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신부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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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떤 의미일까, 우리에게 황지우가 있다는 것은. 세월이 더 가야 그것이 분명해지겠지만 여태까지의 그 대답은, 이렇게 멋진, 이렇게 예술적인 시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 신문에선가 비평가들이 유독 황지우에게 후하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찌 보면 황지우는 칭찬들을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예술인'인지도 모르고,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타협적인 지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혐의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얼마전 그 기사를 읽기 전까지는 단 한번도 황지우에게 대입시켜본 일이 없던 혐의였었다. 아, 그렇구나, 황지우는 우리 흔히 하는 말로 문화적 권력에서 메이저에 속하는 사람이구나. 그런데 왜 여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을까?

황지우 시의, 갑자기 이마 한 복판을 팍 치는 듯한, 살아있는 자의 심장을 손으로 움켜 뜯어내는 프랑켄쉬타인 같은 단 한 줄의 싯귀절들에 자주 매혹되지만 오월의 신부를 꼭 갖고 싶었고, 꼭 보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것은 그의 예술적인 시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무대 위에서 여러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림과 울림을 즐기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오월이다. 그것도 뮤지컬로, 시인이 쓴... 그 복합적인 모든 것이 이 작품을 갖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끝끝내 나는 무대에 오른 오월의 신부는 못 보고 말았지만 책만으로도 충분히 무대를 바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의 책, 접힌 부분만 다시 펼쳐본다.

나, 애비 에미 얼굴도 모르는 고아
너 하나 보고 살았다.
너 죽으면 나도 죽어불랑께...
나는 처음으로 너를 등짝으로 안아보았고
너는 끝끝내 네 얼굴을 내 앞에
드러내지 않고 가려 하느냐?(피흘리는 혜숙에게 영진이)

- 주머니에 주민등록번호를 넣으며(18장 간지)
.......

남녘땅 낮은 곳으로 날 저물고, 나 다시 혼자 되면
뻗친 지붕의오랜 밤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머리맡에는 안 되는 사랑 하나 미뤄놓고
멀리서 다가오는 발소리 듣다가
혹시나 하고 나와 보면 아무도 없네
내 곁에서 흐르지 않는 저 검은 강
희미한 별자리 가까스로 내려와 있고
내 허연 한숨 자릿세 없는 어느 별에 이르네
거기에도 흰 꽃들 쓸어가는 바람 불고 있을까?
아, 오월의 흰 꽃들 다 지는데
...
(민정과 혜숙과 영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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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틱낫한 스님 대표 컬렉션 3
틱낫한 지음, 최수민 옮김 / 명진출판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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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불길같은 화로 인해, 아니 그것은 참아야 하는 상황으로 인해 무척 상처를 입어 있는 상태에서 이 책을 선물로 받았다. 선물한 사람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나, 아니면 내 어딘가에서 그것이 비져나왔단 말인가. 하여간 그 사람의 마음이 고마운 책이었다. 그렇게 받지 않았다면 내가 사서 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물론 이 책은 ~하는 방법 ~가지 류의 처세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 세상에 책 한 권으로 하나의 기능, 기술, 특히나 정신적 수련, 길들임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므로. 그러나 하필 나를 상처나게 하는 지독한 화에 몇 달을 시달리고 있던 터라 이 책이 갖고 싶었던 때였다.

읽고 난 소감은? 역시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내가 치유된 것은 아니다. 아직도 나는, 그 사람에게 심한 말을 해대고 싶고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게 굴면서 나를 마구 자학하고 싶다. 그렇게라도 하면 좀 시원할 것만 같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도 내가 그토록 유치한 이유로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더 괴롭다....

그러나 화가 난다고 해서 폐차나 베개를 두드리지는 말라는 말에 공감을 한다. 마구 퍼부어대고 나면 그야말호 한바탕하고 나면 시원한 것 같지만 결코 무엇도 해소되거나 해결되지 않음을 안다. 정말 그렇다, 잠시 후 더 단단해진 화는 두들겨맞으면 더 커지는 이솝우화의 사과처럼 된다.

또, 거울을 보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자신에 대한 책을 써 보라는 권유는 화를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화가 많이 나 있을 때 자기가 몹시도 초라해 보일 때 거울을 들여다 보면 거기 아주 나약하고, 사랑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슬픈 눈동자가 들어있다.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때 그 눈동자에게 말한다. 너, 많이 아프구나. 그래도 넌 착한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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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대화하는 아이 티피
티피 드그레 지음, 백선희 옮김, 실비 드그레, 알랭 드그레 사진 / 이레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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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티피가 세 살 때 코끼리와 걸어가는 사진. 어린 티피는 누드다. 그냥 아기의 벗은 몸이라 하기에 너무 노골적이라 할지... 여자 아기를 키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어린 여자 아이의 몸이 얼마나 예쁜지... 티피는 이렇게 말했다. 코끼리가 자기를 밟을까봐 조심조심 걸었다고. 난 그 말이 진짜, 진짜라고 믿는다. 그 코끼리는 정말 그랬을 것이다. 티피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건 확인할 수 없지만, 마치 우리가 작은 짐승에 대해 대책없고 이유없이 연민과 보호본능을 느끼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리라. 그 코끼리가 티피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어린 티피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건 아이의 감정으로서 존중해주고 싶다. 정말 그럴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의 오만일 수도 있지. 그 코끼리에게 티피는 그저 연약하고 작은 한 동물이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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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이 희망이다
박노해 지음 / 해냄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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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126페이지에 '거룩한 사랑'이란 시가 있다. 그 시가 준 서늘한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사랑이란 감정은 숭고하고 아름답지만 발이 땅에 닿아있지 않으면, 심지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 사랑을 줄 수도 실천할 수도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다정한 눈빛으로 달콤한 말을 주는 것만으로 다 되지 아니하는 사랑, 손에 빗자루를 들고 땀흘리고, 수고하여 밥 지어 먹이고, 때로는 무모한 침입자들과 맞서 싸워서라도 지켜주어야 하는 것, 내가 진정한 어미라면 갖추어야 할 사랑의 조건.

숱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모질게 살고 있느냐고 묻고 의문을 가질 때 보여주고 싶은 시, 진짜 아름다운 사랑의 능력을 보여주는 시다. 누구는 박노해가 달라졌다 하고 변절했다고도 한다. 나는 근간의 박노해가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 이 책이 나오던 당시의 설왕설래도 잘 모른다. 말들이 많은 것만 보아도 그가 '스타'가 되었다는 뜻이구나 씁쓸했을 뿐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노동의 새벽'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가 더 좋다. 적당히 타협했다고?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가 깊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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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
김정란 지음 / 세계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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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혼이 갈갈이 찢기는 느낌이 들 때, 내가 단 하나의 뭉쳐진 영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느낄 때, 내가 여러 겹의 삶의 단면임을 볼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들을 누구와 말나눌 수 있을까. 그, 여자들만이 느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정서는 실상 입밖으로 내어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공감을 나는 최승자와 김혜순 등에서 발견하곤 했다.

그들의 것과는 또 다름, 그 안쪽, 찢겨진 안쪽에 대한 들여다 봄을 김정란 시에서 본다. 서럽고 아프고 선듯하고 아름답다. 부디 김정란이란 사람이 글과 다른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 서늘한 사람이길, 사람들 발길 잘 아니 닿는 곳의 한적한 밤바닷가 같은 사람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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