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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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전공했지만 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다. 문학과 관련 없는 영역을 두루 읽는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마치 몸이 비타민의 결핍을 느끼듯이 최소한의 문학적 영양을 섭취할 때가 됨을 안다. <사소한 부탁>을 읽으면서 결핍된 비타민과 무기질을 섭취한 것 같아 몸이 행복했다. 한 권의 책으로 여러 권의 시집, 프랑스 문학작품을 읽는 것 같았다. 황현산 선생의 문장을 가르침의 목소리로 여기지 않고 그 자체 문학작품을 읽는 것 같으니 더더욱 행복하다.

 

덧붙여, 그의 세상 보는 안목과 지혜를 만나는 것은 세 번째의 기쁨이다. 오래된 고민이기는 하지만 문학이 과연 세상을 위해 어떤 보탬이 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리고 소포클레스가 신화 속 오이디푸스를 그저 비극적 인물이 아닌 운명에 맞선 사람으로 해석하는 장면은 신선하다. 고등학교 시절 본 연극 <안티고네>가 떠오른다. 최근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이 떠오르기도 한다. 평가는 역사가, 아니 어쩌면 영원히 편파적 평가에 묻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결기를 품고 운명에 맞서는 이들이 있다. 영원한 비극이로되 사람들 가슴에 울림을 주는, 문학 속 오이디푸스 같은 이들.

 

소포클레스 신화로 비극을 만들기 위해 주어진 규칙을 지키고 이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는 시종 운명에 쫓기는 인간이었지만 소포클레스 비극 속의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성찰하는 사람이 된다. 그에게 운명은 신탁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수사에 따라 재조직된다. 그는 자신이 범인으로 밝혀지려는 상화에서도 수사를 고집하고 진상이 밝혀진 이후에도 그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그는 패배하면서도, 운명의 농간에 덧붙이는 이 작은 행위에 의해 거대한 운명의 폭력 위에 인간의 위엄을 세우고, 마침내 운명 앞에 선 인간의 패배를 인간의 위엄으로 바꾼다.

 

최근에 나는 정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정치 뉴스 때문에 울적해지는 일도 많다. 20대 때는 그것이 정치가 아닌 독재에 맞서는 역사적 책무뭐 이런 것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치적 사건이 나라의 명운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위태로운 시기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사건들, 나라 걱정들이 나를 울적하게 만들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이 무엇일까. 사소한 정책의 차이나 태도의 차이만은 아닐 것이다. 그에 대해 황현산 선생은 이렇게 대신 답해주신다. 최악은 왕, 혹은 독재자 개인을 위해 국가가 존재했던 시절, 그 단계를 넘어서면 독재자조차 자신의 신념 때문에 국가를 위해 개개인에게 무릎 꿇기를 강요했던 시절(박정희나 스탈린이 개인의 욕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국가주의를 강요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 단계가 넘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식민주의의 그림자가 넘실거린다. 지금의 정치는 국가와 시민, 국가의 자존과 식민주의 사이, 특정 세력의 권력 독점 대 시민 권력 사이에서 분기점을 넘는 중이다. 그래서 80년대와 같은 피어린 절박함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저쪽 사람들도 그렇겠지)이 주말을 반납하고 기를 쓰고 매달리는 것이리라.

 

국가가 국가를 위해서만 존재할 때, 그 나라는 비록 독립국이라도 식민지와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정치적 절박함은 이렇게도 이어진다.

 

구의역 김군을 제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들과 나향욱의 차이는 상상력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사람의 차이이며 슬퍼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가장 작은 감정까지 간접화된 사람의 차이이다.

 

단순히 인간적인 공감능력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가장 아픈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모자라면 내 세력, 내 기득권수호에만 매달릴지도 모른다.

 

엊그제 딸아이는 남자친구랑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고 왔단다. 자기는 논쟁을 피하고 싶어서 영화를 혼자 볼까 했는데 남친이 먼저 보러 가자고 했단다. 결론은... 둘 다 엄마 생각을 했단다. 페미니즘 논쟁은 뜨겁고 더럽고 아프지만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황현산 선생이 지금 살아 계시다면 다음 발언은 이런 페미니즘 논쟁에 대한 논평으로 딱 적합했을 것이다.

 

여전히 바뀌지 않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직장의 여성 동료에게,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성에게, 심지어는 만나지도 못할 여자들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여성다움이 사실상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학교에 있는 나 같은 이에게 꼭 필요한 말씀도 남겼다.

