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하버드에 오다 - 1세기 랍비의 지혜가 21세기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하비 콕스 지음, 오강남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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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교사 독서토론회에서 이 책을 보기로 했다. 내가 이전 김규항의 '예수전'을 읽고 그 연장선에서 이 책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을  읽고 있노라 했더니 다른 회원들이 이 책을 다음 토론 대상으로 삼자고 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의 반응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치지만 교회나 성당을 열심히 다니는 이들이 잘 안 읽힌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번역이 잘못된 것도 아닌 것 같다. 원전을 읽지 않아서 하비 콕스 자신의 문장이 이런지 번역자가 번역을 잘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문장은 길지도 않고 현학적이지도 않고 자연스럽다. 번역서가 이 정도로 읽히는 일이 흔치 않아서 나는 역자가 누군지 다시 찾아보았을 정도다. 

일단, 하버드는 두뇌 중 두뇌, 미국뿐 아니라 세계 지성의 집합소나 다른 없는데 거기서 예수를 어떻게 가르쳤을까가 참 궁금했다. 천만 가지 예수, 즉 예수에 대한 해석이 세상에 있겠지만 최고의 대학에서는 어떻게 접근할까 궁금했다. 서문에서, 하버드 졸업 필수 요건에 '윤리적 사유'라는 제목의 과목을 이수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지성을 앞서는 혹은 지성의  받침이 되는 '윤리적 사유', 학업 성취 때문에 인성교육도 민주시민 의식도 저버리거나 형식화하는 오늘날의 한국 교육기관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를 돌아봐야 할 대목이다.  

처음엔, 교과목으로서 예수를 가르친다면 굉장히 이성적이고 쿨하게 접근을 하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는 가슴 깊이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에수를 깊이 사랑하면서 냉철하게 그를 언급하는 이를 만나기가 쉽지 않기에 그러한 시각, 서술방식도 참신했다. 또한 하비 콕스는 앞부분에서 매우 길게, 랍비 예수의 설교가 갖는 설화성, 즉 이야기로서의 예수 설화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런 접근은 참 재미있고 신선했다.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때론 지나친 직역 혹은 지나친 의역들 중에서 성경 속의 이야기들을 설화적 상상력으로 만나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얼핏 두루뭉술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오역의 논란에 휩싸이게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화적 상상력', '현대인에게 부족한 이야기성'이 설득력 있는 것은 그만큼 성경과 예수의 행적, 그의 말씀에 대한 지나친 해석들이 권력을 획득하고 혹세무민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최후의 유혹'을 함께 읽고 있다. 제자 선호가 연습장 한 가득 베껴준 성경도 함께 읽고 있다. 이 모두를 다 읽고 나면 복음서부터 다시 읽으려 한다. 나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어떤 종교도 갖고 있지 않지만 예수를 만나고 싶은 열망이 있다. 그것이 체 게바라를 만나고 싶은 마음과 특별히 다른 게 아닐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재된, 영적 안정 혹은 영적 의구의 일환인지도 모르겠지만 자꾸 찾아 읽고 만나다 보면 무엇이 나로 하여금 자꾸 예수를 궁금하게 여기게 했는지 알게 할지도 모르겠다.  

예수를 신앙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냉철하게 이 책을 읽고 싶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예수의 본질은 교회가 아닌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이었음을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책의 말미에 여러가지 모습이 있지만 나에게 예수는 '친구'라고 말하는 저자의 말처럼, 내가 가장 힘겨울 때 예수가 내 곁에 친구로 서 계시다는 상상은 한없이 깊은 감동을 준다. 

