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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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거의 다 읽어갈 무렵 의문이 생긴다. 이 책이 고등학생 및 대학생 필독도서라고? 읽기 어려운 문장은 아니지만 너무 방대하고 일반인이 읽을 필요가 없는 자료들로 가득한데? 여기에도 그 흔한 한국식 출판문화의 폐해가 작동한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든다. 출판사나 소위 서울대 신입생 교양도서 목록등등이 행한 문화 권력의 어두운 그림자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좋지 않은 책이라는 건 아니다. 역사를 과학적으로(방대한 자료로써) 접근했다는 점, 이미 레비-스트로스가 구축하긴 했지만 문화나 문명의 우위라는 건 없다는 관점, 그 치밀성 덕분에 역사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점 등 가치로운 면이 많다. 긴 시간에 걸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함께 읽으면서 통시적으로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게 한 점에 있어서는 내 개인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독서였고. 하지만 혹여 내 제자들 중 똘똘한 아이들에게 고등학교 가서 읽어보렴하고 권할까 해서 살펴본 것에 대해서는 아니다라는 답이다. 역사, 문화인류학 등에 관심이 있다면, 역사선생이라면, 독서광이라면 읽어볼 만하지만 굳이 학생들의 필독도서여야 할까? 저변이 넓은 책으로서라면 <사피엔스>가 그 역할에 더 충실할 것 같다.

 

<사피엔스>가 역사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 철학과 정치 등 넓은 영역을 다루고 있다면 <, , >는 문명사를 깊이 파고든다. 저자 스스로도 말했지만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역사는 과학적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에 대해 방대한 자료로 과학적 논증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이 책은 내내 왜 서구 유럽의 문명이 결국 지배적 문명이 되었을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다. 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전적 우위 따위는 없다는 것, 환경적 조건이 가장 크다는 것, 그 환경적 조건의 출발은 가축화와 식물화, 즉 농경으로 정착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총과 금속을 개발할 수 있었는지라는 것이다. 이것에서 앞섰던 유럽은 결국 다른 지역을 점령하고 그 과정에서 병균으로 토착민들을 멸살하였다.

문명이 앞섰다는 점에서는 중국이 오히려 유럽보다 먼저인데도 유럽이 세계문명을 지배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유럽의 적절한 분열이 다양성으로, 경쟁으로 유럽 사회를 더 발달시켰다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에 내 견해를 더해 자본주의적 자유와 경쟁 문화가 더해져 유럽 문명의 우위를 결정지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결론을 주장으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방대한 자료와 수치, 통계를 논거로 입증하는 게 재레미 다이아몬드의 서술 방식이다. 아마도 이와 같은 접근이 흔지 않았기에 그의 저서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리라. 게다가 그는 유럽 문명이 지배적 문명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더 훌륭한 가치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학자로서 냉철함을 유지하며 글을 쓰지만 다양성이 인정된 덕분에 더 맛있어진 독일 맥주 이야기나 문명과 거리가 멀지만 생존을 위해 유럽인든보다 더 똑똑해진 그의 뉴기니 친구 이야기를 통해 전체주의적이고 지배주의적인 문명이 더 좋은 것은 아님을 말한다. 인류가 수렵채집 양식을 버리고 농경사회로 접어든 것도 결코 축복이 아님을, 자본주의적 효용성이 크다고 해서 사람들이 더 행복한 것은 아님을, 뉴기니의 문명이 유럽보다 뒤처져 보인다고 해서 그곳 사람들의 인간적 가치도 뒤처진 것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독자로서 의문을 갖고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저자는 중국이 조선, 항해술 등 각종 기술과 문명에서 유럽보다 앞섰음에도 근대에 발전에 있어서는 뒤처진 이유를 통일이라고 보았다.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중앙집권적 정부의 지시와 그에 일사불란하게 따르는 체제가 오히려 발전에 독(?)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왜 중국은 선진화된 나라였고 거대한 국가였음에도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화하고 점령하는 일에 쉽게 나서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지금의 유럽 문물은 다른 지역을 식민화해서 얻은 수많은 자원을 에너지로 해서 발달했다. 지금은 가장 인간적이고 품위 있어 보이는 지점에 도달했을지 모르지만 그 이전 역사에는 피가 묻어 있다. 하지만 중국은 유럽과 달랐다. 중국이 약소국을 괴롭히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중국에는 그런 식민지적 자양이 없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단순히 유럽문명의 발달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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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유럽 - 당신들이 아는 유럽은 없다
김진경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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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만나면 나의 글을 돌아보게 된다. 좋은 관점, 폭넓은 공부와 취재, 사회 변화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안목....

