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물고기
고형렬 지음 / 바다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에 연어가 있을까?

나는 연어를 한번도 내 육안으로 직 접 본 적이 없다. 텔레비젼 방송의 동물의 왕국이나 자연다큐멘터리 프 로그램에 나온 연어의 모습이 내가 아는 전부이다. 알래스카나 동시베 리아의 캄차카 반도 같은 머나먼 이 국, 설산과 침엽수림의 광활한 숲, 시리다 못해 피부를 에는 듯한 맑고 깊은 이국의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 그리고 그들을 사냥하는 북국의 거대한 갈색 곰들.. 북국의 곰들이 알을 낳기 위해 소상하는 연어들을 잡아먹는 광경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서유럽이나 일본에서는 연어요리가 최고급 요리에 속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비록 내가 한번도 맛 본적은 없지만 말이다. 이런 것들이 연어에 대해 내가 겨우 떠 올릴 수 있는 영상들이다. 내게 있어 연어는 그저 머나먼 이국, 북국에 서식하는 신기한 물고기, 혹은 야생곰과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음식 가운데 하나라는 정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연어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연어가 있다고 한다. 외국의 동물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었던 연어를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이나 경북 울진의 왕피천에는 지금도 연어가 10월경이 되면 알을 낳기 위해 소상한다. 놀라운 일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1950년이후 급속한 산업화 이전)의 낙동강에도 연어가 소상했다고 한다. 상상하기 어렵다.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연어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 책은 바로 양양의 남대천에서 태어나고 생을 마감하는 연어들에 대한 서사수필이다.

 

 고형렬의 산문 ‘은빛 물고기’는 우리나라 연어의 생태에 대해 쓴 최초의 글이다. 비록 에세이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이건 에세이가 아니라 한국에 찾아오는 연어에 대한 한편의 장엄한 대서사시라 할 만하다. 고형렬의 글은 산문 이상이 아닌 거대한 서사의 감동을 안겨준다. 일생동안 3천2백 킬로미터를 회유한다는 연어.. 그리고 그 연어들은 십여 년 간 끈질기게 그들을 추적해온 한 시인.. 고형렬은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연어의 일생을 풀어내고 해설한다. 고형렬의 문장은 짧은 호흡으로 숨을 쉰다. 그 호흡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의식도 하지 못한 채 허투루 쉬는 숨이 아니라 단전호흡을 하는 숙련된 기공사의 숨처럼 날숨과 들숨 하나하나마다 정성과 진실이 충만하다. 그의 문장에는 군더더기 없다. 그 이유는 1999년에 출간되었던 초판을 원고지 700매 정도로 줄여 재출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여타의 에세이처럼 그의 문장을 가볍게 타고 넘어가기 어렵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는 와인처럼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좋다. 책에는 비록 연어 그림, 삽화, 사진 한 장 없지만 글의 묘사만으로도 연어의 생태와 연어의 세계를 상상하는데 지장이 없다.

 

 고형렬의 글은 1990년 가을, 강원도 삼척에서 시작된다. 삼척의 오십천은 작가 어머니의 고향이다. 삼척 신기리에서 젊었을 때 연어를 잡던 팔순의 고인봉 옹을 저자가 찾아간다. 고옹은 1944년을 기억해 낸다.

 

“ 연어요? 그해 무지 들어왔소. 엄청났소. 허, 그 이상한 놈들. 왜 알을 낳고 죽고 마는 건지. 알을 낳은 연어들은 며칠 못 가서 몸이 상합니다. 나무뿌리나 돌바위에 걸려서 눈을 뜬 채로 죽지요. 자기들이 무슨 일로 이렇게 죽어가는지를 어찌 알겠소. 날짐승들이 지 새끼 낳아 비바람 속에서 같이 살아내는 것 보면 거 눈물겹소.”

 

 그렇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그렇겠지만 삶이라는 것, 혹은 생명이라는 것은 경이롭다 못해 그저 눈물겹다. 연어같은 미물, 날짐승뿐만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다.

 

 고옹이 연어를 잡던 하천에는 이제 더 이상 연어가 오지 않는다. 그 하천의 중류에는 거대한 보가, 그리고 하류에는 연어를 잡는 채포장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고옹은 죽을 때까지 연어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낙동강에도 과거에 연어가 소상했다고 한다. 지금의 낙동강은 환경오염으로 연어의 치어가 살 수 없는 불임의 강이 되어 버렸다. 정부가 건설하고 있는 낙동강의 거대한 보가 완성되면 낙동강은 아무리 물이 맑아져도 영원히 연어가 돌아오지 못하는 실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낙동강 임해의 공업지대와 낙동강의 거대한 보를 없애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고형렬은 이런 상황을 두고 비극이라 하였다. 연어를 볼 수 없는 것도 비극이고 공업지역을 없앨 수 없는 것도 비극이다. 아마 그 비극은 소수의 사람들만 느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비극이 존재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연어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돌아갈 수 없는 모천의 하구에서 헤매는 연어와 일생을 해매는 인간들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과거엔 남해안의 낙동강, 섬진강 같은 큰 하천에 연어들이 나타났지만 지금은 연어의 소상이 거의 중부 동해 이북으로 북상했다고 한다. 1983년 이후 경남의 해안 하천은 연어 소상이 완전히 끊어졌다. 그리고 경북 울진의 왕피천은 강의 하구가 토사에 막혀버렸다. 연어회귀의 남방 한계선은 점점 북상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남한에서 연어를 볼 수 있는 날도 없어질지 모른다.

