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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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학교에서 두려움 없이 차별을 가르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대체로 평등을 지향하고 차별에 반대한다. 관념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 다들 차별이 나쁘다고는 말한다. 차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다는 희망 때문에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논리적으로 꼬여 있는 아이들도 가장 기본이 되는 생각,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에서부터 출발할 수만 있다면 토론을 통해서 주변의 다른 비논리적인 사고들은 정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차별 좀 하면 어때?’라고 생각하는 교사 혹은 학생을 만난다면... 나는 회피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하려 애쓸 수 있을까? 그리고 대다수의 차별은 나쁘다는 걸 알아. 하지만 여자는..., 외국인은....’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의 생각을 바로잡거나 외연을 넓히기 위해서 길고도 정교한 교육방법을 기획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2. 내가 누리는 차별의 특권은 없는가?

남성특권 목록

-내가 승진에 자꾸 실패한다면 그 이유가 성별 때문은 아닐 것이다.

-밤에 공공장소에서 혼자 걷는 걸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운전을 부주의하게 한다고 해서 나의 성별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외모가 전형적 매력이 없더라도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안정적 삶을 살고 있는 중산층 가정 삶이라는 특권(?)에 안주하면서 입으로만 반차별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본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그로 인해 아이들을 잘 양육할 수 없는 학부모들을 보면서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있지는 않은지. 등등.

 

3.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는가?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개선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백인은 많이’, 흑인은 별로라고 대답했다 한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인권이나 이주민 상황에 대해 질문해도 비슷하지 않을까. 간혹 백인이면서 흑인인권 운동을 하는 이라든지 남성이면서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이, 교사이면서 학생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등 고도의 초자아로 객관성을 유지하는 이들이 있겠으나 그들 외의 대부분의 일반인에게 객관적인 입장이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약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말해야 한다. 말하는 것 자체가 투쟁인 것이다. 거꾸로 내가 만약 다수이자 강자의 위치라면 자신의 생각이 아닌 약자의 입장에서 그들은 어찌 생각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교사인 내가 강자이고 학생은 약자라는 것을 잊지 말자.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전보다 좋아졌지 않은가라고 생각하지 말고 학생들이 뭉텅이 취급 받고 무시받고 외면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그들을 그런 취급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돌아볼 일이다.

 

 

4. 나 자신에게 스며있는 구조적 차별은 없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농담들, 에구, 한 대 때려주지 그랬어, 남자가 왜 그래? 애들이 다 그렇지 뭐. 동남아스럽게 생겼네. 어제 짱깨집 갔어. ... 또 뭐가 있을까? 우리 속에 녹아 있는 학생을 차별하는, 혐오하는, 편견에 빠진 그런 표현들... 여럿이 모여서 싫어하는 소수 집단에 대한 혐오표현을 쓰거나 희화화하며 죄책감을 덜고 자기들끼리 연대감을 느끼며 심지어 도덕적 기준의 경계를 무너뜨림(혐오표현을 함부로 쓰면서 집단적 편견과 적대감도 봉인해제 됨. 일베의 세월호 비하 같은 것). 이럴 때는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유머를 만나면 정색하고 따져야 한다.)

 

5. 이것은 단순한 배려인가, 공정하고 합리적인 조치인가?

공무원 시험에서 장애인 수험생을 위해 대필을 해준 것, 어떤 선진국에서 비영어권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입학 후 일정 기간 동안 시험시간을 1.5배 더 주는 정책을 편 것 등... 기초학력이 부족한 학생에게 수행평가의 기준을 달리 주는 일은 어떠한가?

 

6. 나는 정의로운 사람인가?

 

정의의 범위 누구나 정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의 영역은 한계선이 있다. 그 범위가 넘어선 사람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대해도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공산주의자가, 난민이, 성소수자가 도저히 선 안으로 들일 수 없는 정의의 범위일 것이다. 나의 정의의 범위는 무엇인가? 범죄자? 나의 경우 청소년 범죄에 대해서 처벌보다 교화와 사회적 원인 교정이 더 필요하다는 허용적 입장이다. 하지만 일반 범죄, 특히 강력 범죄에 대해서는 사형 등 엄벌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나의 생각에 모순은 없는가?

