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화되었다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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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쇳물 쓰지 마라’, 제목부터 가슴이 아려오는, 댓글 시인 제페토의 시집을 오랜 시간에 걸쳐 읽었다. 이 사람은 분명 시인일 터인데, 누구일까. 왜 기존의 자기 이름으로 시집을 내지 않았을까.

 

글 쓰는 이들 중에는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다양한 글을 쓰는 이가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긴 하겠지. 그게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아도 그이가 누구인지 나오지 않는다. 이 정도 필력이면 이미 기성의 작가나 시인일 법한데...

 

요즘, 세상이 슬프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무도한 세상에 인간은 이미 비인간화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제페토 시인도 그러지 않았을까.

 

우리는 미화되었다 제페토

 

이러지 마세요, 어머니

그것은 숭고한 공포입니다

산사의 돌탑도

타인의 소망을 밟고 높아졌습니다

정성이 하늘에 닿을 때마다

내 가슴에는 평생 갚을

빚 더미가 쌓입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사랑을 두려워합니다

부디 당신이 밝힌 촛불에

데지 않게 하소서

누구도 죽게 마소서 <비나이다>

 

수능 열흘 앞 엄마의 기도에 대해

 

 

꼬리를 자르면

꼬리 없는 짐승이 되지

 

뿔을 자르면

뿔 없는 짐승이 되지

 

DNA를 따라

꼬리와 뿔은 다시 자라날 테고

 

(중략) 짭조름한 피 맛이 간절할 즈음

돌아와 사람을 물면 되지

 

목욕을 하겠지

큰절을 하겠지

 

짐승은 짐승이지

사람은 아니지 <짐승의 방식> - 5.18 망언한 국회의원에 대해

 

 

그의 슬픔과 울분은 슬프고 아픈 뉴스로 가득한 세상에서 비롯된 것일 터. 좋은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꿔본다. 한편으론, 그런 세상을 유지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생각해 본다. 때론 나 자신 대단한 일을 하지 않음에도 이토록 사는 일에는 이 드는가 한탄하는데 다음 시는 그 대답이 될 것 같다.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은 그나마 세상이 덜 나빠지지 않게 하는 큰 힘이 된다는, 그러나 무력하다, 하찮다, 알량하다고 나의 조그마한 삶을 스스로 폄하하지 말라는, 그런 시


아래 제페토의 시에 기대 글을 썼음을 밝힌다

https://brunch.co.kr/@f0f56614cd83447/43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실은 안간힘을 쓴다는 뜻이다

 

지금도 마천루와 전봇대는

쓰러지지 않으려 진땀을 흘리고 잇다

 

평안은 뉴스가 되지 않으나

별일 없는 날을 나는 사랑한다

 

행인들의 따분한 얼굴과

그들이 버티어낸 하루를 사랑한다 <별일 없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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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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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가 영면했다. 한참 그의 <삶의 격>을 읽던 중이었는데 그 소식을 듣는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죽음이 혹은 아픔이나 몰락이 내게 영향을 줄 때가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좋아했는데... 그의 마지막 작품이래서 이 책을 집어들었는데... 그의 명복을 빈다. 새삼스럽지만, 열심히 살았던 훌륭한 사람도 언젠가는 죽는구나...

 

이 책은 몹시 두껍고 몹시 가볍다. 언어의 무게라면서, 너무나 많은 상념과 많은 스토리와 많은 등장인물을 지닌 이 책이 부피에 비해 가벼운 건 뭔가 아이러니하다. 이 책 속에는 이야기들을 쪼개면 다섯 권쯤 나올 법한 많은 이야기들이 농축되어 있다. 가끔 한 권의 값어치가 없는 책, 혹은 저자에게 감사해야 할 만큼 진하고 묵직한 가치를 지닌 책이 모두 한 권이라 불리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이 그렇다.

