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 - 배움이 있는 수업만들기
사토 마나부 지음, 손우정 옮김 / 에듀케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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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배움의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통해 사토 마나부의 이름을 들었었다. 교단에 한때 불었던 열린교육, 발렌도르프 교육, 핀란드 교육 등 다양한 교육적 시도 등과 더불어 지금은 배움의 공동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알려든다.

이 책의 요지는 한 마디로 그것이다. ‘모든 교사가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라. 그리고 다른 교사들과 공유하라. 그러면 그것을 통해 학교의 개혁과 발전, 학생의 발전(학업성취라는 면과 인성 교육이라는 면 모두), 다 이룰 수 있다.

수업을 공개해야 한다 

나 역시 수업의 공개와 공유를 늘 주장해왔다. 일개 교사로서 나는 내 수업에 대해 공개할 의사가 (용기는 아니고) 늘 있었고 그 소심한 노력의 일환으로 자주 스스로의 수업을 녹음하거나 녹화하여 자기 검열을 해왔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에는 동료교사들에게 수업을 공유하자고 늘 주장해왔다. 그것이 교사의 본질인 수업을 학교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우뚝 세우고, 수업의 질을 발전시키는 데 가장 좋은 일임을 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장에서 교사로서 몸으로 그것을 체득했고 사토 마나부는 학자로서 그것을 이성적으로 체득했을 것이다. 나뿐 아니라 많은 일본과 한국의 교육현장의 교사들이 수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럼에도 얼마나 홀대받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나 그것을 바로잡기에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상황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잘 몰랐고, 알고 있다 해도 힘이 없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학자로서 사토 마나부는 그런 힘을 발휘해왔다. 많은 성과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많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수업’이 학교에서 가장 중요함을 각성하라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실 교사가 아이들을 만나는 장면은 수업만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수업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수업의 열의와 알맹이는 다른 업무와 생활지도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서는 우선 그러한 ‘수업’의 중요성에 대한 각성이 먼저 필요하다.

또 이 책을 통해 일본 교육에 관해 놀란 것은, 많은 교장들이 (그 막강한 영향력을 잘 활용하여) 수업 공개를 통해 학교 개혁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일본교육자들도 참으로 보수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친미적 성향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가장 보수적인 집단일 게 분명한 교장들 가운데 학교의 개혁에 그토록 적극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진정 부러웠다. 스스로 사회과 수업 시범을 자초했다는 교장 이야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더 보수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교장의 역할

또, 몰랐던 사실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공교육 현장에 얼마나 많은 일본의 흔적이 있는지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용어가 아직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칠판이며 육성회비 봉투 양식까지도 일본식을 그대로 쓰고 있었던 것들을 발견한다. 일제강점기 때 유산은 그렇다치고, 해방 이후의 교육현장의 변화를 겪고 난 후에도 여전히 따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일본이라서 싫다는 의식은 천박한 것일 수 있으므로 진보적인 경향과 방식을 도입하는 데에는 경계를 두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분명 80년대 말부터 참교육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수업의 변화에 대한 열망과 시도가 있었음에도 그것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흐지부지 되었다가 ‘배움의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그 여기저기 흩어졌던 참교육 열망이 그릇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운동은 있었으되 그것을 정리해 주는 학술적 ‘이름짓기’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토 마나부처럼 학교를 찾아다니며 수업을 함께 고민하던 ‘학자와 교장’이라는 권위 있는, 그리고 보장된 지지자가 없었던 것일까. 책은 고개를 많이 끄덕이게 했는데 또한 나를 슬프게도 했다. 다 내 안에 있던 것들인데, 누군가는 이미 잘 정리해서 자기것인 양하고 있다는 느낌, 나는 재능과 성실성을 다 갖춘 사람인데 조촐하고 괜찮은 부모를 갖지 못한 고아라서 그것들이 산산 흩어진 듯한 아쉬움....

  교육계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 좋은 것마저도...

