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와 앨리스와 푸의 여행 - 고서점에서 만난 동화들
곽한영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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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쿠바 여행 중 들렀던 벤쿠버의 뒷골목을 잠시 떠올렸다. 낯선 거리의 고서점을 뒤지고 있었던 저자에게 감정을 이입해 본다. 마치 내가 그 거리를 걷고 있는 것처럼 설레 보고, 마치 내가 원하던 책을 발견한 것처럼 기뻐해 본다.

곽한영 교수는 영어가 익숙해서 다른 언어로 된 책(예를 들면 케스트너의 책)을 사기는 꺼려졌다고 하지만 영어도 낯선 언어인 내 입장에서는 원서를 비싼 값 치르고라도 사려 했다는 그가 하여간 부러웠다.

 

이 책을 읽으면서 행복했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서점의 추억들이 떠올라서. 열 살 때까지 서점 뒷방에서 삼남매가 뒹굴거리며 컸다. 12시에 문 닫을 때까지 서점은 우리 안방이고 놀이터이기도 했다. 언젠가 돌돌 돌아가는 <딱따구리 문고><동서문고> 서가가 생겼을 땐 그걸 돌리면서 동생들이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매달 25일이면 잡지코너 구석에서 <소년동아>, <어깨동무>, <새소년>을 봤는데 6학년이 되어서는 엄마 몰래 <주부생활> 같은 것도 보고 안 팔리고 남은 잡지를 반품할 땐 부록을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이 책 속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모두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읽은 책들이다. 겨울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서점 닫을 때까지 구석에서 읽던 책들. 내가 읽은 책 중에는 여기엔 등장하지 않지만 <소공녀>, <소공자>도 있었고 <몽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것도 있었다. 나중에 커서는 프랑스 문학과 러시아 문학이 더 좋아졌지만 가만 돌아보니 어린 시절에는 영미 문화권 작품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그 추억이 새록새록 좋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 이것은 일종의 문화적 식민주의 아닌가 싶어 섬뜩해지기도 한다. 유럽 혹은 북미 어딘가 너른 마당의 목가적인 집들, 거기서 뛰노는 허클베리 핀이나 빨간머리 앤, 혹은 작은 아씨들에 대한 연민, 공감, 친근감 같은 것들이 내 핏톨에 흐르고 있는 것일까.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데, 어쩌면 나 어린 시절 나도 모르게 일제 잔재 문화를 친근하게 어린시절 문화로 습득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동생들과 재미있게 보았던 만화영화가 죄다 일본 것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약소국, 문화적 약소국의 반식민상태는 이지적으로 극복하려 하지만 쉽지 않은 걸까?

문학을 전공했고 어지간한 문학작품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최근 한베평화재단에서 베트남 참회여행을 다녀오느라 베트남 문학작품이며 동화들을 읽고 있는 남편을 옆에서 보면서도 베트남 문학은 읽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나의 태도는 도대체 뭘까. 내 의식 속 깊은 곳에 문화적 식민주의와 사대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 학교 사서 선생님은 다른 말씀을 하신다. 동남아시아나 우리나라 문학은 역사적인 경험 탓에 아프고 참혹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그런 이야기들을 외면하게 된 것은 아니겠는가 하고. 그 말씀에 조금은 위로를 받는다. 죄책감을 더는 느낌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주로 서구의 문학에 노출되어 저도 모르게 그것을 친숙하게 느끼는 것은 독자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 독서를 통해 추억을 소환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일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이제 교육자로서 우리는 이런 문화적 불균형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는 있겠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누린 행복도 감사하지만 아이들에게 어떤 추억의 독서를 안겨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과제를 품게 된 일도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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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체력 -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
이영미 지음 / 남해의봄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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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주간지 혹은 신문에서 서평인지 광고인지를 보고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책이 오기를 꽤 기다렸던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방에 있는 걸 더 좋아하고 정신적 활동을 더 중시하는 저질체력의 마흔 넘은 여자(나같은)를 운동의 세계로 이끄는평범하지만 놀라운 마법이 이 책에 있을 것만 같은 기대?