 

작가의 페르소나일 것 같은 주인공 레이랜드는 번역가였다가 작가가 되는 인물이다. 나도 말과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 글과 책이 없으면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만큼 거기 매달려 산다. 그래서 주인공 레이랜드가 깊이 천착하는 언어를 탐구하는 일의 즐거움을 조금은 안다. 언어를 탐구하는 시간을 온전히 즐겼던 주인공의 감정, 평온, 집중에 공감한다.

 

이따금 내 내면에서 만사가 무너지고 모든 게 힘들 때면 단어들로 돌아가고 싶어. 한쪽 구석의 작은 책상에 지금 작업 중인 번역 원고가 놓여 있어. 난 가끔 그곳으로 도망치지.

 

번역을 하면서 알맞은 단어를 부단히 찾을 때만 현실감이 흐려지지 않고 온전했다. 오로지 그때만 모든 것이 괜찮았고 완벽한 현재였다(글을 가지고 놀다 보면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완벽한 현재, 완벽하게 나인 시간...).

 

너무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죽음을 앞두었다가 다시 살아나 느끼는 삶의 희열이 주제인지, 레이랜드의 아들과 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사회적 성취에 앞서는 진정한 자아의 중요성이 주제인지, 주인공의 선행을 포함하여 소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선량한 부자들 이야기가 핵심인지, 안락사(존엄사?)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인지 헷갈린다. 다만 그의 전작 <삶의 격>처럼 인간의 존엄에 대한 숙고가 보인다.

 

특히 은 위반했지만 가난해서 의료 시스템에 접근하기 어려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의료 지식을 활용했던 약사 버크, 사랑하는 아내의 존엄한 죽음을 도와야 했던 남편들의 이야기는 이라는 테두리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진정한 정의, 혹은 도덕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작가의 본령이 철학 교수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확대해서 해석하면 고결한 사람은 그가 부자이거나 지식인이거나 의사, 법률가라서가 아니라는 것, 감옥을 살았거나 가난을 살고 있거나 범법자가 되거나 혹은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혹은 식당에서 음식 서빙을 하더라도 얼마든지 고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그런 옆 사람들을 알아본다.

 

그런 많은 장면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러시아에서 망명(?)한 안드레이가 감옥에서 출소한 후 레이랜드와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그를 번역자로 초청할 때 도스토예프스키 <백치> 초판본을 선물하면서 낭독을 권유하는 장면. 안드레이는 이미 이탈리아어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모국어를 가장 모국어답게 구사한 문학작품을 읽게 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존중하는 장면이다. 낭독하는 안드레이는 자신의 권위를 되찾았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의 권위가 아니었다. 그의 권위 전체, 한 사람 전체의 권위였다.’

 

페터 비에리는 이 글을 쓸 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레이랜드가 겪은 뇌종양의 공포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담은 걸까? 나이가 들어가면 누구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직접 몸의 쇠락이나 병고를 겪으면 그 성찰은 그야말로 리얼이 된다. 주인공은 오진으로나마 진정한 죽음의 공포와 성찰의 터널을 빠져나온다. 그래서 맛본 삶은 더욱 귀할 것이다.

 

이제 그는 여기 앉아 어두운 맞은편 집을 건너다봤다. 집만 어두운 게 아니었다. 정원 문에서 현관문 사이에 있는 전등도 예전처럼 불이 꺼져 있었다. 삶이 끝난 후의 어두움, 시간이 더는 흐르지 않는 암흑이었다.

 

조금 전에는 뉴스를 보려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처음 몇 장면을 보자마자 저런 것은 나와 더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단절(죽음이 임박한다면....).

 

이제 다시 미래가 생겼으니 시간을 낭비하며 지낼 작정이었다. 무엇도 하지 않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느끼고 싶었다. 숨도 못 쉬며 종말을 향하는 게 아니라는 것, 뭔가 미루어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느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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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사이언스 - 아름다운 기초과학 산책
나탈리 앤지어 지음, 김소정 옮김 / 지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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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실주의자이고 합리주의자이다. 있는 것만 보이고 앞뒤가 맞아야 믿는 사람이다. 몰라서 오해하는 부분이 있을까 봐 최대한 많은 것을 보려 애쓰고 마음을 열어놓으려 노력하며 공부할 뿐이다.