일본 학교에서도 전후, 그리고 자본주의적 발전단계에서 성장과 경쟁을 많이 강조하였고 일본인들의 소극성을 극복하여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 적극적인 인성의 아이들을 기르기 위해 학교가 많은 노력을 했나 보다.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조용하고 소극적인 듯 보이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태도 속에서 배움을 내면화하는(그러니까 학습이 아닌 배움을 강조하는) 교육적 단계가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아마도, 원래 일본인의 것이었던 작은 목소리와 남에 대한 배려(조심성)이 자본주의적 공격성 때문에 폄하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 같다. 민족적 성향은 조금 다르니 우리로서는 공동체 의식과 보이지 않는 배려 같은 것들이 성장과 경쟁 속에서 파괴되어 온 것과 비슷할 것 같다. 그 반작용으로 발표가 아닌 듣기, ‘학’이 아닌 ‘습’, 가르침의 수용이 아닌 ‘배움’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고민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 책에서 가장 크게 수용해야 할 것은 수업공개를 통해 학교가 거듭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방법론이나 방향성에 대해서는 다른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친미적 성향, 서방선진국 따라 하기, 신자유주의적 성취 중심의 학교 현장의 문제뿐 아니라 식민잔재 청산과 반통일적 역사 왜곡과 이념대립이란 문제가 한국 사회에는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고 무너져가는 인성교육의 과제가 또한 시급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교육(중등 공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교장임을 지적하고 싶다. 물론 대통령이나 교과부 장관이 의지를 갖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대학입시 문제가 초중등 교육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일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 와 보라. 보신과 안일 혹은 성장중심주의에 서 있는 교장들이 어떻게 학교를 망치고 있는지... 교사의 책임은 없냐고? 물론 교사의 책임이 크다. 그런 교육현실을 타파하지 못하는, 그런 교장들을 개혁시키지 못하는, 교사들 스스로 건강하게 성장하여 스스로 좋은 교육관리자가 되지 못하는, 이런 현실 속의 교사들은 무능하다. 어떤 면에서는 교장 교감들과 함께 부패의 노선을 함께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무소불위한 교장의 권한 속에서는 어떤 건강한 노력들도 짓밟혀 버리고 결국 무언가 노력해 보려는, 그나마 존재하는 교사들의 희망마저도 체념과 비웃음으로 바뀌어 버린다. 비슷한 맥락에서 교육청과 교과부의 교육관료들 또한 그러하다. 장관조차도 오래 묵은 교과부 관료들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 엄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회사 사장도 잘못하면 물러나고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으려 애쓰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학교에서 교장들은 전혀 그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목소리 높여 교사들을 질타하는 학부모들과 조중동은 알고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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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밤길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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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책은 무조건 산다. 사줄 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란 생각이 든다. 

사실 빌려 읽고도 화가 나는 소설가들이 요즘 많다. 재미는 있는데 괜히 읽었다 싶은. 게다가 잘 읽지도 않는 소설을 나름 기대 걸고 돈 주고 샀다가 욕하는 소설들이 많다. 하지만 공선옥은, 빌려읽지 않고 무조건 산다. 

그의 소설이야 늘 재미있다. 하지만 딸의 말대로(딸 아이에게 '나는 죽지 않겠다'를 다 읽도록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칙칙한 소설을 읽는 마음이 좋지만은 않다. 하지만 아마 요즘 소설들이 더 엽기적이고(기발하다는 미명 아래) 더 칙칙한 것들 많을 것이다. 그래도 공선옥 소설은 칙칙하지만 따뜻하다. 웃다 말아 버리는 허무한 뒤끝이 아닌 인간적인 슬픔이 있다.     

답답하긴 하다. 따뜻하다고 해서 희망이 보이는 건 아니다. 삶이 그런 거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대책없는 희망이어도 좋으니까 그런 게 보였으면 좋겠다. 주인공들이 착한 사람들인 거로만 말고 그 안에 내재된 힘 같은 거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그의 소설이 내게 위안이 되는 것은 고작 적어도 나는 이들보단 행복하다는 상대적인 것밖에 없다면 좀 씁쓸하지 않나.  
 

그래도 난, 요즘 열심히 한자도 쓰고 소설도 읽는 우리 엄마한테 이 책을 빌려줬다. 환갑을 한참 넘긴 우리 엄마, 한심하고 비열하고 무능한 남편 심상배 씨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대적으로 우리 아버지가 괜찮은 남편이라고 웃으려나. 상처 준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아직 남아 있어 술로도 풀고 남자(여자)를 원망해 보고 또다른 남자(여자)를 그리워도 해 보지만 아무리 팍팍해도 어린 것, 약한 것, 없는 것들을 뭉개거나 미워하지는 못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우리 엄마랑 또 나랑 닮기도 했다. 모진 남자 만나서 혼자 애 키우고 사는 내 친구랑도 닮았다. 어쨌거나 우린 소설 속 그니들보단 그래도 덜 아프게 산다고 자족할 수 있음에 초라한 흐믓함.  

