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유혹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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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이야기로서의 소설의 기능을 무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은 '문학'이라 하기에 민망한 소설들이 넘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소설을 만나면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그래 본래 소설이란 이런 것이었어야 했다, 그런 느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 맛보았던 희열을 기억한다. 최후의 유혹에서 다시 카잔차키스의 문체를  느낀다.  논란이 되었던 소설이었다 한다. 그래, 앞 부분에서 예수를 묘사하는 부분이 충격적이었는데 역시나 그랬구나... 뮤지컬 수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가 무대에 올랐을 때 서구 사회가 빠졌던 충격과 같은 맥락의 그것이다. 예수의 신성 대신 인간적 면모와 고뇌를 부각시킨 점. 

돌이켜 보면 사춘기 시절 나의 종교적 방황의 뿌리에도 그것이 있었다. 나는 지금도 예수를 사랑하지만 그가 겪었던 인간적인 고뇌에 더 마음이 쓰이고 감정이입이 된다. 나는 시인은 아니지만 이것은 시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아마도 정호승이 그런 감정이입으로 '새벽'이란 시를 썼을 것 같다.) 또한 나는 그런 유약한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딛고 사회적으로 약자의 편에 섰던 예수를 진정 존경하고 마음으로 흠모한다. 다만, 내가 그를 신의 아들로, 신앙의 대상으로 숭앙한다는 신념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는 가지 못한다. 

소설로 돌아가자. 목수인 예수는 십자가 형틀을 만드는 사람이고 하느님의 부름에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환자로 묘사된다. 그가 겪는 자기 운명에 대한 두려움은 과도하게 크다. 운명을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다 결국 하느님을 찾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소설적 상상의 산물이지만 꼭 소설대로가 아니었다 해도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서른 세 해를 산 이상 분명 인간이 느껴야 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는  가졌을 것이다. 무섭게 그것들을 겪었고 싸웠는데, 결국 이겨내고 승리한 것이 아니라고 고통 속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위대했던 것이다.  

소설가는 예수의 고통을 따라갔다. 쓰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싶다. 예수가 사막에 갔을 때 죽은 염소(양?)의 시체를 발견한다. 사람들이 자기 죄를 다 짊어지워주고 사막으로 내쫓아 버렸던 짐승은, 사실은 자기 자신은 아무 죄도 짓지 않았음에도 비참하게 죽어 있었다. 그렇게 무고한 짐승을 보내놓고 사람들은 자기 죄는 사함을 받았다고 기뻐하면 개운해 했을 것 아닌가. 죽은 짐승의 시체를 보면서 예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래, 어찌 보면 예수는 인류에게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자신은 순결하면서도 인류의 죄를 대신 다 짊어지고 혼자 산화해 버려야 했던.. 

예수여, 당신은 그렇게 가고, 그리하여 우리 인간들은 깨끗해졌나이까, 그래서 지금 세상은 좀 나아졌나이까, 이렇게 묻고 싶은 마음은 반항심일 수도 있다. 왜 그렇게 아프셨냐고 묻는 것은 그러나 사실은 사랑이다. 인간 예수에 대한... 기독교인들이여, 인간인 예수를 아프게 사랑하는 이 마음에 대해 무슨 질책도 비판도 평가도 하지 말아달라. 종교적 해석을 하고 싶지 않다. 카잔차키스의 소설에 대해서도 내 마음에 대해서도 심지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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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 번째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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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이 잘못 돌아가면 바로잡아야 하지만 바로잡기의 첫째 단계는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이게 바탕이 되어야 대안이 나온다. 물론 그 대안을 실천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실천력이 다 갖춰져야 문제는 해결이 되겠지. 우리 사회는 다 준비가 되었다가도 실천에서 가로막히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잘못의 원인을 규명하고 문제를 분석하는 단계부터 제대로 되지 않았었다.  