 

지배의 권력이 교육자의 자질을 확인해주지는 않는다. 가르치는 자는 지배하는 자가 아니며 배우는 자는 지배받는 자가 아니다.... 그 관계가 민주적일 때만 교육의 내용도 민주적 가치를 얻게 된다.

 

마음에 새기고 새겨야겠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특히 나처럼 마음엔 울분과 답답함이 가득하지만 내가 뭘 해야 할지, 잘하고 있는 것이긴 한지 자꾸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수많은 사람이에 남긴 이 말씀도 역시.

 

잊어버리지 않는 것보다 더 꾸준한 실천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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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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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지은이와 나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영어공부를 할 때마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나야 영어를 못하는 것이 생존이나 생계와 직결되지 않아 고통이 심하면 때려치우면 된다. 저자는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이 몸의 생존이었고 이방의 언어로 글을 쓰는 것은 영혼의 생존이었기 때문에 그 고통은 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리의 말과 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나는 소박하지만 자부심을 느끼고 산다. 그 입장을 뒤집어야 한다면 참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한때는 식민지였고 그보다 더 긴 세월을 동북아의 패권언어에 지배를 받으며 살아 말에도 글에도 생채기가 없다 말할 수는 없지만 사라져 가는 지구상의 많은 언어들에 비하면, 식민지 역사 속에 이미 사라져 버렸거나 위상의 강등을 당한 많은 언어들에 비하면, 패권언어에 아예 자신의 존재를 묻어버린 많은 언어에 비하면 충분히 자부심을 느껴도 된다고 생각한다.

헝가리어를 잃어버리고 자존감도 잃어야 했던 아고타 크리스토프와 달리 더 많은 책을 읽고 싶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외국어 공부를 하는 나는 자존감을 잃을 이유가 없다. 진도가 나가지 않고 성과가 적어 답답한 것은 그저 나의 언어공부머리가 좀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즐기며 공부할 일이다.

남의 절박함을 읽으며 상대적으로 내 처지가 덜 힘들다고 위로를 받는 일은 좀 미안한 일이다. 그래도 그 이유로 감사하다.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어떤 언어로라도 이토록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남겨준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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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 건축가 승효상의 수도원 순례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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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 때 스스로 작은 개척교회에 걸어들어 가 자발적 기독교 신자가 된 적이 있다. 사춘기를 맞으면 예수의 신성과 인간성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신앙을 접었지만 말이다. 또 초등학교 5학년 때 천주교 신자였던 담임 선생님 덕분에 수녀원 등에 체험활동처럼 반 아이들과 함께 가본 경험도 있다. 그런 경험들 때문에 지금도 신앙은 없지만 천주교적 정서에 친근감을 느낀다. 솔직히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으므로 성당을 다닐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주적인, 영적인, 신비한, 절대적인 어떤 존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존재에 대해 막연하나마 경외의 마음이 있기에 언젠가 신념이 생겨 그 품에 안겼으면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정서는 그러하되 이성이 따르지 않는다는 거다.

종교적인 경험과 상관없이도 성소가 주는 특별한 감성이 있다. 나 역시 이 책 <묵상> 속에 승효상이 언급한 <위대한 침묵>과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혼자서 도심의 성당에 찾아가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기도의 대상을 특정하지는 못한다. 그냥 못난 나를 엎드리게 할 뿐). 그런 내게 이 두툼한 책이 얼마나 매혹적이었겠는가. 특히 승효상이라니, 원래 건축학 에세이를 좋아해 이 책 저 책 읽어대는 내게 특유의 글솜씨로 우리를 매혹시킨 그 승효상이라니.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 책은 좀 실망스러웠다. 긴 글은 그렇더라도 사진이라도 좀 들여다보면서 마치 내가 수도원을 다닌 양 위안을 받고 싶었는데 사진이 너무 어둡다. 긴 글들은, 승효상의 건축학 에세이라기보다 여행기에 가깝다. 여행기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여행기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특정한 문화적 권력의 반열에 오른 이들끼리의 카르텔 같은 게 느껴지는 그 공부 무리며 여행의 조직이 이상하게 위화감이 느껴진다. 여행 중간에 늘 와인 파티를 벌이는 그들, 와인 레벨을 가지고 이탈리아의 웨이터들의 대접을 바꾸었다는 에피소드 등이 즐겁게 읽히지만은 않는다. 이 책은 이 가지고 있는 공익적 요소보다는 개인의 기록, 동아리들의 추억 공유를 위한 존재 이유가 더 크다. 마치 처음에 여행을 가기 전에 누군가가 짜주었다는 여행 프로그램 책처럼 말이다. 그걸 스스로가 아니라 누군가가 짜준단 말이지. 보기 좋게, 편리하게 매뉴얼 북으로 쓰라고. 그건 권력 아닌가?