 

7. 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인가?

 

학식과 경험이 많으며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도록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저항세력으로 등장한다.

많이 배운 자가 가진 자 편에 서는 일은 80년대 독재 정권하에서뿐 아니라 현재까지(사실은 고래로 그래왔지만) 일반적인 현상이다. 교사는 누구보다도 학식과 경험으로 사회변화를 이끌어가야 할 사람들이지만 대개는 침묵, 혹은 동조, 혹은 오히려 앞장섬으로써 기득권에 복무했다. 나에게는 그런 요소가 없는가? 나이가 들면 이제는 그만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8. 나의 교권은 안녕한가?

 

평등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 여성의 권리가 높아지면 남성은 손해를 보는가? 학생 인권이 높아지면 교권은 떨어지는가? 난민을 지원하면 국민에게는 손해인가?

 

교권은 교사의 권리가 아니며 학생인권과 대척점에 있지 않다. 많은 이들이 학생인권이 높아지면서 교권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교권은 학생을 때릴 수 있는 권리, 모욕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므로 학생인권을 존중한다고 해서 교권이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지금은 과거에 교사들이 교육할 권리와 권한을 학생을 함부로 대해도 제재 받지 않을 권한과 착각한 데서, 그리고 그런 착각을 바로 잡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는 시기이며, 여태까지 제대로 인정받아 보지 못했던 학생인권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자리 잡게 만드는 과도기이다. 그래서 생기는 오류들이 많다. 아무 질문이나 던지고 교사를 모욕하고 교사의 수업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학생의 권리인 양 착각하는 학생과 학부모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제대로 존중받고 자란 학생들은 교사에게 그러지 않으며 교사로서 자존감을 굳게 지키고 있는 교사는 결코 학생을 모욕하지 않는다.

 

서로가 존중하며 서로의 권리와 인권을 존중하는 학교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거기까지 가는 데 아직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그리고 하필 지금이야말로 가장 그 혼돈의 정도가 심한 울돌목이다. 여기를 빠져나가면 아마도 나는 퇴직교사가 되어 안정되어 가는 학교를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겠지..라고 희망사항을 적어본다.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 화해하고 함께하는 열린 공동체로서의 우리들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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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거니즘 만화 - 어느 비건의 채식 & 동물권 이야기
보선 지음 / 푸른숲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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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위에 놓인 고기와 생선을 다듬으면서 생명 앞에 한없이 참담한 마음이 되곤 했다. 그렇다고 아직 어린 내 아이들에게 채식을 강요할 수는 없으므로 고기 요리를 해야 했다. 아이들이 다 크고 따로 살면 언젠가는 채식을 하리라, 그런 생각은 했다. 물론 채식을 하더라도 우유나 달걀, 해산물은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도 상 이 책에는 고기보다 먼저 달걀과 우유 이야기가 나온다.

달걀은 바로 생명을 죽이는 일은 아닐지라도 닭의 새끼를 빼앗아 먹는 일이라 마음이 꺼림칙한 게 사실이다. 게다가 이 책에 의하면 우리가 먹는 달걀은 대부분 닭들을 오로지 알 낳는 기계처럼 혹독하게 괴롭혀서 얻어내는 것이다. 저자는 가급적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달걀을 먹으라고 하는데 사실 동물복지든 아니든 남의 새끼를 먹는 건 마찬가지다.

 

우유는 어떤가.