나는 <시사인>을 통해 김진경의 글을 처음 만났다. 그는 지면에서 코로나 시대의 유럽이 결코 세계인들의 귀감이 되지 못함을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 책, <오래된 유럽>에서는 제목이 의미하듯 더 이상은 이상적이지 못한 유럽의 민낯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준다. 프랑스에 사는 목수정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 사는 김진경도 폭넓은 안목을 지닌 한국 출신의 지성인이면서 관찰자가 아닌 생활인으로서 현지 삶을 살아가는 이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하고 귀한 글을 쓴다.

 

나는 지난 겨울 이후 지금까지 클래식이나 팟캐스트를 그림 그리는 일이 푹 빠져 살고 있다. 클래식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 음악, 여행, 미술, 과학 등 다양한 영역의 콘텐츠를 다루는 그 팟캐스트는 정말 재미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부분 유럽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원근법을 공부하겠노라고 출력한 사진 속 풍경은 아름다운 유럽의 거리다. 어떤 작가가 해마다 휴가 때는 유럽에 다녀온다고 해서 유럽에 대한 열망 혹은 열등감이 있는 이인가, 혼자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이 보고 뭐라 할 일이 아니다. 나에게도 유럽에 대한 환상이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질투가 난다. 그들이 누리는 문화적 아름다움, 깊이, 그런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는 속상함 같은 게 있다. 그들이 누린 풍요와 그들이 이룬 아름다움은 식민지 침탈과 전쟁, 약탈의 역사에 기반해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부러운 건 부러운 거다. 실상을 보았다고 해서 열망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의식과 감성 사이에서 괴리를 느낀다.

그런 와중에 김진경의 책을 만났다.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유럽이 결코 유토피아가 아님을 구체적인 사례와 근거를 들어 말해준다. 김진경은 코로나를 통해 드러난 공동체 시스템의 문제점뿐 아니라 스위스를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들이 교육, 다문화 정책, 이민자를 대하는 태도, 현실을 극복하는 대처 능력에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좋은 유럽인이라는 개념이 있다 한다. 아마도 내가 부러워하는 유럽적 이상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일 터이다.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수호하며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 함께 연대할 때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유럽인의 위상. 아마도 내가 열등감을 가지고 가장 부러워하는 측면일 것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성숙한 연대를 구현할 수 있는 곳으로서의 유럽. 그런데 저자는 과연 그런가? 당신이 아는, 혹은 꿈꾸는 유럽이 실존하는가?’ 묻는 것이다.

 

학교 교사이므로 특히 나는 유럽의 교육이 한국의 교육 못지 않게 계급의 대물림에 기여한다는 이야기에 눈이 갔다. 한국은 압축성장과 군부독재, 권력의 부패를 경험했기에 그런 현상이 개발도상국 발전과정의 필연적 부산물쯤으로 여겨졌지만 도대체 유럽은 왜? 자본주의가 발달했지만 복지와 사회민주주의적 국가 개입에 대한 성숙한 담론이 풍부했던 유럽이 왜? 책 속에 답은 없었다. 저자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적어도 유럽을 대안 삼지는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가령 의료보험제도. 미국의 허술한 의료보험 이야기는 하도 많이 들어 익히 알고 있지만 스위스도 별로 다를 바 없단다. 반드시 들어야 하는 의료보험 수가는 턱없이 높고 의료비는 더더욱 부담스럽다. 이쯤 되면 대안을 유럽이 아니라 변형되고 왜곡된 민주주의 제도 속에서 살아온 줄 알았던 우리나라에서 찾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유럽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경제 문화 예술 철학을 선도하고 있다는 점 말고도 다양성, 존중, 배려, 토론, 공감, 공정의 문화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슬람 문화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표현의 자유 논쟁에서 의문점을 갖게 된다. 뭐랄까, 꽤 멋진 아이인 줄 알았는데 궤변을 늘어놓는 위선자임일 밝혀진 것 같아, 혹은 알고 보니 잘난 것도 똑똑한 것도 아닌 친구가 허우대만 멀쩡했던 거였나 싶을 때의 실망감 같은?

 

이 책이 유럽의 숨겨진 면면들에 의문을 던진다고 해서 그들이 쌓아 올린 역사와 가치관이 다 무너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유럽은 끊임없이 우리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어쩌면 유럽이 진정 멋진 것은 그들이 이뤄놓은 것들이 아니라 그들이 성장해온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리하여 유럽 별 거 아니네가 아니라 이 친구들, 이렇게 끊임없이 논쟁하며 살아가는구나.’하는 깨달음을 준다. 그렇다면 허술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멋진 친구들이 맞는 거다.