그게 뭐 대수라고 불편하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좀 진보적이다 라고 말하려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수고나 불편을 딛고 행복을 느끼는 일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과 생활은 그럴 수밖에 없을지라도, 적어도 글로 자기를 한번쯤 검열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은 감출 줄도 알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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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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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나는 남혐, 여혐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있다. 여성인 내가 남학교 교사로 살아오면서 느낀, 직장에서의 여혐 혹은 비하의 피해, 일상 생활에서 느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모든 여성들이 그러하듯 나의 이야기만 모아도(상대적으로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차별이 덜한 직장임에도) 책 한 권이 될 것이다. 그런 측면과 더불어 젊은 남학생들을 가까이서 대하다 보니 그들이 느끼는 남녀역차별에 대한 불편한 마음에 대해서도 이해가 된다.

남자중학생들 사이의 여성혐오는 지금 도를 넘었다. 이 나이 때 학생들이 자기 외의 모든 대상에 대해 공격적인 면, 거기에 사회적 요인, 정치적 요인 등 모든 것들이 집약되어 그런 줄을 다 알지만 자신들의 잘못을 이해도 인정도 하지 않는 가해자이자 그 자신 어리석은 피해자가 되고 있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에게 어떻게 혐오표현의 문제점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나는 국어수업을 통해 혐오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차별의식, 열등의식과 연결되는지, 그것이 어떻게 인권의 문제인지, 남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이 어떻게 결국 스스로의 존중을 깎아먹는 것인지 가르치기 위해 토론도 하고 글쓰기도 하고 별별 방법을 다 쓴다. 당연히 이겨내야 하는 과정이지만 여자도 군대에 가야 할까라는 토론 이슈를 놓고 수업을 할 때 그들로부터 쏟아지는 독설을 듣는 것이 참 힘겨웠다.

남자가 오히려 차별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남학생들에게, 책 속의 이 구절을 활용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남혐과 개독도 폄오표현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런 문제의 핵심은 소수자 혐오의 경우처럼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가령 미국에서 백인들에게 덩치 크고 미련한 백곰이라고 외쳐도 그들이 정신적 고통을 야기하거나 이미지를 고착시켜 백인 차별을 조장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가 사장에게 한국사람들은 사장님처럼 다 게으른 모양이네요.’ 라고 말한다고 한국인 차별이 될 수 없다. 이런 표현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혐오표현이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혐오표현은 소수자, 약자에게 향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접근을 위해 남중생들이 좋아하는 힙합을 예로 들었다. 힙합에는 디스라는 게 있다. 상대방 래퍼를 까는것이다. 디스와 혐오표현은 어떻게 다를까를 놓고 토론을 해보았다. 학생들 스스로 혐오표현이 약자를 향한 것임을 알아낸다. 강자에게 향하는 비판과 약자에게 향하는 비난의 차이도 토론을 통해 알아낸다.

 

이 글을 쓰기 방금 전,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복도에서 *년아!’ 하는 소리가 들린다. ‘들린다, 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너무나 많이 들린다. 여학생도 없는 학교에서 저런 말이 들리는 이유가 뭘까? 남학생들끼리 ‘~욕을 하기 때문이다. 뒤돌아서 방금 그 말을 한 학생을 불렀는데, 평소 욕 좀 하고 말썽 좀 피우고 껄렁대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얌전하고 모범적인 학생이다. 그만큼 저 욕이 만연해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욕하는 청소년의 문제 원인은 사회적 요인과 어른들에서 찾아야 한다지만 정말 이럴 땐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싫어진다.

 

 

