넛지 -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
리처드 H. 탈러 & 카스 R. 선스타인 지음, 안진환 옮김, 최정규 감수 / 리더스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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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 살짝 찌르기라니, 재미있지 않은가? 

동료교사에게 조금 서운한 일이 생겼었다. 왜 그런 일 있지 않나, 딱히 말로 할 것까지는 없는데 섭섭한... 그런데 그도 그걸 느꼈나보다. 딱히 미안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왠지 미안했나? 겨울방학 전에 그는 내게 이 책을 선물했다.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책이었지만 그냥 베스트셀러 중 하나라 생각했던 책, 생각보다 재미있다. 넛지가 슬쩍 옆구리 찌르는 일이라고 했지만 나쁘게 말하면 조작질이고 좋게 말하면 지혜로운 멍석깔기 쯤 될 터이다. 사실 학교에서도 아이들과 이런 '보이지 않는 멍석'을 얼마나 잘 까느냐가 중요하다. 급식실에서 음식물을 보이지 않게 배열하는 일, 광고 중 삽입 되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이미지가 미치는 영향, 세금 납부의 체계를 짤 때 사람들이 헛수고를 줄일 수 있는 방법 등 그 모든 작지만 효과적인 장치들을 다 넛지라 한다면 이것은 단순한 경제학 책이 아니라 생활의 지혜에 관한 책일 수도 있다. 물론, 뒤로 갈 수록 미국의 메디케어 시스템이나 모기지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리 집중해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긴 했다.  

시스템이 중요하다. 일의 효율성 뿐 아니라 공평성에서도, 인간적인 감정을 거스르지 않는 일에서도 그러하다. 뭐 정치가 별 거 있는가. 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일이 잘 돌아가게 하는 게 정치니까. 물론 그 바탕에는 진정성이 깔려 있어야 하지만 진정성은 있으되 효율성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잘 짜여진 시스템이 중요한 것이다. 거기에 넛지... 넛지는 지혜의 또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내게 이 책을 선물한 그와 나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앙금, 이 책이 오고 가면서 녹아버린 데에는 슬쩍, 아닌 듯 하지만 의도한 바를 이루는 능청스러움이 있다. 지혜라 부르련다. 넛지의 또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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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 천재가 된 홍대리
이지성.정회일 지음 / 다산라이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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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한 권의 책을 읽는다, 그게 가능할까, 또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건 이 책과 이지성의 다른 책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책을 '즐기면서' 읽는 사람이고 아이들에게 꾸준히 독서교육을 하고 있으며 독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이건 아니다. 왜 책을 읽는가, 독서가 어떻게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가, 즉, 영혼을 고양시키는가, 라는 질문을 가슴 깊이 한다면, 이 책에 대해서는 왜 이런 식으로 책을 읽어야 하지? 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저자의 다른 책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주장대로라면 가벼운 책을 많이 읽으라는 말은 아니니까 본 뜻은 그게 아닐 것이다. 또한 이런 책들 때문에 책을 열심히 읽고 싶어지는 사람이 많을 터이니 그런 면에서 분명 이 책의 선한 의도는 관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별점을 많이 줄 수는 없다. 왜 이렇게 '많이''미친듯이 읽으라는 것인지 아직도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 이런 책들을 하루 한 권씩 읽으라면 일년 365권도 읽겠다. 하지만 삶은? 사랑은? 살림은? 그것들을 접고 독서에만 매달릴 만큼 독서는 의미있는 일인가? 에 나는 아니, 라고 말하고 싶다. 그럴 시간 있으면 해금을 배우고 농구를 하고 봉사활동을 하고 연애를 하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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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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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1 담임이다. 해마다 쓰는 두레일기를 지금도 쓴다. 올해 아이들은 유난히 더 어린애들같다.  애기 취급하면 더 이쁜 짓을 한다. 사실 저들이 어리지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지만, 어차피 다는 알 수 없는 저 속을 다 아는 척 하느니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들을 대한다. "너희는 '기품있는 열네 살'이야. 건방지지 않지만 도도하고 기품 있는 표정을 지어 봐." 이렇게 요구하면 그들은 정말 탐구적인 눈빛으로 총명한 소년의 표정을 짓는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아직 뭘 모르는데 실수한 거지, 너? '이러면 순진한 눈빛으로 참회를 한다. 아플 땐,' 우리 애기 어디가 아픈데?'이렇게 대하면 마냥 순한 아기양 같은 얼굴로 더 아픈 척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레일기를 쓰면서 아이들은 학구적인 모습 뒤에 세속적인 모습을, 이타적인 행동 뒤에 친구들에 대한 짜증을, 개구쟁이 모습 뒤에 사색하는 소년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다음은 우리 반 정우킴의 일기다.  

