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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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어느 대학 국제어학원에서 영어회화 수업을 들을 때였다. 미국인 교수가 주말 직전 수업에 각자에게 과제를 내주었다. 나에게는 한국드라마(기초회화반이었으므로)를 보고 와서 이야기를 하라고 했는데 내 옆의 스물한 살짜리 대학생에게는 명동에 가서 남자를 만나라고 했다. 남자친구가 없다는 그녀에게 교수가 전한 남친 만드는 비법은 이거였다. 마음에 드는, 아직 사귀지는 않는 그 남자와 식사를 같이 하라(거기까진 할 수 있지?), 그리고 대화를 나누라, 그러면 넌 연애를 할 수 있다.,. 이게 무슨 황당한 비법인가?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와 그 남자에 대해말하라. 세상 어떤 남자도 여자도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려는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면 다들 자기 이야기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당신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당신에 대해 묻고 관심 갖고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당신이 그를 사랑하지 않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간단한 연애의 비법은 사실 모든 관계에서 다 통한다.

 

정혜신은 누군가를 만나면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 라고 묻는다고 한다. 이 단순한 말은 마법의 언어다. 국제어학원의 미국인 교수가 말해준 연애의 비법이자 공감의 첫 마디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다들 자기말만 하려든다. 그런 세상에서 누군가 당신은 어때?’라고 물어주었을 때, 갑자기 스포트라이트가 자기 자신에게 비출 때 느끼는 기쁘고 아픈 당혹감을 정혜신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들과 일주일 만에 단둘이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아이가 갑자기 엄만 요즘 뭐가 재미있으셔?” 라고 질문을 던진다. , 난 요즘 뭐가 재미있지? 질문을 받았으므로 대답을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구나, 나 자신도 나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았구나... 내 아들은 그냥 자기 본성대로, 늘 살아왔던 대로 그렇게, 자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에게 집중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무심한 듯 던진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나는 아, 나도 소중한 사람이구나, 우리 아들이 이 엄마한테 관심이 있구나, 이 아이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이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들에게 한수 배웠다. 정혜신의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와 내 아들의 요즘 엄마가 뭐가 재미있으셔?”, 그리고 미국인 교수의 그 사람의 이야기를 물어라.”는 모두 맥락이 통하는 공감의 언어 물꼬 트기들이다. 참 쉬운 첫마디, 그런데 우리가 참 못하는, 기술적 문제가 아닌 태도의 문제인 그런 말들이다.

 

정혜신의 책에서 가장 공감되는 대목은 존재가 소멸된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빠르게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는 방법이 폭력이라는 말이었다. 맞다. 우리는 보통 폭력을 저지른 사람을 비난하고 미워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를 벌할 땐 벌하더라도 그 폭력의 근원이 무언지 살필 필요는 있다. 특히 우리처럼 아이를 키우고 가르쳐야 하는 부모와 교사들은 더더욱.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자녀와 학생들의 폭력적 행동은 대개가 어른들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저게 누굴 닮아 저럴까?’, ‘어디서 저런 이상한 녀석이 우리 학교에 들어왔지?’ 라고 욕하고 밀쳐내려 하기 전에 내 모습에서 자식의 폭력성을 돌아보고 그 아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친구들에게 표출되는 폭력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정혜신은 또 폭력은 자기 존재감을 극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하는데 아들러가 아이들이 부모나 친구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쓴다고 한 것처럼 아무 것도 자신을 드러내거나 인정받을 방법을 갖지 못한 사람이 세상에 인정받을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한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자존감이 높고 자기 내면에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은 폭력이나 폭언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정혜신은 충조평판을 하지 말라고 한다. 외워두면 좋을 것 같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줄임말이다. 아들러도 하지 말아야 할 많은 말들을 제시했다. 위 네 가지 말고도 조롱과 칭찬마저도 삼가라 했다. 칭찬조차도 수직적 권력관계에서 나온 말이라고. 물론 아들러의 주장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고 교사의 입장에서는 때로 충고와 조언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수평적 인간관계에서는 충조평판의 폐해를 분명히 안다. 나 역시 남편에 대한 나의 언어들, 내 어머니에게 하는 말들을 돌아보니 대개가 저기 어딘가에 걸렸던 것 같다.

 

정혜신은 마음과 존재에 대한 공감이 곧 상대방이 한 행동에 대한 공감은 아니란 점을 분명히 말했다. 많은 교사들이 상담 연수할 때 걱정하는 부분 중에 공감해 주면 아이들이 기어올라요. 학생들은 공감하는 교사에게 막 행동해도 되는 줄 알지 않을까요?’ 한다. 교사나 부모는 아이들과 다정하게 공감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물론 그렇게 아이 행동을 이해하면 야단치거나 벌을 주기 어렵긴 하다) 아이들이 잘못한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 다정함과 단호함의 경계를 어떻게 짓느냐고 울상을 지을 게 아니다. 아이들도 다정하나 분명하고 엄격할 때, 즉 화내거나 짜증내지 않고 진심을 담아 네가 한 행동은 잘못된 것임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지 함께 생각해보자라고 말하는 부모나 교사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혜신이 나의 오랜 질문에 답한 것이 있다. ‘토 달지 않고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은 공감이 아닌 감정 노동일 뿐이라고. 기질적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힘들어 하는 내가 어쩌다 상담을 공부했을까 싶을 때가 많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지나치게 감정이입이 되어서 많이 힘들다. 내 어머니와의 대화에서는 지칠 때가 많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 대해 정혜신은 감정노동과 공감은 다르다고 말해준다. 공감해주기 싫다, 라고 마음속에서 도리질 칠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던 많은 상담교사, 심리치료사, 혹은 맏딸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에게 아니,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준다.

 

정혜신은 또 정서적 공감과 정서적 호들갑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간혹 사람을 잘 사귀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좋아지지 않을 때 그게 이상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그의 다가옴은 늘 과장되어 있었다. 분명 나에 대해 말하고 묻는데 그게 기분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건 공감이 아니었던 것이다. 공감은 반드시 진심과 동반되어야 한다. 거짓 공감은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곧 피곤해진다. 물론, 내가 만나는 학생들도 당연히 그걸 안다.

 

나는 상담업무를 맡은 교사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었지만 아무 상관없는 일반인에게도 이 책은 따뜻하게 읽힐 것 같다. 자기의 말을 돌아보고 관계를 돌아보게 해준다. 자기성찰만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고 잘 견뎌왔는지를 스스로 묻고 스스로 위안하게 해주는 힘도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정혜신이 앞에서 그렇게 내 스스로 묻고 대답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럼 정혜신은? 그에게는 남편이 그런 역할을 한단다.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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