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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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이 즈음에 경제 관련 책들을 읽고 있다. 경제학은 사회과학이니 인문학과 멀지는 않다. 신영복 선생도 경제학을 전공했다 하더라. 그렇기는 하지만 나같은 인문주의자가 경제서를 집중적으로 읽는 이 시대가 평화로운 시대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긴 하다. 

국어과 선생님들과 하는 독서토론에서 이 책을 읽었다. 감성적이고 보수적인 선생님도 있다. 이 책이 어떤 느낌으로 그에게 다가갈까 궁금했다. 그는 '내가 전혀 몰랐던 세상이 여기 있더라. 그 동안 속았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유수한 대학을 나와 나이 서른 넘은 유능한 교사가, 평소에 책깨나 읽는 그가 마치 고등학교때 반공교육만 받다가 대학에 가서 처음 운동권 가요를 접한 80년대 학생같은 소리를 한다.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누구나 삶의 반경이란 게 있다. 그가 우리 학교 국어과 샘들의 독토모임에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냥 고등학교 경제 시간에 배운 아담 스미스나 케인즈 같은 경제학자들의 이름밖에는 모른 채 경제에 관심을 두지 않고 평생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것은 삶의 어떤 고리 혹은 계기의 문제일 수도 있고 장하준의 영향력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정치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정권이 엑스맨이라니까) 그 선생님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특별히 진보적이랄 것도 없는 분들이다. 내가 보기엔 평범하나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요즘 워낙 정상적인 사람들이 드물다 보니 그 선생님들이 이 세상을 견디는 게 힘들 때가 있다.  

책은, 일단 제목도 재미있고(원제에는 자본주의, 라는 단어가 언급되어 있다. 또한 부제에는 장하준이 '더 나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임도 명기되어 있다.이 책을 놓고 사회주의 운운하는 사람들은 책을 제대로 읽기나 한 것인지 묻고 싶다.) 둘째, 문장이 명료해서 좋았다. 영어로 쓰고 그걸 다시 우리말로 번역했다는데 아무래도 장하준 박사가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군더더기 없는 영어를 구사했을 것이라고 토론할 때 여러 샘들이 말한다. 나는 현란하게 쓰는 글과 직역으로 오히려 오역을 만드는 번역서들을 혐오한다. 정말 잘 아는 사람은 어렵게 쓰지 않는다. 또한 번역하는 이도 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잘못된 번역으로 독자를 곤혹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읽기 어려운 글은 (물론 독자가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글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대개 저자 혹은 번역자의 오만을 탓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탁월하다. 너무 쉽게 쓰여져서 그런가, 어떤 40자 서평에 경제학자 맞냐고 심하게 평가절하한 것을 보았다. 어려운 걸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진짜 능력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장하준은 왜 마이너가 되었을까. 한국에서 활약하지도 않을 뿐더러 한국의 주류경제학자들이 대개 미국학파인데 비해 그가 영국에서 공부한 사람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경제가 미국과 일본을 모델로 해서 따라가기 급급할 때, 만약 우리에게 모델이 꼭 필요하다면 서유럽도 있고 북유럽도 있다고  말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쪽에서 공부했거나 이 엄혹한 보수적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꼭 이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고민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다. 그 탄압과 비난을 감수하고 사는 것은 정말 힘들다. 오죽하면 비교적 양식있는 알라딘에서도 장하준이 사회주의자니 함량미달이니 하는 감정 섞인 비난을 들어야 하는가(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란 말이다.) . 

내용은, '자유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영미에서 부르짖는 '자유주의'는 실체가 없다, 정작 자신들은 철저한 보호무역과 관세로 무장을 하고 경제를 발전시켜 왔고, 이제 자신들의 뒤를 따르려는 개발도상국들에게는 그런 보호무역이나 정부 관여를 억제하고 자유경쟁하자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미 충분히 맷집을 불려놓은 거대국가들이 작은 나라들을 상대로 하여 보호장치 없이 '자유롭게' 한판 붙자고 하는 이 논리의 헛점을 조목조목 짚어주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신자유주의 사상은 경제뿐 아니라 우리 사회 온갖 세부 항목에 다 적용되는 주류 사고방식이 되고 말았다. 고작 20년도 채 안 된 시간이다. 물론, 70,80년대에도 경쟁을 조장하는 개발중심의 경제와 정치 사상이 급속히 사회에 퍼져나갔지만 그래도 유교적 사고방식이나 농경주의적 정서가 성장과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뒤에서 가만가만 '땡겨주기'라도 했다. 80년대의 학교도 치열한 입시경쟁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대놓고 경쟁이 최고다 일등이 최고다 공부 못하면 쓰레기다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많은 교장들이 그렇게 생각은 했어도 훈화를 할 땐 점잖게 인성을 말하고 협동을 논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학교 앞 플랭카드에 대놓고 경쟁하는 어린이 성공하는 학생을 칭찬하고, 잘난 아이 못난 아이를 갈라놓는 다양한 방식을 노골적으로 계발하는 시대가 왔다. 

