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의 유골 캐드펠 시리즈 1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 / 북하우스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단편집을 1권으로 셈했을 때, 우리 나라에 가장 많은 작품이 번역된 미스터리 작가는 당연히 애거서 크리스티다. 크리스티의 모든 작품을 손쉽게 구해볼 수 있다는 그 점 만으로도 우리나라 미스터리 독자들은 큰 행운을 누리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2등은 누구일까? 몇몇 작가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어쭙잖은 지식으로 꼼꼼이 따져보아야 승부가 가려질 것 같다. (참 별걸 다 따져본다.)

전 작품이 번역된 코난 도일은 기껏해야 9권으로 탈락, 역시 전 작품이 12권 밖에 되지 않는(그나마 모두 나오지도 않았다) 반 다인도 탈락이다. 작품수가 적은 챈들러도 마찬가지. 많은 작품을 썼지만 10권 내외만 번역된 상태인 존 딕슨 카도 탈락이다. 같은 맥락에서 E.S. 가드너와 렉스 스타우트 역시 탈락.

모리스 르블랑은 뤼팽 전집 20 권으로 일단 상위권에 이름을 올릴만 하다. '미스터리의 왕'으로 불리우는 엘러리 퀸이 시그마 북스로 나왔던 20권 + DMB의 <꼬리 아홉 고양이>로 21권, 르블랑을 제친다. '미스터 베스트셀러' 로렌스 샌더스도 드문 드문 나왔던 맥널리 시리즈, 대죄 시리즈, 계명 시리즈, 기타 단행본 등을  모두 합해봐야 15권이 채 되지 않아 보인다. 일본 작가들 중에 가장 많은 작품이 번역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쓰모토 세이초 역시 10권을 크게 넘을 것 같지는 않다.

숨어 있는 다크호스는 이미 눈치채고 계시듯 앨리스 피터스. 캐드펠 수사 시리즈가 모두 번역되어 있는 덕택에 20권을 먹고 들어가는 피터스 여사는 이에 더해 애드거 상을 수상한 현대물 <죽음과 즐거운 여자>가 나와 있어 총 21권이다. 피터스 여사의 작품은 아니지만 추모 소설집 <독살에의 초대>를 플러스 알파로 더하면 엘러리 퀸을 능가하기에 이른다. 전혀 예상 밖의 결과 아닌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지명도임에도 피터스 여사를 단박에 2위에 앉게 한 캐드펠 수사 시리즈. 전 권을 번역한 출판사의 뚝심도 칭찬 받을 일이지만, 시리즈 자체가 가진 매력이 이런 일을 가능케 하였으리라. 그러나, <죽음과 즐거운 여자>를 몇년 전 재미있게 읽었던 경험은 있지만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쉽게 손이 가지 않았었다. 막상 시리즈 전부가 출판 되었다면 냉큼 손이 가지 않는, '차려 놓은 밥상 마다하기' 심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차에 최근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과 제프리 디버의 <코핀 댄서>를 연달아 읽고 <불야성>의 '처절함'과 <코핀 댄서>의 '현란함'에 좀 지쳐있었다. 마음의 안식을 얻고자 손에 들은 책이 바로 캐드펠 시리즈의 첫번째 이야기인 <성녀의 유골>.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 집어든 책도 역시나 사람 죽어나가는 추리 소설이라니 나도 참 어지간한 모양이다 -_-;;)

이유야 어쨌든, 나는 마음의 안식을 찾았다. 피비린내 나는 가부키쵸를 지나 무시무시한 암살자의 손길을 거쳐 도착한 중세의 고즈넉한 수도원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종교에 귀의할 생각은 없다. 하하.

<성녀의 유골>은 12세기 잉글랜드와 웨일즈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그 시절 민중들의 소소한 생활과 그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기독교 신앙, 수도사들의 일상과 그들의 숨은 권력욕, 캐드펠 수사의 관조적이면서도 관찰자적인 모습 등이 시리즈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미스터리적인 요소로만 보자면, 흔하디 흔한 소재와 트릭들이지만 같은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지는 순전히 작가의 역량이다. 작가의 솜씨는 한시대를 풍미한 거장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앨리스 피터스의 시선은 사건과 트릭, 명쾌한 해결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마음, 그리고 인간의 삶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캐드펠 시리즈의 미덕이 있다.


** 중세의 수도사가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캐드펠 시리즈는 <장미의 이름>과 종종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둘은 전혀 다른 성격의 소설이다. 둘 중 어느 한 작품의 기준에 맞추어 다른 작품을 비교하는 것은 올바른 관점이 아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유명세가 달리는 캐드펠 시리즈의 첫 작품인 <성녀의 유골>은 1977년 작품으로 <장미의 이름>보다 3년 먼저 씌여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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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4-27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추리소설보다 그런 마음의 안정을 주는 점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상복의랑데뷰 2006-04-27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죄 4권, 계명 3권, 맥널리 4권. 그리고 단행본이 10여권 조금 부족하게 가까이 나왔을 겁니다. 루시의 고백, 케이퍼, 도둑맞은 축복, 해리의 사랑...휴우 세기도 어렵네요. ㅠㅠ

로드무비 2006-04-27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의 계보를 완전히 꿰고 계시군요.
전체를 통찰하는 리뷰, 좋은데요.^^

oldhand 2006-04-27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만두 님 / 아, 미스터리 팬들은 마음의 안정도 역시 미스터리에서.. 하드하냐, 말랑말랑하냐에 따라 가는거군요. ^^
상복의 랑데뷰 님 / Mr.베스트셀러의 단행본이 생각보다 많구나. 앤더슨의 테이프도있다. 혹시 20권 넘는거아냐? 그럼 거짓말 한게 되는데.. -_-a
로드무비 님 / 완전히 꿰긴요. 그건 물만두 님이 하시는 일이죠. ^^ 통찰이라니, 졸문에 과찬이십니다.

하이드 2006-04-27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의 리뷰를 볼때마다 알라딘하는 보람을 느낍니다.

oldhand 2006-04-28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망한 칭찬을 해주시는 군요. 그건 그렇고 이제 술은 깨셨나요? ㅎㅎ

하이드 2006-04-2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대략 그렇네요 ^^; 근데, 왜 당췌 몸은 한바탕 운동한사람처럼 이리 쑤시는걸까요, 모든걸 '삼십대' 나이탓을 해봅니다.

oldhand 2006-04-28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역시 문제죠. 더 곤란한 것은 그 문제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진다는 점이죠. 저는 이제 또 다른 '고지'가 멀지 않았습니다. OTL

2006-05-27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