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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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결이 잘 맺는 것이 좋은 글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박경리 선생 이야기로 맺는다. 가장 고독한 존재로 글을 마주하는 자기 자신 이야기로 맺는다. 외로움은 문학의 필연이라고 선언한다. 아팠지만, 아팠기에 글이 될 수 있었노라고,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성 소설가일 것 같아 보였던 공지영은 그렇게 자신의 문학을 토로한다.

 

그가 박경리는 아닐 것이다. 비견하려고 그렇게 맺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존경하는 선생만큼의 삶과 문학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으려 그렇게 맺는 것이리라. 그리고 어쩌면 훗날 공지영은 그런 이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다 간 길이 아니니까.

 

나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공지영을 질시한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유명세를 치르는 그녀를 보면서 나의 삶이 초라해 보였던 적 있다. 그가 세 권쯤의 책을 가졌을 때였던 것 같다. 그의 유명한 이름이 부러웠던 것이 아니라 세 권의 책이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에게는 책 대신 제자들이 있었다. 그런 비교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녀에겐 없고 나에게만 있는 제자들이 나를 안심시켰다. 나에게는 세상이 알아주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이 중요했고, 나에게도 그런 의미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이 참 안심이 되었다.

 

물론 그녀나 나나, 우리가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도 그 누구의 삶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런 잣대는 성취 중심적 가치관을 가진 속물들의 잣대일지도 모른다. 하긴, 아무래도 나는 속물인 게 맞다고 생각된다면 그런 잣대로 그녀를 평가해 보자.

그 자신의 말대로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계속 움직여야 하는 열정 덩어리로 살아온 그 사람이라면 글재주를 타고 나지 않았더라도 무언가를 했을 것이다. 좌충우돌할지라도 누군가 억울한 사람 편을 들면서 하루하루 열정적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이의 글은, 그저 잘 쓴 글, 말빨이 좋아 재미있는 글이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열심히 살았기에 생겨난 많은 이야기들로 채워졌기에 더욱 좋은 글이 되었으리라. 그러니까 그 사람의 복잡다단하고 화려한 삶에 입방아를 찧고 질시하고 미워하면서도 은근히 선망하고 몰래 매혹될 일이 아니라 가감 없이, 순수하게 칭찬해 주고 좋아해 주면 될 일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모차르트 협주곡 23을 몰입해 들었다. 다른 책을 통해 예수의 행적을 읽으며,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의 행적으로 위로 받던 내가 마음으로 공지영의 여행에 동행했다(물론 그의 과감한 발길은 내 스타일은 아니다). 책 뒤에서인지 앞에서인지,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여행지에서 끔찍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그이의 마음에 마음으로 동참했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기질과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책은 좋은 책이다. 이 책은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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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화되었다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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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쇳물 쓰지 마라’, 제목부터 가슴이 아려오는, 댓글 시인 제페토의 시집을 오랜 시간에 걸쳐 읽었다. 이 사람은 분명 시인일 터인데, 누구일까. 왜 기존의 자기 이름으로 시집을 내지 않았을까.

 

글 쓰는 이들 중에는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다양한 글을 쓰는 이가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긴 하겠지. 그게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아도 그이가 누구인지 나오지 않는다. 이 정도 필력이면 이미 기성의 작가나 시인일 법한데...

 

요즘, 세상이 슬프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무도한 세상에 인간은 이미 비인간화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제페토 시인도 그러지 않았을까.

