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지 않겠다 창비청소년문학 15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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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을 약간 숙제하는 기분으로 읽기 시작하지만 자아도취에 빠져 문장 가지고 장난치는 '어른 소설'들보다 고갱이 알차게 다가오는 청소년 소설에 종종 빠져든다. 이 소설도, 아이에게 읽으라고 하고 잠자리에 가벼운 기분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참 좋다. 재미도 재미지만 등장하는 청소년들이 허랑하지 않으면서도 건강하다.  

민수가 알바비 떼이는 이야기를 읽을 무렵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아들과 밤 늦게 이 책 이야기를 잠깐 했다. 물론 알깍쟁이 같은 서울 아이들은 최저임금제도 따지고 더 나은 조건의 알바 자리를 찾아 다닐 정보력도 있다. 뭐,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던 아들녀석이 시골에서 몰래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고딩 알바생보다야 덜 절실한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내 새끼니까 부당한 대우 받지 말고 급여도 많이 받았으면 좋겠고 디럽고 치사하면 때려치우면 되는 상황이 다행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엊그제 엄마도 아빠도 없이 가출해서 겨우 대학 가놓고 생활비 없어서 군대로 도피했다가 제대해 복학과 복귀를 두려워하던 제자 녀석의 전화를 받았을 때 마음은 또 달랐다.  

결국 그 아이는 휴학을 하고 한달 120 받는 백화점 안전요원으로 취직을 했지만 4대보험비 다 떼어두었다가 6개월 이전에 그만두면 그것도 안 돌려줘, 12시간 근무에 최저 임금 겨우주는데 쉬는 시간도 거의 안 줘,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데 다른 알바 구할 시간조차 없고 이렇게 한 학기 벌어 한 학기 대학 다니는 처지가 까마득해 절망하고 있었다. 참 무의미하게, 밤에 돌아와 단 30분씩이라고 알바 구하러 다니는 시간으로 투자해서 좀 더 괜찮은 데로 옮기란 말밖에 못한 나, 그래도 희망이 있잖아, 이렇게 문자 보내놓고 그 단어가 참 미안했던 나에게 녀석은 '희망이란 말 오랫만에 들어요, 고맙습니다, 어머니(6살부터 엄마 없이 지냈다 열아홉 살에 재혼한 엄마를 찾은 녀석은 중학교 2,3학년때 담임을 한 나를 종종 어머니라고 부른다.)'라고 답한다. 아이에게 근사한 알바 자리를 구해주거나 장학금을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다가 이 아이들을 잘 살아가게 하는 정말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천하태평 학비 걱정은커녕 용돈 올려달라고 조르는 내 진짜 아들 녀석이 걱정되다가, 그랬다. 

알바 하면서 만난 민수와 연주 두 아이들이 연애하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사람을 착하게 하는 힘이 있는 연주나 아무리 애를 써도 여자친구 생일선물은커녕 자기 용돈조차 벌기 어려운 민수도 어렵다고 비뚤어지거나 다른 사람을 비아냥거리지 않는다. 좋아하는 여자친구 앞에서 '후까시'는 좀 잡아 보지만 민수의 마음은 참으로 순수하고도 건강하다. 소설이 위선을 떤다고? 그렇지 않다. 나는 요즘 청소년 소설들이나 아이들의 겉모습이 오히려 위악을 떤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착하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자기도 스스로에 대해 좀 헷갈리기도 하지만 사실 자신을 좀더 올바른 사람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고상한 면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인간의 양면 중에서 그런 면이 더 강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학교 아이들에게 진짜 근사한 연애는 그 아이 앞에서 내가 멋진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그런 연애라고, 서로를 높여주는 사람을 만나고 그런 사람이 되라고 하는데 민수와 연주가 바로 그렇다. 중학교 때부터 2,3년씩 이성 친구를 사귀고 있는 우리 집 청소년들을 보아서 그런지 고딩들의 연애가 그리 낯설지 않다. 가끔 연극표나 전시회 표를 사주면서 여친 혹은 남친과 데이트를 하고 오라고 하고 아들 딸의 친구들과 문자를(연락할 일이 있어서 그런 거긴 하지만) 주고 받기도 한다. 내 눈에 다 들어온다고 생각하는 착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라고 해서 다 어리석은 연애를 하리란 속단도 역시 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 아이들에게 감정이입했듯이, 차라리 그들의 인생 그 자체로 그들이 씩씩하게 연애도 인생도 이끌고 나가리라 믿어본다. 