그가 첫 책을 이렇게 재미있게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에디터로서 갈고 닦은 읽기, 글다듬기의 힘일 수도 있고 그 사람 안에 글과 말을 재미나게 다룰 줄 아는 재능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기가 직접 해본 일을 이야기하는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큰 동력이었을 것이다. ‘정말중요하고 정말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이야기할 때의 가뿐 호흡, 신나서 이야기하는 반짝임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하지만 나의 기대에 부합하더냐고 물으면 아니, 라고 대답하련다. 운동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강력한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모자란 열정에 불 지펴줄 것만 같은 기대가 있었지만, 미안하지만 그에는 미치지 못했다(적어도 나에게는). ? 저자가 이룬 성취가 너무 높아서 그렇다. 그가 정말 시작부터 평범한 사람이었고, 평범하나 닿을 수 있는 목표치에 올라선 정도였다면 우리도 , 그럼 나도 해볼래!’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누리는 신세계는 무려 트라이애슬릿의 세계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는 아무 것도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줄 모르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하던 그런 평범한 아줌마가 아니었다. 이미 부지런함과 열정을 갖추고 있던 사람이었다. 운동뿐 아니라 매사에.

 

운동을 힘겹게 시작하던 과정, 중간에 게으름이나 힘겨움 때문에 실패의 고비를 넘긴 이야기들을 같이 힘겹게 읽어나가면서 나 자신의 무기력이나 게으름에 대해 위안을 받아가며 같이 극복해 보고 싶었던 나는 중반에 접어들기도 전에 금방 철인3종으로 훅 뛰어넘어가는 이야기에 당황한다. 새벽 수영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랑말랑하다가 갑자기, 오늘저녁부터 동네 운동장을 단 한 바퀴라도 돌아볼까 하다말고 갑자기, 턴을 못 하고 다리가 땅에 안 닿아서 운동장 같은 데서 직진만 하던 자전거를 다시 타볼까 하는 생각이 싹틀까말까 하다 갑자기, 그녀는 한강에서 수영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서 실망하다가 뒤로 가면서 저자의 인생역정을 읽다 보니 이 책은 슬슬 나의 열등감을 불러일으킨다. 아이도 잘 키우고 직장생활도 잘 했고 제2의 인생도 잘해나가고 있단다. 저자로도 강사로도 잘나가고 있는 이유를 그녀는 아마도 운동 덕분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건강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맥락일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저자와 비슷한 또래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책을 읽으면서 난 뭐했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고대 동문들과 자전거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완주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좀 불편했다. 저자는 굳이 자신의 출신학교를 밝힐 생각은 없었겠으나 손미나와의 인연, 자전거 완주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나온 명문대를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주변에서 보면 명문대동문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열심히 동문 동아리 활동들을 하던데, 그렇게 열심히 모이는 이유가 우정 때문만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잘나가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우정을 쌓으면서 서로 이끌어주기도 하는 것,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이 불평등한 세상에 유능한 이들끼리의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는 게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평범한 아줌마들은 이 책을 읽고 힘을 내기보다 자신의 삶을 초라하게 느끼게 될지 모르겠다. 나만 그런 거면 다행이고.

 

그나마 궁시렁거리며 책을 덮는 나에게 남편이 그거 따라하지 말고 나랑 동네학교 운동장 돌러 나가자.’ 해서 토요일 새벽 5, 별을 보며 동네 한 바퀴 걸었던 거, 고맙게 생각한다. 덕분에 따릉이(서울시 자전거)는 안장을 최대한 낮추면 나 같은 키 작은 아줌마도 탈 수 있다는 걸 새벽 길거리에서 몰래 확인했다는 거, 고맙게 생각한다.