척, 척은 안 좋은 것일까? 예쁜 척, 잘난 척, 멋진 척,,,, 난 척을 해 봤다. 쿨한 척, 그저그런 척, 무덤덤한 척... 뭔가 하긴 해야 하는데, 뭐라 해줘야 하는데, 그게 자꾸 빗나가 버리니 뭐라 할 수가 없다.... 힘들고 지치고 아프고 슬플 때 길을 가던 친구 역시 나보단 덜해도 그 아이도 힘들어 보일 때, 차마 내가 걔에겐 기댈 수 없어 그 아이에게 기댈 수 있는 내 어깨를 내줄 때, 안 힘든 척, 안 아픈 척,... 척을 해야 한다. 내가 쓰러지면 안 되니까... 그렇게 친구가 다 회복되어 갔을 때, 내 걸음은 점점 느려지다 멈추고 만다... 그저 그렇게 그냥 끝을 맞이한다. 무엇이든 어려운 일을 해내고 나면 거기에 따른 보상과 성취감, 만족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길던 인생을 끝냈을 땐 아무 것도 없다. 보상이고 포상이고 기쁨이고 성취감이고 없다,. 천국? 천당? 관세음보살? 그저 허례허식일 뿐, 그들이 죽어보지 않은 이상 그게 있는지 모른다, 죽었을 땐, 때는 이미 늦은 후... 요즘 찬현이는 아이들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왜 살까.. 그럼 내가 하나 묻는다. 살면서 어떤 느낌을 받는가 ?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이다. 답, 정답, 정확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싶으면 죽어보라, 죽고 나면 왜 사는지 알게 될 것다, 모르겠다고? 그대들이 떠들어대는 하나님 부처님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이렇게 답했다. 

죽을 것이 뻔한데 왜 사나? 그리고 왜 열심히 사나?  그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는 건 아닌데.. 이유도 없고. 생명은 태어난 것 자체가 이유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의무라고밖에는. 오직 인간만이 왜 사나를 고민한다네. 어찌 보면 지구 자연 중 가장 사색적인 동물이고 어찌 보면 가장 오만한 동물이고 어찌 보면 가장 생명력이 떨어지는 동물이지. 나는 사춘기 때의 그 질문에 대답을 찾기도 전에 갑자기 너무나 바빠지는 바람에 살다가 살다가 여기까지 왔다네. 정우는?  

 소설은, 죽음으로 걸어가는 소년의 이야기다. 우리는 건강할 때에도 늘 죽음을 예감하고 준비하며 산다.  겪어보지 않았다고 해서 죽음의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과 코를  맞대고 사는 사람의 심정을 우리는 모르는 것도 사실이다.이것은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정상적인 속도로 늙어가도 우리는  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고통스럽기 일쑤다. 몸이 늙는 만큼 마음도 따라 늙으면 차라리 괜찮다. 몸은 이주일이지만 마음이 조인성인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 아름이는 열일곱의 마음으로 여든의 몸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소설은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죽어가는 소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소년이 태어나게 된 이야기가 생동한다. 열일곱에 일찌감치 아기 엄마 아빠가 되어버린 맑고 천진한 영혼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부모들이 '생산'을 한 그 나이 즈음에 죽음으로 향해 가는 한 소년은, 몸은 죽음을 향하나 영혼은 이제 막 생성하는 그런 아이다. 인간에게 육신은 질곡이다. 내가 싫어하는 명언 중 하나인 '건강한 육신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가 다시 떠올랐다. 영혼은 대개의 시간 거울을 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좀 못난 몸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한다. 영혼은 자기 안을 들여다 보면서 오롯이 잘 자라고 갈고 닦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그걸 읽을 능력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몸이 아름다운 인격을, 아름다운 얼굴이 아름다운 영혼을 만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건강한 몸이 영혼조차 활력있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마도 소설가나 시인들은 잘 알지 않을까. 아름이는 그런 아이였다. 나이든 영혼의 지혜와 너그러움에 십대의 생명력을 함께 지니고 조금은 귀엽고 천진한 자기 부모를 들여다 보고 그것을 글로  쓰고 싶어했던. 