나는 얼마 전 학업성취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오늘날의 학교 분위기에 따라 학교 상담실을 진학홍보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교장은 상담부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진학상담부'란 이름으로 거듭나게 된 그 부서에서 상담은 주로 학업상담 중심이 되었다. 일탈학생, 부적응아에 대한 상담에서 학생 전체에 대한 상담으로, 라는 구호를 외치면 상담실을 진학(주로 방과후 수업을 전담하는 부서다.)부에 넘겨 준다.  교사들을 위한 상담연수를 기획하고 전교생이 테마별로 전일제 진로체험활동을 하게 하고  아이들이 따뜻하게 찾는 상담실을 만들려고 따뜻한 벽지를 새로 바르고 장욱진의 그림 액자를 만들어 걸면서 4년 동안 공들인 상담실을 새봄에 떠나야 한다. 

슬픈 겨울을 지나면서 친구인 예수를 언급하는 부분을 읽었다. 가슴은 한없이 시리고, 이럴 때 그 분이 곁에 있다면, 아니 어쩌면 믿음이 없는 내 곁에도 그는 와계실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일종의 강의록이었던 이 책을 여러가지 시각으로 읽었던 내게 결론은 가장 힘겨울 때, 가장 밑바닥일 때 만나는 예수로 끝난다. 저자는 전도를 의도한 게 아니었는데, 그는 감성적인 글을 쓴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눈물은, 닦고, 이 말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강의록으로서의 이 책, 가르치는 자로서의 하비 콕스 교수는 역시 가르치는 사람인 내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그는 예수를 강설하지 않았고 학생들이 생각하고 만나게 했다. 많은 토의와 과제들이 있었고 결론을 함부로 내리지 않았다. 또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학생들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들을 놀라워하면서 바라본다. 20여년을 예수를 가르치면서, 새로 만나는 강의와 새 학생들에 대해 늘 감탄하는 그 자세, 그는 진정한 교사다. 한 강의를 마칠 때마다 산후 우울증 같은 것을 겪는다는 그, 새 학기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엄청난 양의 책들을 다시 살펴 보는 그, 결국 그 강의를 완전히 접고 나서 자기가 20년 동안 강의했던 강의실이며 흔적들을 되밟으며 가슴 아파하는 그는 진정한 교사다. 정말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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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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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중에, 자신이 어쩌다가 대한민국 여성이 닮고 싶은 여성으로 꼽히게 되었는지 의아하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비야 씨 말대로 돈을 많이 버나 권력이 있나... 도대체 무엇이 대한민국 여자들 특히 젊은 처자들의 가슴에 그이는 희망의 불씨를 지폈나. (어찌 보면 대기업 여회장이나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그 젊은 처자들의 별이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이 어두운 세상의 희망적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비야를 생각하면서 문득 전혜린이 생각났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를 전혜린. 나 고등학교 시절 여고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전혜린. 독일 슈바빙 거리를 레인코트 자락 날리면 걸었을 젊은 지성이었던 전혜린. 그 때 전혜린이 당시 젊은 처자들의 삶에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면 한비야는 21세기에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둘의 공통점은, 첫째, 여자들이 쉽게 하기 어려운 '외국 경험'에 있다. 둘째, 자유로움이다.  가족과 결혼, 남자로부터의 자유로움. 셋째, 맘껏 공부하기이다. 넷째, 책으로 자신을 알리고 다른 사람들(특히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것, 그리고 앞의 것들과 연관되지만 외국어 구사 능력이다. 결국 능력있고 자유로운 여자, 이것이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 여자들의 희망사항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혜린과 한비야는 다른 점이 더 많은 사람들이다.  