 

우리는 미화되었다 제페토

 

이러지 마세요, 어머니

그것은 숭고한 공포입니다

산사의 돌탑도

타인의 소망을 밟고 높아졌습니다

정성이 하늘에 닿을 때마다

내 가슴에는 평생 갚을

빚 더미가 쌓입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사랑을 두려워합니다

부디 당신이 밝힌 촛불에

데지 않게 하소서

누구도 죽게 마소서 <비나이다>

 

수능 열흘 앞 엄마의 기도에 대해

 

 

꼬리를 자르면

꼬리 없는 짐승이 되지

 

뿔을 자르면

뿔 없는 짐승이 되지

 

DNA를 따라

꼬리와 뿔은 다시 자라날 테고

 

(중략) 짭조름한 피 맛이 간절할 즈음

돌아와 사람을 물면 되지

 

목욕을 하겠지

큰절을 하겠지

 

짐승은 짐승이지

사람은 아니지 <짐승의 방식> - 5.18 망언한 국회의원에 대해

 

 

그의 슬픔과 울분은 슬프고 아픈 뉴스로 가득한 세상에서 비롯된 것일 터. 좋은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꿔본다. 한편으론, 그런 세상을 유지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생각해 본다. 때론 나 자신 대단한 일을 하지 않음에도 이토록 사는 일에는 이 드는가 한탄하는데 다음 시는 그 대답이 될 것 같다.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은 그나마 세상이 덜 나빠지지 않게 하는 큰 힘이 된다는, 그러나 무력하다, 하찮다, 알량하다고 나의 조그마한 삶을 스스로 폄하하지 말라는, 그런 시


아래 제페토의 시에 기대 글을 썼음을 밝힌다

https://brunch.co.kr/@f0f56614cd83447/43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실은 안간힘을 쓴다는 뜻이다

 

지금도 마천루와 전봇대는

쓰러지지 않으려 진땀을 흘리고 잇다

 

평안은 뉴스가 되지 않으나

별일 없는 날을 나는 사랑한다

 

행인들의 따분한 얼굴과

그들이 버티어낸 하루를 사랑한다 <별일 없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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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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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가 영면했다. 한참 그의 <삶의 격>을 읽던 중이었는데 그 소식을 듣는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죽음이 혹은 아픔이나 몰락이 내게 영향을 줄 때가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좋아했는데... 그의 마지막 작품이래서 이 책을 집어들었는데... 그의 명복을 빈다. 새삼스럽지만, 열심히 살았던 훌륭한 사람도 언젠가는 죽는구나...

 

이 책은 몹시 두껍고 몹시 가볍다. 언어의 무게라면서, 너무나 많은 상념과 많은 스토리와 많은 등장인물을 지닌 이 책이 부피에 비해 가벼운 건 뭔가 아이러니하다. 이 책 속에는 이야기들을 쪼개면 다섯 권쯤 나올 법한 많은 이야기들이 농축되어 있다. 가끔 한 권의 값어치가 없는 책, 혹은 저자에게 감사해야 할 만큼 진하고 묵직한 가치를 지닌 책이 모두 한 권이라 불리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이 그렇다.

 

작가의 페르소나일 것 같은 주인공 레이랜드는 번역가였다가 작가가 되는 인물이다. 나도 말과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 글과 책이 없으면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만큼 거기 매달려 산다. 그래서 주인공 레이랜드가 깊이 천착하는 언어를 탐구하는 일의 즐거움을 조금은 안다. 언어를 탐구하는 시간을 온전히 즐겼던 주인공의 감정, 평온, 집중에 공감한다.

 

이따금 내 내면에서 만사가 무너지고 모든 게 힘들 때면 단어들로 돌아가고 싶어. 한쪽 구석의 작은 책상에 지금 작업 중인 번역 원고가 놓여 있어. 난 가끔 그곳으로 도망치지.

 

번역을 하면서 알맞은 단어를 부단히 찾을 때만 현실감이 흐려지지 않고 온전했다. 오로지 그때만 모든 것이 괜찮았고 완벽한 현재였다(글을 가지고 놀다 보면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완벽한 현재, 완벽하게 나인 시간...).

 

너무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죽음을 앞두었다가 다시 살아나 느끼는 삶의 희열이 주제인지, 레이랜드의 아들과 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사회적 성취에 앞서는 진정한 자아의 중요성이 주제인지, 주인공의 선행을 포함하여 소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선량한 부자들 이야기가 핵심인지, 안락사(존엄사?)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인지 헷갈린다. 다만 그의 전작 <삶의 격>처럼 인간의 존엄에 대한 숙고가 보인다.

