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하나.

평소엔 소심하기 "서울역에 그지없는" 나는 가끔 엉뚱하게 냉큼 질러대는 일이 있다. 그 결과물의 하나가 바로 나의 첫 차. 96년 봄, 가족들에게 일언 반구의 언질도 없이 지인의 지인을 통해 구입했던 91년 형 중고 자동차. 아버지는 내가 차를 샀다는 사실을 1년이 지나서야 아셨다. 물론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게다.

신차였을 무렵 "최진실"이라는 당대 최고의 광고 모델까지 동원되었던 잘나가던 모델인 "파란색 스쿠프"의 오너가 된 oldhand. 휘발유 값이 리터당 600원대 이던 행복한 시절이기도 했다. 혹자는 자신의 생애 첫번째 자가용이라면 한밤중에라도 벌떡 일어나 고이 잘 있는지 나가서 확인을 하기도 하고 그런다지만, 게으르기로 치자면 또 한가닥 하는 나는 "차는 타고 다닐라고 있는거지 모시는게 아니야"라는 생활 철학을 실천했으며 나의 "애마(?)"는 그렇게 슬슬 전형적인 고물차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에어컨을 튼 채 정차해 있으면 시동 꺼지기, 가끔 조수석 창문 잘 안올라가서 손으로 잡아당기며 올리기 등의 특기를 자랑하며, 용달차에 버금가는 승차감을 뽐내는 차였지만 나는 그 차에 "청룡"이라는 스펙타클한 애칭을 붙여주었다. 주위에서는 비록 "청노루"나 "청토끼"라고 비하했을지라도 말이다.

99년 여름, 친한 이들로 구성된 조직 하나에서 청평으로 놀러를 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차량편에 "청룡"도 동원이 되었다. (애인도 없고 음주도 잦았던 그 즈음에는 거의 한 달에 두 세번 사용할까 말까하는 상태였다.)
MT가 끝나고 항상 하게 되는 일. 먹다 남은 반찬거리, 인스턴트 음식들 자취생에게 몰아주기. 나는 이것저것을 얻어 챙겼으며 그중에는 샀다가 개봉도 하지 않은 콩간장 한 통도 있었다............


청평 나들이 후 일주일이 지났다.
차를 쓸 일이 있어서 한 여름 일주일 동안 땡볕아래 서 있었던 청룡을 찾았다.
차 문을 연 순간 안에서 벌어진 참극에 나는 잠시 망연자실하였다.

대시보드 위에 올려 놓고 깜빡 잊었던 콩간장.(옛날 자동차들은 대시 보드 위가 평평했다.)
그렇다. 남들은 휴대폰을 깜빡 잊었다가 배터리가 차안에서 폭발한다지만,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나의 청룡 안에서는 간장이 폭발한 것이다. -_-;;;

운전석 앞 유리창의 윗 부분부터 조수석의 등받이 전체에까지 남아 있는 간장의 흔적과 형체를 알수 없게 터져버린 간장통은 폭발 당시의 장관을 짐작하게 했다. -_-;;;;;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것이 확실시 되는 "여름철 자동차 내 간장통 폭발 사건". 서너달이 지나도록 영문을 모르고 내 차에 타는 사람들로부터 "차에서 메주 뜨는 냄새"가 난다는 논평을 심심치 않게 들어야 했다.

2001년 초 친구에게 넘어간(물론 거저 주었다. -_-;) 청룡은 그 후 6개월만에 완전히 퍼져버려서 폐차의 길을 걸었다.
'그래도 내 품에 있었을 때는 엔진 소리 하나만은 묵직했던 쓸만한 놈이었는데.. 적토마 마냥 너도 주인을 가리는 구나'라는 나의 사뭇 관운장스러운 웅혼한 한탄이 주위 친구들에게 먹혔을리는 물론 없다.

폐차장의 고철로 스러져갔을 청룡아. 다음 세상에는 꼭 에쿠스로 태어나길 바란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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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0-26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야군줄^^;;;

oldhand 2005-10-26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저는 타이거즈 팬이랍니다. ^^;;;

파란여우 2005-10-26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그럼, 청개구리?^^

야클 2005-10-26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장 냄새나는 에쿠스를 만나면 전생에 청룡이 아니었는지 물어봐야겠습니다. ^^

oldhand 2005-10-27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개구리가 되었을지 에쿠스가 되었을지... 어디선가 게을렀던 옛 주인을 추억하고 있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