 

부러움에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지금 한창 육아 전쟁에 허덕이는 젊은 아기엄마들, 혹은 3,40대에 접어들었지만 이제 내가 슬슬 늙는 게 아닐까 불안해 지기 시작하는 늙지도 젊지도 않은그녀들에게 이영미는 좋은 모범이 되고 희망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저 언니보다 젊은 나, 지금부터 시작해도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나로 하여금 책을 덮자마자 자전거를 꺼내들게 해달란 말이야, 하고 요구하는 것은 나의 칭얼거림에 불과하고 내가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책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의지박약용기부족의 문제일 뿐임을 나는 잘 안다. 이영미의 책 곳곳에 숨어 있는 유용한 팁들만 해도 충분히 감사할 만하다(운동을 처음 시작하는 이라면 비싼 운동화 사서 책상위에 올려놓기, 운동한다고 소문내기, 운동장 한 바퀴부터 시작하기 등을 권한다거나, 프랭크처럼 집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운동도 소개한다거나). 그리고 분명 많은 이들이 이 책 때문에, 이 책 덕분에 몸매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인생을 바꾸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을 게 분명하다고 본다.

 

그의 글쓰기 방식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했다. 머리말의 마지막 문장이 이렇게 끝난다.

 

그렇게 내 삶에 일어난 작은 균열은, 아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회 날에 시작되었다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하는 소설적 발화 방식, 재미있지 않은가? 이와 비슷하게 어쩌구저쩌구..... 그 이야기는 3장에서. 이런 식으로 끝내는 부분을 보면 강사로 활약하고 있다는 이 사람, 기질적으로 꽤 재미있는 이야기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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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3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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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예견된 불행을 짚어가며 읽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아무래도 책 읽는 순서가 잘못되었나 보다. 목로주점을 먼저 읽고 나서 <제르미날>을 읽을 것을.... 제르미날의 주인공 에티엔은 바로 이 <목로주점>의 주인공인 제르베제의 아들이다. <제르미날>에서 이미 에티엔 가족의 비극을 엿들었지 않았는가. 그러니 지금 읽고 있는 이야기 속 제르베제가 아름답고 배부르고 따뜻하고 행복해 보여도 그것이 곧 무너질 것임을 알고 있는 마음은....

 

그토록 깔끔하고 성실하고 진지하던 제르베제는 왜 불행해져야 했을까

 

지금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프랑스의 현실로부터 2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도시에는 빈민이 광산에는 굶주리는 광부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으로 근근이 사는 사람들 중 우연히 불행을 만나지 않는 사람들은 겨우겨욱 포도주나 커피 정도를 누리고 살았지만 갑작스레 어떤 일이 닥칠지는 아무도 몰랐다. 특히 여자들은 남자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폭풍을 맞는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얼마나 싸웠단 말인가. 그러니 그들의 민주주의는 그토록 견고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허술한 복지 시스템을 가졌더라도 스스로 자책할 일은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왕과 왕비를 단두대에 세운 역사를 몹시도 자랑스러워한다는데 우린 그런 경험도 거의 없지 않은가.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이다.

 

200년 전인데, 그런데 거기서 우리의 삶이 엿보인다면 그것은 또 어떤 비참인가. 연금을 받지 않으면 노동으로 근근이 살아야 하는 현실, 누군가 갑자기 아프거나 했을 때 일어나는 가정의 붕괴 혹은 해체, 출산과 노동과 남자의 폭력 앞에 무력한 여자의 운명. 이런 부당한 일들은 지금도 일어난다. 고전의 힘은 그런 것일 터이다.

결과를 알고 보았다고는 해도 제르베제가 한참 잘 나갈 때,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먹고 즐길 때의 장면은 흐믓했다. 그런 아름다운 삶이 무너진 것은 개인의 허영 탓일까 운명 때문일까 제도적 모순 때문일까. 과거도, 지금도 비극은 항상 복합적이다. 좋은 교육으로 삶의 바른 자세를 가르칠 수도 있고 심지어 제도적 모순조차 혁명의 힘을 빌어 고칠 수도 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건가?

