몸들이 대양을 질주해온 연어들이었던가.

남편은 서서히 숨이 끊어진다. 아내도 곁에서 같이 운명하려고 밭은 숨을 고른다. 상대방에 대한 아무런 유언도 당부도 부탁도 남기지 않고 물과 함께 흘러간다. 저만치 각기 다른 물길에 몸을 싣고 물살을 따른다.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잡아줄 수가 없다. 이승에서 맺은 그들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고 있다.

부부는 잠시 동안의 부부였다. 저들이 언제 펄펄 뛰던 연어였던가. 수정을 마치고 그들은 허무하게 사라져간다.

연어들의 팔만사천 감정은 다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희생을 전제로 한다.

 

연어 부부의 육신은 물결에 쓸려 사라져 간다. 그러나 부부가 세상을 떠난 뒤, 그 해 겨울을 나면 다시 아이들은 태어난다. 연어 어미들이 죽어간 그 남대천에 그 아이들이 모래알처럼 숨어 있다. 그 아이들은 또다시 그들의 어미처럼 저마다의 생의 법을 지켜갈 것이다. 생명이란 자신인 알이 자신인 어미를 먹는 일이고 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다른 생의 인연으로 건너갈 수가 없을 것이다.

 

고형렬의 서사는 연어 채포장에서 끝이 난다. 이제 더 이상 연어들이 마음놓고 생과 사를 이어갈 터전과 환경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천의 하구에서 연어를 잡아 알을 수집하여 인공부화시켜 이듬해 봄에 바다로 내보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연어를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연어가 저절로 소상하지 않는 텅 빈 하천들.. 고형렬은 그 아쉬움을 이렇게 말한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격식 있는 생사법이 있어서 그들은 연어다운 일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산행의 장례가 사라진 것처럼 연어들도 인공을 수정되고 몸은 피로 처분될 뿐이다. 먼 훗날 콧속에 붙은 흑운모나 화강암, 편마암으 향기를 찾아 여인의 속살 같은 남대천을 찾아 돌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때 그들의 친척인 그 귀여운 무명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이제 고형렬의 글을 읽고 난 지금, 연어의 존재란 내게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연어들에게 있어“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격식 있는 생사법”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2011년 2월 1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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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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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며칠 전 대구에 첫눈이 내렸다. 예전에 여긴 눈이 귀했지만 요 몇 년 사이 기후변화 탓인지 겨울철 눈이 잦다. 경험상 첫 눈은 늘 모두가 잠든 한밤에 내렸는데 이번 첫 눈도 역시 그랬다. 일어나자마자 밤새도록 내리 쌓인 하얀 설경을 바라보는 건 일상에서 드문 낭만이다. 물론 그 낭만은 오래가지 않고 금새 출근걱정으로 이어진다. 멀리서 바라보는 눈은 센티멘탈하게 해주는 매개가 되지만 내 몸에 닥치는 눈은 여지없는 현실이 된다. 질척이는 눈뭉치는 지저분하고 걷기에 불편하다. 눈길에서 제힘을 쓰지 못하는 자동차들의 거대한 패닉상태를 보라. 눈은 얼마나 이중적인가.

 

추위에 약한 체질탓인지 군복무 시절 경험한 경기 북부의 그 혹독한 추위와 지긋지긋한 폭설 때문에 나는 중부지방보다 훨씬 따뜻하고 눈이 거의 없는 이곳 대구에 거주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이제 눈이 귀찮은 존재가 된 건 그만큼 나도 어지간히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인가. 올해 첫눈이 온 날 아침은 마침 야간 출근조였다. 오후가 되면 눈은 녹을 것이고 아침에는 출근 걱정이 없어 오랜만에 눈을 즐길 낭만과 여유가 생긴다.