 

특히 은 위반했지만 가난해서 의료 시스템에 접근하기 어려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의료 지식을 활용했던 약사 버크, 사랑하는 아내의 존엄한 죽음을 도와야 했던 남편들의 이야기는 이라는 테두리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진정한 정의, 혹은 도덕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작가의 본령이 철학 교수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확대해서 해석하면 고결한 사람은 그가 부자이거나 지식인이거나 의사, 법률가라서가 아니라는 것, 감옥을 살았거나 가난을 살고 있거나 범법자가 되거나 혹은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혹은 식당에서 음식 서빙을 하더라도 얼마든지 고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그런 옆 사람들을 알아본다.

 

그런 많은 장면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러시아에서 망명(?)한 안드레이가 감옥에서 출소한 후 레이랜드와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그를 번역자로 초청할 때 도스토예프스키 <백치> 초판본을 선물하면서 낭독을 권유하는 장면. 안드레이는 이미 이탈리아어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모국어를 가장 모국어답게 구사한 문학작품을 읽게 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존중하는 장면이다. 낭독하는 안드레이는 자신의 권위를 되찾았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의 권위가 아니었다. 그의 권위 전체, 한 사람 전체의 권위였다.’

 

페터 비에리는 이 글을 쓸 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레이랜드가 겪은 뇌종양의 공포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담은 걸까? 나이가 들어가면 누구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직접 몸의 쇠락이나 병고를 겪으면 그 성찰은 그야말로 리얼이 된다. 주인공은 오진으로나마 진정한 죽음의 공포와 성찰의 터널을 빠져나온다. 그래서 맛본 삶은 더욱 귀할 것이다.

 

이제 그는 여기 앉아 어두운 맞은편 집을 건너다봤다. 집만 어두운 게 아니었다. 정원 문에서 현관문 사이에 있는 전등도 예전처럼 불이 꺼져 있었다. 삶이 끝난 후의 어두움, 시간이 더는 흐르지 않는 암흑이었다.

 

조금 전에는 뉴스를 보려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처음 몇 장면을 보자마자 저런 것은 나와 더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단절(죽음이 임박한다면....).

 

이제 다시 미래가 생겼으니 시간을 낭비하며 지낼 작정이었다. 무엇도 하지 않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느끼고 싶었다. 숨도 못 쉬며 종말을 향하는 게 아니라는 것, 뭔가 미루어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느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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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사이언스 - 아름다운 기초과학 산책
나탈리 앤지어 지음, 김소정 옮김 / 지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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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실주의자이고 합리주의자이다. 있는 것만 보이고 앞뒤가 맞아야 믿는 사람이다. 몰라서 오해하는 부분이 있을까 봐 최대한 많은 것을 보려 애쓰고 마음을 열어놓으려 노력하며 공부할 뿐이다.

침대 머리맡에 사주명리학 책과 더불어 과학 에세이들도 쌓여 있다. 무엇을 아무리 공부해도 세상 이치를 깨우칠 리 없으며 어떤 통찰력을 갖게 되더라도 진정한 세상의 이치를 다 알기엔 편협한 생을 살다 갈 것이다. 하지만 알아가려는 그 노력의 여정은 즐겁다. 알면 알수록 내 존재의 하찮음이 느껴지는데 그 깨달음이 더욱 즐겁다. 내 존재가 작아질수록 생명과 죽음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유시민이 과학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책 읽어보라고 권한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원더풀 사이언스>이다. 누구는 이 사람의 입담을 칭찬했지만 미국식 유머가 꼭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유와 표현력은 정말 대단하다. 그래서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술술 읽히는 글을 만날 때마다 갖는 의문인데, 원 글을 잘 쓴 걸까, 번역을 잘한 걸까? 글 자체가 복잡하고 난해한데 깔끔한 문장의 번역이 나올 리는 없을 것이다. 원래 잘 쓴 글을 망치는 번역도 쉽진 않다. 아마도 이 책은 원저자 나탈리 앤지어의 뛰어난 글솜씨가 좋은 번역가를 만났을 것이다.