 

 에밀 졸라는 사람들의 치열한 삶과 혁명의 정당성을 담기 위해 이 소설을 써나갔겠지만 그 안에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운명을 담는다. 멋진 소설은 불가한 거대한 우주의 질서, 사회의 벽, 그 앞에 한없이 초라한, 그리고 한없이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왜 그것이 멋진가?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루고 싶은 이상이기도 한 까닭이다. 현실과 이상은 고기와 가죽처럼 떼어내기가 어렵다. 함께 있을 때 더 아름답다. 그래야 살아있다. 문학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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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수업 - 법륜 스님이 들려주는 우리 아이 지혜롭게 키우는 법
법륜 지음, 이순형 그림 / 휴(休)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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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것보다 이 세상에 더 경제적인 것은 없다, 라고 법륜스님은 아이 키우기의 중요성을 말한다. 왜 많은 가치 중 하필 경제를 말했을까 싶긴 하지만 말이다. 책은 내내 스님의 명성에 걸맞게 간결하고 적절한 조언으로 가득 차 있다. 두 자녀를 낳아 기르고 사춘기 소년들을 30년 가까이 키워온 나로서는 사춘기 아이들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에 대해 설득력 있게 말해주는 스님이 고맙다. 가령 아이가 자기가 한 10쯤 잘못했다 싶은데, 벌을 100쯤 받았다면 억울하겠지. 그럼 자기가 잘못했다는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억울한 마음만 남는다. 결국 반항심만 생기고 교육 효과는 없다, 자녀와의 갈등, 훈육상황에 대한 스님의 조언은 경험상으로 보아도 매우 지혜롭다. 잘못에 대한 인정과 설득 작업이 훈육 이전에 선행되어야 하는데 무조건 야단부터 치는 부모는 아이를 억압하여 말을 잘 듣게 했다고 착각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그런 억압이 효과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설득되지 않은 채 행동만 수정된 듯 보이는 아이들은 언젠가 그 앙금을 드러낸다. 반항이든, 무기력이든, 부모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든.

 

학교에서 학폭위가 열릴 때 아이들보다 더 기를 쓰고 싸우는 부모들, 자기 아이는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부모들의 태도는 결코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만 모른다. 자기 자녀가 잘못을 저질러도 편을 들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이를 망치는 길이라는 걸 모른다. 그래서 특히 다음 이야기는 요즘 학부모들께 꼭 들려주고 싶다.

 

친구들과 싸우고 돌아왔을 때 부모는 네가 잘못했다’, ‘친구가 잘못했다하고 판단하면 안 된다. 아이가 맞고 왔으면 흥분하지 말고 아이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주라. 친구를 나쁜 놈이라고 말하지 말라. 아이 마음에 보복심을 심어주게 된다.

 

스님은 부모가 자식의 자립을 막으면 자식은 반항을 하지만 그렇다고 자립도 못한다. 반항심은 생기는데 막상 어떻게 스스로 서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부모에 대한 고마움은 없고 원망만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면 간섭하지 말고 놓아두라고 한다. 어렸을 때는 세심한 돌봄이, 사춘기 이후에는 믿음이 양육의 기본이 되어야 함에도 장성할 때까지 들러붙어 있는 것이 사랑인 줄 착각한다.

 

장성한 자녀가 사회성이 떨어지고 대인관계를 두려워 한다면 사춘기 전후 아이가 시행착오를 거듭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 한다. 자식이 강아지처럼 순순하게 말 잘 듣는다고 좋아할 게 아니라, 때가 되면 부모 품에서 벗어나는 것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고도 한다. 사춘기의 반항은 뒤집어 생각하면 성장에 필요한 성장통일 수도 있다. 그것은 억누르지 않는 것이 교육적이다.

 

하지만 자녀와 많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무조건 허용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음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흔히 부모들은 그 경계를 헷갈려 오류를 범하곤 하는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등학생 때는 아이한테 허락을 받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아이를 상전처럼 모시고 허락을 받으면 나중에 문제가 된다. 자신의 일은 자기가 결정하되 아이와 대화를 나눠서 이해를 구하라.