이렇게 계속 공선옥 소설을 사 모으다 보면 삶의 여유가 느껴지는 소설을 쓰는 그를 발견하는 날도 올 것이다. 그의 삶 덜 팍팍해지고 체념도 넘고 관조도 넘어 유머감각도 생기는 그런 날이. 나와 그가 같이 늙어 가면서, 동시대를 늙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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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천재 이제석 - 세계를 놀래킨 간판쟁이의 필살 아이디어
이제석 지음 / 학고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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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서점에서 보고 당장 사기로 결심했다.  

기발한 사람 중에는 자기가 외계인인 줄 아는 사람이 있다. 이제석은 그러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범인(凡人)의 싸가지를 갖추었다. 그럼에도 분명 천재다. 노력하는 천재이지만 분명 타고난 바가 있다. 개념도 있고 재미도 있고 천재성도 있고 상식도 있는, 그런 사람 흔하지 않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라는데, 이제석의 광고에는 자본주의적인 도덕률 이상의 어떤 것들도 보인다. 물론 그에게 있는 어떤 인문학적 바탕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인데, 만약 그가 인문학적으로 공부를 더 많이 한다면 그의 광고는 더욱 철학적으로 깊어질 것이다. 깊어져서 창의성이 떨어지려나, 그건 잘 모르겠지만 기왕이면 그가 이상적인 천재로서 더더더 깊어지길 바란다. 더 진보적으로 되고 더 창조적으로 되고 더 되바라지게 되고 더, 돈을 벌기도 하고 전혀 못 벌기도 해서 자본의 꽃인 광고의 명제를 초라하게 만들어 버렸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왜 광고는 자본주의의 점유물인 듯 말하는가. 사람 사는 곳에는 늘,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선전과 호소와 선동과 광고가 있었고 필요했다. 넓게는 다 정치적(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인 행위들이다. 그게 돈과 결합하는가 예술과 결합하는가 정치와 더 가까워지는가는 창조자의 성향과 사회적 경향과 뭐 이런 것들의 복합적 작용이 될 것이다. 광고로 시는 왜 못쓰는가. 광고는 휴머니티 왜 불가능한가. 세상은 이미 어차피 장르가 무의미한 곳이 되어 버렸는데. 비지니스맨이 정치하고 교사가 영화 만들고 법조인이 애들 밥그릇 걱정하고... 그러니까 광고인 이제석도 홍익인간뿐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술도 하고 정치적으로도 진보하기 바란다.  

이 책 다 마음에 든다. 단 두 가지 빼고. 

대학 때 수석한 거, 너무 자랑하신다. 자기가 '기냥' 천재로 보일까봐 그거 해명하려 한 겸손의 반증이리라. 그리고 아이디어, 나도 물론 화장실에서 수업 구상도 하고 뭐 좋은 생각 많이 떠올리는데 그런다고 변기에 앉아 있는 사진(일부러 누군가보고 찍으라고 했거나 삼발이 놓고 찍었나 본데)까지야... 재밌는 사람이다. 사실 정말, 이 책에서 마음에 안 드는 단 한가지는, 너무 짧다는 거다. 벌써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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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HaHa! 유머 교수법 -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모두 즐거워지는
도니 템블린 지음, 윤영삼 옮김 / 다산북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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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평가와 유머
다양한 방향으로 교원에 대한 평가가 진행 중이다. 교과부(와 조중동)에서 그토록 강력히 원했던 교원평가는 아직 정식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지만 이미 사회적 분위기는 교사에 대한 평가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고, 실지로 다양한 방식으로 교사들은 평가받고 있다. 학교 수업은 학부모들에게 공개된 지 오래되었고 실험과 시험운영이란 형식으로 몇 번씩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내가 속한 사립학교에서는 재단평가라는 이름으로 교사들에 대한 관리자의 평가가 이미 진행된 지 오래다. 성과급은 또 어떠한가. 평가자가 교내의 교사들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성과급 지급을 위한 성적표를 받을 때 교무실 분위기는 참으로 암울하다.