침대 머리맡에 사주명리학 책과 더불어 과학 에세이들도 쌓여 있다. 무엇을 아무리 공부해도 세상 이치를 깨우칠 리 없으며 어떤 통찰력을 갖게 되더라도 진정한 세상의 이치를 다 알기엔 편협한 생을 살다 갈 것이다. 하지만 알아가려는 그 노력의 여정은 즐겁다. 알면 알수록 내 존재의 하찮음이 느껴지는데 그 깨달음이 더욱 즐겁다. 내 존재가 작아질수록 생명과 죽음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유시민이 과학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책 읽어보라고 권한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원더풀 사이언스>이다. 누구는 이 사람의 입담을 칭찬했지만 미국식 유머가 꼭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유와 표현력은 정말 대단하다. 그래서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술술 읽히는 글을 만날 때마다 갖는 의문인데, 원 글을 잘 쓴 걸까, 번역을 잘한 걸까? 글 자체가 복잡하고 난해한데 깔끔한 문장의 번역이 나올 리는 없을 것이다. 원래 잘 쓴 글을 망치는 번역도 쉽진 않다. 아마도 이 책은 원저자 나탈리 앤지어의 뛰어난 글솜씨가 좋은 번역가를 만났을 것이다.

 

확률, 척도에서 시작해 화학, 물리, 진화생물, 분자생물, 천문학으로 끝난다. 과학이야기가 천문학에서 끝나면 인문학도들도 마음이 놓인다. 이 공부의 끝을 우주의 존재론에 대한 생각으로 확장하면 이 모든 존재와 고민이 공즉시색(空卽是色) 같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생각이 그러니까 나의 삶은 얼마나 짧으며 나는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로 끝나지 않고 내 존재의 하찮음 덕분에 삶에 대한 집착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 공부를 하면서 그런 성찰을 얻다니. 최근에 읽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도 그렇고 김상욱의 에세이들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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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상형문자 b판시선 19
고명섭 지음 / 비(도서출판b)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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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시인 그랑그루아가 떠오른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서술자, 혹은 호메로스 같은 시인일 수도 있다. 고명섭은 인류사의 파노라마를 타고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는 무대에 선 사회자 역할을 한다. 때로는 변사처럼 주인공의 목소리를 내고 때론 주인공 혹은 대척자나 주변인물들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시집을 읽었는데 역사극을 본 듯도 하고 심리와 상황 묘사가 탁월한 대하소설을 읽은 듯도 하며 새삼 짚어보는 철학자, 문학가, 역사 속 인물들을 가장 처절하고 부끄럽고 나약하고 비루한 밑바닥의 개인 서사로, 업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는 기분이 든다. 9000원밖에 안 되는 이 책은 마치 얇으나 깊은 마법서 같다.

 

고명섭 시는 모든 시가 서사시이다. 과거형 어미가 형식을 지켜 올리는 고대의 연극을 연상케 하기에 현대시적인, 시적인느낌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시를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적 탐색, 탐구의 여정을 호메로스 같은 고대 시인의 서술 형식을 빌려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시 속에는 플라톤이 등장하고(이데아, ) 비트겐슈타인의 서사가 있으며(헛간의 빛) 카프카가 담긴다(몰래 쓴 편지). 니체와 칸트를 아우른다. 그들 자신이 쓴 책도, 그 주장을 재해석한 책도, 소설로 그 삶을 재구성한 책도 세상에는 많지만 마치 그들이 되어 그 삶을 살아본 듯 그들의 몸이 되어 아픔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그들이 걸었던 흙길을 같이 걸으며 밤 늦은 시간 펜촉을 사각거리거나 열등감에 젖어 고개를 숙이는 이런 시는 없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많지만 그걸 통섭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한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자들은 더 많지만 그게 지금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고명섭이라는 한 평범한 기자는 어떻게 그런 경지에 갔을까.