아이가 문제제기를 하면 무시하지 말고 들어주라. 그리고 차분하게 이야기하라. 아이도 이성적으로는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만 무의식이 안 따라주는 것뿐이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엄마들은 헌신적인 사랑은 있는데 지켜봐주는 사랑과 냉정한 사랑이 없다.’, ‘엄마부터 자식을 어른으로 대우해야 자식이 어른이 되는 거다.’라고 한다.

이렇게 개개인 가정과 부모의 양육에 대해 조언하지만 그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고민 상담에 그치지 않는 것이, 양육은 국가와 사회의 공동 책임임을, 그리하여 개인의 노력 못지않게 제도적 노력을 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점이다. 최초 3- 스님은 3살까지의 엄마 돌봄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 유급휴가제가 사회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부처님은 수행 차원에서 (개인에게) 내려놓을 것을 가르치고, 다른 한쪽으로는 살기 좋은 세상, 즉 정토를 건설하라고 하셨다.’ 고 주장한다. 정토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지만 현실에서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 즉 개인적 수행과 함께 제도적으로 바꿔 나가서 아이들의 보육문제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제도적 개선을 위한 싸움이 외롭지 않도록 아이를 키우는 사람 당사자가 제도 개선을 위해 싸우면 마음속에 분노가 생기고, 분노가 있으면 아이를 잘 키울 수 없다. 그러므로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나 앞으로 키울 사람들이 싸워줘야 한다.’라는 주장도 고맙게 들린다. 아기엄마들뿐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 아이들이 자라는 이 세상에 힘을 보태야 할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책의 독자인 엄마들에게 남편과의 관계를 통해 자녀문제를 해결하라고 조언할 때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아이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해주어도 부모가 화목한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말엔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아이가 공손하기를 원하면 아내가 남편한테 공손하면 된다는 말에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엄마들은 말을 줄이고 남편이 뭐라고 하면 알겠다고 대답하라. 남편이 벌컥 화를 내고 비이성적으로 폭발한다면, 아내가 두 가지 유형이다. 하나는 잔소리하며 따지든지, 대답을 안 하고 외면하든지...’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부부가 갈등을 느끼면 모두 아내 잘못이라는 의미인가? 누구나 갈등상황에서는 남탓을 하기 전에 자신을 성찰하는 자세가 옳을 것이다. 그것은 아내뿐 아니라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뭐든지 엄마탓? 아빠는?

엄마의 존재가 중요하고 비중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엄마가 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엄마 을 하는 것은 다르다. 이 책에 많은 미덕이 있지만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이 많다. 심지어 나는 상담실에서 학부모용으로 산 이 책을 아무에게도 읽히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했다. 인터넷에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찾아 봤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는지. 호평 일색인 이 책, 많은 엄마들은 읽고 자녀교육의 지표로 삼았을까? 남편에게 소리 지르는 아내는 자녀교육을 망친다는 구시대적 발상에 대해 비판 한 마디 없이 부모교육서로 권위를 인정받는 책이 되어 있다니.