 

확률, 척도에서 시작해 화학, 물리, 진화생물, 분자생물, 천문학으로 끝난다. 과학이야기가 천문학에서 끝나면 인문학도들도 마음이 놓인다. 이 공부의 끝을 우주의 존재론에 대한 생각으로 확장하면 이 모든 존재와 고민이 공즉시색(空卽是色) 같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생각이 그러니까 나의 삶은 얼마나 짧으며 나는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로 끝나지 않고 내 존재의 하찮음 덕분에 삶에 대한 집착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 공부를 하면서 그런 성찰을 얻다니. 최근에 읽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도 그렇고 김상욱의 에세이들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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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상형문자 b판시선 19
고명섭 지음 / 비(도서출판b)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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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시인 그랑그루아가 떠오른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서술자, 혹은 호메로스 같은 시인일 수도 있다. 고명섭은 인류사의 파노라마를 타고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는 무대에 선 사회자 역할을 한다. 때로는 변사처럼 주인공의 목소리를 내고 때론 주인공 혹은 대척자나 주변인물들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시집을 읽었는데 역사극을 본 듯도 하고 심리와 상황 묘사가 탁월한 대하소설을 읽은 듯도 하며 새삼 짚어보는 철학자, 문학가, 역사 속 인물들을 가장 처절하고 부끄럽고 나약하고 비루한 밑바닥의 개인 서사로, 업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는 기분이 든다. 9000원밖에 안 되는 이 책은 마치 얇으나 깊은 마법서 같다.

 

고명섭 시는 모든 시가 서사시이다. 과거형 어미가 형식을 지켜 올리는 고대의 연극을 연상케 하기에 현대시적인, 시적인느낌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시를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적 탐색, 탐구의 여정을 호메로스 같은 고대 시인의 서술 형식을 빌려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시 속에는 플라톤이 등장하고(이데아, ) 비트겐슈타인의 서사가 있으며(헛간의 빛) 카프카가 담긴다(몰래 쓴 편지). 니체와 칸트를 아우른다. 그들 자신이 쓴 책도, 그 주장을 재해석한 책도, 소설로 그 삶을 재구성한 책도 세상에는 많지만 마치 그들이 되어 그 삶을 살아본 듯 그들의 몸이 되어 아픔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그들이 걸었던 흙길을 같이 걸으며 밤 늦은 시간 펜촉을 사각거리거나 열등감에 젖어 고개를 숙이는 이런 시는 없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많지만 그걸 통섭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한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자들은 더 많지만 그게 지금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고명섭이라는 한 평범한 기자는 어떻게 그런 경지에 갔을까.

이것을 뒤에 평론을 쓴 신형철은 ‘(고명섭은) 자신이 천착한 사상가와 예술가의 삶의 한 국면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을 본 것이었으리라.’ 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시 는 이런 고명섭의 목적의식을 담고 있는 듯 보인다.

 

무너진 집, 돌담 옆에 주둥이를 잃어버린 항아리

물기 없는 흙바닥의 아가미처럼 헐떡거리는 아가리

병조각 널린 길에서 발가벗고 뒹구는 몸뚱이

벌레 먹은 세월이 엉겨 썩어 들어갈 때

책의 문을 열면 굴뚝새 한 마리 푸드덕 날아갔다.

책 속으로 난 길은 하구의 강줄기같이 흩어지고

숲은 깊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뭇가지 사이 잎사귀를 뚫고 햇살 몇 가닥 들어와

큰 나무뿌리의 이끼에 맺힌 빗물의 잠을 깨웠다

이 숲 어디엔가 손길 닿지 않은 유적 묻혀 있지 않을까

...

 

책 속으로 들어가 책과 책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

멋대로 난 풀잎의 혓바닥이 종아리를 스치고

사금파리들이 발가락에서 피를 핥았다

손전등을 들고 더듬어 보는 숲의 상형문자

입 꼭 다문 문자들이 눈을 깜빡거렸다. - 고명섭 <상형문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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