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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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정여울 , 풀꽃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문학 선생이라는 점이다. 중학교에서 열다섯 살짜리 남자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문학적일 수 있을까. 대학에서 문학의 본질을 가르치는 이들과 나를 같은 반열에 놓는 일이 우스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나의 정체성을 문학선생에 놓는다. 물론 문학의 사회적 의미’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가 윤동주에게 물었던 질문,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니?’)를 나 자신에게 되돌리는 그런 선생이라는 점에서 스토너와는 다를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여울이 이 책을 극찬했을 때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을 때도 그렇고 아무래도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 대한 공감은 당연하리라.

 

농업을 전공한 대학생이었으나 어느 교양 문학 수업에서 만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로 영혼을 한 대 얻어맞은 학생 스토너는 이후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 학자 교수의 길을 걷는다. 문학과의 만남을 이토록 순정하게, 본질적으로 표현한 글이 많지 않으리라. 어떻게든 문학의 맨 얼굴을 잠시라도 접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충격과 감동을 잘 이해할 것이다. 나에게 그 순간이 어떤 한 지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그 기분은 안다. 중학교 때 조지훈의 시를 읽을 때도 그러했고 하다못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의 감동도, 시리게 느꼈던 기억(그리고 더불어, 분석적으로 시를 가르쳐야 하는 아픔을 스스로 몸부림쳤던 국어선생님들을 얼마나 안타깝게 이해했던가, 나는!)이 있다.

 