부부가 갈등을 느끼면 아이들이 힘들어하고 비뚤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자녀를 위해서라도 부부의 갈등은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 부부갈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원인을 성찰해야 할 사람 중에 아빠의 몫에 대해서 누군가가 이야기해 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당신이 돈 벌어온다고 자녀교육은 아내 몫으로만 돌리고 아이에게는 무관심하지 않았느냐고, 아이와 대화를 나누려 노력하기보다 하지 말아야 할 때는 허용을, 정작 훈육이 필요할 때는 방관을 하진 않았느냐고, 아내가 양육 문제를 의논하려고 다가오거나 자녀가 심리적 어려움을 하소연하려 문을 두드리면 귀찮다고 등 돌리지는 않았느냐고, 양육과 가사에 힘겨웠던 아내가 몸이 아프다고 피곤하다고, 혼자 힘들다고 짜증이라도 낼라치면 소리를 지르면서 윽박지르지는 않았느냐고, 힘든 가사노동을 당연히 아내의 몫으로만 치부하지는 않았느냐고, 심지어 맞벌이를 하는 아내에게도 돈벌이도, 가사도 양육도 모두 당연히 해내며 다정하고 지혜롭기까지 요구하지는 않았느냐고, 왜 우리 집사람은 누구처럼 음식도 맛있게 하고 아이들도 잘 키우고 남편에게도 상냥한 그런 사람은 아닌 거냐고 따지는 건 너무 욕심이 많은 거라고, 그러니까 이제부터 아이들을 잘 키우려면 남편인 당신이 잘해야 한다고, 아내의 짐을 덜어줘야 한다고, 아이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밥을 해먹이고 공부를 돌봐주고 같이 서점에 가고 운동장에 나가야 한다고, 아빠들에게 누가 그렇게 좀 말해주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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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게 길을 묻다 - 트라우마를 넘어선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찾아서
고혜경 지음, 광주트라우마센터 기획 / 나무연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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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나 세월호는 마음에 새겨진 문신 같다. 책에서만 배운 4.19와는 또 다른 아픈 기억이다. 나는 중학교 때 소위 유언비어로 광주를 만났고 대학 1학년 때 사진전으로 광주를 만났다. 간접적인 경험이었지만 그 아픔은 역사적 유전자에 새겨져 버렸다. 아마도 세월호 사건과 더불어 죽을 때까지 이 각인을, 이 낙인을 풀 길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직접 겪은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이 책은 직접 광주를 겪은 사람들의 꿈 분석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융의 꿈 분석심리학에 바탕을 둔 치료의식이자 사회적 기록이기도 하다.

 

고혜경은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베트남 참전용사라 써 붙인 노숙자가 없는 이유를 한국의 가족주의가 전쟁의 상흔을 가족 안에서 치유시켰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사회적으로 참전용사가 반사회적으로 인식된 미국과, 박정희 군부정권에 의해 칭송받았던 한국 사회의 차이도 있을 것 같다. 사회적 사고는 사회적 트라우마로 남지만 어떤 사회문화 속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현명하게 극복할 수도, 오히려 더 큰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월남전 참전의 상처가 치유된 것은 아니겠지만)

 

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리 상태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해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래서 내 꿈을 되새겨 보는 일도, 남의 꿈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남의 꿈을 듣는다는 것은 가슴으로 듣는 것이어야 한단다. ‘내 꿈이라면’, ‘내가 상상해 본다면이런 마음으로 듣는다. 꿈을 해석해 주려거나 조언하려 들지 말라고 한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대목 중이 이런 것이 있었다. 광주의 트라우마를 가진 내담자 중에는 꿈에 귀신을 자주 보는 이가 있었다. 심리학적으로 꿈에 나타나는 귀신은 내 안의 어떤 에너지, 한의 응어리 같은 것이라고 한다. 고혜경은 꿈 속 귀신에게 말을 걸고 그 이야기를 들어보라 한다. 그러면 두려움이 순화된다고. 나는 귀신을 자주 보진 않지만 나쁜 남자에게 쫓기는 꿈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린아이를 자주 보곤 하는데 이 대목을 읽은 후 그들을 두려워하기보다 그들은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새벽마다 꿈에서 깨어나면 꿈을 곱새기는 시간을 꼭 갖는다. 그때마다 그들의 정체는 내 안의 무엇이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것이 공포든 불안이든 죄의식이든, 나의 것이기 때문에 모두 안쓰러운 것들이다.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마음의 짐이 보인다. 어떤 것은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짊어지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그러니 꿈에 등장하는 무서운 존재들을 쫓아낼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 광주를 겪은 이들, 세월호를 겪은 이들 앞에 나의 그림자는 새발의 피일 뿐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지난일로 치부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광주의 묻힌 이야기들을 들춰 다 들어줘야 한다. 죗값을 치르지 않은 이들은 지금에라도 감옥에 가야 한다. 죽어서 돌아오지 않는 이들의 억울함은 이미 이생에서 도저히 풀 수 없는 것일지 모르더라도, 적어도 그 시신을 찾아 해원하고 그 원혼에게 세상의 미안함을 충분히 보이는 일은 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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