우리에게 머리 좋은 인재나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이념의 트라우마는 뛰어난 지성인들이나 학자들조차도 편견이나 두려움 없이 사회의 문제를 파헤치는 일을 못하게 했다. 간혹 그것을 해낼 수 있었던 사람들(리영희 선생같은 분들)이 있었지만 매우 극소수였거나 극악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얼마 안 되는 그들도  함께 논의하고 논쟁할 동지들이 거의 없다 보니 논리를 발전시키기 위한  자기검증 과정이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심한 경우에는스스로 권력화되면서 자기모순에 빠져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순혈주의가 비뚤어진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로 변질되어 사회의 집단적 광증으로까지 나타나는 대한민국에서,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비판할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지성들이라 할지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넓게 통일과 민주를 이야기할지언정 민족주의 자체에 대해 논의하거나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유기체 자체의 도덕성(외부에 대한)을 건드릴만한 쟁점은 피해가기 일쑤였다. 그것을 박노자는 당당하게 건드린다. 독도나 베트남 문제, 중동 파병, 우리 내부에 들어와 있는 다문화가정이나 이주노동자 문제를 떳떳하게 말하지 않고 민주와 통일을 말하는 것 혹은 '대한민국의 영광된 미래'를 말하는 것은 마치 개인의도덕성을 담보하지 못하면서 운동과 도덕성을 논하곤 했던 과거 운동권진영의 자기모순과 닮은 듯 보인다.

박노자를 읽으면서, 한국인의 혼을 지닌 이 사람, 핏줄은 결국 우리 민족이 아니잖은가, 참 아깝다, 라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도 역시 순혈주의의 아집에 빠진 사람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제3의 한국인이기에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하지 못하는 말을 할 수 있다. 만약 박노자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한국인이었다면 아무리 천재적인 두뇌와 통찰력을 지녔더라도 대한민국을 이렇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박노자가 러시아에서 온 사람인 것은, 아까운 일이 아니라 고마운 일인 것이다.  

 

1.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문제 많은 이 사회를 고치려는 열정이 생긴다. 그래서 노력한다... 

2. 우리가 사는 사회는 문제가 많다. 이것은 애정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필생의 조건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성을 통해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1.이 감성적 접근이고 2.가 이성적 접근이라면 근현대사의 진보진영의 문제해결 방식은 감성 논리였고 박노자는 이성 접근이었다. (그렇다고 박노자에게 한국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후자는 드물었기에 더욱 귀하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기도 한다. 원래 내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비판과 성찰이 더 아픈 법이다. 그래서 박노자를 더욱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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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디자인
하라 켄야 지음, 민병걸 옮김 / 안그라픽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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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을 바꿔 한국인 디자이너가 이런 관점으로 이런 디자인 책을 썼다면 별 거슬림없이 읽었을 수 있겠다. 한국적인 것을 어떻게 디자인해 낼 것인가, 또한 그것을 상품화할 것인가, 간단히 추려서 이런 기조의 책일 수 있었을 터이니. 

책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그냥 디자인 일반에 대한 에세이를 기대하고 샀던 나의 기대와 책의 내용이 달랐던 것 뿐이다. 하지만 디자인 전선에서 뛰는 사람들이나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다. 나는 주로 사진과 그림들을 중심으로 보았다. 글의 내용은 디자인 강의같은 전문적이거나 지엽적이거나 한 내용들이 많았다. 또한 하라의 디자인들은 매우 일본스럽다. 소위 말하는 젠 스타일의, 지나칠 정도로 여백을 강조하는 깔끔한 그만의 디자인은 정말 매력적이지만 이방인에게는 어쨌든 그 일본스러움이 편안하지만은 않다. 그저 그의 디자인 감각과 창의성을 배우고 싶을 뿐이다. 디자인 공부를 하려 하는 아들에게 도판을 중심으로 한 번 훑어 보라고 권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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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나의 고전 읽기 9
김슬옹 지음, 신준식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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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리뷰들을 읽어보니, 우리 한글이 얼마나 훌륭한지, 세종대왕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새삼 깨달았다는 내용이 많다. 나는 이 '28자로 이룬 문자혁명..'이란 책이 잘 쓰여진 책임을 말하고 싶다. 

나는 중학교에서 20년 동안 국어를 가르쳐왔다. 작년에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자격을 획득했다. 안팎으로 더도덜도 없이 한국어 선생인 내게 이 책은 참 소중한 책이다. 아니, 20년 동안 가르치면서 한글과 한국어에 대해 알만큼 알지 않나요, 라고 묻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은 나와 같은 사람이야말로 더 깊이있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중고등학교에서나 초중급 정도의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꼭 읽어야 할 책이다. 학술적이고 연구 위주의 성과물이라기보다 교양학문 정도의 수준이다. 그것은 필자인 김슬옹 선생이 청소년도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쓰고 싶어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는, 깊이 있고 심오하고 아주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책보다 괌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화할 수 있도록 쉽게 쓰여진 책이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분야나 목적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현학적이거나 어렵게 쓰여진 책이라고 좋은 책은 아니라는 것의 또다른 표현이다. 저자는 자신이 한글을 잘 연구한 학자이자 강단에서 실천적으로 훈민정음을 가르친 사람답게 군더더기도 없이 적확하면서도 진정성이 가득 담기게 글을 잘 썼다. 

