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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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가 영면했다. 한참 그의 <삶의 격>을 읽던 중이었는데 그 소식을 듣는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죽음이 혹은 아픔이나 몰락이 내게 영향을 줄 때가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좋아했는데... 그의 마지막 작품이래서 이 책을 집어들었는데... 그의 명복을 빈다. 새삼스럽지만, 열심히 살았던 훌륭한 사람도 언젠가는 죽는구나...

 

이 책은 몹시 두껍고 몹시 가볍다. 언어의 무게라면서, 너무나 많은 상념과 많은 스토리와 많은 등장인물을 지닌 이 책이 부피에 비해 가벼운 건 뭔가 아이러니하다. 이 책 속에는 이야기들을 쪼개면 다섯 권쯤 나올 법한 많은 이야기들이 농축되어 있다. 가끔 한 권의 값어치가 없는 책, 혹은 저자에게 감사해야 할 만큼 진하고 묵직한 가치를 지닌 책이 모두 한 권이라 불리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이 그렇다.

 

작가의 페르소나일 것 같은 주인공 레이랜드는 번역가였다가 작가가 되는 인물이다. 나도 말과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 글과 책이 없으면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만큼 거기 매달려 산다. 그래서 주인공 레이랜드가 깊이 천착하는 언어를 탐구하는 일의 즐거움을 조금은 안다. 언어를 탐구하는 시간을 온전히 즐겼던 주인공의 감정, 평온, 집중에 공감한다.

 

이따금 내 내면에서 만사가 무너지고 모든 게 힘들 때면 단어들로 돌아가고 싶어. 한쪽 구석의 작은 책상에 지금 작업 중인 번역 원고가 놓여 있어. 난 가끔 그곳으로 도망치지.

 

번역을 하면서 알맞은 단어를 부단히 찾을 때만 현실감이 흐려지지 않고 온전했다. 오로지 그때만 모든 것이 괜찮았고 완벽한 현재였다(글을 가지고 놀다 보면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완벽한 현재, 완벽하게 나인 시간...).

 

너무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죽음을 앞두었다가 다시 살아나 느끼는 삶의 희열이 주제인지, 레이랜드의 아들과 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사회적 성취에 앞서는 진정한 자아의 중요성이 주제인지, 주인공의 선행을 포함하여 소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선량한 부자들 이야기가 핵심인지, 안락사(존엄사?)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인지 헷갈린다. 다만 그의 전작 <삶의 격>처럼 인간의 존엄에 대한 숙고가 보인다.

 

특히 은 위반했지만 가난해서 의료 시스템에 접근하기 어려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의료 지식을 활용했던 약사 버크, 사랑하는 아내의 존엄한 죽음을 도와야 했던 남편들의 이야기는 이라는 테두리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진정한 정의, 혹은 도덕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작가의 본령이 철학 교수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확대해서 해석하면 고결한 사람은 그가 부자이거나 지식인이거나 의사, 법률가라서가 아니라는 것, 감옥을 살았거나 가난을 살고 있거나 범법자가 되거나 혹은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혹은 식당에서 음식 서빙을 하더라도 얼마든지 고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그런 옆 사람들을 알아본다.

 

그런 많은 장면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러시아에서 망명(?)한 안드레이가 감옥에서 출소한 후 레이랜드와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그를 번역자로 초청할 때 도스토예프스키 <백치> 초판본을 선물하면서 낭독을 권유하는 장면. 안드레이는 이미 이탈리아어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모국어를 가장 모국어답게 구사한 문학작품을 읽게 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존중하는 장면이다. 낭독하는 안드레이는 자신의 권위를 되찾았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의 권위가 아니었다. 그의 권위 전체, 한 사람 전체의 권위였다.’

 

페터 비에리는 이 글을 쓸 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레이랜드가 겪은 뇌종양의 공포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담은 걸까? 나이가 들어가면 누구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직접 몸의 쇠락이나 병고를 겪으면 그 성찰은 그야말로 리얼이 된다. 주인공은 오진으로나마 진정한 죽음의 공포와 성찰의 터널을 빠져나온다. 그래서 맛본 삶은 더욱 귀할 것이다.

 

이제 그는 여기 앉아 어두운 맞은편 집을 건너다봤다. 집만 어두운 게 아니었다. 정원 문에서 현관문 사이에 있는 전등도 예전처럼 불이 꺼져 있었다. 삶이 끝난 후의 어두움, 시간이 더는 흐르지 않는 암흑이었다.

 

조금 전에는 뉴스를 보려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처음 몇 장면을 보자마자 저런 것은 나와 더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단절(죽음이 임박한다면....).

 

이제 다시 미래가 생겼으니 시간을 낭비하며 지낼 작정이었다. 무엇도 하지 않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느끼고 싶었다. 숨도 못 쉬며 종말을 향하는 게 아니라는 것, 뭔가 미루어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 느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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