우리 학교는 일 년에 두 번 교사상담연수를 한다. 심리학이나 상담의 기술에 대한 연수도 하지만 학생들과의 대화법이나 올바른 훈육법에 대한 연수도 했다. 지난 학기에는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 모든 교사가 읽고 학생들의 언어생활 지도에 대한 토론을 해보았다. 연수는 늘 토의와 토론으로 그친다. 문제가 심각함을 인지하고 원인을 분석하지만 대안을 애매하고 실천은 전무하다. 대개의 교사연수가 그러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이어지는 행정적 실천 말고, 정말 교육적인 실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이번엔 꼭 대안을 내자, 그리고 그것을 꼭 실천하자, 고 다짐했다. 모든 교사가 모든 프로그램의 작은 부분이라도 맡아서 준비하고 진행에 힘을 합쳤다. 좋은 말을 모아 캘리그래피로 써서 창문에 붙여도 보았고 말투가 거친 학생들은 따로 교장교감이 책을 한 권씩 선물하며 상담도 했다. 담임 선생님들은 아침 시간에 긍정적인 인사말로 하루를 시작하는 행사도 했다. 학생회의 캠페인도 있었고 듣고 싶은 좋은 말을 모아 나무에 거는 예쁜말나무행사도 했다. 바른 말을 사용하는 학생들에게 상도 주었다. 악플의 심각성에 대해 토론하고 좋은 댓글도 만들어 보았다. 그래서 정말 2학기 개학 후 한 달쯤은 학생들도 조심하는 듯 보였다.

물론 그런다고 뿌리가 뽑히진 않을 것이다. 우리 선생님들 가운데 나온 말 중 교사들 스스로 우리의 말을 돌아보자. 학생들에게 ~!’라고 부르지 말자. 교사가 학생에게 욕을 하거나 모욕감을 주는 말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들이 듣겠는가?” 하는 것이 있었다. 많은 선생님들이 공감하면서, 벌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어 깨닫게 하는 방식을 고심했다. 교사연수를 하면서 얻은 감동이 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학생들을 어떻게 규제하고 벌줄까를 고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좋은 말을 많이 듣게 하여 욕설과 혐오표현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나누었다. 이 책의 저자도 그렇게 말한다. 물론 아래의 근본원인 제거가 결코 쉽지 않으며 그거는 그거대로 고민하더라도 학교와 가정에서는 뭐라도, 뭐 작은 일이라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지만 말이다.

 

혐오표현도 금지하고 규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혐오표현을 낳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고 사회의 내성을 키우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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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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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개인의 것일 수 없겠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발화와 문장은 개인의 입과 손을 통해 나오니 말이나 문장에는 개인의 목소리가 들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교정교열을 거치다 보면(정상적인 문장이 되기 위한 기준을 통과하다 보면) 그런 개인의 목소리는 들어있지 않게 되는 것 아닐까...

아주 뛰어난 문필가의 경우라면 비문일지라도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고스란히 살려줄지도 모르고, 그런 문장조차 칭송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의 보통 작가들은 비문혹은 정상적이지 않은 문장이라는 이유로 자기 문장에 대한 수정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나마 뛰어난 교정교열작가를 만나면, 자기만의 개성이 사라져 버린 아까운 마음과 더불어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은 것 같아 기분은 썩 좋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기라도 할 것이다. 물론 교정교열자와 논쟁이 붙거나 수정된 문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그 이의 수필을 나오는 족족 읽는다. 문장이 좋다기보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그리고 취재력이 돋보이는 생동하는 글을 쓴다. 그런데 어떤 여행기를 읽다가 경악했다. 그이의 글 같지 않았다. 지나치게 짧은 문장도 어색했지만 비문이 너무 많았고 쓸데없는 쉼표가 많다. 그렇다면 여태껏 좋은 교정자를 만났다는 것인가? 이 책은 너무 급히 나왔던 걸까? 어쩌면 이번 글은 원래 유난히 비문이 너무 많아 도저히 손을 못 댄 걸까. 혹은 교정자나 데스크가 글이란 게 원래 글쓴이의 개성을 살려야 좋은 글이라는 철학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나는 편집자의 힘을 믿는다. 책을 너댓 권 냈지만 늘 편집자와 이야기를 많이 나눌수록, 편집의 한 단계, 한 단계를 거칠수록 내 글이 더 나아지는 것을 느낀다. 마치 도자기를 빚듯이 공이 들어간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도 자기 글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편집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서 나온 책은 마치 정성을 다하여 키운 좋은 부모 밑에서 잘 성장한 아이처럼 빛이 난다. 그리고 아무리 교정교열을 거처도 원 저자의 향기는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그런 경험을 하는, 편집자를 믿는 작가들도 그래도 내가 쓴 원글에 대한 집착이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은 사람이 내놓은 역작, 창조물, 작품 들 중 가장 영혼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작곡이나 그림은 남의 손에서 교정교열되는 과정이 없건만 책은 왜 그러한가, 잠시 의문이 들긴 하네...

저자인 전문 편집인 김점선 씨의 이 말을 인용하며 위 질문과 아쉬움에 대한 답을 대신하련다.

 

자기 글에서 이상한 부분을 빠짐없이 짚어낼 만큼 완벽하게 객관적인 눈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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