이라크전이 터졌을 때, 교과 내용 중 '토론하기' 단원에서 이라크 전과 파병을 주제로 하여 아이들이 토론을 했던 적이 있었다. 전쟁 반대도 나왔고 파병 찬성도 나왔지만 당시 교장, 교감은 나를 반미주의 계기수업을 했다고  몰아쳤다. 그때 했던 대화 중, 

"안선생, 왜 반미수업 했소?" 

"반미 수업 한 적 없습니다. 반전에 대해서는 이야기했습니다. 전쟁은 옳지 않은 것 아닙니까? " 

"미국이 전쟁을 했는데 전쟁을 반대하면 미국을 반대한다는 얘기지!" 

"반미고 친미가 중요합니까? 교사가 아이들에게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못합니까?" 

"지금같은 시기에 반전은 곧 반미요, 우리가 반미를 하고 어떻게 살아납니까!" 

아, 이런 게 바로 친일파들의 논리였으리라. 속으로 일제시대였으면 친일파가 됐을 인간 같으니! 하고 욕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 우리에게 미국은 그런 존재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 사는 줄 아는 나라, 가고 싶고 따라 하고 싶은 나라. 그러나 최강부국 미국에는 가장 심한 빈부격차와 불안한 치안과 높은 범죄율이 그늘에 있다. 진정한 삶의 질, 진정한 효율을 고려하지 않는 경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한 경쟁과 성장으로 부자가 더욱 부자가 될 때 가난한 자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는 논리는 가난했던 나의 아버지마저 신봉했던 이상한 논리였다. 가난한 자에게 나누지 않으면 그들이 살아남을 수 없을 때(경제 논리로 보자면), 아니면 부자이나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도덕에 의하여(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럴 때에만 부자들은 자신이 가진 걸 나눈다.(사실 전자가 더 설득력있다. 과학적이고) 뭐 대략 이렇게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기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이 혹은 그 추종자들 감추어 '어리석은 우중이 미처 깨닫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야기를 장하준은 조목조목 까발려준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니 참 다행이다, 라는 말로 누군가 독서토론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대안은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책에서는 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에 대한 조심스러운 대안 제시가 있다. 구체적이지는 않으나 의미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논의가 잦아질 수록 사람들은 왜 꼭 미국식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세상은 하루 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변화는 작은 데서 온다.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세상도 작은 균열에서 비롯된 충격으로 붕괴된다. 평범하고 합리적인 한 소시민이 난 이런 것 몰랐었다고, 새로운 세상을 본 것 같다고 놀라워한 그 충격에서 세상의 변화는 시작된다. 장하준은, 펜이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주는 요즘 몇 안 되는 진정한 논객이다. 지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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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 - 송기숙 산문집
송기숙 지음 / 화남출판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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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도 언급된 황석영 씨가 별명이 황구라라던가. 그런데 그와 고은과 더불어 지은이에게도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 '구라'라는 속어에는 물론 '거짓과 과장'의 혐의가 있긴 하지만 한편 참 소소한 것조차도 무지하게 아름답게 느끼게 하는 귀여운 뻥끼(氣)를 일컫는 애교스런 표현이기도 하니까 감히 그들을 묶어서 그렇게 불러 보는 것이다. 

국어 선생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할 것이다. 우리 공동체가 갖고 있는 특별한 의미를 문학적으로뿐 아니라 분석적으로도 종합적으로도 보여준다. 나도 수업 시간에 '두레'를 짜서 공부하는데(초등학교의 모둠 수업과 같은 개념이다.) 아이들에게 왜 조組가 아닌 두레여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공부좀 하는 집 아이들이나 어머니들은 이 두레수업을 몹시 싫어한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손해라는 것이다. 수고는 그들이 다하고 점수는 공동점수를 받으니 이 아니 불공평하냐고 항변한다. 하지만 나는 달리 설명한다. 일종의 팀이 협력하여 공부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사회성을 기를 뿐 아니라 공부 잘하는 아이라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 특히 리더쉽을 기를 좋은 기회라고,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또 어떨 때는 혼자 책으로 공부할 때는 잘 하지만 협력해서 공부할 때 어려움을 느끼면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배운다고, 이것이야말로 윈-윈 게임이라고 조목조목 설명해준다.  