아름이는 소년인데 지나치게 감성적이어서 작가의 유체이탈(상대 性에의 빙의)가 잘 안 이루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서하와 주고 받는 이메일이 아름인지 서하인지 헷갈릴 정도로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은 것(결론적으로 아름이나 서하나 다 김애란이었다는 것)이 조금 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론 남자 아이들의 감성이 얼음처럼 날카롭고 맑기도 하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김애란이 재미있는 작가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그를 '읽고 싶은 작가'에서'좋아하는 작가' 반열로 올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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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서재 - 최재천 교수와 함께 떠나는 꿈과 지식의 탐험 우리 시대 아이콘의 서재 1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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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필자 중 하나인 최재천 교수, 여러모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존재라고 인정하지만 특히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과학자'의 귀감으로서 내가 아이들에게 아인슈타인이나 쳇 레이모 같은 사람과 더불어 많이 소개하는 분이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전공과 상관없이 문학성이 뛰어난 에세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데 비해 우리는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학문적으로는 꽤 의미가 있지만 대중적으로 읽기 어려운 현학적인 문장 혹은 문장의 기본조차 되어 있지 않은 비문으로 전달력이 떨어지는 책들을 만나게 되는 게 늘 안타까웠다.  이것은 물론 기본적인 문장 공부가 덜 된 탓만은 아닐 것이다. 문장도 그렇지만 인문학적 관점이 부족한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어쨌거나 전반적으로 우리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 최재천이나 정재승 같은 이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 청소년들을 위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그렇게 기대감에 부풀어, 또 하나, 제자들에게 맘껏 권할 만한 책이 나왔으려니 하고 책을 펼쳤다. 서평들은 또 왜 그리 좋은지 더더욱 기대를 하며 주말, 재미있게 읽기 시작했다.  

최교수는 나보다 위의 연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의 기억 중 공감될 만한 부분이 많아서 나로서는 더욱 재미있었다. 그에게 백과사전이 있었다면 나에게는 금성에서 나온 학년별 교과별 백과사전이 있었고 동서문학전집과 더불어 딱따구리 문고가 있었다. 아직 개발이 덜 된 동네 뒷산을 뛰어놀던 기억도, 비록 어른이 다 되어 발령 받아 간 곳이긴 하지만 강원도의 추억도 공감이 된다. 그래서 이 책, 꼭 우리 집 아이들, 학교 아이들에게 권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중간중간 매사에 눈을 빛내며 모든 일에 열심이던 그가 인생의 접점에서 만났던 책 이야기도 정말 유용하다. 아이들 읽기 좋게 쓴 문장도 참 마음에 든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다 아름답다'에서 놀라워하며 읽었던 '문학적 문장'들은 거의 없지만 이야기 자체만으로 재미있다.  

하지만 읽기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는 우리집 아이들에게 읽히지 않기로 했다. 학교에서 청소년인문학토론반 아이들에게 적극 권하려 했던 계획도 접었다. 그저 우리 반에서 곤충에 관심이 많아 과학탐구대회에 자주 나가 입상을 하는 도영이에게는 이 책을 빌려주기로 했을 뿐이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상류층일텐데 그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군인의 아들로 자란 최교수는 청렴하고 엄격한 가정교육의 성공 케이스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려움을 스스로 이겨낸 과정이 아무리 본받을 만하다 하여도 일반적이지는 않다. 타고난 재능이 일단 뛰어난 이 사람의 이야기를 읽을 때, 공부좀 한다 하는 아이들은 꽤 고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경복중고, 서울대, 하버드대를 거쳐 서울대, 이대 교수로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적절한 재능과 가정교육이 뒷받침되는 아이들에게는 '꿈'일 것이다. 그런 종류의 꿈이 80점짜리 아이를 90점으로 이끌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 이 책은 이 책 대로의 사명이 있고 그것을 잘 해낼 것 같다.  

하지만, 재능이 있는 아이들에게는 그것을 나누어야 함을, 재능을 뒷받침해 줄 좋은 집안을 가진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그나 그의 부모 개인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키워준 것임을 알게 하고 그것을 어떻게 함께 나누어야 할지를 숙고하게 하는, 그런 기대치에는, 이 책은 많이 못 미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심지어는, 이렇게 뛰어나게 살지 못한 일반 어버이로서의 열등감마저 느꼈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피해의식이려나. 물론 최재천 교수는 그 모든 하늘의 선물을 마치 제가 잘나서 그렇게 살게 된 줄 알면서 혼자만 누리는 사람들과는 다르고, 진심으로 자기가 가진 좋은 것들을 어린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사람이다. 자연을 보는 눈이 따뜻한 것처럼 사람을 보는 눈도 따뜻한 사람이다. 그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잘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잘난 체를 하고자 해서라기보다 그야말로 남에 대해서든 자신에 대해서든 긍정적이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미덕이 이 책에서 잘 살아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자신의 입지전적 이야기를 듣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 아빠가 말야, 이렇게 저렇게 화려하게 공부했어~ 이런 이야기를 듣는 느낌.

