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졸업하려면 워드 1급을 따야 된다. 학교가 실시하는 삼품제 때문이다. 삼품은 인성품, 국제품, 정보품으로 이뤄졌다. 그 중 정보품이 내겐 버겁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기에 그렇다. 그나마 워드 1급을 따면 정보품 인증을 해준다기에 2주 전 필기 시험을 봤다. 다들 기출문제만 시험 전 날 보고 들어가면 합격한다 그랬다. 공부 하나도 안하고 땄다는 형도 있었다. 근데 떨어졌다. 그리고선 우울해졌다.
이번 금요일에 다시 시험을 봐야 한다. 졸업을 해야 하기에 그렇다. 아니면 유예생이 된다. 학생인 것도 학생이 아닌 것도 아닌 주변인이 돼 버린다. 원서는 하반기에 넣을 작정이니 직장인이 되기에도 아직 이르다. 2주 전 우울이 가슴에 멍울지려 한다.
주위에 바지런 떨며 살았던 아해들은 다들 제 밥벌이를 하는 듯하다. 나처럼 밥벌이에 무심하고 고급문화에 취해 있는 한량들은 절반 정도 밥벌이를 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얕은 고민도 들기 시작한다. 김훈 선생 또한 밥벌이는 지겹다며 기자질 하기 싫었던 젊은 시절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지 않았나. 어쩌면 밥벌이를 해야 하는 생활을 유예 시키기 위해서 나름 현실도피에 전념하던 1년이 아니었나 한다.
덕분에 박학다식해지고 심미안은 깊어졌다. 글은 더 간소해지고 말은 다소 누그러졌다. 어미는 아들을 근심하고 아들은 어미를 달랜다. 밥은 여전히 달고 닳고 닳은 인연들은 무람없이 포근하다. 다만 관자놀이가 아파 올 때가 있으니 사람 구실을 어서 해야 한다는 조급증이 들 때다. 이런 안빈낙도도 하루 이틀이지 올해를 넘기면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주위의 형들 마냥 심신이 핍진해 질 것이 분명할 터. 마음을 다잡고 살아야겠다는 반성없는 울림만 가슴에 여울진다.
나보다 3살 어린 기집애는 나이 들고 보면 지금의 번민도 다 아름다울 거라는 선문답 같은 소릴 했더랬다. 소설가 황석영이 자서전 같은 소설 '개밥바라기 별'에서 '대위'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지 않았나.
'사람은 오늘은 산다고'
친구들이 종종 몽상가로 치부하는 나는 과거에 몸을 두고 내일을 살았다. 삿된 말이 귓가를 간지럽히니 아직 수련이 덜 된 모양이다. 이 글도 내일 읽으면 부끄러운 허황된 수사일 터. 하지만 나 또한 오늘을 살아야겠기에 내일의 나를 개의치 않는 오늘의 내가 돼야 할 듯하다. 말이 말로써 근심을 이어나가니 술을 권해 줄 친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