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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88
데스몬드 배글리 지음, 추영현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평점 :
미스터리 소설은 여러 하위 장르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미스터리 독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하위 장르는 무엇일까? 아마도 '본격 미스터리'이리라. 그 다음이 '하드보일드' 쯤 되지 않을까. 한 작품에 여러가지 세부 장르의 특성이 혼성되어 나타나는 현대 미스터리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세세한 구분이 큰 의미가 없을 수 있겠지만, 재미삼아 더 이야기 해 보자. 그렇다면 가장 인기없는 미스터리의 하위 장르는 무엇일까? 적어도 국내의 독자들에 한해서는 '스파이 모험 소설'이 아닐까.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나 <독수리는 내리다>처럼 미스터리 독자들 사이에서 두말할 것 없는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도 있으며 존 르카레나 에릭 앰블러 같은 해당 분야의 거장들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동안 내가 만나거나 의견을 들어온 많은(많은가?) 미스터리 독자들 중에 '스파이 소설'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설의 분야라고 말하는 이는 여태 없었던 것 같다.
70~80년대의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공 교육을 받아온 우리 세대에게나 탈 냉전과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경험하며 자라온 더 젊은 세대들에게나 서방과 공산권의 치열한 첩보전과 암투를 그린 스파이 모험 소설(더군다나 결국은 서방의 입장에서 쓰여진)은 식상할 수 밖에 없는 장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그다지 호의적이지 만은 않은 시각으로 접하기 쉬운 스파이 물일지라도 일단 잡으면 손을 뗄 수 없는 흥미진진함과 뛰어난 오락성을 제공한다면 장르 소설을 읽고자 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훌륭하게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냉전 시기 철지난 동서방의 첩보전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데스몬드 배글리의 <질주>는 이러한 점에서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되는 소설이다. 1970년, 냉전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씌여진 <질주>는 유서 깊은 영국식 모험소설의 전통을 잇는 뛰어난 오락물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같은 우울함도 없고, <죽음의 문서>같은 느끼함도 없다. 이 소설은 '아이슬란드'라는 우리로서는 좀처럼 경험해 보거나 자세한 정보를 접하지 못한, 북유럽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바가 없는 북대서양의 외딴 섬나라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한반도의 절반 정도의 크기, 남한 보다 약간 큰 섬나라인 아이슬란드의 인구는 불과 30만 명. 한 여름의 평균 기온도 10도에 지나지 않지만,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혹한의 추위는 아닌 나라. 국토의 일부가 빙하로 이루어져 있으며 섬 전체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화산의 섬이기도 한 백야의 나라. 아이슬란드의 풍광과 그 험난한 자연을 배경으로 아주 사실적이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추격전과 수수께끼와도 같은 복잡한 첩보전이 동시에 벌어진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사실감 넘치는 묘사에 있다. 첩보원들에게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서바이벌'의 기본기와 실제, 권총 등 여타 무기류에 대한 묘사등이 아주 세세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 들어 있었다. (백과 사전 식으로 늘어 놓아져 있는 작가의 지식 자랑을 읽는 것 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이런 점에서 데스몬드 배글리의 능력은 뛰어난 듯 하다.) 시니컬한 듯 하면서도 현실감 넘치는 주인공 스튜어트의 대사와 독백은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의 그것처럼 맛깔나며,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시각도 아주 담백해서 이런 류의 소설이 자칫 빠지기 쉬운 '느끼함'도 잘 피해 나가고 있다.
'장르 소설 최고의 목적은 재미다'라는 명제에 동의하신다면 <질주>는 후회없는 선택이 되리라 믿는다.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질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