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쇼팽 : 피아노 소나타, 연습곡
Decca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아쉬케나지의 연주는 언제나 무난한 연주의 전형이라는 평을 받는다. 과도한 감정 이입이나

조금은 작위적으로 들릴 수 있는 해석을 배제하고 악보에 충실한 연주를 보인다. 지나치게

딱딱하지만은 않은 약간은 서정적인 색채를 띄는 그의 연주는 호불호가 엄격하기 보다는

대부분 사람들이 무던히 좋게 보고 또 듣게 될 연주이다. 그가 쇼팽 콩쿠르에서 하라셰비치에

밀려 2위를 차지한 것은 아마도 이런 무던함의 결과일 듯 싶다.

 데카 레이블에서 나온 이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와 연습곡 모음집 또한 기존의 아쉬케나지가

들려주는 연주와 별로 다르지 않다. 포고렐리치나 아르헤르치 같은 파격은 별로 없으며

소담스럽고 조금은 서정적인 연주가 귓가를 즐겁게 한다. 어려운 기교를 요하는 연습곡에서

조차 무던히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는 이 연주자에게 개성이 강하지 않다거나 너무 범생이

같다는 식의 비판은 클래식을 너무 자주 접한 사람들이 음악에 가지고 있는 매너리즘의 표출이

아닐까 한다. 어려운 곡도 쉽게 들려주는 그 무기교의 기교가 아쉬케나지에게는 있다. 모두가

자신만의 피아노를 가지기 위해 노력할 때에 아쉬케나지 또한 이런 무던함과 소탈한 연주로

자기만의 건반을 가질 수 있었다.

 빌헤름 켐프의 슈베르트 소나타나 베토벤 소나타를 들으면 독일계 피아니스트의 거장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기교에 있어서는 안드라스 쉬프나 폴리니에 비해

모자라지만 그 기교를 뛰어넘는 초탈한 거장의 손누름이 있다는 것이다. 은근히 저평가

받는다고 보이는 아쉬케나지의 연주 또한 이미 불혹의 나이에 이러한 경지를 터득한 것이

아닐까 한다. 시절이 다 속도를 좇고 개성을 욕망할 때 소담스런 타건으로 작곡가들의 곡을

해석하는 아쉬케나지야 말로 '인생의 짧고 예술은 길다' 라는 조금은 진부한 표현하에

불멸의 이름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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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나는 참 고민이 많을 시기이다. 내 또래들은 이번 설날에 세뱃돈을 받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존적 고민을 하였고 어떤 아해들은 자기 조카들에게 세뱃돈을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성찰적 고민을 하였다. 또 어떤 친구는 사회에서 좀 더 높은 값으로

팔려 나가기 위한 담금질을 위해 휴학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고 또 어떤 친구는

자기가 계속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길을 찾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잡다한 고민에서 해결된 이들도 있다. 초딩때 젤 친했던 나의 친구는 전공 공부에

대한 회의를 거듭하다 수능을 다시 보기로 한 후 고등학교 때 이후로 가장 편안한 경지에 이르렀다.

고시를 보네 좀 있다 컴터 관련 직종으로 옮길거네 하던 경찰대 나온 내 고딩 때 짝궁은 이제

달려가는 시간의 속도와 보조를 맞추기에도 버거운지 스스로의 위치에 자족하기로 한다고 그런다.

솔직히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에야 수많은 고민과 끝간데 없는 헤아림과 무량대수와 같이

느껴지는 경우의 수를 살피느라 심신이 다 피곤에 절어 있지만 일단 루비콘 강을 건너고 나면야

오히려 모든 행동들은 명쾌해 지고 정신은 오롯이 자기가 가야할 길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나도 지금 잡다한 고민에 빠져있다. 강박증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잡생각들을 생각지 않으려는

고민과 언제 다시 상경하느냐에 대한 여러가지 변수들에 대한 헤아림이 만든 고민이 있다.

불과 몇달 전에 결정한 언론사 쪽의 길이 나에게 맞는가에 대한 고민과 아버지가 부재한 이후로

맘이 조금은 여려지신 엄마에 대한 고민과 지금 사놓은 이 수많은 클래식 음반들을 언제

다 집중해서 듣느냐에 대한 고민이 있다. 나보다 어리거나 혹은 그 또래의 사람이 깊은 학식이나

뛰어난 통찰력을 보였을 때 잠시나마 그이를 질투하는 이 소인배적 마음을 어떻게 누그리냐는

고민이 있고 몇몇 사람들과의 만남에 특별히 가중치를 두지 않고 어떻게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할까 하는 박애 정신과 같은 좀 같잖은 고민도 있다. 피동피동 살이 오르는 얼굴과 어느새부턴가

또래들보다 나이를 먹어 보인다는 지인들의 말에 반응한 외양에 대한 고민도 있고 하루하루가

알차게 여물어 지지 않는 것에 대한 존재 성찰론적 고민도 있다. 

이러한 고민들도 과연 루비콘 강을 건널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불현듯 술라 펠릭스에 관한

시오노 나나미의 말이 떠오른다. 술라는 좋은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항상 명쾌했기 때문에

인간적 매력이 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따른다는 식의 말.. 