그는 평범한 1학년생들에게 문법과 작문 기초만 가르치게 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아주 중요한 일 같아서 열정적으로 고대하고 있었다. ... 일주일 동안 강의 계획을 짜면서....우선 문법의 논리성이 느껴졌고 그것이 스스로 퍼져나가 언어 전반에 스며들어서 인간의 생각을 지탱하게 된 과정을 알 것 같았다. 그는 학생들을 위해 고안한 간단한 작문 연습에서 아름다운 산문의 싹을 보았으며 자신이 느낀 것들로 학생들에게 활기와 의욕을 불어넣게 될 때를 고대했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 스토너는 지금 이 시절이 지나고 나면 결코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시절이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스토너는 문학선생에 발 들여놓는 순간부터가 참 그답다. 순수하고 본질적이다. 그가 가장 빛나던 것은 물론 가르치는 기쁨을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이였다는 데서 나타나지만 말이다.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깊은 희열을 주는지를 맛보고 이 삶을 지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다. 아마 무대 공연을 하는 이들도 그림을 그리는 이들도 책을 써서 독자를 만나는 이들도 다 나름대로 자신의 창작이 인정받는 순간의 기쁨을 알 것이다. 수업은 그런 종류의 창작물이 아니지만 기획과 실연과 교감과 이후의 영향이 일관되게 만나는 일종의 예술이다. 수업을 해본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할 것이다. 수업 듣는 학생들의 눈빛을 통해 자신의 수업이 얼마나 많은 전기적 자극을 주고 있는지를 발견했을 때, 자신의 수업으로 인해 학생들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의 부글거림, 이글거림, 돋아남, 들끓음들이 생겨났는지를 느낄 때의 기쁨.... 스토너는 진정 그걸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결코 화려할 것도 재미있을 것도 없는 선생이란 자리가 이토록 매력적이라는 것을 아마도 저자인 존 윌리엄스는 스스로 경험했기에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다른 장면들 스토너가 가정적으로 불행했던 장면 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소설가의 편파적인 시각(스토너 편들기)이 불편했던 점을 조금이라도 언급하고 싶다. 스토너의 선량하고 우유부단한 성품과 달리 아내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묘사했지만 내가 볼 때 두 사람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스토너가 이타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내가 사회적으로 진출하려는 욕구, 예술적 성취의 욕구를 마치 이기적인 사람의 모습인 양 묘사하고 잇는 것은 작가의 개인적인 견해일 수 있다고 본다. 양육방식의 차이도 그렇다. 부부의 불화는 양육방식의 차이를 낳고 그 갈등 사이에서 아이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지만 아버지가 학자의 길로 딸을 이끌 수도 있었는데 어머니가 망쳤다는 식으로 보긴 어려울 수 있다. 이것은 양육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부모의 불화가 아이를 불안정하게 키운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설 말미에 암에 걸려 죽음으로 걸어들어가는 스토너의 모습이 어찌나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마치 나 자신이 곧 임종을 맞을 것처럼 마음과 몸이 함께 잦아드는 것 같았다. 만약,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자신의 감정과 몸 상태를 그대로 기록하고 죽는다면 이러하리라 싶을 정도로 정밀하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만날 때 얼마나 두려울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상상하지만 만약 병약해져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몸의 쇠잔해짐과 더불어 정신의 힘도 약해지면서 이 삶의 피로함 뒤에 죽음을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감기몸살이라도 심하게 앓을 때는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고 먹고 싶지도 않고 잠으로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죽음이 얼른 나를 데려가기를 바랄만큼 육체를 곤하게 저 심연으로 가라앉힐지도 모른다. 나의 정신 에너지도 서서히 사그라들면서 다가오는 죽음을 맞는다면, 슬프지만 나쁘지 않으리라. 그래도 스토너의 죽음이 슬펐던 것은 마치 옆에서 며칠간의 임종 과정을 다 지켜본 것만 같은 기분 때문이리라. 어느 날 갑자기 접한 지인의 죽음이 아니라, 잦아드는 과정을 함께 한 시간들이 주는 그 세세한 아픔의 공유 때문에 충격적이지는 않으나 깊이깊이 슬플 수밖에 없는, 그런 죽음. 이 소설의 미덕은 잔잔해 보이면서도 정밀한 감성의 묘사와 전달에 있다. 문학을 만나는 감성, 잘 가르치고 싶은 열망과 희열, 죽음을 만나러 가는 과정의 고단함 등을 어찌나 치밀하게 묘사했는지 동종의 감수성과 정신영역에 사는 이들에게는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 모든 이가 이 즐거움을 공유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별만큼 많은 이들이 각기 다른 즐거움과 감성으로 서로 다른 영역들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사니까. 모든 이에게 문학이란 게 그토록 절실하고 아름답고 밀접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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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G. 융 무의식 분석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총서 3
C.G.융 지음, 설영환 옮김 / 선영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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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무의식에 관한 융의 저작이다. 물리학까지 동원되는 융의 박학다식함이 독자에게 즐거움을 줄 수도 있건만, 어색한 번역 때문에 책의 진가를 한국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떤 인간이 어떤 것에서 이뤄지고 있는가를 알기만 해서는 그 인간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이 문제라면 그 인간을 산 인간이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성취한 바로 인간을 평가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싶다. 융은 프로이트처럼 과거의 원인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로 현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는 아들러와 융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야말로 애초 문명인의 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신경증 환자에 대해서는 신경증은 자기 자신과의 불화나 알력이다. 의식은 도덕적 이상에 따르려고 하는데 의식은 비도덕적 이상을 지향하여 행동하려 한다,’고 말하는데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신경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거꾸로 비도덕적인 사람이 신경증에 걸리기도 하는데 그런 사람은 도덕 자체가 억압되어 있다.’

 

사례 중에서 사업 후 휴식을 즐기고자 했으나 우울증에 빠진 남자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성공적인 사업 수행에서 벗어나 퇴직 후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어 했지만 막상 퇴직한 후에는 그러지 못했다. 다시 일로 복귀해 보았지만 일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는 그렇게 멋지게 전환되지 않았다. ‘예전에 조직을 이끌었던 것처럼 그의 데몬은 그를 파멸로 이끄는 속임수를 감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일이 별 의미 없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교훈도 얻을 수 있고 한편으로 에너지가 강한 사람은 그 에너지의 방향을 어떻게 잡는지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도 필요하다. 그런 열망의 에너지는 좋은 관계를 만나면 긍정적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남을 해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대립과 긴장이 없는 곳에 에너지는 없다. 그런 고로 의식의 입장에서 그 대립물이 발견되어야 한다.

사랑의 대립물은 권력에의 의지이다. 사랑이 지배하는 곳에 권력의지는 없으며, 권력이 판치고 있는 곳에는 사랑이 없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그늘이다.

 

비슷한 이야기로 인간관계의 불화는 자기 자신과의 불화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무의식은 억압한다면 그 배후에서 습격할 것이다.’ ‘억압을 제거하면 의식의 여러 내용들이 무의식 속에 가라앉는 것을 막게 되고, 그럼으로써 무의식의 생산활동이 멈추게 되리라.’ 무의식을 두려워하고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님을 융은 제안한다. 무의식의 긍정적 측면을 아니마와 아니무스로 설명하기도 한다.