엄마로서도 읽고 선생으로서도 읽었다. 하지만 종종 나는 주인공 아이들이 되어 상황에 몰입했다. 작가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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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에 담긴 긍정의 한 줄 긍정의 한 줄
양태석 지음 / 책이있는풍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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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의 우울감이 예술적 섬세함과 연관이 있다고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도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긍정의 마음, 긍정의 주문, 긍정의 자기조절을 많이 강조했었다. 이 책도 아들 읽으라고 샀는데 대딩 첫해, 사람들 만나고 술마시고 고딩 때 못해본 '스스로 공부하기'(그래봐야 과제) 등 인생공부하기 바쁜지 도통 책 읽을 생각을 안 한다. 한쪽도 안 되는, 그것도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를 말이지, 지하철 안에서 읽으라고 손바닥만한 책을 사줬더니, 뭐? 지하철 안에서 책 읽는 남자를 보면 왠지 답답해 보인다?  

오히려 내가 지하철로 외출하는 날 들고 나갔다가 끝까지 읽어버렸다. 의외로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들이 많다. 일화의 힘이 있지 않은가. 진정성, 감동 그런 것들.. 특히 배려할 줄 모르고 참을 줄 모르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할 이야기가 많다. 아이들이 하도 나대길래 아침마다 틈틈이 명상을 하곤 하는데 특히 싸움이 잦은 무렵에는 남을 배려하는 이야기나 몇몇 의인들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친 이야기들(전쟁을 막은 축구선수 이야기 등)을 들려준다. 이 책을 쓴(엮었다가 맞는 표현이려나?) 양태석 씨는 글을 쓰던 사람이라 그런지 부제나 덧붙이는 문장도 참 좋다. 학교 메신저에는 닉네임을 달 수 있는 기능이 있는데 한 문장 정도 적을 수 있는 그곳에 책에서 얻은 문구를 가끔 써넣기도 했다. 

다만, 중간중간에 매우 성실하여(운도 좋았겠지) 기업가로서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기업가로서의 성공, 돈을 많이 버는 일 등에 대해 가치의 방점을 찍는 듯하여 좀 거슬리긴 한다. 

월마트 창업자나 모건가 이야기처럼, 사회적으로 비판할 것이 많은 몇몇 기업 혹은 기업인의 성공담은 읽기 거북하기까지 하다. 자칫 독자들에게 그들을 미화하는 것으로 오인받을 수도 있다. 일화도 맥락 속에서 읽지 않으면 악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런 측면 때문에 편집자의 책무와 권한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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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 - 한 시골교사의 희망을 읽어내는 불편한 진실
황주환 지음 / 생각의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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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환 선생은 '말'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사람 같다. 교사는, 특히 국어교사는 말로써 살아가는 사람이다. 때로는 말의 성찬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가르치는 아이들 앞에서, 내가 뱉은 교육적인 발언들, 그리고 문학적인 언사들이 과연 진실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나마 아이들 앞에서 하는 말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고민하고 준비하는 만큼 거짓과 실수를 덜 수 있다. 꼭 해야 하는 말을 골라내는 노력의 과정에서 그것이 아이들의 빛나는 눈빛과 만날 때에는, 내가 '말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감사할 때도 있다. 

하지만 교무실에서 난무하는 쓸모없는 허사들과 독설들 앞에서는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교사이기도 하다. 누구나 그런 생각들을 잠깐잠깐 할 뿐이지만 황주환 선생은 그것을 깊이 고민하고, 고민을 넘어서 사유하고, 그것에서 그의 교육철학을 뽑아낸다. 

교사의 경력이 쌓여가면 아이들 앞에서 거짓언사를 자기도 모르게 지껄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되기도 한다. 그것은 독설 뿐 아니다. 칭찬조차도 관용적으로 내뱉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면 그토록 비참할 수가 없다. 개그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교장의 훈시가 우스운 것은, 그 아름답기 짝이 없는 말들이 모두 거짓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언사 뒤에서 자기가 비웃음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벌거숭이들! 그러나 문제는, 그 벌거숭이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들이 쥐고 있는 권력의 칼날은 교육을, 아이들을, 교사들의 영혼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 가장 무서운 것은 교사들이 그들과 동화되지 못해 슬퍼하며 한패가 되려 애쓴다는 것이다.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교장이 조회대에서 그럴 때, 고민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교사는 교단에서 똑같이 아이들을 향해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그러나, 하지만, 그래도, 말에는 힘이 있다. 올바른 말에는 분명 힘이 있다. 그런 믿음이 없으면 아이들 앞에서 교사는 무엇으로 당당히 서겠는가. 정신 바른 교사들이 좌절하는 이 땅에서 교육에 희망은 없다. 교사들이 푸념을 하고 뒷담화를 하고 화를 낼 것이 아니다. 바른 말 뒤에 희망의 지지대를 굳건히 세울 일이다. 특히나 동료교사들을 경멸의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십 보나 백 보나 그게 그거라도 남보고 뭐라 하지 말 일이다. 바른 말을 세워서 함께 가야 한다. 황주환 선생은 '사유'를 했고, 그의 책을 읽고 나는 그런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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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리더는 유머로 말한다 -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촌철살인 유머 한 마디!
민현기.박재준.이상구 지음 / 미래지식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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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교사가 될까? (여기서 재미있는, 이란 웃기는, 이란 뜻이다. 수업 구성을 재미있게 하는, 이 아닌 웃기는 수업을 하는) 이것이 최근 나의 화두이다. 다양한 방식의 수업으로 아이들이 한 시간 국어 수업이 어찌 지났는지 모르게 재미있게 수업을 하려고 노력을 하지만 아무래도 유머는 약하다 보니 그 부분을 채우고 싶어서 개콘도 열심히 보고 성대모사도 해보곤 하지만 아무래도 잘 안 된다. 그래서 유머 강의법이나 유머집 같은 것들을 한 묶음 사서 열심히 읽었다. 