이것을 뒤에 평론을 쓴 신형철은 ‘(고명섭은) 자신이 천착한 사상가와 예술가의 삶의 한 국면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을 본 것이었으리라.’ 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시 는 이런 고명섭의 목적의식을 담고 있는 듯 보인다.

 

무너진 집, 돌담 옆에 주둥이를 잃어버린 항아리

물기 없는 흙바닥의 아가미처럼 헐떡거리는 아가리

병조각 널린 길에서 발가벗고 뒹구는 몸뚱이

벌레 먹은 세월이 엉겨 썩어 들어갈 때

책의 문을 열면 굴뚝새 한 마리 푸드덕 날아갔다.

책 속으로 난 길은 하구의 강줄기같이 흩어지고

숲은 깊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뭇가지 사이 잎사귀를 뚫고 햇살 몇 가닥 들어와

큰 나무뿌리의 이끼에 맺힌 빗물의 잠을 깨웠다

이 숲 어디엔가 손길 닿지 않은 유적 묻혀 있지 않을까

...

 

책 속으로 들어가 책과 책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

멋대로 난 풀잎의 혓바닥이 종아리를 스치고

사금파리들이 발가락에서 피를 핥았다

손전등을 들고 더듬어 보는 숲의 상형문자

입 꼭 다문 문자들이 눈을 깜빡거렸다. - 고명섭 <상형문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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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만난 말들 - 프랑스어가 깨우는 생의 순간과 떨림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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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정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정치적 지향은 나와 비슷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닮았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삶을 꿈꾸는 나 대신 그걸 직접 살아가고 있는 그의 체험 삶의 현장’, 거기 더해진 통찰적 지성은 내게 대리만족의 기쁨을 준다.

 

사실 프랑스어야말로 내 희망 외국어 공부’ 1순위였다.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공부했고 대학에 가서 교양 불어 수업을 들었다. 언어에 재능이 있었더라면 좀 더 공부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연인이 된 프랑스어에 대한 이야기를 목수정이 들려준다. 적으나마 기초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 프랑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어보련다.

 

아름답다를 입에 달고 사는 프랑스

닮고 싶은 프랑스 문화를 알게 되는 점도 좋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천지 만물 속에서 시시각각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해 내고 그것을 찬미하며 서로의 미적 감각을 자극하는 오랜 언어습관이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아름답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단다. 열정적인 모습도 좋다. 프랑스어에 ‘Je n’ai pas d’envie 앙비가 없어(간절하지 않아)‘ 라는 말은 전 괜찮아요쯤 되는, 권유를 차단하는 말이라지만 속뜻을 보면 간절한 열망만이 우리를 움직일 거라는 의미가 있단다.

 

코팽 바게트는 저렴하다

1970년대까지 바게트 가격을 국가가 매년 정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다른 책에서 목수정은 우리가 식구라는 단어를 갖고 있듯이 프랑스인들도 친구를 코팽(copain)(함께 빵을 나누는 사람)’이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우리가 쌀값을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갖고 있는 것처럼 프랑스인들은 지금도 바게트는 저렴하게 판다. 2023년 평균가 1유로에 약 80센티 길쭉한 것이나 60센티 통통한 것 2종을 판단다.

 

절박함의 정신분석학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살아남은 유대인 그룹 중 어린 나이에 레지스탕스 활동한 그룹은 우울증을 겪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이 피해자가 아닌 전사라는 자의식이 그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한편, 우울증을 가장 심하게 겪은 수용소에 끌려갔던 아동 그룹은 대신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이룬 경우가 많다.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행복에 과잉투자한 결과이다.

