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창우 시를 노래하다 세트 - 전2권 백창우 시를 노래하다
백창우 지음 / 우리교육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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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3 남자아이들. 3월 첫단원부터 시다.

변영로의 '논개'를 배우기 앞서, 500여년 전 짧게 살다간 한 여자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다.  매혹적이었을 그녀, 자기 힘의 몇 배나 되었을 몸부림치는 왜장을 끌어안고 자기 자신이 돌아오지 않을 추가 되어 가라앉았다는 그녀, 석류 속 같은 입술이 붉고 고왔을 그 사람....

우리는 가보지도 않은 진주의 남강에 꽃잎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그 여자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하고 나서 시를 펼쳤지만, 읽지 않았다. 우선, 백창우가 곡을 붙이고 홍순관이 부른 시노래 '논개'를 먼저 들었다.

물론 나는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 이 노래를 혼자 들어보았다.  이 북시디의 책을 아껴아껴 다 읽을 때까지도 노래는 듣지 않았던 이유는 백창우의 글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지점토나 석고로 빚은 듯 희고 고운 책 표지(사진 속의 기타치고 있는 토우와 꼭 같은 질감의 책이다) 안에 페이지마다 백창우는 순진난만, 자기가 좋아하는 시 이야기를 펼쳐놓았는데 거기에는 그토록 내가 찾아헤매던 박정만도 있고 내 가슴을 에이던 기형도가 백창우의 가슴도 에였다 하고 내가 가장 슬플 때 곁에 있던 최승자도 안고 가고 있었다. 그가 다시 들려주는 고정희를 읽으며, '우리의 아기들은 살아있는 기도라네'를 다시 읽으면서 난 울기까지 했다.

우리 아기에게

해가 되라 하게, 해로 솟을 것이네

별이 되라 하게, 별로 빛날 것이네

나는 왜 이 빛나는 따뜻한 귀절을 읽으며 자꾸 눈물이 났을까 모르겠다.  내 아이들에게 이렇게 주문처럼 외기만 하면 정말 그렇게 자라준다면, 입이 닳도록 그렇게 외일 것이다. 내 손길 내눈길 무엇으로라도 내 아이들에게 폭군이 되라 인형이 되라, 절망이 되라, 절망이.... 그렇게 외인 적은 행여 없을까 슬프고 두려워서 울었다.

하여튼,  그렇게 그의 글 읽기에 빠져 노래 들을 염을 두지 못하던 내가 수업을 앞두고 급히 '논개'만 찾아 들었다. 그리고 수업에 들어가 노래를 들려주었다.

백창우의 노래보다도 그가 쓴 시를 더 좋아하던 나는 그가 지은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나 '벙어리 바이올린'이나 다 매력적인 노래들이라고 생각해왔고 그의 동요들도 많이 사랑해왔지만 어디까지나 그 노래의 매력은 소박함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논개'는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연상시키는 분위기 위에 비장미 넘치는 홍순관의 목소리가 그야말로 강물처럼 흐른다. 간주로 나오는 가야금(거문고?) 소리는 기생이었던 논개와 촉석루 위 죽음의 연회를 연상하게 하는데 경쾌한 리듬에도 불구하고 음과 음 사이를 빗겨 가고 있는 음률 때문인지 묘하게 비장감을 더해준다.

겸손하고 나즉한 그의 글들 때문이었을까, 그의 소박한 차림과 행적 때문이었을까, 백창우가 재주는  많으나 욕심은 없는 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그 깊이와 고급스러움에 새삼 소름이 끼친다.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며  이동원의 '향수'며 조하문의 '해야', 하덕규의 '가시나무 새' 심지어 송창식의 '푸르른 날'까지 자주 노래를 들려줘 왔지만 나는 그날 그저 '좋기만 한' 노래가 아니라 '아름답고 신비하고 고급스런'  시와 노래와 연주가 어우러진 음악을 들려줄 수 있어 행복했다.