읽는 동안 재미있긴 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라면 모를까 수업에 써먹을 만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요즘 아이들의 유머와는 좀 거리가 있다. 유머를 일부러 준비해 두었다가 수업이 지루할 때쯤(수업 맥락과 상관 없이) 그 유머를 써 먹는 것은 좀 촌스러운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제일 좋은 것은 수업 중 나누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생동하여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면 중간중간에 졸음을 깨게 하는 유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언론학교에서 김연주 KBS 전 사장의 강연을 들었다. 화려한 달변도 유머로 청중을 끌어잡는 연설가도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지루하다 싶은 방식으로 강연을 했다. 다만, 기자 출신답게 오로지 팩트만으로 자신의 주제(종편의 부당성과 문제점에 대해 설파하는 자리였다.)로 이끌고 가는 솜씨가 역시 전문가로구나, 전문가의 알짬은 겉으로만 달달한 강의의 스킬이나 말재간으론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로구나,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그다지 재미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서 그랬는지 중간에 유머를 한자락 한다. 손오공과 사오정 이야기다.  

"손오공과 사오정이 KBS에 입사 면접을 보러 왔답니다. 사오정이 좀 자신이 없는지 손오공에게 답 3개만 알려달라고 했어요. 먼저 면접 보러 들어간 손오공에게 나 김연주가 물었습니다. 첫째 질문, 산업혁명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죠? 대답, 18세기 영국입니다! 오, 좋아 그럼 둘째 질문, 좋아하는축구선수는 누구입니까? 대답, 전엔 박지성이었는데 요즘은 차범근이요, 오, 그래요? 셋째 질문, 요즘 여자들이 성형수술 많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답,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면접을 보고 나온 손오공과 엇갈려 지나가면서 사오정이 "빨리빨리! 답 세 개만, 세 개만~"  그래서 손오공이 "18세기 영국!, 전에는 박지성, 요즘은 차범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알려줬어요. 다시 김연주 앞에 앉은 사오정, 첫째 질문 들어갑니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습니까? 대답 18세기 영국! 뭐? 당신 이름이 뭐요? 대답, 전엔 박지성, 요즘은 차범근! 아니, 당신 이렇게 된 거 아니야?(손가락으로 머리를 빙빙 돌리며) 대답,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난 후로 강연은 반짝 깨어나 잘 마무리가 되었다. 숨겨둔 비상금 같은 유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난 수업지도안을 쓰는 기분으로 몇 가지를 기록해 두었다. 연습도 해야지~! 유머는 타이밍이라고, 내용이 웃긴 것도 중요하지만 이야기할 때 몸짓이나 박자나 속도가 적절해야 별 거 아니라도 웃기게 들린다. 뭐 이 책이 중학생들에게 먹힐 유머로 가득차지 않은 것은 책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선택의 문제이겠으나 어쨌든 읽으면서 웃었던 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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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서울대학교 관악초청강연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신영복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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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게 뭐 있을까 싶었다. 남편이  먼저 읽고 이번에 대학에 들어가는 아들에게, 네 또래 아이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권했다. 나는 샘들 독서토론 책으로 추천했다. 3월에 바쁘니 좀 가볍게 읽자고. 그리고 아들보다 내가 먼저 외출할 때 들고 나가 읽었다. 처음엔 너무 빨리 책장이 넘어가서 (물론 만 원도 안 되는 책이지만) 뭐야, 그랬다. 단 한 번의 강의를 책으로 만들어내는 건 상술 아닌가, 대학에서 말야, 이러면서... 그런데 그렇지 않다. 