 

 

 겨울 첫 눈이 오면 늘 책장에서 꺼내보는 책이 있다. 바로 일본작가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집 철도원

 

 눈에 얽힌 추억은 많이 있지만 눈이 오면 생각나는 책은 이 철도원이 유일한 것 같다.눈이 사람에게 주는 효능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정화다.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철도원>은 하얗게 내린 눈처럼 마음이 정화되는 카타르시스와 목젖을 울컥하게 하는 감동이 있는 슬픈 이야기다.겨울철이면 늘 막연하게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은 또렷한 모습이 없으면서도 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데 그런 날이면 아사다 지로의 눈처럼 시린 슬프고 따뜻한 이야기를 천천히 읽는다. 읽고 나면 답답했던 가슴이 풀리면서 따끈하게 데운 캔커피 처럼 마음이 훈훈해진다. 

 

 

 소설의 배경은 끊임없이 눈이 내리는 일본 북부 홋카이도 지방의 시골 간이 역인 호로마이 역. 호로마이 역은 한때 메이지시대 이래 최고의 탄광촌으로 기세를 떨치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역장 오토마츠의 퇴직과 함께 폐쇄될 운명의 쓸쓸한 노선. 1970년대 석탄산업의 활황기 때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을 강원도 태백이나 정선의 기차역들을 떠 올리면 족할 듯하다. 호로마이 역의 역장인 오토마츠는 이곳에서 45년을 근속하고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래된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에 등장했던 투명인간 차장이 입은 바로 그 투 버튼 검정색 철도원 코트. 소설 속에 묘사된 오토마츠가 입은 철도원 제복도 바로 그런 코트이다.

 

 오토마츠는 자신의 직업에 투철한 사내다. 그는 하나밖에 없었던 늦둥이 딸이 동사해 돌아온 날도 열차 안내 깃발을 흔들며 딸의 주검을 실은 기차를 맞고 여객 일지에 "이상 없음"이라 적는 철도원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멀리서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역에서 마지막 기차를 배웅하는 업무를 완수하고 나서야 숨진 아내가 있는 영안실을 찾아간다. 오토마츠 대신 아내의 임종을 지킨 건 동료 철도원의 아내였고 그녀는 아내의 임종소식을 듣고도 곧장 달려오지 않은 오토마츠를 매정하고 박정한 인간이라고 비난한다. 눈이 얼어붙은 외투 차림으로 아내가 있는 영안실에 왔으면서도 끝내 울지 않았던 오토마츠에게 동료 철도원의 아내는 어째서 울지도 않느냐고 따지고 들자 그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도 철도원인데, 사사로운 집안 일로 눈물을 보이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의 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작가는 너무 작위적인 설정으로 슬픔을 자아내려 하는 것일까. 자신의 가족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역장의 책임을 다하려는 오토마츠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는 가족보다 역장이란 임무가 더 소중했던 일 중독자였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지독히 고집 세고 우직하기만 해서 융퉁성이 전혀 없는 인간이었을까.

 

 또다시 눈 내리는 추운 12월의 마지막 밤. 오토마츠와 그의 오랜 친구 센지는 새해를 맞기 위해 눈덮힌 호로마이역을 지킨다. 센지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오토마츠는 늦은 밤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정월 초하루는 오토마츠의 딸 유키코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늦은 밤, 호로마이 역에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나타난다. 낮에 역에 놀러왔다가 인형을 놓고 간 어린소녀의 언니가 동생의 인형을 찾으러 온 것이다. 낮에 놀러왔던 소녀는 내년이면 학교에 입학한다면서 작은 책가방까지 맨 귀여운 아이였다. 오토마츠는 역 주변 마을 주지스님의 딸들인 줄 알고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해준다. 그날 밤, 마지막에 나타난 언니는 오토마츠의 딸이 살아있었더라면 꼭 같을 또래의 고등학생 소녀다. 그녀는 오토마츠에게 따뜻한 새해 밥상까지 차려준다. 소녀가 끓여준 된장국은 생전의 아내가 끓여내던 바로 그 된장국 맛이다. 오토마츠는 자신의 딸 유키코를 회상하며 즐거운 밤을 보낸다. 쓸쓸하고 적막한 호로마이역을 찾아온 그 소녀들은 누구일까.