교사로서 욕심을 부려, 그가 교과서에 나온 시들을 노래로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본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으면 어떠랴. 우린 도종환을 배울 때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도종환의 또 다른 시노래를 들을 것이고 김용택이나 정호승, 나희덕, 김기림도 그럴 것이다. 아니, 교과서에서 시를 배울 때가 아니더라도 나는 자주 백창우를 들려줄 것이다. 아니, 시에 노래에 그 뒤에 숨어 자기 모습은 비추어 보이지 않을 그이므로 '백창우를 들려줌'이라 말하면 안 될지도 모르겠다. 시는 노래와는 다른 것이지만 시가 노래를 만나 더 살아난다면 분명 기쁘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시가 화폭 속에 죽어 있는 그림이고 썩지 않고 관 속에 누워 있는 연인이었다면 노래는 그것을 되살아나 춤추게 하는 어떤 힘이다. 백창우가 선별한 시들은 물론 시 자체로 아름답지만 거기에 그는 호흡을 불어넣었고 색을 입히고 가락을 돋운다. 시를 더욱 아름답게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사랑 아닌가. 사랑하는 존재를 더욱 살아있게, 빛나게 해 주는 작업. 백창우는 노래하는 이이지만 진정으로 시를 불러일으키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能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가 만든 노래들을 들려주면서 나의 아이들, 나의 제자들, 나의 아기들에게 해가 되라, 별이 되라, 희망이 되고 길이 되라, 온 마음을 담아 간절히 외일 것이다. 이것은 내가 백창우를 가장 열렬히 읽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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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겐 2006-05-10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 친구중에 특수학교 선생님이면서 글쓰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백창우 선생님을 무척이나 존경하고 좋아하던데.. 전 관심이 없어서 그랬나 백창우가 누굴까 하고 말았었답니다..
 
사람 VS 사람 - 정혜신의 심리평전 2
정혜신 지음 / 개마고원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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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그의 칼럼을 읽고 이름을 다시 본 사람이 딱 세 명 있다. 박노자, 최재봉, 정혜신.

글이란 게 완전무결한 문장의 신뢰도도 중요하고 이슈를 잡아내는 능력도, 남들과 다르게 보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주제의식도 중요하지만 문학적 매력을 풍기는 표현력 그게 또 중요하다.  그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물론 글쓰는 이의 건강한 의식일 것이다. 정혜신 글을 읽을 때마다 그 모든 것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때로는 너무나 과감한 소재를 언급하여 제목만 보고 아슬아슬할  때도 할 말 다하면서 (적들에게) 비판할 구석을 주지 않는 총명함에 감탄한다.

그래서 내가 관심둘 필요조차 없는 인물들이 언급되었음에도 신뢰를 가지고 이 책을 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을 얼마나 정확히 분석해내는  게 가능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좀 안다는 사람, 아주 좋아하거나 아주 싫어하는 사람 이야기들부터 읽어가기 시작했다. 정혜신은 예의 능력있고 바지런하고 체력 좋은(??)  성공한 사람들 특유의 2인분 어치의 능력을 가진 게 분명하다. 본업을 두고 글도 쓰고 또 내가 모르는 다른 활동을 할지도 모를 이 사람 언제 이렇게 시시콜콜한 자료들까지 다 수집해 두고 메모 정리 기억을 해둔 것인지.. 종종 '그의 소설 전부를 읽어 보았다'는 둥 '그의 노래 수천 곡 중에서' 등의 표현을 보면 아니, 문학과 근접한 전공과 직업을 가진 나도 다 안 (혹은 못)읽은 그 문학 작품들을 언제 다 섭렵하고 있었다는 것인지(그가 좋아하기는커녕 그 정 반대임이 분명한데도), 놀라게 된다.  문학 뿐이랴 영화는 노래는 공연은 방송은 또 어떤가 말이다.

대개는 극찬이요 그 안에 비판을 숨기는 것도 다수이지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것은 일단 작자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든 싫어하든, 찬탄의 념으로 먼저 다가가기, 다시 말하면 칭찬 먼저 하기 방법이다. 폭이 넓고 비틀어지지 않은 칭찬은 그 다음 어떤 비판도 공정하고 진심어리게 느껴지게 한다.

