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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좋은 소설도 읽으면서 늘 마음이 불편하다. 죽음과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이 소설을 쓰여지지 않고 악인이 등장하면 재미는 없는 것인지.
오랫만에 아무도 나쁘지 않은 소설을 읽었다. 모두 서로 사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다. 여관이 망해도 소설이 안 돼도 쌀이 떨어져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현실 속 사람들이 그렇듯, '영란'의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상처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 대한 위협과 자신에 대한 자학으로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사람을 찾는 방식으로 극복한다.
주변 사람들이 다 아름다웠던 적이 있었다. 인간은 하나하나가 소우주라 했다는데 그 말이 정말 실감이 났다. 말이 없는 아이는 말 없음 뒤에 신비로움을 지녔었고 까불대는 친구도 자기 안의 또다른 세상을 지니고 있었다. 수줍고 무능해 보이던 아이가 빛나는 시를 쓰는 것을 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서 대학 초기였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감성은 얼음처럼 맑았으나 결핵성 질병에 시달리고 있어 체력이 가장 고갈되어 있었다. 우울증이 겹쳐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보일 때였었다. 그럼에도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다, 그 신비한 사람들 하나하나가 몹시 궁금했었다.
영란의 등장인물들은 고상하다. 아코디언과 풍금으로 뽕짝을 연주할지라도, 추운 싸구려 여관 마당에서 파를 다듬고 있을지라도 벽에 뽕끼 가득한 필치로 '생활시'를 쓸지라도 조금도 천박하지 않다. 말못하는 딸을 위해 풍금을 연주하는 아버지는 신비롭고 카페를 전전하며 록을 트로트화 시켜 부르는 무명가수의 열창에도 '쏘울'이 묻어난다. 완규의 시는 순진해서 오히려 가슴을 친다. 그런 사람들 하나하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정섭은, 비록 상처를 입고 가족에게 상처를 주었었지만 참으로 순수한 사람이다. 늙은 술집 작부와 삶의 의욕을 잃고 적당히 시들어가는 구멍가게 여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아무나 붙잡고 징징거리는 여자도 영란 앞에서는 다 아름답다.
아무래도 정섭의 마음이 '영란'에게 가고 있음이 분명했는데도 그 둘은 만나지 않는다. 언제 만나서 서로를 사랑할 것인가, 혹은 파탄날 것인가를 기다리며 책을 읽었지만 목포를 각각 빙빙 돌며 딴 사람들만 만나고 돌아다니던 그 두 사람은 마치 회오리의 가운데를 향해 조금씩조금씩 걸어들어오듯이 서로를 향해 다가간다. 영란이 인자와 함께 꾸려가는 간재미횟집을 향해 무심한 듯 찾아가는 정섭의 발길이 아름답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