이 책에 있는 내용들이 대체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더라도 - 가령 훈민정음이 아주 과학적으로 만든 문자라는 것- 그것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정리하느냐의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 준다.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그래픽으로서의 한글의 문자 미학과 조형의 과학성, 거기 담긴 우주와 자연과 인간의 상생성까지 한글의 완벽함에 감탄하게 된다. 보석을 품에 안고도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내치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들이란 생각이 든다. 한글의 과학성은 훈민정음 제자해에 이미 밝혀졌지만 현대에 와서 거꾸로 창제와 전파의 과정을 거스르면서 마치 비밀한 암호를 풀어가듯 흥미진진하게 밝혀졌다. 내가 교단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가르칠 때 이와같은 흥미진진함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제로 관련 내용을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충분하지 않아서 한두 시간 정도에 걸쳐 한글 생성원리와 조음원리를 설명하면 그 부족한 시간에도 아이들은 매우 놀라워하고 흥미있어 한다. 최근에는 휴대폰의 자판과 연결지어 그런 흥미를 더욱 북돋울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이 땅의 한국어 선생들이 부디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 완벽함과 논리정연한 과학성 때문에 감탄했듯이 우리 아이들(학생들)도 한글의 아름다움에 빨려들어가게 잘 가르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공자나 관련된 사람이 아닌 경우 한글의 우수성과 애정을 논하면 '오바하는 거 아닌가' 하는 반응을 보인다. 또는 뭐 그런지는 몰라도 난 관심없이, 이런 태도인 경우가 많다. 한글이 너무 우수하고 세종대왕이 너무 위대하고 우리 민족이 뛰어나고... 이런 논리를 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우수하면 우수한 대로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거기서 더도덜도 갈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소수밖에 안 돼 보이는 (한)국어 관련된 사람들이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은 또 그만큼의 이유가 있다. 과장할 건 없지만 폄하해서도 안 되며 갖고 있는 가치가 묻혀서도 안 되는데 여지껏 한글은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했다. 아니 그 글자를 쓰는 주인인 한국인들에게 제대로 제 모습을 드러내 본 적조차 없다. 그래서 그 소수의 사람들은 거품을 물고 목이 갈라져라 외치는 것이다. 한글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그 과정은 거의 투쟁이요 운동이나 다름없다.

이 책이 청소년이 읽기엔 쉽지 않다 하더라도 대학에서 교양으로나마 많이많이 읽혔으면 하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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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대의 4050 학급살림 이야기 지혜로운 교사 8
이상대 지음 / 우리교육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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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필자인 이상대 선생과 면식이 있다. 

15년 전쯤 5월 어느 날, 내가 알던 출판사 사장이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나와 선생을 서로 인사하게 해주었다. "서로, 스승의 날 선물이야." 라면서. 물론 교사 출신인 그 사장님은 스승의 날 = 교사의 날로 순치해서, 교사들인 너희들에게 서로서로를 선물로 소개해 준다는 의미였다. 서로 선물이라고는 하지만, 이상대 선생보다 8살 쯤 아래인 나에게야말로 좋은 선배를 선물로 소개받는 감사한 자리였다. 

이상대 선생은 자그마한 체구에 참으로 소박하고 귀엽게 생기셨다. 저런 외모라면 학기초 담임과의 첫 대면의 자리에서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고도 남을 것이다. 만나는 사람의 긴장을 확 풀어버리고 호감을 주기에 충분할 만큼 좋은 인상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조금도, 책잡히면 어쩌나 하는 부담이나, 잘 보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긴장을 갖지 않게 한다. 그래서 이 양반을 좋아하는 사람이 참 많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를 자주 본 것은 아니다. 여태 얼굴 뵌 것은 다 합해 봐야 다섯 손가락을 꼽을까 말까인데, 그럼에도 같은 국어교사로서 볼 때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게 하는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당신 입으로 내가 뭐 잘했소, 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내가 교사로서의 그에 대해 아는 것들은 몇 마디 말들에서 풍기는 교사로서의 풍미, 그리고 그가 써온 글들에서 온다. 