또 하나 이 글에서 언급되는 이 대단한 사람들의 삶은 사실 내가 그다지 좋아하거나 따르거나 부러워하는 형태의 삶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배웠다. 여기 언급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참으로 치열하고 열심이라는 것이다. 물론, 정신분석학적으로 측은지심을 일으키는 불쌍한 영혼들, 게다가 사회적으로 매우 치명적 영향력을 지닌 영혼들이 많기는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뒤에 이해해 줄 수밖에 없는 영역들이 있으리란 것을 정신과 의사다운 시선으로 잡아낸다는 것이다. 나는 심은하에 별 관심은 없지만 그토록 대중적 사랑을 받고도 지켜낼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와 영역의 고집이 매우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과 너무 다른 김민기의 내면에 대해 생각하며 사람에 대한 '실례'란 가끔 지나친 칭찬 혹은 믿은 혹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찬탄에서도 비롯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아무리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도 '내가 칭찬받고 싶은 영역'에 대한 것이 아니면 무의미하고 내가 진정 빛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의 어떤 구석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세상 모든 평가를 물리치고 그 사람을 신뢰하고 사랑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영혼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 믿고 사랑하고 한 생을 사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정혜신이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본 김민기의 뒷모습은 그런 생각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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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겐 2006-03-07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풀꽃선생님 안녕하셨지요? 전 이책을 다른 각도에서 읽었었나봐요...
날씨가 많이 풀려서 좋네요.. 바람은 살짝 불어주지만 따뜻한 봄볕이 마냥 좋던걸요.. 개학해서 이제 바쁘시겠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구요.. 전 요즘 책을 통 볼 수가 없답니다..
 
달걀과 밀가루 그리고 마들렌 우리문고 12
이시이 무쓰미 지음, 고향옥 옮김 / 우리교육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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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에 대해 자꾸 친숙함이 느껴지는 것이 편안하지만은 않다. 일본 영화, 애니메이션, 일본 소설 들이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솔직히 이쁘고 가벼운 그 무엇이 느껴진다. 일본 대중 문화를 접할 때에도 엽기적이고 독특한 무엇을 주로 접하는 사람도 있겠으니 이것은 순전히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이 소설은 화자가 중학생 '딸'이지만 어쩐지 엄마 냄새가 많이 난다. 글쓴이는 그 딸 또래의 자녀를 둔 사람이고 소설 속 '엄마'한테 자신을 투영했을 거라고 상상해 본다. 사춘기 소녀들의 시니컬함을 서술어체로 선택할 때, 작가는 자신의 중학교 시절을 회상했을 것이고 자신의 딸 또는 그 또래 소녀들의 요즘의 말투나 정서를 유추했을 것이다. 그것이 몰입의 경지까지는 도달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달걀냄새가 좀 남아있는 마들렌처럼.

그리고, 일본 대중문화에서 많이 보이는 '프랑스 선망'도 좀 보인다. 엄마가 프랑스 요리를 배우러 간대서가 아니라 나호에 집 분위기도 그렇다. 그런 컴플렉스는 우리도 가지고 있겠지.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도 엄마 냄새가 난다. 나호의 사춘기적 고민을 이야기하기보다. 나호 엄마의 자아찾기가 많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몇편의 동화를 쓰면서, 과연 누구를 위해 이 동화를 쓰는가 생각해 보았다. 동화는 아이들이 읽는 것이지만 나는 일기처럼 엄마로서 나,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나의 정서를 어딘가 드러내고 싶었다는 것을 솔직히 스스로 깨달았다. 많은 사람들의 글쓰기의 목적이 사실은 자기 위안, 자기 발견, 독백 들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청소년 문고이지만 바로 내 또래의 한, 사춘기 딸을 둔 중년 초기의 서늘한 한 여자의 초상으로 읽는 편이 차라리 편했다고 고백한다. 이 책이 청소년 문고로 성공했는지는 그 또래 아이들에게 다시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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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주 한 잔 합시다
유용주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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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12년만에 전화를 했다. 열심히 두레일기를 썼던 종화. 동그란 눈과 웃는 입매가 귀여웠던 '쫑아'.