 

무의식이란 마음 중 의식되지 않는 것들의 존재- 의식 영역의 바닥 밑에 체류하여 의식에 의해 지각되지 않은 채 형성되어 잠재의식적으로 흡수된다. 이것은 직관이나 사색으로 인지되기도 하고 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무의식을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직관을 열어놓아야 한다.

무의식이라는 게 그야말로 무의식적으로존재하다 보니 다음과 같은 일도 발생한다.

 

니체는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안에서 1835(<짜라~>를 쓰기 전)에 발행된 선원의 수기 중 일부를 쓴다. 이는 표절의 의도가 아니라, 자신이 읽은 것을 무의식에 묻어두었다가 꺼낸 듯하다.(어렸을 때 들은 농부의 노래를 나이든 작곡가가 자신의 교향곡 악장에 테마곡으로 쓰는 경우가 있음).

 

그러고 보면 나 역시 도종환 시에 흠뻑 빠져 있을 때 도종환 풍의 시를 쓰곤 했다. 의도하지 않은 표절이 예술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것은 오래 인간의 역사 속에 공유된 원형들, 그리고 동시성(이것도 융의 개념이다), 인간 사고의 유사성과 더불어 무의식적 습득으로 인한 의도하지 않은 닮음에서 기인하는 바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표절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무의식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융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의식이란 게 그야말로 100% 의식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완벽한 의식은 불가능하며 인간은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에 좀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드문, 훌륭한 품성이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뒷부분의 에 관한 부분이다. 번역을 다른 이가 한 것인지, 융의 문체가 달라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문장도 보다 명료해진다. 융은 꿈을 하나의 사실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꿈은 의미를 지니며 꿈은 무의식의 고유한 표현 중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인과적이고 목적적이라고 본다. 프로이트와 달리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그리고 긍정적이며 보완적인 의미로 꿈을 바라본다.

 

융은 꿈의 장면들은 의식적인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고도로 객관적인 소산이라고 말한다. 꿈은 의식의 저변을 흐르지만 확정적이고 명확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꿈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꿈은 도덕적으로 잘 행동하라고 명령하지는 않는다. 가령 완벽한 신사가 추저분한 여자 꿈을 꾼다면 외적인 완벽한 자신의 모습의 허구성을 보상하기 위해 의식을 평형을 이루려는 무의식의 시도일 수 있다. 꿈의 상징은 인간의 마음의 본능적 부분에서 합리적 부분으로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전달자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꿈과 꿈꾼 이를 분리할 수 없고 이미 정해진 꿈 해석이란 있을 수 없다. 각 인간마다의 맥락을 봐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동양식 꿈 해몽이 다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융 식으로 말하자면 문화적 축적으로 이룬 원형이 공통적인 꿈 해석을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개인의 맥락이지 매뉴얼화한 해몽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꿈에 대통령을 만났다의 한국식 해석은 대길이지만 융은 열등감이 강한 사람이 꿈에서 위대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거나 완벽한 척 젠 체하는 신사가 현실에서 경멸하는 추저분한 여인꿈을 꾸며 자신의 무의식을 만난다고 해석한다.

 

같은 꿈이 반복되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한다. 무의식이 지속적으로 보내는 신호일 것이다. 꿈은 꿈꾸는 이의 생활태도에서 부족한 것을 보상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고 장래를 예측할 수도 있다고 한다.

 

또 꿈은 정신적 균형을 잡아주기도 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날아가거나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꾸기도 한단다. 오만에 대한 무의식의 경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꿈 중에서 꿈꾼 이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인출해낼 수 없는 요소가 종종 있다. 이를 융은 원형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 같다. 우리 몸에 진화의 흔적이 있듯이 옛날의 심리가 우리들 심리 속에 있다는 것이다.

 

융은 많은 신앙인들은 심리학을 두려워해 원형적인 마음의 힘과 상징을 외면했다.’면서 일찍이 정신이었던 것들이 오늘날 지능과 동일시되어 만물의 어버이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고 의미 있는 주장을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의 원형 손실은 꿈의 상징으로 보상된다.