어려서부터 우유를 거의 먹지 않고 살아왔던 나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시리얼이나 집에서 만드는 팥빙수로 우유를 제법 먹었다. 우유를 너무 안 먹으면 골다공증 걸린다고 채근하는 주변사람들 말을 생각하며 순진하게도 이렇게라도 우유를 섭취하는 스스로를 기특해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 역시 바보같이 우유가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평생 늘 젖이 나오는 소가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을 왜 못해왔던 걸까. 소젖을 얻기 위해 암소를 억지로 임신시키고, 새끼가 젖을 먹지 못하도록 떼어낸단다. 그렇게 젖소는 임신 출산과 착유를 거듭하다가 착유의 효용을 다하면 고기가 된단다. 특히 만화에서 새끼와 억지로 떼어낼 때 소들이 느끼는 안타까움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가 싶어졌다. 억지로 키우고 목숨을 빼앗고 갈가리 찢어서 고기를 만드는 일도 잔인하지만 그 짧은 생마저 고단하게 살도록 할 뿐 아니라 새끼마저 빼앗는다니. 나도 인생을 살면서 가장 마음 깊은 일이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일이다. 나도 모르게 동물의 모성애에 감정이입이 되어 많이 괴로웠다. 그렇게 절반도 채 안 되게 달걀과 우유 이야기까지 읽고 이 책을 덮었다. 한동안 책을 읽지 못했다. 한동안 우유와 달걀을 먹기 힘들었다.

 

괴로워하는 내게 남편은 이렇게 말해준다. “잘은 모르겠지만 인간이 잡식성 동물이라서 고기를 먹지 않고 살기 어려운 거라면, 그들에게 미안해하지 말고 고맙다고 하고 먹자.” 나는 식구들을 위해 삼겹살을 구우면서, “돼지야, 고마워.”라고 말했다. 치즈와 버터를 좋아하는데 대용품으로 채식치즈나 마가린을 찾아보고 있다. 두유나 두부 대신 콩밥을 지어 열심히 먹어본다.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책을 읽은 여파가 가시면 또 별 고민 없이 슬픔 없이 삼겹살도 우유도 달걀도 먹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이 책처럼 죽비로 내리치는 책이 필요하다. 한없이 작아져 마른 풀꽃같은 할머니가 되어 바스라져서 우주를 떠나는 게 나의 소원이다. 그 길로 나아가는데 지혜를 주고 마음을 다지게 해주고 용기를 내게 해주는 좋은 길잡이 중에 이 책이 있다.

저자는 내내, 완벽해지려 애쓰거나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그저 같이 생각이라도 해보자고, 작고 부드러운 손을 내민다. 강요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미더운 마음은 물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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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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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떤 분야에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일도 쉽지 않지만 단편적 지식을 넘어서는 통찰력을 갖추기는 더 어렵다. 그리고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알고 있는 것과 통찰하고 성찰한 것을 쉬운 말로 다른 이에게 나누는 것이다. 유시민이 존경받는 이유는 여기 있다. 그는 그 세 가지를 다한다.

유시민은 원래 경제학 전공자이다. 이 분야에 아는 게 많은 것은 당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지금 사회와 묶어서 볼 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게다가 나처럼 고등학교 사회 시간 이후, 그리고 대학교 신입생 때 사회과학 공부를 한답시고 관련 책을 좀 읽은 이후에는 경제학 이론과 거리가 먼(은행 이율 계산하는 것도 머리 아프고 세금 낼 때마다 연말정산 할 때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사람이다) 삶을 살아온 사람들도 쉽게 읽히는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원래 진짜 잘 가르치는 선생들은 어려운 내용을 쉽게 가르치는 법이다. 잘난 이는 많지만 함께 가는 이들은 많지 않은 이 이 척박한 대한민국에서 그는 그걸 해낸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세상에 드러날 무렵, 많은 이들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그의 행태에 분노했지만 내 동생처럼 경제관념이 빠삭한이들은 내가 저런 이들을 위해 피 같은 세금을 내왔단 말인가!’ 하면서 분노했다. 같은 부모 밑에 태어났지만 경제적 유전자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나는 문과적 감성으로 <경제학 카페>를 읽었다. 여기에 무수히 등장하는 경제학자들과 그들의 이론, 한없이 객관적으로 쓰려고 애쓴 저자의 이론 소개나 각종 계산식들은 수학 시간에 귓등으로 수업 듣는 학생마냥 건성건성 읽고 대신 듣고 싶은 말에만 귀를 쫑긋했다. 가령,

 