그런 협력학습 정신은 우리 조상들의 두레정신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막연하게 알았던 그 두레정신이란 것이 근거를 가지고 당당하고 단단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산문집이지만 에세이이고 그 에세이는 서양의 가벼운 '논문'의 개념과도 닿아있다. 그러면서도 그 글빨이 참 술술 읽히는 게 아주 재미있다. 

뒤로 가면 송기숙의 인물평이 나온다. 고은, 황석영, 박현채... 실존의 인물을 전설의 인물로 승격시키는 말빨의 힘이여! 무협소설 속에서 8도를 종횡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황석영, 자유영혼으로 그 육신을 넘나든 듯한 고은, 역사 속에서 말없이 뚜벅뚜벅 걸어나와 굵은 목소리로 나즈막하게, 그러나 짧게 진중한 질문을 던지고 사라진 박현채... 송기숙 소설 속 인물들 같다. 다들 한 말빨, 글빨 하던 이들이었고 시대의 풍운아들이(었)다. 누구는 그래서 송기숙의 진정성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어쩐지 이제는 그런 화려한 필치를 구사하는 열정의 문인들의 시대는 가버린 듯 싶어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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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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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뭐가 불온하다는 건지 궁금하다. 자본주의를 부정한 것도 아닌데.. 시중에 나온 경제학 책 중에 잘 읽어보면 자본주의 자체가 경제와 민중의 삶의 최대 적임을 선언하는 책들도 많은데.. 신자유주의가 무슨 금과옥조도 아닌데... 

목소리 칼칼한 주장이 아닌 많은 예시와 통계수치가 근거로서 바닥을 잘 다지고 있어 오히려 냉철한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도 이 책을 '불온하다'고 선언한 이들이 있다. 

학교에서도 그런다 .교사가 아이를 품을 수 있다면 큰소리를 치거나 매를 들지 않아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무지막지한 폭력을 가해서라도 아이를 제압하려 드는  교사들의 혈기 뒤에는 그 아이가 자기를 이기려 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다. 장하준의 책이 불온한 것이 아니라 저들이 장하준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뭐가 두려운가. 위에서 말했지만 경제적 체제를 뒤집는 것도 아닌데. 생각해보면 미네르바는 그렇지 않았던가. 주장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공감하는 자들이 어떻게 증폭되는가의 문제인 것 같다. 장하준의 경제학은 쉽다. 요렇게 딱딱 맞게 이야기를 하는데 ,유명한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쉽게 이해되는데(게다가 주제는 하나로 일관되게 나아간다. 친절한 반복학습까지...),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부도덕한지를 쉽게 깨달을 '우중'들의 각성이 저들은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참 바보들이란 생각이 든다. 이솝우화의 사과처럼, 저들이 장하준의 책을 불온문서로 규정하는 순간부터 대중은 그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미네르바도 그랬다. 경제에 관심 없었던 나같은 사람도 미네르바가 뭐라 그랬는지 읽어보고 싶어졌다. 환율, 금리, 이런 거 모르고 재경부가 심리적으로 행정부처 중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나같은 사람도...... 당신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지? 혹시, 엑스 맨? 

이 책을 열심히 밑줄 긋고 읽고 컴에 요점정리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던 중 새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나왔다. 역시 같은 주장에 대한 탄탄한 근거들로 꽉 차 있을 것이다. 그 책으로 학교 선생님들과 독서토론을 하기로 했기에 나쁜 사마리아인에 대한 복습은 여기서 접기로 한다. 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결코 재미있지 않았지만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 이런 책을 읽어야 했었다. 20년쯤 후가 되면 내 전공과 관련없는 그런 공부는 안 해도 되는 세상이 올 줄 알았다. 경제가 싫은 나같은 사람에게 경제학 책 읽기를 강요하는 또 다른 이 시대, 감사하다 해야 할지 슬프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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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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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도 읽으면서 늘 마음이 불편하다. 죽음과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이 소설을 쓰여지지 않고 악인이 등장하면 재미는 없는 것인지. 