 

 

무의식은 단지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의식이 되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정신적 내용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내가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 모든 것, 언젠가 의식했지만 이제는 망각된 모든 것, 나의 감각에 의해 인지되었지만 의식이 유념하지 않은 모든 것, 내가 의도 없이, 주의하지 않고, 다시 말해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하고자 하고 행하는 모든 것, 내 안에 준비되어 있어 나중에야 비로소 의식에 나타나게 될 모든 미래의 것...

 

이 무의식이 순전히 개인의 것이든 원형에 근거한 집단 무의식이든, 그것에 귀 기울이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융은 강조한다. 인간 안에는 의식으로 알 수 없는 신비한 영역이 분명 있다. 그것을 알고 싶어하는 이들이 공부하는 학문이 아마 심리학일 것이다. 그 근원을 거대한 영적 존재로 보는 이들은 종교를 선택할 것이고 인간 보편성에서 신비를 풀어보려는 이들은 문학과 예술을 선택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무의식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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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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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심리학>을 먼저 읽고 있었는데 그 책 광고에 ‘<미움받을 용기>의 원저라고 써 있다. 참 우습지 않은가. 원전은 소외받고 그것의 해설서가 각광받는 이런 현상. 그렇다고 아들러 심리학이 너무나 학술적이어서 읽기 어려운 책도 아닌데 말이다. <아들러 심리학>은 나중에 학부모 연수나 학부모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고 토론해 보았으면 싶을 만큼 쉬우면서도 현실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좋은 책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 아들러를 일본에서는 뭐라고 해석했는지 궁금해졌다.

 

아들러는 열등감이라는 표현을 제일 먼저 쓴 심리학자라고 한다. 누구나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기 발전의 계기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지 열등감을 열등 콤플렉스, 즉 병적 수준으로 놓아두지 말라고 한다. 또한 자기 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도 열등감이 많은 사람임을 이야기하는 장면도 재미있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거울처럼 깊이가 같다.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다.

우월성 추구나 열등감 모두 성장을 위한 자극이 된다.

열등감 자체는 나쁜 게 아니고 열등 콤플렉스가 병이다. 나는 키가 작아서...할 수 없어등등처럼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가 문제라는 것이다.

 

말로 잘난 체를 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자랑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다.

반면 열등감 자체를 첨예화시켜 특이한 우월감에 빠지는 패턴이 있다. ‘불행 자랑(너는 내 심정 어떤지 모를 걸)’을 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과 불행을 통해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의 관계를 권력투쟁으로 보는 관점도 재미있다. 자주 병을 호소하는 사람도, 문제아도, 자신이 우월적 위치에 서고자 일탈이나 병을 이용하는 것으로 본다. 교사들에게도 흔히 말썽꾸러기들을 보면 아프다, 관심과 사랑을 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보라고 한다. 심리학이라는 게 결국 자신을 들여다보고 남들이 보내는 마음의 신호를 감지하기 위해 하는 공부가 아닌가. 이 책을 단순히 자기계발서로 여겨 지금 여기서 행복하려고 노력해라.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수준으로만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론 책을 기획한 이들의 의도는 바로 그런 목적으로 독자들이 이 책을 집어들기를 기대하긴 했을 것이다. 과연, 혼자서 행복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의 병이나 불편감은 나 혼자 안에서 솟아난 것은 아니다. 관계를 주목하지 않고 혼자 행복할 수는 없다. 아들러도 결코 뭐든지 네 마음에 달렸으니 지금 여기서 행복하려 노력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정치토론을 걸어오는 사람의 목적은 상대를 도발하고 비난하여 굴복시키고 싶은 것이고 비행청소년이 된다거나 해서 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대응 방식은 상대가 권력투쟁을 걸어온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싸움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고 한다.

분노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인데 화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다. 다른 사람을 적으로 보는 것은 용기를 잃은 이가 인생의 과제로부터 도피한 까닭이라고 한다. 이 말에 동의하는 것이, 대개 억울감과 피해의식이 많은 이들일수록 남을 비난하고 작은 일에 화를 내곤 하지 않는가.

 

궁극적으로 아들러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지금 여기의 행복을 논해서가 아니다. 그는 인간관계의 목표를 공동체 감각을 키우는 것에서 찾는다. 그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부모 자식간 조차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과 용기 부여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만약 자녀를 키우는 입장이라면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아들러 심리학에서도 부모나 교사가 자녀를 어떻게 교육시킬지에 대한 언급, 학교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 칭찬과 벌의 무용론 칭찬하지 말고 고맙다, 라고 말하라. 칭찬도, 야단도, 체벌도 금물.