다른 일로도 먹고살 수 있는데도 몸을 팔 사람은 별로 없다.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진 후 여자들이 매매춘으로 나서지 않은 나라는 옛 동독 하나뿐이었다. 흡수통일과 더불어 서독의 사회복지 제도가 그대로 이식됨으로써 여성들이 몸을 팔아야 할 절박한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리지 않은 덕분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복지에 관하여 부자나라란 국민 개개인의 평균 부가 높은 나라가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평균적으로 높은 복지수준을 누리는 나라이다.라고 말하면서 GNP의 절대적인 크기가 아니라 그것을 인구수로 나눈 1인당 GNP가 빈부의 기준이 된단다. 1인당 국민총생산이 비슷하다면 국민 평균 노동신간 적은 나라가 더 부유하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GNP 수준은 높지만 실제 복지는 낮다.

그리고 새삼스럽긴 하지만 자연을 경제학의 세계에서 논한 것은 불과 50년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경제학의 출발은 발전, 그리고 그로 인한 갈등들이 아니었을까? 즉 산업자본주의의 발전과 경제학의 발로는 맞물려 있는 것이다. 자연이나 환경이라는 개념에 대한 관심은 자본주의 발전의 여파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 전에야 자연은 그저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인 줄만 알았으니까. 유시민은 새만금을 언급하면서 깨끗한 자연은 아무 대가 없이 소비할 수 있는 자유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에야 경제논리로 환경오염을 막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많아졌지만 이제 자연과 환경은 비록 비경제적일지라도 놓쳐서는 안 되는 가치이다.

 

그리고 2002년에 쓰인 책이라 어떤 부분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의료서비스 시장과 의료보험 시장은 원래부터 자본주의 시장원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예외 영역이라 개입과 통제가 불가피하다. 어느 나라도 의료 서비스와 약품 공급을 시장원리에 내맡겨둔 나라는 없다.’라는 구절은 2020년 지금에 더더욱 절박하게 다가온다. 코로나 사태를 맞으면서 사람들은 새삼 이명박 대통령 시절 추진했다 무산된 민간의료보험을 떠올린다. 미국의 의료실태를 언급하면서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의료를 국가가 거머쥐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를 말한다.

공중보건 서비스는 국방이나 치안과 같은 성격을 가진 공공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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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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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 마음이 아픈 사람, 범죄자, 능력이 부족한 사람,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 세상을 달리 보는 사람, 몸이 약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하는 사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위험한 사람,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돌연변이, 약자, 소외된 사람, 이상한 철학이나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 성소수자, 기괴하게 생긴 사람, 괜히 불쾌감을 주는 사람....

...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배제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별 힘이 없고 권한이 없어도 서너 명만 모이면 어떻게든 에너지를 뿜는다.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정치인이 되면 배제의 법안으로 만들며 저들을 옭죌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절대 권력을 갖게 되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해지는지는 역사적으로 경험해 잘 안다.

 

그런 차별주의자들은 어디까지 배제하고 싶어 할까? 눈치볼 사람이 없이 마냥 그 배제의 외연을 확대하다 보면 결국 <기억전달자>의 세계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폭력과 범죄가 다름’, 그리고 욕망과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인간에게서 그 다름의 요소들을 다 제거하고 나서 가장 평등하고 가정 평온(해 보이는)한 세상을 만든다. 그걸 만든 이가 누구인지 소설 속에서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섭다. 다수의 이름으로 저런 결론에 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에.

 

소설의 도입부에서 소개된 세상은 지극히 평화롭고 안정돼 보였다. 하지만 점점 이 안정감의 정체에 의심이 든다. 범죄와 부도덕의 근원이라 여겨져 성욕을 억제하는 약을 먹인다는 발상은 끔찍하지만 그나마 상상력의 범주 안에 있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상상은 몸이든 마음이든 끌리는상대를 내가 선택하는 일의 싹을 제거하는 일이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제어는 모두 인간의 자발적인 감성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감성을 고조시킬 수 있는 것들 하나하나를 제거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사람들의 감정의 흔들림을 억제하기 위해 빛을, 바람을, 햇빛을 모두 제거했다. 조너스가 사는 세상에는 음악도 없고 예술도 책도 없으며 꿈도 제어되는 그런 세상인 것이다.

