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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의 옥중수고 1 - 정치편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이상훈 옮김 / 거름 / 1999년 10월
평점 :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라, 이 멋진 말로, 그들이 채 읽지도 않은 그람시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인용되었다. 뭐, 글을 읽지 않고 주변적인 이야기만으로 누군가를 아는 일, 흔하고, 그게 꼭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다. 대학시절 들은 그의 이름은 내 머리에서 잊혀졌지만 어느 날 우연히 저 말이 떠올랐다. ‘이성으로 비관하고(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왜 이 말이 떠올랐냐 하면, 지금, 답답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이 고스란히 학교 현장에 영향을 주고 결국 이대로 학교와 교육은 점점 피폐할 것이며 일개인으로서 교사들의 삶도 더욱 팍팍해질 것이라는, 스멀스멀 파고드는 비관론이 학교 교사들의 목을 죄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현상들은 고스란히 학교에서도 펼쳐진다. 이모, 오모와 같은 성장 중심주의, 경쟁지상주의 지도자들이 득세하자 똑같은 주장을 펼치는 학교 관리자들이 거기 편승해 득의양양하고 있다.
젊은 교사들의 절망이 깊어지고 있다. 때로 나는, 내가 이 척박한 교육현장을 20년이나 지나온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나의 시대도 험난했지만 적어도 교장들이 비리를 저지를지언정 교묘히 자신의 죄과를 덮어두진 못했던 시대를 살았고 적어도 교무실 교장실에서, 정치권에서 핏대를 올리거나 탄압을 받았을지언정 아이들과는 정말 행복했고 학부모들과는 다정했던 그런 시대를 살았다. 앞으로 점점 학교가 황폐해진다 해도 내게 남은 시간은 10년쯤, 내가 정년을 다 채운다 할지라도 16년. 남은 시간이 더 짧다는 데에 안도감이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저 젊은이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제 정말, 제대로 선생이 되어가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이 사랑하고, 잘 가르칠 수 있는 기술도 적절히 습득했고 상담도, 업무도 가장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된 30대의 멋진 교사들이 절망하는 모습은 어찌할 것인가.
그들이 비관론을 펼칠 때마다, 그리고 정말로 괜찮은 교사들이 학교를 못 견뎌서 떠나곤 할 때마다 나는 이 구절을 떠올렸다. 나는,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라는 말로 그들을 위로하였다. 나이든 나는 희망을, 젊은 그들은 절망을 이야기하는 현상은 무엇인가. 하긴, 돌이켜 보면 우리 20대 때 이성으로 조목조목 따져본 어떤 장면도 희망적이지 않았음에도 도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오기어린 희망의 의지를 펼쳤던 그 80년대도 그러하지 않았나. 이성은, 비관할 수밖에 없었으되 의지는 낙관으로 불탔다. 그러지 않으면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 몸에 불을 지르던 젊은이들마저, 절망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희망을 던지기 위해 그러했다.
다시, 아니, 이제 그람시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그래서 들었다. 그의 책 속에, 낙관할 수 있는 어떤 근거들이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근거 없는 낙관론자가 아님을 보여줄 근거들.
마키아벨리에 대한 그람시의 해석이 일단 눈에 띈다. 한참 전에 군주론을 읽으면서, 재미있기도 했지만 도무지 이 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람시처럼 진보적인 사람에게 보수적일 뿐 아니라 뻔뻔스러울 정도로 지도자(지배자)의 논리에 충실한 충고를 하고 있는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보일지. 하지만 의외로 그는 마키아벨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민중 또는 민족 곧 다대의 혁명적 계급들에게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도자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 그 지도자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설득하고자 했다.
마키아벨리즘은 보수적 지배집단들의 전통적인 정치기술을 개선하는 데에도 일조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마키아벨리즘의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성격이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석한다. 군주시대에, 군주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한 시대에, 군주의 정체와 탐욕에 대해, 쉽게 말하면 다 까발려 이야기함으로써(뻔뻔해 보이긴 하겠으나) 오히려 그들의 정체를 드러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마키아벨리가 그걸 까발리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글을 썼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어떤 사적인 목적으로 썼든, 또한 그의 글이 뻔뻔한 군주들과 히틀러같은 독재자에게 어떻게 힘이 되었든지 간에 본질적으로 시대의 현상을 세세히 묘사함으로 반어법적으로 혁명적인 글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일 게다.