신영복 선생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사람이 한결같다는 것, 혹은 진흙밭에 굴러도 신의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강의 2부에 토론을 할 때, 사람들의 질문을 받고 그에 대답을 하는 장면을 읽을 땐 진정 공부해온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는구나, 싶었다. 중복되지 않으면서 일관되는 자기의 사상이 있다. 현학적이지 않으나 공부한 흔적이 있다. 

새삼, 존경할 만한 몇 안 되는 사람이란 생각에 마음이 뿌듯하다가 생각에 먹구름이 끼어든다. 몇 해 전 한 여자 시인이 독설적이 시집을 한 권 냈다. 그 중 '돼지의 변신'이라는 시가 있는데 거기 은유된 돼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20년쯤 감옥에서 썩다' 내려 온 그를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신다는 둥, 학생과 청중을 감동시키려 위선적인 노력을 하는 모습을 비꼬는 그 시가 도대체 누굴 얘기하는 것인지 읽으면서 자꾸 선생이 연상되어서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만약 비유가 맞다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묘사했는지(우리가 책이나 강의로 만나는 명사의 모습이 다 진실이라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는다), 선생을 비꼰 게 아니라면, 누가 봐도 그를 말하는 듯이 보이는 이런 시를 출간한 건 간접적인 명예훼손일 수도 있는 게 아닌지, 궁금했다. 마음이 불편하다.  

공감하는 부분들 이야기를 하자. 

목수의 집그림 이야기가 나온다. 실천적인 삶을 산 사람과 관념의 틀에 갇힌 사람(선생은 자기 반성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의 차이가 집 그림을 그릴  때 주춧돌부터 그리느냐, 지붕부터 그리느냐로 나타난단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도마 위에 생선을 놓고 먹으려고 다듬으면서 우린 이 아름다운 생선의 살았을 적 모습을 못 보는구나, 늘 죽어있는 옆모습만 본다, 고 생각했다. 꽁치를 들고 그의 정면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두 갠데, 우린 옆으로 누운 눈 하나의 생선만 그린다. 혹은 자반이 되어 반으로 쪼개진 모습만 본다.... 몇 년 전 내가 가르친 아이 중 발달장애와 자폐증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만든 '나만의 시집:( 중3 남자 아이들이 A4 종이 4장을 반으로 접어 자기가 고른 시와 직접 쓴 시를 손으로  베끼고 그림을 그려 시집을 만들다.)에는 정면의 얼굴을 한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보통 아이들이 못 보는 그 아이의 시선을 우리 모두 놀라워했다. 물론 신영복 선생이 말하는 목수의 그림은 '일하는 사람의 관념성 탈피'에 대한 이야기이고 자신과 같은 지식인의 관념성을 비판하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다르게 생각하기'가 되지 않으면 관념성을 탈피할 방도가 없다.  

변방과 마이너리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에도 공감한다. 내 삶은, 어렵게 살아온 사람에 비하면야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는 늘 내가 비주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대학 시절, 열심히 '투쟁'하지 못했던 나는 부끄러운 마음을 들고 야학에 가서 언니 오빠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시를 나누었다. 87년 6월 항쟁 때(지금이야 민주화운동이라고 그때 많은 시민들이 함께 했다고 논하지만)도 거리에서 만난 어른들은 학생들이 데모한다고 야단치고 조선일보 같은 신문에서 공부 안하고 데모나 하는 대학생들을 맹비난하는 기사를 싣는, 불심검문의 시대에 대학시절을 보내야 했다. 20세 이후 20여년 간 정치적으로 대부분 '지는 투표'를 해왔다. 또 내 삶의 거의 전부를 펼쳤던 '학교'라는 공간에서 나는 전교조 교사라는 이유로 늘 비난과 감시와 편견에 시달렸다. 학교의 중심이 아이들, 그리고 수업이었기에 망정이지 일반 회사같았다면 열심히 일하고도 평가에서 늘 뒷전인 채로 20년을 지내오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이너로 살아가다가 '변절'을 하기도 한다는 면에서 내 삶은 별 볼 일은 없었을지라도 부끄럽진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하련다. 바닥 끝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힘겹게 살아가는 어린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같은 아웃사이더로서!)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내가 분명히 믿는 것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뛰어난 능력과 권력을 지닌 자들인 듯 보여도 작고 찌질해보이는 것들의 순한 힘들이 세상을 망가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뭉쳐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신영복 선생이 변방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창조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만 난 '착한 마이너'의 단결로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것으로써 나만의 '변방론'을 정리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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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6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