 

스무 살 시절 가벼운 우울증을 앓았다. 그 때의 회색빛 세상을 지금도 기억한다. 조너스의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공평한 세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기억일지라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듯 보인다. 죽음은 죽음이라 말하고, 상실한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애도해야 한다. 하얀 눈의 아름다움과 그 위를 달리는 쾌감을 얻으려면 발가락이 얼어붙는 고통도 같이 껴안아야 한다. 자유의지가 없이, 고통도 없이 진정한 행복이 있을까? 설령 행복하다고 생각한들 그것은 진실한 것일까? 평안함, 행복함만을 위해 외면해도 되는 진실이 있는 것일까? 통제하는 자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더욱 공포스러웠고 흔히 보아왔던 것과 다른 디스토피아를 보여주었기에 더욱 우울했던 이 소설을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햇빛, 바람, 음악, 빛깔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기만 해도 책을 읽힌 보람을 느낄 것이다.

당연한 듯 곁에 있는 이 아름다운 것들은 불편한 것들을 견디면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줄 알아서 고마운 줄 몰랐던 것들이 사실은 간절하게 소중한 것들이라는 깨달음을 코로나 창궐의 공포 속에 동결시켜야 했던 일상을 통해 얻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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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 박찬일의 이딸리아 맛보기
박찬일 지음 / 창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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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좋아하지 않고 요리하기를 몹시 꺼려하는 나이지만 요리사를 꿈꾸는 나의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신문에서 연재할 때 몇 번 이 글을 읽은 듯하다.

내용은 관심 영역이 아니지만 이런 재기발랄한 문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문장 자체를 즐기며 재미있게 읽었다. 음식에 관심이 없는 이도 다른 나라 문화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박찬일의 농담 코드는 한국적이지는 않다. 과장된 장면을 시크하게 말하는 방법, 투덜거리는 마초 캐릭터 같이 묘사하지만 그 안에 철학과 인간미를 담고 있는 주제뻬를 묘사하는 방식, 고생하고 고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남 이야기하듯 거리두기를 하는 위트 등. 이런 유머를 잘못 구사하면 세상 가벼워보인다. 물론 그가 다룬 한국 셰프가 이탈리아에 요리 유학 가서 시칠리아 어느 식당 주방에서 개고생한 이야기는 충분히 가볍고 발랄해도 무탈할 소재이긴 하다. 그런데 낄낄거리고 읽으면서 마음이 깊어지는 지점이 있다.

가령 유기농 채소에 대하여 이런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것,

 

미국 캘리포니아 거대 유기농 기업들은 최저임금에 멕시칸들을 고용해서 땡볕 아래 샐러드용 채소의 벌레를 손으로 잡도록 시킨다. 그 채소는 다시 경유를 펑펑 쓰며 수천 마일을 달려서 미국 동부로 간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유기농일까?

 

박찬일의 주방장이었던 주제뻬가 과도한 육식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

아마도 우리 자식들은 쇠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없게 될 거야. 우리가 다 뺏어먹었기 때문이지. 고기가 언제까지 무한정 값싸게 공급될 거라고 생각해? 고기는 지구를 파괴하고 있지. 초지가 말라가고 아마존이 무너지고 있어 그게 다 없어지면 우리 아이들에게 고기를 줄 수 없을 거야.”

 

그리고 푸아그라 만드는 방식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통한 간접적인 비판(박찬일 셰프는 푸아그라를 요리하지 않는단다)...

 

결론적으로이 책은 정말 재미있고 그러면서도 생각할 거리도 있는, 어른에게도 중딩들에게도 권할 만한 좋은 책이다. 베네치아에서 경찰들에게 공식적으로 삥 뜯긴 아픈 추억 때문에 이탈리아에 다시 가고 싶진 않지만 이글을 읽고 시칠리아가 조금 궁금해지긴 했다. 이탈리아 음식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내가 즐긴 것의 세 배 정도 더 재미있게 이 책을 읽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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