그람시가 마키아벨리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런 점인 듯하다.
‘마키아벨리는 인간과 인간의 행동 동기에 대해서는 ‘비관적’(또는 현실적)이다,. 기차르디니는 비관적이 아니라 회의적이고 속좁다. 지성의 비관주의는 적극적 현실적인 정치가에게서 의지의 낙관주의와 결합될 수 있다.’
회의가 아닌 냉철한 비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지성적 대안, 거기서 나오는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게다.
재미있는 말이 있다. 카도르니즘. 권위주의적 지도자였던 카도르나의 이름에서 비롯한다. 자신이 지도하는 자들의 동의를 얻기 위한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는 권위주의적 지도자를 뜻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권위주의와 통치의 스킬을 충고하고 있다면 그 기술 안에는 이런 무지막지한 독재에 대한 경고도 들어있다. 말하자면 통치를 하되, 무식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어떤 독재자도, 궁극적으로 전권을 휘두르더라도 그 이전에는 피지배자의 말을 듣는 시늉을 한다. 그것과 잔혹한 통치를 랜덤으로 휘둘러 피지배자를 혼란스럽게 할지라도 말이다. 시종일관 귀를 막고 바보같은 지배를 실시하는 이들의 말로는 짧고 굵다. 나는 한동안 ‘카도르니즘’을 나의 사내 메신저 닉네임으로 썼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말은 우리에게 참 낯선 단어이거나 아주아주 그 반대로 우리 삶에 깊이 드리운 그림자이거나, 였을 듯하다.)
2장 국가와 시민사회에서도 눈에 띄는 구절이 있다.
‘하나의 계급을 대변하는 많은 서로 다른 정당들의 부대가 전체 계급의 요구를 더 잘 반영하고 더 잘 요약하는 단일한 정당의 한 깃발 아래로 결집한다면 - 유기적이고 정상적인 현상이다. ’
대선을 앞두고, 어떻게든 정권을 바꿔보겠노라고 야권단일화를 이야기한다. 이전에도 수많은 정당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 있었다. 그걸 욕하면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의론으로가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 정당을 바라본다면 그람시의 해석이 훨씬 현실적이고 정당하다. 제대로, 단일한 정당의 깃발 아래 결집하기를. 아니 정당의 이름으로 떳떳하게까지 아니더라도 단일한 세력화에 꼭 성공하기를.
‘투쟁이 법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때 그 투쟁은 분명 위험하지 않다. 그것이 위험해지는 것은 바로 법적인 균형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정되는 때이다.(물론 측정기를 폐기하면 나쁜 날씨도 폐기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수많은 법적인 논쟁에 놓은 사안들을 떠올리게 한다. 전교조, 전공노의 민노당 후원금 사건, 한진중공업 사태 등. 이것은 불법(파업, 농성,)이므로 국가가 개입하겠다고 하는 무한한 사건들... 법은 있으되 제대로 집행되지 않거나 불합리한 법이거나 할 때 개개인이 선택할 방법은 투쟁밖에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물론 측정기를 폐기하면 나쁜 날씨도 폐기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도 재미있다. 간혹 정치인들은 착각한다. 측정기를 폐기함으로써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렸다는 어리석은 착각을. 착각하지 말라. 착각은 곧, 끝난다.
‘강력한 열정은 지성을 날카롭게 하는 데 필요하며 직관을 더욱 예리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말도 멋지지 않은가. 열정과 지성의 관계, 그 균형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과제이다. 어느 한쪽이 과하거나 넘칠 때의 부작용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위의 말은 어슷비슷해 보이는 또 다른 정열을 열정이라고 착각하란 뜻이 아니다. ‘저급하고 조급한 욕구와 정열은, 그것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분석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 또 그러한 행위가 행동을 촉진하기 위한 의식적인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기만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오류의 원천이다. ‘선동가가 자기자신의 선동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된다.’ 조급한 욕구와 정열은 집착이 되기도 한다. 물론 당사자는 자신이 정의의 사도이면서 열정도 지닌 멋진 인간으로 이 한 몸 역사에 희생시킨다고 착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