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바람은 거셌다. 말은 낯설었고 날씨는 짓궂었다. 발은 붓고 발바닥은 헤졌다. 그렇게 제주도 올레길을 걸었다. 사람은 좋았다. 다들 길을 가르쳐 준다며 말을 걸었다. 밥집에선 뭐가 맛있는지 친절히 설명해 주더랬다. 5일을 짧고 하루는 길었다. 지친 몸은 경치 감상을 사치로 만들고 무거운 가방은 제 몸하나 건사하기 힘들게 했다. 그래도 좋았다.
거센 바람은 땀을 식혀줬다. 낯선 말은 마음을 다습게 했다. 짓궂은 날씨는 풍경에 새로운 옷을 입혔다. 어느새 도시의 삶이 익숙해진 몸은 쉬이 노곤해졌지만 마음만은 활기찼다. 바다 냄새는 연인의 아찔한 향내보다 더 진한 울림을 줬고 바다 소리는 여인의 간지런 속삭임 보다 더 황홀했다. 셋이 간 여행이었지만 난 항상 혼자이고 싶었고 또 홀로 걷는 길이 많았다. 서울에서 넘쳤던 말이 제주에선 궁핍했고 그래서 마음은 넉넉했다.
얼굴과 팔은 검게 변하고 눈두덩의 다크써클은 진해졌다. 기분은 삶아 빤듯 하얘지고 둔탁했던 머리는 너른 제주의 거리마냥 훨씬 한가해졌다. 괜시리 마음만 번잡했던 서울살이에 쉼표 하나 찍으려 떠났던 제주. 마음을 비워내고 그만큼 마음을 채웠으니 이제 다시 봄날이다. 조금은 튼실해진 다리가 사진이 아닌 몸으로 추억을 증명한다. 아로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