아이들이 오랜만에 전화를 걸면 첫마디가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이다. 나라도 그런 말을 할 것이다. 사실 기억력 특히 사람 이름 기억하기에 취약한 나는 예고없이 제자의 방문이나 전화를 받으면 당황하는 것도 사실이다. 전화를 받고 약속을 하고 만나면 앨범을 보며 그 아이와의 추억을 복습하기도 한다. 물론 99% 예외없이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아이들의 어린 시절 얼굴과 표정, 입성까지도 다 기억이 난다. 내가 가르친 아이 모두를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나를 다시 찾는 아이들은 기억할 수밖에 없는 어떤 인연이 있는가 보다.

쫑아를 모를 리가 없다. 스물 여덟 살이 된 청년 쫑아는 어린 시절과 많이 달라졌지만 입매가 여전하고 눈동자가 여전하다. 쫑아는 내게 유용주의 산문집을 보냈다.

국문과를 나왔지만, 대학 시절 시집을 손에 들고 다녔지만 내게 그 회색의 시절 감성을 울리는 시는 단 한 편도 없었다. 읽기가 그랬거늘 한 편 시를 썼을 리 만무했다. 그런 내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삼척에서 혼자 자취를 하며 교편을 잡던 스물 네 살 때였다. 딱히 외롭고 힘겹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살아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돌아온 자취방, 라디오도 TV도 없던 작은 방에서 처음 읽었던 시는 도종환이었던 것 같다. 저녁 7시면 가로등도 희미해 거리에도 못 나가던  그 즈음의 내 시에서는 그래서 도종환 냄새가 난다.

문학이 밥이 되던가? 미술이나 음악, 네가 좋아하는 어떤 길도 좋다고 아들에게 말한다 하면 사람들은 예술이 돈이 되기에 아들에게 권하느냐고 묻는다. 돈이 되기도 하고 전혀 아니 되기도 한다만 과연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고 나 스스로에게 물을 때 답은 돈이 아니다. 물론 찬 바람에 그냥 내놓아져 살아야 한다면, 세 끼중 한두 끼는 굶어야 한다면 이런 말 하지도 못할지 모르겠으나 내가 돈을 벌고 삶을 살 때 과연 단지 그것만으로 내가 산다 할 수는 없다. 끊임없는 나의 영혼의 궁핍을 채워줄 그 무엇은 통장이나 부동산은 아니다. 과연 문학이 없고 예술이 없다면, 아낀 돈으로 품에 안고 돌아오는 한 권의 시집, 소극장 구석에서 만나는 연극, 전시회장에서 만나는 나의 그림자가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이 엄혹한 '생활'을 견디고 '시대'를 버텨 과연 나 '산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삼척의 연탄불 꺼진 자취방의 아린 겨울을 이겨낸 그 시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유용주 이야기를 하자. 쫑아는 12년만에 연락이 닿은 내게 유용주의 "쏘주 한 잔 합시다"를 보내왔다. 제자들을 만나면 책을 사서 들려보곤 하던 내게 거꾸로 책을 보내온 드문 제자가 그이다. 유용주는 한겨레 신문을 통해 자주 만났지만 특별히 나와의 접점을 찾은 기억은 없던 작가이다. 쫑아가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한참은 그랬을지 모른다. 그의 글을 곱새겨 읽자니 어쩌면 내가 아이들 앞에서 민중을 이야기해도 날바람에 표피 한꺼풀 벗겨낸 상처가 아프듯 적당히 당의정이 입혀지지 않은 삶의 날피부는 아직 두려운 무엇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미친 듯이 땀을 흘려 돈을 벌어들이고 새벽까지 자기 영혼을 치열하게 만나는 유용주, 성질이 나면 누구든 붙들고 주먹다짐이라고 하고 싶어지는 펄펄 살아있는 유용주, 그런 삶에 비해 그의 글발은 참으로 많이 다듬어져 있다. 결코 겉멋이 들었을 사람이 아니지만 얼마나 새벽책상 앞에서 벼렸는지 그의 글발은 생생하면서도 유려하다.  바로 그라면, 문학이 왜 단지 밥이 아니고 영혼의 치유를 위한 불가피한 처방인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삶이 아픈 사람이어야 그 고달프고 바쁜 삶 끝에, 이렇게만 살 수 없는 그 힘겨움을 덜어줄 진정하고 유일한 것이 돈도 아니요 명예도 아닌 문학이고 예술인지를 알 것이다,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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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겐 2006-03-07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등학교때 선생님과 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선생님 저 기억하세요로 시작했는데요... 거진 20년이 되어 오는데 절 기억해주는 선생님때문에 눈물 난 적 있어요..
 