 

기억에 남는 대목을 정리해 본다.

 

수많은 언어 폭력은 더 심한 사건의 전조현상 인정한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한국이야말로 가장 아슬아슬한 곳일 수 있다.

 

국가(國歌)의 다양한 의미 - 라 마르세예즈, 이탈리아 국가처럼 전쟁을 암시하는 가사, 영국 여왕을 칭송하는 영국 가사, 기독교 찬송가 같은 스위스 가사, 작곡가 친일 논쟁이 있는 우리나라 애국가 등 논란이 있다는 지적 국가를 부를까 말까에 대해서는 자율에 맡길 때 가장 논란이 덜 된다. 프랑스에서 베일 착용을 금지하자 베일 착용자가 오히려 늘었다는 것도 비슷한 이치인 듯 보인다. 어쩌면 논란 일으키기 좋아하는 이들이 음모에 놀아나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차별과 혐오에 대한 경계를 가르칠 때 수업자료로 쓸 이야기

(요약) 보든이라는 18세 여성이 길에 세워진 어린이용 자전거를 타고 급히 동생을 데리러 가려다가 그건 우리 아이 자전거야!’라고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내려놨다. 주민의 신고로 기소되었다.

프레이터라는 41세 남성이 가게에서 86달러어치의 물건을 훔쳤다. 무장강도로 5년 징역을 산 적 있던 전과자였다. 기소되었다.

이 둘의 재범 위험도를 판단해 형량을 정해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미연방은 위험평가risk assessments’라 부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돌려 재범율을 보고 형량을 정한다. 보든이 더 높게 나왔다. 왜냐하면 보든은 흑인, 프레이터는 백인이었기 때문

 

외국인 이민자의 범죄율은 확실히 높다. 스위스 인구 25퍼센트의 외국인이 범죄의 58퍼센트, 독인은 인구 2퍼센트의 불법 이민자가 전체 범죄 용의자 8.5퍼센트를 차지하는 등등. 하지만 이것은 가짜 투명성이다. 독일 14~30세 젊은 남성 인구가 전체 9퍼센트지만 이들은 전체 폭력 사건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러니 이민자가 아닌 젊은 남성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 이민자 차별이라는 이슈와 약간 동떨어진 이야기이긴 한데, 인류의 역사는 젊은 남자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삼아왔다 하고 교육의 모범국가라는 핀란드에서도 남자 중학생의 학력 저하가 가장 큰 교육 난제라 했던 것이 생각난다. 동서고금, 생물학적 이유 때문인지 젊은 남자는 사회 발전의 가장 큰 동력이기도 하고 트러블 메이커이기도 했던 것일까. 남중에서 수십 년을 가르치고 있는 나는 힘든 길을 걸어왔던 게 맞다.

 

이란이 반외세를 외치면 전통 회복을 주장할 때 자발적으로 베일을 쓰고 저항한 이란 여성들이 있었다. 페미니즘 민족주의. 1979년 성직자 호메이니를 내세워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혁명에 성공. 하지만 그 다음 새 정부가 반 서구를 기치로 내세우며 여성들에게 다시 베일 착용을 강요했다나. - 역사는 항상 이런 아이러니와 배신의 씨앗을 품고 진화 혹은 반복돼 오고 있구나 싶다. 꼭 가야 할 길이었지만 실수 혹은 오류를 범한 한국 페미니즘 운동과 위안부 운동에 대한 착잡한 마음이 오버랩된다. 하지만 오류가 있다고 가야 할 길을 아니 갈 수는 없다. 어떤 것은 실수이지만 어떤 것은 적들의 농간에 이용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 n번방 사건을 수면에 끌어올렸던 사람, 위안부 투쟁으로 평생을 살아왔던 사람들이 정치권에 가서 망가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이 해왔던 일들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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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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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박학다식이 죄는 아니잖아?’하는 말이 자꾸 머리에 맴돈다. 나는 수업을 위해서도, 나의 흥미를 위해서도 박학다식의 욕구를 채워주는 책들을 좋아한다. 이 책은 중학생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쉬운 문체로 쓰였을 뿐 아니라 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식재료 식물과 중학교 수준의 영양소 이야기나 역사 이야기(어쩌면 약간 야사가 아닐까 싶은 에피소드들도 나온다)로 구성돼 있다.