 

 연어는 10월경에 모천으로 소상하여 알을 낳는다.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에서 연어의 알이 수정되어 난황흡수를 마치는 기간은 10월부터 1월까지 4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난황흡수란 것은 물고기의 치어들이 불룩한 배를 달고 다니다가 온전한 치어로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난황에는 어미로부터 받은 온갖 영양분이 들어있다. 연어의 치어는 난황을 먹고 자란다.

연어 수정란들의 사란율(알이 죽는 비율)은 약 1.4퍼센터 정도인데 묘하게도 어미 연어들의 모천 회귀율과 비슷하다. 연어알 100개중에 1~2개만 죽고, 또 연어 100마리 중에 1~2마리만 고향을 찾아 올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상수는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1820년 조선조 서유구가 어류에 관해 저술한 책 난호어묵지는 연어를 年魚, 혹은 季魚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매년 모천으로 소상하는 연어의 습성을 보고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이런 우리나라의 연어와는 달리 외국의 연어명칭이나 문화는 차원이 다르다.

 

 연어를 영어로 salmon이라 하는데 인터넷 영어사전에서 이 단어를 검색해 보면 연어에 대한 영어 이름이 한 두개가 아님을 알게 된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모천에서 알에서 깨어난 연어의 치어를 영어로 alevin(앨러번)이라 한다. 그리고 모천에서 한해를 넘긴 2년생 연어는 smolt(스몰트)라고 부른다. 연어는 스몰트로 불릴 때 봄에 바다로 나간다. 바다로 나간 연어가 다시 알을 낳으러 고향으로 돌아올 때 쯤이면 연어의 이름은 grilse(그릴스)가 된다. 그릴스가 모천으로 돌아오면 이때부터의 연어는 비로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salmon(샐먼)으로 불린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산란후의 연어는 또 kelt(켈트)라고 한다. 북유럽의 켈트족은 연어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영미문화권에서 연어의 이름은 연어의 생애별로 다양하다. 연어 문화는 영미권에서 훨씬 더풍부하고 다채롭다. 이런 다채로운 연어의 이름이 영미문화권에 존재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영미인들에게 있어 연어는 아득한 과거부터 생활의 일부였으리라..

 

 가을에 모천에서 탄생하여 겨울을 보낸 연어 새끼들은 봄이 되면 바다로 나간다. 그리고 해류를 타고 지구의 북쪽으로 올라간다. 연어들의 목적지는 북태평양이다. 연어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북태평으로 가는 움직임과 이유는 불가해한 비밀이다. 많은 학자들이 연구했고 지금도 연구하고 있지만 연어가 바다로 나가고 다시 모천으로 돌아오는 이유를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다.

고형렬은 이렇게 말한다

 

“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공부하고 행동하고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 답을 알지 못할 뿐이지 그 답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어떤 비밀 속에 갇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연어들이 회유하는 비밀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그 비밀 밖의 문지방에 서 있는 천진무구한 아이들일 뿐이다.”

 

 연어는 냉수어종이다. 그들은 동해의 수온을 따라 회귀를 시작한다. 동해안은 여름이 다가올수록 수온이 상승한다. 한여름엔 수온이 26도까지 올라가는데 이런 수온에서는 연어가 살 수 없다. 차가운 해류는 북쪽으로 이동한다. 연어는 차가운 수온과 해류에 몸을 맡긴다.

 

 “강원도 남대천 앞바다에서 떠나온 그들이 북태평으로 향하고 쿠릴열도를 벗어나 알류산 열도에 진입할 때면 이미 그들중 9할은 죽고 백에 대여섯 마리만 살아남는다. 이 살아남은 일부의 연어들이 대를 잇는 특별한 존재들이다. 그들 중에 살아서 고향에 돌아오는 연어는 100마리에 1.4마리꼴, 그러니까 200마리에 3마리 정도만 살아남아 돌아갈 뿐이다. 성냥개비만한 연어 치어들이 살아남아서 베링해까지 도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이동하는 곳마다 먹이는 풍부하지만 그야말로 천신만고의 여정이 아닐 수 없다.”