수상한 매력이 있는 나라 터키 240+1 - 240박 241일 터키 체류기
미노 지음 / 즐거운상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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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조만간 그리스 터키 쪽을 여행할 마음이 있기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여행하다가 터키 남자의 사랑을 받았고 결국 거기 7개월 이상 머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심상치 않았고 단순한 여행 안내문과는 다른 구성도 마음이 끌렸다. 책 속 터키 사람들은 막연하게 알았던 이 나라의 매력에 더욱 마음을 빼앗기게 만든다. 사진 속 파묵칼레의 온천 풍경은 내가 가 보고 싶은 사막이나 설원의 나라처럼 이 지구의 것이 아닌 듯이 보인다. 게다가 유적지가 아니라 시장 주변의 사람 냄새가 풍겨오는 듯해서 더 좋았다. 된장을 공수해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된장찌개를 팔았다는 이야기도 재밌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각이 든 것은,

글쓴이의 얼굴은 사진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쓴이를 순수하게 사랑했다는 그 터키 남자는 이름도(실명이겠지?) 얼굴도 여기저기 보이는데 작가는 자기 이름도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 킥킥거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거의 다 읽다가, 읽으면서 이 국경을 넘은 사랑을 어떻게 마무리했을까 궁금해 하다가, 갑작스레 그 남자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결말에서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어쩌면 이것은 소설이 아닐까? 난 여행기 혹은 여행 안내문이 아닌 한 도발적이고 창의적인 멋진 여자의 상상으로 쓰여진 소설을 읽은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녀는, 전혀 소설이 아닌 척 꾸며 쓴 완벽한 소설의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지나가던 이국의 여행객에게 드닷없이 사랑공세를 폈다는 터키남자나 그랬다고 마냥 240일을 거기 눌러붙어 살았다는 여자나, 된장찌개를 팔았다는 이야기나 황당하기 짝이 없다.

 

황당해서 거짓말이란 뜻은 아니다. 그건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내용도 아니다. 거짓말 같아서 더더욱 재밌었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국의 연인을 그리워하다 비명횡사했을 그 터키 남자의 사진 속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보고 또 봤다. 작가는 이 남자의 사랑을 즐겼을지언정 그 자신도 이 남자를 사랑한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글 군데군데 그런 가벼운 필치가 느껴졌기에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나라면, 내가 이 작가였고 나 역시 이 남자를 사랑했다면 그렇게 이루지 못하고 떠난 남자의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난 책으로 쓰진 못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나라면, 그의 사진은 아파서라도  이렇게 책에 버젓이 싣지 못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때, 그 책의 무게와 기대치를 미리 가늠하고 읽지 않는가. 재밌게, 정보를 얻으며, 터키 여행에 대한 즐거움의 애피타이저로서 이 책을 읽을 수 있으리라 했던 내게 마지막에 던져준 무거움은 약간의 배신감마저 준다.

 

그렇다고 이 책을 혹평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나는 조만간 터키를 갈 것이다. 멋진 여행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꼭, 파묵칼레에 가 볼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가 사랑했었다는, 책 속에서 읽은 이야기는 그 여행에서 기억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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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겐 2006-03-07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전 아마도 선생님의 뒷길만 따르겠는걸요.. 제가 목표 하는 도시가 융프라우고 다음이 터키의 이스탄불인데요.. 전 터키하면 이스탄불만 떠올리다 이 책을 보면서 새로운 도시에 대한 흥미가 많아 졌어요.. 선생님.. 사랑은 의심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