이 책을 읽고 난 후 아이들이, 그래, 이렇게 매사에 즐기면서, 매사를 긍정적으로 무엇을 읽어도 빛나는 충격을 받을 줄 아는 그런 자세을 배워야겠어, 라는 느낌으로 책을 덮는다면 최고의 효과를 얻는 것이리라. 그래, 세상의 수많은 어린 최재천들의 긍정 에너지는 그렇게 이 책에서 자신들이 정말 얻어야 하는 좋은 것들을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겠지. 서점마다 베스트셀러 칸에 시퍼렇게 꽂혀있는 이 책이 또하나의 서울대 신화, 하버드 신화, 공부 지상주의 신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독서와 통섭과 자연과의 교감, 인문학적 학문의 자세에 대한 돌풍을 일으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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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의 옥중수고 1 - 정치편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이상훈 옮김 / 거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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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라, 이 멋진 말로, 그들이 채 읽지도 않은 그람시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인용되었다. 뭐, 글을 읽지 않고 주변적인 이야기만으로 누군가를 아는 일, 흔하고, 그게 꼭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다. 대학시절 들은 그의 이름은 내 머리에서 잊혀졌지만 어느 날 우연히 저 말이 떠올랐다. ‘이성으로 비관하고(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왜 이 말이 떠올랐냐 하면, 지금, 답답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이 고스란히 학교 현장에 영향을 주고 결국 이대로 학교와 교육은 점점 피폐할 것이며 일개인으로서 교사들의 삶도 더욱 팍팍해질 것이라는, 스멀스멀 파고드는 비관론이 학교 교사들의 목을 죄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현상들은 고스란히 학교에서도 펼쳐진다. 이모, 오모와 같은 성장 중심주의, 경쟁지상주의 지도자들이 득세하자 똑같은 주장을 펼치는 학교 관리자들이 거기 편승해 득의양양하고 있다.

젊은 교사들의 절망이 깊어지고 있다. 때로 나는, 내가 이 척박한 교육현장을 20년이나 지나온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나의 시대도 험난했지만 적어도 교장들이 비리를 저지를지언정 교묘히 자신의 죄과를 덮어두진 못했던 시대를 살았고 적어도 교무실 교장실에서, 정치권에서 핏대를 올리거나 탄압을 받았을지언정 아이들과는 정말 행복했고 학부모들과는 다정했던 그런 시대를 살았다. 앞으로 점점 학교가 황폐해진다 해도 내게 남은 시간은 10년쯤, 내가 정년을 다 채운다 할지라도 16년. 남은 시간이 더 짧다는 데에 안도감이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저 젊은이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제 정말, 제대로 선생이 되어가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이 사랑하고, 잘 가르칠 수 있는 기술도 적절히 습득했고 상담도, 업무도 가장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된 30대의 멋진 교사들이 절망하는 모습은 어찌할 것인가.

그들이 비관론을 펼칠 때마다, 그리고 정말로 괜찮은 교사들이 학교를 못 견뎌서 떠나곤 할 때마다 나는 이 구절을 떠올렸다. 나는,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라는 말로 그들을 위로하였다. 나이든 나는 희망을, 젊은 그들은 절망을 이야기하는 현상은 무엇인가. 하긴, 돌이켜 보면 우리 20대 때 이성으로 조목조목 따져본 어떤 장면도 희망적이지 않았음에도 도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오기어린 희망의 의지를 펼쳤던 그 80년대도 그러하지 않았나. 이성은, 비관할 수밖에 없었으되 의지는 낙관으로 불탔다. 그러지 않으면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 몸에 불을 지르던 젊은이들마저, 절망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희망을 던지기 위해 그러했다.

다시, 아니, 이제 그람시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그래서 들었다. 그의 책 속에, 낙관할 수 있는 어떤 근거들이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근거 없는 낙관론자가 아님을 보여줄 근거들.

마키아벨리에 대한 그람시의 해석이 일단 눈에 띈다. 한참 전에 군주론을 읽으면서, 재미있기도 했지만 도무지 이 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람시처럼 진보적인 사람에게 보수적일 뿐 아니라 뻔뻔스러울 정도로 지도자(지배자)의 논리에 충실한 충고를 하고 있는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보일지. 하지만 의외로 그는 마키아벨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민중 또는 민족 곧 다대의 혁명적 계급들에게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도자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 그 지도자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설득하고자 했다.