 

 오토마츠가 결혼 17년 만에 얻은 어린 외동딸은 호로마이역에 딸린 문풍지 바람이 끊일 새 없는 사무실 겸 살림방에서 추위를 못 이기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오토마츠는 늘 자신의 직업이 아이를 죽인거라는 죄책감으로 한평생을 보낸다. 그러나 이제야 찾아온 딸은 그런 오토마츠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자식노릇 한 번 못하고 죽어버렸다면서 오토마츠를 위로한다. 아버지는 철도원이니까.. 그게 아버지 직업이라면서 말이다.

 

 

  오토마츠가 새해 새벽에 죽은 자신의 딸과 재회하는 장면은 눈시울이 찡해지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장면. 독자의 눈물과 슬픔, 그리고 가슴을 뜨겁게 하는 감동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꿈에도 그리던 딸을 만난 날, 오토마츠는 그날의 여객일지에도 여전히‘이상 없음’이라고 적어넣는다. 그리고 새해아침, 오토마츠는 눈덮인 플랫폼에서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손깃발을 꼭 쥔 채 주검으로 발견된다.

 

 오토마츠와 딸이 만나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나는 오토마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시커먼 제복차림에 시린 눈 냄새 풍기며 역무원의 일에 몰두했던 오토마츠의 모습에서 내 아버지를 떠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서 들판으로 달려가셨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지 않는 듯이 새벽부터 들판으로, 직장으로, 생업의 터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밤이 늦어 아이들이 잠든 뒤에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정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과 궁핍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본능이 우리 아버지들을 그렇게 가정과 멀어지게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본능에 충실했던 것이 그들이 저지른 유일한 실수라면 실수이리라.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그런 실수를 원망할 수 없다. 이 작품의 오토마츠를 미워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산업화시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부분 그렇게 살았다. 시골 간이역에 오토마츠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덩치 큰 기차가 들어오면 레일도 바꿔줘야 하고 역에 들어오는 열차를 수신호로 안내하면서 안전하게 정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버스처럼 혼자 와서 혼자 출발 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아닌 것이다. 소설에 보이는 오토마츠의 고집이나 일에 대한 무서운 집착은 비현실적이어서 그런 사람이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그러나 한평생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실수를 한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을 더하고 더한 평균적 인물이 바로 오토마츠 역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토마츠는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일 중독자가 아니라 그런 시대를 그렇게 견딜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희생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딸이 죽고 아내가 죽던 날도 여전히 여객일지에 이상 없음’이라고 적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이란 것도 그렇게 돌아간다.

 

 한쪽에서는 사랑하는 가족과 애인과 친구를 상실하고 슬픔과 비탄에 잠긴 사람들이 힘들어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끝없이 이어지는 기차 레일처럼 꿋꿋이 이어진다. 슬픔에 잠겼던 사람들, 잠시 희망을 잃었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삶의 터전은 바로 오토마츠가 여객일지에 적어 넣은‘이상 없음’의 바로 그곳일 것이다. 사람들은 기찻길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면서 희로애락의 매듭을 이어간다. 오토마츠는 기차레일이 아닌 레일 밑의 거대한 침목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레일 밑에 깔린 단단하고 묵직한 침목이 있어야 기찻길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열차와 열차를 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하중과 희로애락을 떠받치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고요하고 든든한 기차레일 밑의 침목은 삶의 토대며 근본이다. 오토마츠의 삶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침목 같은 삶의 중심에 대한 믿음을 져 버리지 않았던 철도원이었기 때문이리라. 눈이 많이 내린 겨울 아침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집 철도원에는 단편<철도원>외에도 주옥같은 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옮긴이의 말을 들어보면 아사다 지로는 일본에서 '가장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손꼽히는 작가라고 하는데 <철도원>이나 <러브레터>같은 단편을 읽어보면 그런 수식이 어떻게 붙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러브레터>는 한국에서 최민식과 장백지 주연의 <파이란>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철도원>은 1999년에 일본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주연을 맡았던 일본 국민배우 다카쿠라 켄의 연기도 정말 좋았고 딸 연기를 했던 히로스에 료코의 청순한 모습도 좋다. 역장역을 맡았던 다카쿠라 켄은 올해 11월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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