 

감자나 옥수수의 역사는 흥미로웠다. 식물은 인간에게 먹히지만 가축처럼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이 길들인 것이 아니라 그 식물들이 인간을 길들인 것일 수도 있다는 시각도 흥미롭다. 세상에는 너무나 맛있는 식재료 식물이 넘쳐난다. 특히 잎채소를 좋아하는 나는 자연이 준 풍요에 대해 진심으로 경이감을 느낄 때가 많다. 이 책은 그런 식물들이 어떻게 인간과 어우러지고 싸우고 버티고 여기까지 왔는지 보여준다. 때로는 악마의 식물 취급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굶주림과 싸우는 인간 곁을 지키고 때로는 사악한 자본의 현현으로, 때로는 구휼의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해온 벼, , 옥수수, 토마토, 감자 들, 그리고 남편이 너무나 사랑하는 고추와 콩(두부) 이야기가 흥미롭게 담겨 있다.

 

나무는 지각 변동으로 기후가 달라지자 오히려 풀로 진화했다는 내용에 무릎을 친다. 경쟁과 성취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커지고 우뚝해지고 많아지는 것만이 진화가 아니란 이야기다. 더 작고 여리게, 쪼개지고 부서지고 낮아지는 어떤 존재야말로 가장 진보적이고 진화적인 것 일 수도 있다. 벼 한 톨이 1000배로 성장하는 것도, 식물과 식물이 어우러지는 것도 라피도포라처럼 공생을 위해 모습이 달라지는 것도 혼자만 잘 살려는 성취의 단계에서 이룬 일들이 아니다. 때로는 그저 살아남는 것, 때로는 자기를 죽이고 다른 존재를 살리는 것, 때로는 지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오히려 진정한 진화라는 것이다. 세상을 좋고 나쁨, 이기고 짐, 성공과 실패로 나눌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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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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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을 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플래그(작은 테이프)를 붙여놓는다. 다 읽으면 그 대목을 다시 읽으며 노트북에 옮긴다. 그리고 서평을 쓸 때 다시 한 번 오타도 정리하고 내용을 묶기도 하면서 그것을 정리한 후 두 개로 복사하여 하나는 서평을 쓸 때 활용한다. 방금 전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서평을 쓰기 위해 이런저런 작업을 하면서 분명 지금 세 번째 보는 내용인데 이토록 새롭다는 것에 살짝 절망하고 있다(, 그런 내용이 있었지, 하고 떠오르기만 하지 어느 순간 언어나 문장으로 저절로 나올 만큼 기억하지 못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서). 아무리 내가 책 읽는 그 순간을 즐기는 사람이라지만 때로는 어딘가에 써먹어야 하는내용조차 그러면 어쩐다... 이렇게 노력이나 들인 공에 비해 성과가 적은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온 내 자신에 살짝 연민을 느끼면서.

 

이 책 서문에 저자가 오늘날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철학에 대해 가르친다.’라고 쓴 말을 변주하면 이 책도 오늘날의 많은 철학책이 그러하듯 철학을 논하지 않고 철학자와 철학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철학책을 읽을 시간과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살이 잘 발라진 접시를 내놓는 격이다. 그런 책은 전에도 세상에 많았다. 다만 에릭 와이어의 보통 사람같은 말투와 태도 때문에 위화감 없이 읽힌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철학자나 철학과 교수가 쓴 입문용 철학책들의 요점정리식 철학책과는 뭔가 다르다고나 할까.

 

사실 서문을 읽으면서 그 툭툭 던지는 듯한 미국식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읽지 않으려고 한동안 구석에 처박아두었다. 그러다가 에이, 그래도 대충 한 번 훑어는 봐야지,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첫 장에 만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서 다루는 철학자들은 공통점이 있다. 삶의 태도랄까, 이론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서의 철학, 그 자신의 약함을 감추지 않은 철학. 세상 모든 예술과 철학과 학문이 다 작가의 삶에서부터 오지 않은 것이야 없겠지만 특히 이 책의 저자가 선택한 철학자들은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왕이었지만 연민과 긍휼, 바른 사람의 모범을 보이며 살았던 아우렐리우스도, 사회 변혁에 앞장섰던 간디나 시몬 베유도, 세속의 가치가 아닌 가치를 추구하며 살 수 있다고 보여준 소로도, 가장 낮은 곳, 가장 고통받는 인간으로 살며 자기 고통을 찍어 철학을 논했던 쇼펜하우어나 에피쿠로스도, 그리고 허허실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흘끗, 어깨 너머 쓱 쳐다보고 떠난 소크라테스, 그 자신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사유 속에서 철학을 구현했던 몽테뉴나 가장 아픈 사람이면서 삶을 무겁게도 우습게도 들었다 놨다 관조하던 니체도 다 그런 사람들 아닌가.