나는 사실 이런 학급운영 방법론보다 그의 수필을 기다렸다. 우리교육의 편집장이기도 했고 이 출판사의 여러 저서들의 필자이기도 한 선생의 수필집을 우리교육이 얼른 내주기를 기대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나온 '빛깔이 있는 학급운영'의 꼭지 마디마디에 썼던 여는 글 때문이었다. '교육'은 대개 정책 속에 있거나 신문 속에 있거나, 그보다 좀 실체를 명확히 할 것 같으면 먼지 냄새가 많이 나는 교실 속에 있다. 그런데 이상대 선생의 글을 보면, 교육이 문학적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아름다움, 이것이 문학의 이중적이면서도 동전의 양면처럼 필수적인 요소들이라면 정말 아이들 냄새가 나면서도 그것을 그악스럽지 않게 아름답게 정말 따뜻하게 그려낼 수 있는 문학작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그런 작품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참으로 미약한 것도 사실인데, 나는 이상대 선생의 글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교단수필이 아니어서 좀 아쉽긴 하지만 이 책 '이상대의 4050 학급살림 이야기'도 단지 방법론적인 실용서만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그가 만든 학급문집의 아무 쪽수를 펼쳐보는 듯한 재미와 정감이 묻어나는 게, 꼭 인간 이상대 그대로다. 책과 사람이 똑같다, 이게 쉬운 일인가? 글이란 게 아무래도 영혼의 과시이고 화장이기 쉽지, 아무리 겸손을 가장해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가 쉽지 않다. 물론 좋은 작가일수록 그에 근접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맑은 영혼을 글로 논하면서 인세를 챙기고 팬 관리를 하는 허명의 글쟁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상대 선생의 책은 내가 아는 인간 이상대, 교사 이상대와 똑같다. 

나는 몇몇 동료 교사들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하지만 이 조그만 책은 아무에게나 선물할 책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가 그 작은 눈으로 허허실실 웃으며 따뜻하게 아이들을 바라보듯, 아이들을 다 품고 가는 듯한 학급운영 방법은 사실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행정업무에 치일 대로 치이고 아이들이 사고치지 않고 무사히 한 해를 마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이 땅의 평범한 교사들에게 이상대 선생처럼, 수레를 움직이는 바큇살이 아니라 그 사이의 빈 공간처럼, 항아리를 만드는 옹골찬 벽이나 바닥이 아니라 그 비어있는 여유와 열린 입구처럼 한없이 열린 마음으로 아이들을 넓게 품고 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 양반이 온갖 이벤트성 학급행사로 끊임없이 아이들과 자신을 후달구는 그런 학급운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 핵심은, 끊임없이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 끊임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는 것이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쳐보려고 아프게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씨앗을 심고 싹이 텄을 때 급한 마음에서 그것을 잡아당긴다고 쑥쑥 잘 자라지 않는다는 것, 지겨울 만큼 기다려야 그 싹은 조금씩 자라나고, 그것이 열매를 맺을 때쯤이면 처음 씨앗을 심었던 사람은 그 자리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럼에도 그 잘 자란 놈을 두고 내가 씨앗을 심었네, 싹을 틔웠네, 10센티미터만큼 크게 했네, 공치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교육이란 것을. 그것을 제대로 심득(心得)하지 않은 이들이 학교를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앉아서 이러니 저러니 하며 교육을 망치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이상대 선생같은 이들이 있어서 아이들을 주섬주섬 챙겨 함께 가고, 가는 길에 여기저기 딴 데를 기웃거리는 녀석들은 팔짱도 끼고 어깨동무도 하면서 함께 가고 있기에, 그나마 만신창이 교육에도 아직 희망은 있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잘하고 못하고, 잘못하고 실수하고에 따라 버려도 되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이들을 버려도 끝까지 버리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이 부모이고 교사들이다. 그리고 학교다. 학교는 끝까지 아이들을 안고 가야 한다.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지 않고 교사들이 스스로 행복해 하면서 아이들을 품고 가는 방법을 이상대 선생이 가르쳐 준다. 물론, 노자의 도덕경은 수천 년 동안 수없이 읽히면서도 그 짧은 글을 이해하고 따라할 수 있는 이들이 별로 없었듯이 이상대 선생이 아이들과 함께 가는 방법은 뭇 교사들에게 무슨 도사의 드높은 공력처럼 따라하기 쉽진 않을지 모른다. 그러면 그것 하나만 배우자. 수레를 움직이는 것이 바큇살이 아니라 살과 살 사이에 공기가 드나들 수 있는 빈 공간이라는 것, 항아리에 물을 담을 수 있는 것은 그 안의 둥근 공간이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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