잡다한 고민은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결정을 명쾌하지 못하게 하기에 사람을 우유부단

하게 하고 광장 공포증이 있는 사람마냥 밀실에서 모든 걸 해결하게끔 만든다. 물론 이러한

점이 나의 매력이 될 수 있지만 이제 이것의 유통기한은 조금 지난 것 같다. 유통기한이 지난걸

계속해서 먹으면 처음에야 그 익숙한 맛 덕분에 버리지 않길 잘했단 생각이 들지도 모르나

시일이 조금씩 흐르면 몸에 탈이 생기고 다른 음식조차 입에 담기 힘들어 진다. 이러한 고민의

끝은 아마도 늙은 노새와 작별을 구하고 새롭고 힘센 당나귀 등에 올라타는 일일 것이다.

인생이 종마 경주라면 아마도 지금이 타이어를 갈 때가 아닐까 한다.

----- 결론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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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희끗 보이던 시간도 날짜도 없던 밤에

누구도 모를 분칠을 당신 앞에 해두고

옆집의 바둑이도 조금은 잠잠할 적에

반짓고리 옥가락지 쳐다보며 잠시 시름에 잠깁니다.

 

왜그런지 몰라 미운 그대가 달빛처럼 좁은 방 가득 채울적에

지그시 깨문 입술 사이로 파르르 눈물이 흐릅니다.

 

겉저고리 사이에 드러난 가슴팍에 서린 온기가

어쩌면 임의 손길이 달빛을 빌어

내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진 것을 아닐지 하는 망녕된 생각에

홀로 얼굴 붉어지고 가슴이 널뛰듯 하지만 

임을 원망함에

다시금 나를 질책하고 당신을 미워합니다.

 

기나긴 상념을 닭 우는 소리가 깨돋울 때에야

지난한 하룻밤이 햇님에게 자리를 내줄 때가 됐음을 압니다.

 

비단을 팔러 온 상인의 늙은 노새만이 이 시름을 아는지

저벅저벅 걸음으로 햇님 깔리는 땅바닥을

되새김질 하는냥 못내 못살게 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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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소스라치게 차갑다. 잘해주지 못했던 인연들에게 미안하단 사죄의 연락을 남기고픈

날이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내게 부지부식간에 상처를 주거나 내몸에 무자비한 생채기를

남긴 이들에게 잘못하였단 말을 듣고 싶다. 별로 너그럽지도 그다지 참을성이 많지도 않은 내게

그 깊이를 시험해 보는 냥 무던히 많은 짱돌을 던졌던 이들에게 논리적인 설교가 아닌

감성적인 삿대질을 하고 싶다. 그대들이 무던히도 짓밟고 가볍게 여겼던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바다처럼 멍들어 있다는 것을 하늘도 보란듯 큰소리로 보여주고 싶다. 누가 아프라고

그랬냐는 비겁한 변명은 귀싸대기를 날리고픈 충동마져 일어나게 할 것이 명약관화.

어찌하든 미안하였다며 다시는 그대 마음 아프게 하지 않으리란 나직한 음성의 보살핌이야말로

울음섞인 참회보다 더 절절한 감정이입의 증거. 가끔은 나도 아프기 싫다고 가끔은 나도

애달픈 이가 목터지게 불러보고 싶다고 가끔은 나도 누군가에게 아무렇지 않게

하고픈 말 하고 싶다고.. 그러면 나의 이 아무것도 아닌 허상 뿐인 궁전은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

스스로에게 괜찮다.. 하는 약물의 효능이 이제 다 했다며 죽어 지낸 시절들을 보상받고 싶다며

팅팅 부어 오른 내 심장의 우심방과 좌심실에도 휴가를 주고 싶다며 번잡한 내 귓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하고 싶다며 부족한건 내가 아니라 그대들이라 말하고 싶다면..

그러면 나의 이 유리막 같은 신경세포는 수습불가능한 상태로 부서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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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안드레이 즈바아긴체프 감독, 블라디미르 가린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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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비가 없는 자식들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왔다. 돌아온

 아버지는 강압적이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본다. 첫째 아이는 그런 아버지의 방식을 동경하고 기꺼이

 따르지만 둘째 아이는 그런 아버지의 방식이 못마땅 하다.

 아버지에 대한 존재 부정은 물론이고 끝없는 반항으로 그닥 

 잔잔하진 않지만 나름 평화로운 수면에 돌팔매질을 가한다.

 이러한 돌팔매질은 오이디푸스적 부친 살해가 완성되었을 때야 

 비로소 스스로를 향한다. 그제야 첫째는 아버지가 되고 둘째는

 첫째가 된다. 아버지의 방식으로 시신을 옮기는 첫째의 모습과

 수장당하는 아버지의 시신에 대고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는 둘째의 모습이 이러한 설명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 영화는 성서를 기초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7일 동안의 

 이야기가 영화의 전체 줄거리 인데 이 짧은 기간동안 그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상처받고 또 성장한다.

 둘째의 이름이 성서에 나오는 이반이라는 것도 구약을 읽은 이들에겐 

 영화를 읽을 구름판을 제공한다. 

 이 영화의 해석에 대한 분분한 의견 속에 내가 본것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추구했던 러시아 영화의 아름다움이

 이 작품을 통해 한층 더 진일보하여 나타난 것이다. 

 영화로 시를 쓴다던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들이 수많은 알레고리와 알 수 없는 상징으로 인해 

 관객을 다소 어지럽게 하였다면 이 감독은 서사속에 상징을 넣어

 관객의 이해를 비교적 명료하게 한다. 표의문자와 비슷한 작품으로

 관객에게 영화를 읽게 하였던 몇십년 전의 거장의 작품이

 소통 불가능한 지점을 향한 치열한 구도 정신을 보였다면

 표음문자를 이용한 이 감독의 대중 친화력은 평론가와 식자들의

 전유물인 러시아 영화에게 소통의 장을 제공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별점은 최상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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