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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춤추는 악어
김수우 지음 / 신생(전망) / 2015년 12월
평점 :
쿠바 여행을 다녀오면서 쿠바에 대한 책을 참 많이 읽었다. 그 나라에 대해 잘 알게 된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럴 리가 있는가? 단 12일의 여행, 단 열 권의 책으로 한 나라를 다 안다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난 쿠바에 대한 이야기는 얼추 다 들어본 느낌이다, 라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말레콘, 올드 카, 헤밍웨이, 체 게바라.. 그게 쿠바의 전부는 아닐 테니 말이다.
<쿠바, 춤추는 악어>는 내가 읽은 쿠바 관련 책 중 가장 두껍다. 책의 두께가 일단 그러하지만(솔직히 읽기에 매우 불편했다. 한편으로는 팔리기 좋고 읽히기 좋게 적절히 분량을 조절하거나 두 권으로 분책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 하지 않은 출판사의 뚝심이 좋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용도 두껍다(?). 쿠바에 대한 글을 쓰는 이들은 누구나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그래서 다른 관점의 책들을 만나기 어렵기도 하고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이 블로그나 책들에서 반복되는지도 모른다) 김수우만큼 감성적으로 쿠바에 다가간 사람도 많지 않은 것 같다. 여행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생활이야기라고 해도 될 만큼 쿠바에 머문 시간도 길고, 남들이 다 체 게바라만 이야기할 때 일관되게 호세 마르티로 쿠바를 바라보는 시각을 유지하는 점도 남다르다.
김수우는 쿠바에게서 ‘공존’에 관한 대안을 발견한다. 자본주의는 그 속성 때문에, 사회주의는 현실적 실패 때문에 이제는 이 지상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워진 ‘공존’의 대안을 쿠바는 제시한다. 공산주의 국가라 할지라도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나 부패가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대안, 나라가 가난해도 비참해지지 않을 수 있는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럴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체 게바라나 혁명의 성공, 혹은 카스트로의 정치적 성공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지만 김수우는 ‘호세 마르티’를 그 근원적 힘으로 여긴다. 현실의 권력자가 아니기 때문에 훼손되지 않을 수 있는 오래갈 수 있는 ‘쿠바의 힘’이 된 호세 마르티. 그래서 그런 역사적 영웅을 갖는 것은 민족이나 국가의 자산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국민적 영웅이 있었던가 돌아본다. 없다 말할 수는 없지만 의도적으로 평가 절하된, 혹은 부풀려지는 바람에 훼손된 영웅들이 얼마나 많던가.
작가는 ‘공존이란 함께 자유로운 것. 그 자유가 배려가 시작되는 자리’라고 말한다. 자유가 배려가 멋지게 만날 수 있음을 우리 사회는 겪어보지 못했다. 배려는 곧 손해라고 배워온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은 얼마나 황막한가.
쿠바의 품격, 호세 마르티
호세 마르티의 문학은 단순한 문학이 아니다. 그의 문학은 사상을 담고 있고 사람들을 고무시켰을 뿐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근원적 해결책을 탐구했다. 그것도 아주 쉬운 민중의 언어로.
호세 마르티는 “게으르지도 않고 성격이 고약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곳은 불의가 있는 곳이다.”라고 말했단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나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만약 열심히 살고 계시는데도 집이 가난하다면 “아빠, 왜 우리 집은 이렇게 가난해?”라고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라. 그건 사회구조의 문제이다. 열심히 일하는 아빠가 무능해서 불성실해서 집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겨라. 그리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자.” 그럴 때면 꼭 숙연해지던 아이들이 몇 있었다. 호세 마르티의 저 말은 이상하게 힘이 된다.
호세 마르티는 흑인을 볼 때마다 ‘나는 늘 그들에게 빚진 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은 실상 가장 힘든 일을 한다. 세상은 대개 그런 그들의 희생 덕에 숨을 이어가기도 한다. 뭔가를 가진 자들이 누구 덕에 자신이 편안히 먹고 숨 쉴 수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저런 겸허를 얻기 힘들 것이다. 쿠바 거리를 걷다 보면 위축되지도 않고 거칠게 행동하지도 않은 흑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것을 가장 경멸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품격을 유지하는지 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묵었던 까사의 잘생긴 뮬라토 청년은 “쿠바 여자들 참 멋지다(가무잡잡하고 멋진 몸매를 가진 여자들을 많이 보았기에).”고 칭찬하는 우리의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자기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긴 했다. 못생긴 사람도 많다고.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고 있다. 우리 눈에 그들이 멋져 보인 건 아마 얼굴이 검어도, 초라한 옷을 입었어도 위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상대적으로 위화감을 느끼게 비싼 옷을 입은 사람을 발견하기 어려웠고 자기가 피부가 희다는 이유로 우월감을 자랑하는 문화도 없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장면은 다음 이야기이다.
몹시 붐비는 쿠바버스에 장애인이 탔을 때 놀랍게도 사람들이 길을 비켜 그가 자리를 잡게 도와주었단다. ‘몸도 불편한데 복잡한 버스를 꼭 타야 했나’라고 생각한 건 한국 사람들이 하는 생각인 것이다. 그가 버스에서 내리려하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틈 없이 엉겨있던 사람들이 또 한 번 통로를 만들어 그를 내려주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버스에서 내려 장애인을 몇 걸음 안전한 데까지 인도해 주고 다시 버스를 탔다.(이야기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버스는 안 가고 기다렸다는 거다. 배차간격이 버스운전 노동자를 스트레스 만땅으로 만드는 한국에서는 ‘인성’의 문제뿐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쿠바인들의 일상화된 배려 문화를 김수우는 목격한 것이다.
물론 내가 여행 갔을 때 저런 장면을 보지는 못했지만 곳곳에서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들은 많이 만났다. 친절은 매너가 아니라 삶의 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사람에 대한 존중은 혁명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계급과 차별이 버젓이 살아있던 식민시대와 친미 독재정권 시대를 거쳐 왔고 그것을 이겨냈기 때문에 모든 차별에 반대하며 약자를 배려하는 것은 곧 ‘혁명정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집 앞에 서서 한참 다정하게 수다를 떠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에게서는 사라져버린 광경 아닌가? 그런데 언제, 왜 사라졌던가? 더듬어 보니, 우리 삶에는 휴대폰이 개입했던 것이다. 쿠바에도 휴대폰이 있지만 흔한 물건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아직 수다와 대화가 남아있는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 요르크 프리드리히는 ‘사람들은 부드럽게 몰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지역공동체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생활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란다. 왜 성장만이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가? 쿠바는 지속가능한 삶의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절대 빈곤이나 인간의 품위가 유지되지 않는 가난을 감수하자는 뜻이 아니다. 미국처럼 펑펑 소비하고 뒤처리를 남에게 넘기는 지구 위의 불평등에 눈 감은 채 ‘가난해도 마음만 행복하면 돼.’라고 마음을 다스리자는 말도 아니다. 적정한 부, 적정한 경제 속에서 행복하기가 왜 불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 대안으로 쿠바를 눈여겨 보자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