 

이 내용은 매우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절박함은 사람을 성공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물론 궁지에 몰려 회생의 기회마저 잃어버리는 제 3세계의 수많은 역사와 비교해 보면 유대인들의 삶의 특수성을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상처를 노력과 성공으로 극복하려 애썼다는 이야기 말고, 스스로 전사로 싸웠던 이들이 우울증이 적었던 이유와 상관관계는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강한 자의식과 자존감을 갖는 일은 성공이나 성취와는 다른 영역이다.

 

프랑스 엄마들에게 한국이 배워야 할 것

프랑스 엄마들은 마지막에 안아주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이성에 호소하는 과정을 거친다. 아무리 어려도 얼굴을 마주 보고 화나지 않은 목소리로 게임의 규칙을 단단한 어조로 설명한다. 저자의 또 다른 책 <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나 <프랑스 아이처럼>에 소개된 이야기를 종합하면 프랑스 가정교육은 매우 엄격한 편이고 일관된 면이 있다. 오늘날 한국 교육은 공교육도 문제, 사교육도 문제이지만 가정에서의 교육은 더더구나 일관성도 없고 교육이랄 것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경향이 있다. 다정하지만 단호한, 그리고 일관성 있는 교육의 태도는 부모와 교사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정책의 연대, 박애와 복지

저자는 문화 발전에서 정책과 제도가 중요함을 말하면서 90년대 스크린 쿼터제를 언급한다. 어지간해서 집단행동이나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는 영화인들이 대거 거리로 나와 스크린 쿼터제 유지를 주장하는 걸 보면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남지 못하고 외국영화로부터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건가 의아해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한국영화 발전의 바탕이 되었을 거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비슷한 이야기를 장하준 교수도 <맛있는 경제학>에서 했던 것 같다. 취약한 존재에게 공동체나 가정, 가장이나 리더가 생명줄을 붙들 수 있도록 보다 많은 지원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 국가가 펼치는 정책과 제도는 그런 역할을 한다. 자유시장경제니 적자생존을 아무 데서나 떠들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는 정부나 지자체가 평등을 지향하면 만든 모든 정책에 솔리다리테(연대)란 말이 들어간단다. 프랑스 혁명 정신 중 박애의 현대 버전으로 봐야 할 듯하다고 말한다.

목수정은 결혼 대신 그와 거의 비슷한 효력이 있는 팍스시민연대계약을 했다. 저소득층에 정부가 지원하는 기초생활비를 활동연대수입이라고 부른다.

 

혐오와 저출산

한국에서 저자 소개 등에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유대인이라는 표현은 유럽에서는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유럽의 인종 쓰레기로 모는 4종 세트는 극우 인종주이자, 마초, 동성애 차별주의자, 유대인 차별주의자란다.

혐오와 차별은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야말로 혐오가 분열로, 결국 사회 파괴로 나아가는 대표적 사례일지도 모른다. 지금 뿌려진 분열을 씨앗으로 앞으로 더 대대적인 홍역을 치를지도 모른다.

 

마치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절반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남성들의 보편적 인식에 기대 아젠다를 이끌었듯. 젊은 여성들의 반정치 의식이 비혼과 출산 거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정책들을 남발하고 있는 현실처럼 이민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그치지 않으면 오래오래 엉뚱한 뒤치다꺼리로 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하게 될 것이다.

 

갈등이 파도를 치지 않으면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땅 밑으로 곪고 썩는다. 지금의 남녀갈등이나 저출산 문제 등은 미투와 연관해 남녀차별의 쌓이고 쌓인 갈등이 폭발하고 떠오른 부산물이라 생각한다. 반드시 한 번은 겪어야 할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본질이 아니라 본질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방인과의 갈등, 소수의 약자들을 대한 비뚤어진 시선의 문제들도 언젠가는 터지고야 말 일이다. 약자가 언제까지나 소수는 아닐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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