 

이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나, 아니면 어디선가 들은 말이었나, 결국 철학자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 위해 철학을 한다는 말. 이 책이 관통하고 있는 죽음과 노화에 대한 사유가 이 책의 주제가 아닌 모든 철학의 궁극적인 주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늘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이가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 꼭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내 머리와 마음에서 죽음이라는 화두가 떠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도 나쁜 일도 아니라는 위안이 든다.

 

저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은 타고난 비관주의를 억누르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이라 평했다. 아우렐리우스는 고귀한 인간이었지만 사실은 비관주의자였다. 그럼에도 약자에게 관대하고 늘 자신의 품격있게 행동했는지 돌아보려 애쓴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품성을 지닌 뛰어난 사람을 보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극히 드물지만,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얼마나 따뜻해지는가.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고 말했단다. 너무나 공감하는 바이다. ‘행복하다라는 말은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자기 평가일 것이다. 어떤 이는 즐거워서 행복하고 어떤 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행복하며 어떤 이는 뭔가를 도모할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적당한 슬픔이나 외로움이 있어야만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저 유형은 다 다르겠지만 저마다의 즐김, 몰입이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 줄지언정 행복의 조건을 규정하기란 힘든 일이지 싶다.

 

이 책을 통해 시몬 베유의 존재를 알게 된 것에 기쁨을 느꼈다. 저자는 그이의 몰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깊이 몰입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 것이 아니다. 그 순간 몰입할 자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라고 쓴다. 공감. 베유는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꼈다고 한다. 베유처럼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 자기 고통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는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내 살과 영혼 속을 파고 들어온다.’고 했다니. 뉴스를 보는 일, 학교에서 아픈 사연을 가진 학생들 이야기에 공감하는 일도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데 베유는 그런 일반적인 공감의 차원을 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지에 가까이 가는 이만이 현실을 바꾸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약자와 함께 했던 모든 이들은 진정으로 공감능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베유처럼 아프도록 실천하는 이로 살기는 어렵다. 게으르고 이기적인 삶을 추구하는 나는 다만 내 고통을 어떻게 들여다볼까, 라는 과제만으로도 벅차다. 니체처럼 저녁 7시에서 9시 사이에는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어 보고 싶다.

그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원회귀라는 개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작가의 말대로 그것을 매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준으로 삼으며 이 소소한 삶의 어설픈 오류들을 짚어보고 나는 지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돌아보련다.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니체가 한 말, ‘고통은 청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답해야 하는 부름이다.’을 떠올려 보련다. 그는 정작 신이 죽었다고 외쳤지만(그걸 깨달았을 때 그는 분명 몹시 괴로웠을 거다) 고통이 부름이라면 그 부름을 던진 존재는 누구냐고 묻고 싶어진다. 그 우주적 질문은 무신론자인 내게 오히려 다시 종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먼 우주를 바라보며 초거시적 안목으로 세상을 살다간 칼 세이건처럼 거대하고 허무한 이 생과 여기서 겪었던 고통에 대해 피식 한 번 웃어주며 삶을 마칠 수 있게 할지도 모른다.

 

저자는 결국 자신이 스토아 철학자임을, 혹은 그런 지향을 지니고 있음을 밝힌 것 같다. 쉽게 말하면 현실을 즐기라고 말하는 것도 같다. 자본주의적 욕망이 아닌 유연한 삶의 태도와 여유로.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스토아 철학에 대한 저자의 정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 30대에 저 말을 접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위안을 받았다. 내 고통의 많은 부분은 뭔가를 바라고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그런데 그러기도 싫고 그러기도 힘들다는 마음의 투정 그 둘 사이의 갈등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카잔차키스의 말은, 그 태도는 나를 얼마나 가볍게 했던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생명이란 없겠지만 그나마 무심한 듯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의 오연한 매력은 늘 세속적 욕심에 목매지 않을 때 나오더라.

 

몽테뉴 왈,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현재가 아니며, 죽음이 현재일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몽테뉴 왈, ‘오늘과 다른 빛도, 오늘과 다른 밤도 없다. 저 태양과 저 달, 저 별, 저들이 뜨고 지는 방식,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조상이 즐겼던 것과 똑같으며, 똑같은 것이 우리의 후손을 즐겁게 할 것이다.’ 이 얼마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말인가?