칭찬의 목적은 자기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고 상하관계에서나 하는 것이므로 하지 말라고 한다. 부모 역시 자녀를 칭찬하지 말고 고맙다라고 말하라고 한다.

, 이제 학부모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이런 것을 얻어 가면 좋겠다.

부모는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상태에서 지켜보라고 한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자신이 자녀의 생활, 특히 공부에 개입하지 않으면 방임하는 줄 안다. 하지만 공부에 관해서는, 자녀에게 그것이 본인의 과제라는 것을 알리고, 만약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전하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에게 관심은 많으나 개입하지 않는다고 느끼면서 자율적으로 스스로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 하긴 잔소리도 지나친 개입도 아닌 방임도 아닌 그런 경지는 참 쉽지 않다. 모든 부모들은 자신이 자녀에게 잘하고 있는 줄 안다. 그런 과도한 자신감과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불안감이 공존하는 모순된 심리 상태에서 자녀를 키우고 있다. 그러니 아이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학교에는 노이로제 상태에 놓인 불안한 아이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부모와 학부모 상담을 하다 보면 다들 당당하게 그럴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고 자기 아이가 얼마나 게으른지 성토한다. 상담실의 눈으로 보면 노이로제 걸린 아이들보다 더 불안한 것은 바로 그 학부모들이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갈팡질팡하며 결국 내리는 결론은 불안하니까 아이를 학원에 보내겠다이 불쌍한 시대의 자화상 앞에 그야말로 아들러를 강림시키고 싶다.

 

 

끝으로, 이 책을 내 마음의 평정을 위한 책으로 이용하려한다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안해서 밖으로 못나오는 게 아니라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 불안한 감정을 지어내는 것(은둔자의 변명).

누군가에게 욕을 먹었을 때는 상대가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거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

 

어렸을 아버지한테 맞아서 사이가 틀어졌다프로이트 식’,‘ 나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 맞은 기억을 꺼내들었다 아들러 식

 

말더듬는 걸로 고민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투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자의식 과잉으로 더욱 말을 더듬게 된다. 자기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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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기술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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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보수적이다. 당연하다. 지은이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는 18세기 프랑스의 세속사제란다. 그러니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관점으로 글을 해독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말과 글이 넘치는 지금 세상에, 되돌아보고 곱씹을 대목을 헤아려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요즘 나는 두 가지 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다. 하나는 한 동료의 말 많음에 대한 생각이다. 살면서 실패를 경험해 보지 못한 그는 말이 지나치게 많고 늘 누군가를 가르치려 든다. 그의 말은 거의 공해 수준이다. 가끔 그의 잘난 체와 말 많음의 심리학적 근거와 사회적 배경, 가정적 요인까지 헤아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데, 그의 말 많음이 이렇게 주변사람의 정신 영역까지 오염시킨다. 물론 반면교사가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면 안 되는 이유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그에게 감사를 전한다.

 

누군가가 얼토당토않은 짓을 하거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할 때, 그것을 들어주거나 동조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비웃기 위해 입을 닫는 것은 조롱형 침묵이다. 이때 상대는 자신이 칭찬과 동조를 이끌어낸다고 착각하면서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계속 이어가기 마련이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의 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 나는 가족 앞에서 남의 험담을 하지 않겠노라선언한 바 있다. 사실 살면서 남의 뒷이야기, 험담 따위를 하지 않고 살기란 참 어렵다. 그런 험담이 때로는 심리적 불안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기도 한다. 권력을 쥔 사람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침묵보다 더 절실하게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써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사실 수다나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험담은 정신의 배설에 불과할 때가 많다. 나는 그런 흔한 험담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과묵하고 진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번번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조롱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절망했다. 그렇게 수십 년 살았는데, 이제 오십이 넘어 아직도 내가 내 의지로 내 혀와 손(글쓰기)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참 부끄러운 일 아닌가.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겠다.

 

이 책에는 나로 하여금 뜨끔함을 느끼게 하는 구절로 가득 차 있다. 그런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은 다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런 말들. 가령,

 

나는 제대로 침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만약 그것만으로 족하다면 인간과 짐승이 서로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자기 입안의 혀를 다스릴 줄 아는 것, 혀를 잡아둘 때나 자유롭게 풀어줄 때를 정확히 감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일단 침묵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는 모든 대목에서 변치 않는 단호함을 유지하는 것.