전혜린이 있는 집 자식으로 남들이 꿈도 못 꿀 독일 유학을 했던 데 비해 한비야의 해외 체험은 거의 자력갱생 수준이라는 점, 전혜린의 공부가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법학이었던 데 비해 한비야는 주로 어학을 중심으로(물론 그 사람이 자기 전공을 살려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학위를 위한 공부보다는 삶 자체에 필요한 공부를 했다는 것이 다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혜린이 자신의 삶에 매몰되어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한 반면, 한비야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경험과 능력과 지적 자산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주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한비야를 사랑하고 그를 닮으려 애쓰는 오늘 날의 젊은이들은 30여년 전의 젊은이들보다 훨씬 건강하다. 세상이 거꾸로 간다고 하지만 분명 사람들은 발전하고 진보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도 들어 참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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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2-03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혜린과 비교하니 공감이 팍팍 옵니다.
저도 당근 전혜린에 열광하던 여고생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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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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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그다지 즐겨 읽지 않지만 너무 오래 안 읽으면 마치 특정한 음식이 결핍되었을 때 느끼는 허기 같은 것을 느낀다. 딱 그럴 즈음이었는데 젊은 친구 하나가 이 책을 권한다. 사실 김중혁의 이름은 한겨레 신문에서 먼저 보았다. 그렇다고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다. 솔직히 젊은 소설가들에 대한 약간의 불신감이 있었다. 재기발랄함과 엽기적인 발상을 창의력인 양 여기는 소설들이 너무 많아서 불편하다. 아무리 소설이 재미있어야 한다지만 그 안에 담아야 할 인간적인 어떤 가치들을 뭉개는 듯한 무분별한 상상력들의 난무, 혹은 인간주의에 대한 냉소 등은 싫다. 젊은 소설가들이 다 그럴 리야 없지만 계기가 없으면 좋은 소설가들을 만날 기회가 없으니까  그렇다는 뜻이다. 그러던 중 이 책을 빌려주겠노라는 동료(후배? - 교사는 뭐 - 선후배, 상사, 이런 개념이 없으니까)의 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보았다. 

역시나 메시지나 의미 같은 것이 가슴을 묵지근하게 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고 음악은 내가 깊이 들여다보는 영역이 아니었기에 예의 소설들을 읽었을 때 그 즈음을 내내 가슴에 그 이야기로 사는 그런 증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 참 신선하고 괜찮네,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소설이라면 이런 작가라면 책을 빌리지 않고 사서 보아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다음엔 김중혁씨, 당신 소설을 구입하겠소. ^^)  

엽기적인 이야기들이 아니라서 좋았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 내가 모르는 영역(디제잉같은)임에도 불구하고 뭐 특별한 사건 전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라서 신기했다. 매뉴얼 제너레이션은 특히 내가 아주 싫어하는 매뉴얼북(난 매뉴얼을 읽지 않고 기계를 만지작거려 체화시키는 것을 진정 좋아하는 사람인데)을 소재로 이토록 신선한 발상을 하다니?! 아니, 베르베르의 단편 중에 우주를 장난감 가지고 놀듯 하던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MP3 플레이어를 지구에(오르골로부터) 연결하는 발상이 좋았다. 거기에 별 특별한 사연이 얽히지 않았음에 뒤로 갈수록 어?어?어? 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여기에 등장하는 두 여자 - 고신희 씨, 사장-와 화자가 진부한 남녀관계로 얽히지 않는 것도 좋았다. 

엇박자D의 공연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나는 주로 수업이나 연수를 기획해 보았을 뿐이지만 규모가 크든 작든, 보고 들을 사람을 대상으로 그 사람들을 좌악 이끌어 함께 시간을 이끌어간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잘 기획된 공연, 강연, 수업, 프로젝트가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잘 알 것이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이대로만 된다면 보게 될 관객들의 놀라는 반응, 찬사, 함께 한 마음이 되었을 때의 벅찬 공동체 의식 들을 상상하며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준비를 거듭거듭 하면서 그런 감동적 상상이 점점 실체를 가져간다는 느낌이 온다. 현장에서 관객들의 그 눈동자, 숨죽인 집약을 경험하는 순간의 희열은 어떠한가.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공연 장면을 상상했다. 음악도 없이 음치들의 생음으로 조합된 노래 한 곡이 주는 날것의 겸허한 감동을 현장에 있는 듯 실감했다. 딱 한 번 가보았던 EBS 스페이스 공연장을 연상하면서 나는 마치 콘서트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거기에, 학창시절의 아픈 추억을 간직한 엇박자D의 회한이나 뭐 이런 종류의 무거운 주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아름다운 느낌을 받았다.  