그렇다면 정녕 철학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에서 비롯된 학문이 맞는 것 같다.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레너드 코헨의 음악을 찾아 들었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구입했다. 그리고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향을 염려했다.’ 이 대목에 격하게 공감하며 쇼펜하우어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물론 나는 나의 얕은 지식을 지혜라고 착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때로는 그저 데이터, 그저 지식에 불과한 것들도 삶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런 것들을 모으고 잘 운용하다보면 지혜로운 인간으로 되어갈 수도있으리라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보긴 한다. 내가 나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면 철학을 읽는 보람이 있는 게 아닐까? 아니, ‘철학에 관한 책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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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들은 - 최승자의 아이오와 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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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의 60여 년 인생 중 어쩌면 가장 활발하고 빛나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작가 회의에 초청받아 가서 석 달 넘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날들을 일기장에 적었다. 나중에야 노트북에 적었겠지만 처음에는 수기로. 그게 1994년이란다. 1994. 강원도에서 근무하던 사립학교를 그만두고 아기와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새로운 직장에 다니며 생애 가장 힘든 나날을 보내던 나는 그 무렵을 최승자의 시들로 버텼더랬다. 나와 함께 나달나달해진 최승자의 시집 속 시들은 당연히 그이가 아이오와에 가기 전 피눈물 흘리듯 쓰던 시들이었겠지. 그이가 시를 쓸 나이와 비슷한 나이를 지나고 있던 나 역시 삶의 피눈물을 흘리며 그이의 시를 읽었던 것이다. 그렇게, 단 한 번 면식도 없는 그의 삶과 나의 삶을 이어본다.

 

일기가 뭐 재미있을까 싶었다. 그저 사랑하는 시인의 사생활이 궁금했을 뿐이고, 그 안에 시를 쓴 과정이나 심정 이야기를 좀 담았으려나 싶었던 게다. 그런데 참 재미있게 읽었다. 미주알고주알 재미난 문체로 구체적이고 서사적으로 드라마틱하게... 이야기를 엮는 이가 아니다, 최승자는. 그저 오늘은 어디서 리딩이 있었고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서 이웃 작가들을 초대해 먹였고, 이런 소소한 나날들의 기록일 뿐이다. 그리고 시인은 파티를 즐기는 이도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이도 아니기에 꼭 참석해야 하는 모임이나 세미나 같은 거에나 나가고 관광도 거의 하지 않고, 그래서 특별한 사건도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그이가 룸메이트 쇼나와 교감을 나누고 결국 그를 신뢰하게 되는 과정, 특이하고 진중한 마틴과 어쩌면 영적인 끌림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은 그 사귐에 설레며 책을 읽었다.

 

사실 이 책 이전에 최근에 나온 <어느 게으른 시인 이야기>를 먼저 읽었다. 그 책 말미에 아이오와 작가 회의가 끝날 무렵 신비주의에 천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나무들은>에서도 미국에서 좋아하는 책을 많이 사 모으는 가운데 점성술 관련 책에 흥미를 보이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시인은 영혼이 맑고 직관이 뛰어나다 보니 아마도 그 맑은 기운으로 영빨을 경험했을 것이다. 칼 융 역시 그런 경험을 많이 했고 그런 측면을 분석심리학에 잘 활용했다 하는데 세상에 과학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영역에 심리학이나 시, 예술이 다가간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고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칫 그 경계가 애매하면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실제로 최승자는 이 이후 정신적으로 한동안 앓았다 한다. 그게 그 무렵 빠져들던 신비주의의 문제이기만 할까 싶기는 하다. 그의 기질은 언제라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그래서 시가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고 그 아주 얇은 경계에서 그는 늘 아슬아슬한 사람이었을 터이니.

 

하지만 그에게 이제는 세속적인 건강과 맛있는 밥, 따뜻한 사람과의 기댐, 소위 행복이라고 부르는 그 무언가가 다가가면 좋겠다. 평생 외로웠다 해도 노년은 더 이상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령 더 이상 내 젊은 날에 나와 함께 피흘려주던 그런 시, 다시는 쓰지 못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의 책 세일즈 포인트가 높은 걸 보면서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십수 년의 침잠을 마치고 복간이든 어쨌든 다시 책이 나오고 주목을 받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의 시를 사랑했는지 고백을 들으며 그이가 조금은 덜 외롭겠다 싶어 기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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