 

 연어의 생존률은 기적같은 일이다. 연어의 삶 자체가 기적같은 일이고 그 기적같은 연어에게는 또 한가지 불가해한 일이 있다. 연어가 북태평양의 베링해에서 2년정도를 보내고 나면 자신의 고향인 모천으로 돌아온다. 너무나아득하고 멀고 험한, 그리고 그 연어들의 피조차 얼려버릴 듯한 혹한의 북해에서 무려 3천2백킬로미터를 다시 아래로 여행하여 강원도 양양의 남대천으로 정확히 찾아오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것보다 더 불가해한 일은 모천으로 회귀한 연어는 그 순간부터 절대로 먹이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이다. 마치 자신들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듯이 말이다. 연어는 산란을 위해 모천에 돌아온 날부터 오직 물만 삼켜서 아가미 쪽으로 내보낸다. 암수가 똑같이 굶는다. 마치 먹는 일을 잊어버린 것처럼..

 

연어가 소상하여 먹이를 먹지 않는 시점부터 연어들은 짝짓기를 하고 부부가 되고 산란을 한다. 짝을 찾지 못한 수컷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다. 암컷들은 하천 바닥의 모래와 자갈을 파내고 자신들의 아랫배가 다 찢어져 너덜거리게 될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산란을 한다. 물고기를 잡아서 알을 짜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물고기가 알을 낳을 때 그들의 아랫배 피부는 작고 가는 구멍이 되고 그 피부가 파열되어 알들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수컷들은 암컷이 낳아놓은 알 위에 정액을 뿌린다. 부모가 된 연어들에게 남은 일은 죽음밖에 없다.

 

 연어는 한번 알을 낳으면 다시 알을 갖지 못하고 모천에서 죽는다. 이것을 연어의 일생일란一生一卵이라고 한다. 산란을 마친 연어에게 남은 건 죽음이다. 연어는 아비와 어미가 되면 물 속 세상에서의 인연은 끊어진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연어들에게서 죽음의 두려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연어가 산란하기 전부터 먹이를 전혀 먹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의 후손을 남기는데 있어 부모의 생명에너지를 온전히 후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고형렬은 연어 아비와 어미의 마지막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그도 인간이고 인간이란 부처처럼 탈속의 경지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상 희노애락과 감정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연어에 대한 마지막 묘사는 비록 담담해 보이고 무심한 카메라의 렌즈같이 투명하고 중립적으로 읽혀지지만 그 이면에는 연어 부부의 애틋한 인연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이 배어있다. 그러나 고형렬은 연어의 생과 사를 불교적 세계관으로 다음과 같이 풀어낸다.

 

“ 연어 부부는 죽을 때 동시에 출생한 것처럼 같은 시간에 생명이 끊어진다. 켈트들은 물살에 밀리기 시작한다. 살은 허옇게 되면서 연어의 목에 붙은 생명의 끈은 극명한 한계에 다다른다. 속살의 다홍색도 다 빠지고 푸석푸석해졌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아름답던 은빛 비늘은 뽑혀나가고 한쪽 눈은 빠져서 덜렁거린다. 이 몸들이 대양을 질주해온 연어들이었던가.

남편은 서서히 숨이 끊어진다. 아내도 곁에서 같이 운명하려고 밭은 숨을 고른다. 상대방에 대한 아무런 유언도 당부도 부탁도 남기지 않고 물과 함께 흘러간다. 저만치 각기 다른 물길에 몸을 싣고 물살을 따른다.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잡아줄 수가 없다. 이승에서 맺은 그들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고 있다.

부부는 잠시 동안의 부부였다. 저들이 언제 펄펄 뛰던 연어였던가. 수정을 마치고 그들은 허무하게 사라져간다.

연어들의 팔만사천 감정은 다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희생을 전제로 한다.

 

연어 부부의 육신은 물결에 쓸려 사라져 간다. 그러나 부부가 세상을 떠난 뒤, 그 해 겨울을 나면 다시 아이들은 태어난다. 연어 어미들이 죽어간 그 남대천에 그 아이들이 모래알처럼 숨어 있다. 그 아이들은 또다시 그들의 어미처럼 저마다의 생의 법을 지켜갈 것이다. 생명이란 자신인 알이 자신인 어미를 먹는 일이고 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다른 생의 인연으로 건너갈 수가 없을 것이다.

 

고형렬의 서사는 연어 채포장에서 끝이 난다. 이제 더 이상 연어들이 마음놓고 생과 사를 이어갈 터전과 환경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천의 하구에서 연어를 잡아 알을 수집하여 인공부화시켜 이듬해 봄에 바다로 내보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연어를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연어가 저절로 소상하지 않는 텅 빈 하천들.. 고형렬은 그 아쉬움을 이렇게 말한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격식 있는 생사법이 있어서 그들은 연어다운 일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산행의 장례가 사라진 것처럼 연어들도 인공을 수정되고 몸은 피로 처분될 뿐이다. 먼 훗날 콧속에 붙은 흑운모나 화강암, 편마암으 향기를 찾아 여인의 속살 같은 남대천을 찾아 돌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때 그들의 친척인 그 귀여운 무명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이제 고형렬의 글을 읽고 난 지금, 연어의 존재란 내게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연어들에게 있어“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격식 있는 생사법”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2011년 2월 1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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