이 작가의 변화와 성장과정을 죽 지켜볼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그의 소설도 달라질 것이고 그것은 분명 좋은 방향이길 바란다. 지금의 착한 발랄함에 철학과 무게가 더해진 멋진 방향일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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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심리학 - 가르치는 사람들을 위한 행복한 치유
토니 험프리스 지음, 안기순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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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미국에서 나온 임상적인 교육학 책들이 꽤 많이 읽히고 있는 것 같다. 그 책들은 은근히 나를 불편하게 한다. 첫째, 우리의 학교 분위기와는 너무 다른 미국의 학교현장에 대한  이질감 때문이다. 인간적인 정서가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 교육과정, 상담하는 태도 등 둘째, 아이들을 대화와 이해로 만나야 한다는 데에는 조금도 이견이 없을 뿐더러 한국의 교사 일반이 범하는 오류(아이들에게 권위적으로 접근하려하는)에 일침을 가하는 괜찮은 방향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역시 우리 현실과는 너무 달라서 어떻게 접근하고 적용하란 말인가, 하고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한다. 미국식이든 유럽식이든 우리는 넓은 세상의 다양한 교육방식을 공부해야 우리의 교육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교사로서 우리에게는 그런 공부가 필요하다. . 

이 책은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다. 월간 '우리교육'에서 교사의 분노를 다룬 기사에서 참고도서로 소개를 했기에 읽기 시작했는데 뭐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게 당장 분노조절법을 다룬 것은 아니다.. 

전반적인 기조는, 교사가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하고, 그것이 생기면 바로 풀 수 있어야 하고, 학교에서 높은 자부심을 유지해야 좋은 교육이 행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물론 나는 교사의 입장에서 매우매우 공감한다. 한편, 이것은 미국적 상황에서 나온 글이기에 한국의 교사들이 받는 스트레스와는 좀 양상이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교사를 어려워하는 상황의 한국 학교에서 미국 교사들이 받을 법한 스트레스는 별로 받지 않는다. 업무과중으로 인한 스트레스, 아이들을 잘 지도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동료교사나 관리자, 교육정책에 대한 스트레스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까? 양상은 어떻든 교직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기 소개된 이완법이나 여러가지 체크 리스트들은 쏠쏠하게 쓸만하다. 책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동료교사들과 체크를 해 본다면, 또는 소모임 들에서 이야기를 나누어 본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심지어는 뒤쪽에 교장의 스트레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그래, 생각해 보면 교장도 교사들을 만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고, 자부심없이 스트레스 만빵인 교장이 좋은 교육을 할 수는 없으므로 교장들의 스트레스도 해소해야 한다. 그런데 그 부분을 읽으면서 그래, 이건 미국 이야기지? 우린 왜 교장의 스트레스를 걱정하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 교장이 되는가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별 관련은 없는 이야기인데, 우리 나라에서도 교장 선생님들이 미국처럼 말썽 피는 학생들 상담을 맡고, 그 녀석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좀 받았으면 좋겠다. 교육청 눈치 보느라 스트레스, 학교성적 안 나올까 성취도 평가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거 말고. 아니, 교사들과의 관계에서도 스트레스 받았으면 좋겠다. 교사들을 잘 이끌고 그 마음에 서운하고 맺힌 거 없이 어떻게 함께 나아갈까 고민하는.. 그런 스트레스 말이다. 교사들이 모두 훌륭해진다고 해서 과연 이 땅의 교육이 좋아질지, 교장들이 모두 괜찮은 사람들로 자리를 채운다고 해서 이 땅의 교육이 정상을 되찾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되면 쪼끔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반성과 더불어 걱정 한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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