마키아벨리즘은 보수적 지배집단들의 전통적인 정치기술을 개선하는 데에도 일조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마키아벨리즘의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성격이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석한다. 군주시대에, 군주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한 시대에, 군주의 정체와 탐욕에 대해, 쉽게 말하면 다 까발려 이야기함으로써(뻔뻔해 보이긴 하겠으나) 오히려 그들의 정체를 드러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마키아벨리가 그걸 까발리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글을 썼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어떤 사적인 목적으로 썼든, 또한 그의 글이 뻔뻔한 군주들과 히틀러같은 독재자에게 어떻게 힘이 되었든지 간에 본질적으로 시대의 현상을 세세히 묘사함으로 반어법적으로 혁명적인 글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일 게다.

그람시가 마키아벨리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런 점인 듯하다.

‘마키아벨리는 인간과 인간의 행동 동기에 대해서는 ‘비관적’(또는 현실적)이다,. 기차르디니는 비관적이 아니라 회의적이고 속좁다. 지성의 비관주의는 적극적 현실적인 정치가에게서 의지의 낙관주의와 결합될 수 있다.’

회의가 아닌 냉철한 비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지성적 대안, 거기서 나오는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게다. 

재미있는 말이 있다. 카도르니즘. 권위주의적 지도자였던 카도르나의 이름에서 비롯한다. 자신이 지도하는 자들의 동의를 얻기 위한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는 권위주의적 지도자를 뜻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권위주의와 통치의 스킬을 충고하고 있다면 그 기술 안에는 이런 무지막지한 독재에 대한 경고도 들어있다. 말하자면 통치를 하되, 무식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어떤 독재자도, 궁극적으로 전권을 휘두르더라도 그 이전에는 피지배자의 말을 듣는 시늉을 한다. 그것과 잔혹한 통치를 랜덤으로 휘둘러 피지배자를 혼란스럽게 할지라도 말이다. 시종일관 귀를 막고 바보같은 지배를 실시하는 이들의 말로는 짧고 굵다. 나는 한동안 ‘카도르니즘’을 나의 사내 메신저 닉네임으로 썼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말은 우리에게 참 낯선 단어이거나 아주아주 그 반대로 우리 삶에 깊이 드리운 그림자이거나, 였을 듯하다.)

2장 국가와 시민사회에서도 눈에 띄는 구절이 있다.
‘하나의 계급을 대변하는 많은 서로 다른 정당들의 부대가 전체 계급의 요구를 더 잘 반영하고 더 잘 요약하는 단일한 정당의 한 깃발 아래로 결집한다면 - 유기적이고 정상적인 현상이다. ’

대선을 앞두고, 어떻게든 정권을 바꿔보겠노라고 야권단일화를 이야기한다. 이전에도 수많은 정당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 있었다. 그걸 욕하면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의론으로가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 정당을 바라본다면 그람시의 해석이 훨씬 현실적이고 정당하다. 제대로, 단일한 정당의 깃발 아래 결집하기를. 아니 정당의 이름으로 떳떳하게까지 아니더라도 단일한 세력화에 꼭 성공하기를.
 

‘투쟁이 법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때 그 투쟁은 분명 위험하지 않다. 그것이 위험해지는 것은 바로 법적인 균형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정되는 때이다.(물론 측정기를 폐기하면 나쁜 날씨도 폐기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수많은 법적인 논쟁에 놓은 사안들을 떠올리게 한다. 전교조, 전공노의 민노당 후원금 사건, 한진중공업 사태 등. 이것은 불법(파업, 농성,)이므로 국가가 개입하겠다고 하는 무한한 사건들... 법은 있으되 제대로 집행되지 않거나 불합리한 법이거나 할 때 개개인이 선택할 방법은 투쟁밖에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물론 측정기를 폐기하면 나쁜 날씨도 폐기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도 재미있다. 간혹 정치인들은 착각한다. 측정기를 폐기함으로써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렸다는 어리석은 착각을. 착각하지 말라. 착각은 곧, 끝난다.

‘강력한 열정은 지성을 날카롭게 하는 데 필요하며 직관을 더욱 예리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말도 멋지지 않은가. 열정과 지성의 관계, 그 균형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과제이다. 어느 한쪽이 과하거나 넘칠 때의 부작용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위의 말은 어슷비슷해 보이는 또 다른 정열을 열정이라고 착각하란 뜻이 아니다. ‘저급하고 조급한 욕구와 정열은, 그것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분석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 또 그러한 행위가 행동을 촉진하기 위한 의식적인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기만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오류의 원천이다. ‘선동가가 자기자신의 선동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된다.’ 조급한 욕구와 정열은 집착이 되기도 한다. 물론 당사자는 자신이 정의의 사도이면서 열정도 지닌 멋진 인간으로 이 한 몸 역사에 희생시킨다고 착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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