 

지혜의 상책은 침묵하는 것, 중책은 말을 적당히, 적게 하는 것,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말이 아니더라도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하책이다.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입을 연다.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닫는 것은 나약하거나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입을 닫아야 할 때 말을 하는 것은 경솔하고도 무례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해 입을 닫을 줄 아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만약 무언가를 말하고픈 욕구에 걷잡을 수 없이 시달리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결코 입을 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침묵만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말을 하는 태도, 말이 너무 많은 태도, 말이 별로 없는 태도.... 다 나쁜 태도이다.

말을 적게 하되 제대로 된 발언을 하는 것이 완벽한 태도이다.

 

말을 전혀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정말 필요할 때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나쁜 태도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가 바로 말해야 할 그 때임을 어찌 알까. 누구나 자기는 그 말을 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 주장할 것이니 말이다.

정치인에게 뭐라 할 것만이 아니다. 필부필부들의 하나마나한 말들(물론 삶을 다정하게 만들기 위한 오롱조롱한 말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말들의 90%는 할 필요 없는 말이거나 하지 말았어야 할 말 들일 것이다. 나로서는 그걸 알게 되는 일이 필생의 숙제이다특히 권력을 쥔 사람일수록, 나이가 많은 이일수록 듣기는 민첩하되 말하기는 더뎌야 한다.’ 모르는 문제를 만나면 미련 없이 입을 닫고, 나보다 많이 아는 이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에 대한 반전의 주장도 있다. 흔히 말은 즉자적이나 글은 그렇지 않으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존경받는 풍토가 있다. 하지만 서점에 가보면 이런 것도 책으로도 쓸까 싶은 허접한 책들이 널렸다. 나 역시 너무 많은 글을 쓰면 말이 많았던 지난 밤이 떠올라 괴로운 아침처럼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고 정신의 바닥, 내 지성의 얕음을 들킨 듯 하여 당분간 글을 쓰기 싫어질 때가 있다. 책을 찍어내듯 써대는 많은 작가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저자는 아주 좋은 내용이라도 미주알고주알 글로 풀어내는 것은 문제다.’라고 말한다. 예로 든 학식이 풍부한 이가 대중을 위해 글을 쓴다. 이미 나와 있는 산문집을 운문집으로 고쳐낸다든지... 이런 짓을 왜 하는가? 그 자체로 탁월한 저서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현대에도 적용이 가능한 이야기이다. 책을 내기 위한 책, 팔기 위한 책들, 요즘 상업적으로 만들어 팔고 있는 처세술 책, 필사 책, 재탕 책들을 꾸짖는 듯 들린다.

 

그리고 중요한 지적을 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작가 노릇을 하게 되면 쌓이는 책들로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것이 글로 표현되면 인간의 정신이 활동할 여지가 더 이상 남아 있겠는가?

 

말로도 글로도 표현되지 않은 인간의 깊은 영성의 세계, 그것을 남겨놓아야 할 것이다. 시나 그림을 명료한 비평으로 완벽하게 해석한 글을 읽고 싶지 않다. 궁금하지만 결코, 끝내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글의 침묵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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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윈터 리미티드 에디션) 세계문학의 천재들 1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리스본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야간열차를 타 본 적이 있다. 침대칸 열차는 좁고 불편해서 좋은 기억이 남지 않았다. 그래도 오밤중에 달려간 기차역은 아름다웠다. 바람이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네 식구가 사진을 찍으며 아름다운 리스본과 안녕을 고했다. 디젤 냄새 풍기는 기차역에 밤이 깊어도 아늑했던 것은 기차가 그날 밤은 우리의 집이었기 때문이었을까.

 

3일밖에 머물지 못한 리스본은 참 맑고 아름다워서 언젠가 꼭 다시 오고 싶었다.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던 기억들, 트램을 따라 광장을 뛰어다니던 일, 광장, 열차 타고 다녀온 페냐 성... 좋은 기억만 남은 몇 안 되는 여행지이다.