오랫만에 아무도 나쁘지 않은 소설을 읽었다. 모두 서로 사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다. 여관이 망해도 소설이 안 돼도 쌀이 떨어져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현실 속 사람들이 그렇듯, '영란'의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상처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 대한 위협과 자신에 대한 자학으로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사람을 찾는 방식으로 극복한다. 

주변 사람들이 다 아름다웠던 적이 있었다. 인간은 하나하나가 소우주라 했다는데 그 말이 정말 실감이 났다. 말이 없는 아이는 말 없음 뒤에 신비로움을 지녔었고 까불대는 친구도 자기 안의 또다른 세상을 지니고 있었다. 수줍고 무능해 보이던 아이가 빛나는 시를 쓰는 것을  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서 대학 초기였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감성은 얼음처럼 맑았으나 결핵성 질병에 시달리고 있어 체력이 가장 고갈되어 있었다. 우울증이 겹쳐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보일 때였었다. 그럼에도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다, 그 신비한 사람들 하나하나가 몹시 궁금했었다. 

영란의 등장인물들은 고상하다. 아코디언과 풍금으로 뽕짝을 연주할지라도, 추운 싸구려 여관 마당에서 파를 다듬고 있을지라도 벽에 뽕끼 가득한 필치로 '생활시'를 쓸지라도 조금도 천박하지 않다. 말못하는 딸을 위해 풍금을 연주하는 아버지는 신비롭고 카페를 전전하며 록을 트로트화 시켜 부르는 무명가수의 열창에도 '쏘울'이 묻어난다. 완규의 시는 순진해서 오히려 가슴을 친다. 그런 사람들 하나하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정섭은, 비록 상처를 입고 가족에게 상처를 주었었지만 참으로 순수한 사람이다. 늙은 술집 작부와 삶의 의욕을 잃고 적당히 시들어가는 구멍가게 여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아무나 붙잡고 징징거리는 여자도 영란 앞에서는 다 아름답다.  

아무래도 정섭의 마음이 '영란'에게 가고 있음이 분명했는데도 그 둘은 만나지 않는다. 언제 만나서 서로를 사랑할 것인가, 혹은 파탄날 것인가를 기다리며 책을 읽었지만 목포를 각각 빙빙 돌며 딴 사람들만 만나고 돌아다니던 그 두 사람은 마치 회오리의 가운데를 향해 조금씩조금씩 걸어들어오듯이 서로를 향해 다가간다. 영란이 인자와 함께 꾸려가는 간재미횟집을 향해 무심한 듯 찾아가는 정섭의 발길이 아름답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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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별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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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집었는데..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장이나 서술방식은 그렇다치더라도.. 비더라는 인물을 조명하는 이유와 의도가 무엇인지?? 알라딘에 올라온 서평과 책소개를 읽고서야 이것은 나름대로 칠레의 아픈 역사 속에서 예술가인 척 했던 한 비열한 인간에 대한 고발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지, 책만 읽어서는 그런 내용 파악이 가능했을까 싶다. 

나는 빅토르 하라의 전기문을 읽으면서 우리의 광주항쟁보다 더 잔혹하고 치열했던 칠레의 9.11 사태에 가슴 아파했다. 그런데 제목도 근사한 '먼~~~~~~~~~~별' 속에서 그 사건은 일부러 그런 듯이 언급을 피해 가는 듯 보인다. 좌파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카를로스 비더를 신비한 예술가로 묘사한 의도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명들을 읽고서야 이것이 오히려 서늘한 역사를 서술하고 아픔을 부각시키는 저자의 기법임을 알았다. 

그런 오해가 아니었더라도 나는 문장의 아름다움 운운하며 이 작품을 음미하며 읽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저 몽롱하게 스페인어가 풍기는 분위기에 젖어 (유랍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다. 모든 문장과 책속의 모든 상황이 명료하게 머리와 가슴에 들어오는 순간을 얼마나 갈구했던가.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지력이 성장해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더라. 그래서 책을 읽을 때 20% 30%만 들어오더라도 그러려니 한다.   

대학에 입학하여 선배들이 넌 어째 국문과에 왔느뇨 질문하니 아이들마다 대답이 천차만별이었다. 그 중, 서정주의 시가 나를 시로 이끌었다고 대답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름다워 보였는데도 이상하게 선배들의 얼굴은 우울했다. 물론 그 까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문학이, 예술이 잔혹해지면 더더욱 배신감은 크다. 서정주와 비더는 또 다르지만 어쨌든 그가 떠올랐다. 이문열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생의 모순이 가슴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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