리스본에 대한 순전히 좋은 기억만으로도 이 책은 매력적이었다. 어쩌다 보니 영화를 먼저 보았는데 영화도 나쁘진 않았지만 책이 주는 특별한 깊이가 있다. 혁명의 향기, 문자향, 리스본의 향기, 바다 냄새, 비 냄새, 오래된 건물의 먼지 냄새 같은 것이 섞여 있는 아름다운 문학작품, 그러니까 일 년에 한두 편 볼까말까한, 그런 책이었다, 내게는.

 

주인공인 그레고리우스와 아마데우는 같은 자아를 가진 사람인 듯 보인다.

얼핏 보면 둘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내성적이고 학자적 성향이 강한, 고등학교 고문법 교사이다. 매우 고리타분한 삶을 살아왔다. 그에 비해 그가 좇는 아마데우는 아름다운 태양같은 사람이다. 숭고하고 화려한, 주목과 숭앙을 받는 사람. 그러나 아마데우는 그레고리우스의 페르소나이다. 그 둘은 탐구심, 도덕심, 본질 추구...등에서 공통적이다. 어쩌면 그레고리우스가 살고 싶었던 또 다른 삶을 산 사람이 아마데우가 아닐까.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에게 요구가 많은 사람이었다. 변덕이나 뒤틀린 허영심도 아니었다. 나중에 그는 가끔, 자신의 이런 태도는 잘난 척하는 세상을 향한 조용한 분노.. 라고 생각했다.

 

아마데우는 천박한 허영심을 대하면 잔인해졌소.. ‘천박한 허영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거예요.’

 

아마데우는 허영심을 돌림병처럼 증오하던 사람이었다. 뛰어난 사람이 자기 안의 허영심을 경계하기란 쉽지 않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말 중 하나인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란 표현도 결국 아마데우가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벼리는 말이기도 했다. 타인은 나의 거울일 수 있다. 하지만 법정이라니! 이 엄혹함 앞에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은 게 사실이지, 나처럼 내성적인 사람들은 부끄러움도 부끄럽다. 나보다 더 부끄러워해야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특히나 아마데우처럼 뛰어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사회적 영향을 생각해서라도 좀 더 스스로에게 엄격해지기를... 여기서 엄격함은 사회적 성공에 대해 기능과 스펙을 키우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성, 겸손에 대한 엄격함이기를....     

 

그렇게 극과 극의 삶처럼 보이던 두 사람의 삶은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도 아마데우과 같은 종류의 병인) 뇌의 이상을 느끼면서 만나게 된다.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의 뇌종양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병원 벽에 있는, 뇌지도가 걸려 있던 사각형 모양의 빈자리를 생각했다.

삶의 양상은 전혀 달랐으되 어쩌면 죽음으로 가는 길이 비슷해지고 있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비극을 뇌종양으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레고리우스는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세상을 만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볼 때, 그 안에 열린 마음을 보는 게 중요하다. 존엄에 대하여 아마데우가 스스로에게 엄격히 요구했던 항목처럼 곧 스스로 군더더기 없이 허영 없이 살 때만이 스스로 인정하는 존엄성을 지닐 수 있다. 의사, 혹은 혁명가 혹은 열정적 사랑에 빠진 이는 모두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 아마데우는 그렇게 파란 불꽃으로 순정하게 살았던 사람이고, 그레고리우스는 그를 알아보는 영혼이었다.

 

(새 안경을 맞춘 그레고리우스) 새 안경으로 세상은 더 넓어졌고 공간은 실제로 3차원이 되어 사물들이 마음껏 몸을 펼 수 있었다. 타호 강은 더 이상 흐릿한 갈색 평면이 아니라 그야말로 강이었고, 상 조르지 성은 하늘을 향해 세 방향으로 솟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세상은 피곤했다. ... 새상은 더 가까워지고 강제적이 되었으며, 뭔가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보이지 않는 이 요구가 너무 커지면 모든 것과 거리를 유지하게 하고 단어와 글 저편에 과연 외부세계가 있기나 할까라는 의심 이 의심은 즐겁고 소중했다. 이런 의심이 없는 삶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 을 가능하게 했던...

 

본질적으로 둘 모두 지나치게 고귀한 성향 때문에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면모도 보인다. 아마데우는 끝끝내 자신의 고결함에 자신을 베이고 말지만 오히려 그레고리우스는 건강하게 현실을 벗어나 자아찾기에 성공한다. 아마데우를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또 다른 면을 궁금해 하지만 궁금해 한다고 해서 다 자아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 거울을 만난 그레고리우스는 행운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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