하지만, 교사는 평가받아야 한다.  여론 때문이 아니더라도 교사는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평가라는 것 자체가 교육적으로 의미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의미를 떠나서도, 교사들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없었기 때문에 진정한 교육을 행하는 교사들이 홀대받아왔다고 생각한다. 지금 학교를 망치고 있는, 여태까지 학교를 망쳐온 그 수많은 가짜 교사들, 교사로서 아이들을 짓밟다가 결국 교감으로, 교장으로 올라서서 더욱 학교를 망쳐왔던 그들, 그들에 대해 아무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는 이토록 망가졌다. 물론,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 제대로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조건들이 요구된다. 근평처럼 잘못된 평가가 확대될 뿐이라는 두려움이 교사들에게는 강하다. 실현될 가능성 별로 없는 조건들을 채워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전교조는 평가 자체를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덜 나쁜 조건들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선생님 설명이 졸려요  

유머책 이야기하려다가 심각해졌다. 

아이들에게 수업만족도 조사라는 것을 받는다. 일종의 성적표다. 내 수업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는지.... 몇 년 전부터 아이들에게 이 ‘수업만족도 조사’라는 평가를 받을 때마다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선생님이 설명할 때 수업이 재미없다’는 것이었다. 오해는 마시라. 아이들이 ‘재미없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웃기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수업의 구성이나 집중도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어른들은, 자신이 관심 있는 일에 대해 짜임새 있게 수업을 하면 재미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요즘 아이들은 5분 간격으로 유머를 빵빵 터뜨려 줘야 한다. 아니면 동영상이나 이벤트 같은 것으로 지루할 틈 없이 수업을 구성해야 한다. 내 국어 수업은 아이들이 만들고 쓰고 두레별로 토의하고... 다양한 활동으로 이루어지므로 지루할 틈은 없지만 행여 내가 조금이라도 길게 설명을 할라치면 진지하기 짝이 없는 내 언변에 아이들이 숙연해지기 일쑤다. 그렇다고 착한 우리 아이들, 열심히 설명하는 선생님한테 미안해 졸기도 어려웠겠지...

그래, 결심했다, 나도 웃기는 선생님이 되어 보자. 가물가물하지만 한때 나도 쫌 웃기는 사람 아니었을까? 언제부터 나는 유머를 쳐도 모인 사람들 모두 뭔가 깊은 의미가 있을 거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듣게 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그래 나도 웃기는 선생님이 되자!
그래서 재작년부터인가 나는 유머 관련 책들을 사 모으고 연극적 수업에 대해 연구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진지한 것 같아서 발성법에 대한 책과 화술에 대한 책도 사 모았다. 사실, 책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은 하고 있지만 어디 가서 화술 같은 거 배우기는 너무 쑥스럽다. 집에서 혼자 발성 연습하고 녹음하고 그럴 때마다 식구들이 웃기도 하고 유머집 펴놓고 깔깔거리거나 개그콘서트 꼭 봐야 한다고 우기면 의아해 하기도 했지만, 또, 그렇게 한다고 과연 내 유머가 늘긴 느는 거냐 회의도 많이 느꼈지만, 보아라, 이번 1학기 수업만족도조사에서 아이들은 선생님, 국어가 넘 재미있어요. 썰렁할 때도 있지만 웃겨요, 등등의 평가와 더불어 목소리가 졸리다, 유머좀 하시라, 이런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런 건 있었다. “국어 선생님 수업의 좋은 점; 가끔 유머를 친다(효과는 없지만) ...”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웃기진 않아도 웃겨주려고 노력하는 나를 존중해 준다. 우리 반 녀석들이 유독 내 유머에 안 웃어 주길래 “이봐이봐, 우리 반은 왜 안 웃을까?” 그랬더니 너무 솔직하고 맑아서 가끔 뒤통수를 치는 우리 반 정우가 “선생니임~, 선생님 유머가 70년대 개그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해서 애들이 뒤늦게 웃었다. 애들 말로는 담임 반이라 야단도 많이 맞고 진지한 훈화도 많이 듣고 하다 보니 선생님 말은 다 진지하게 듣는다나. 그래도 유치하나마 조폭 유머, 똥개그, 삑사리, 랩개그(운율 가르치면서 랩송도 부르고 그랬다) 사투리 연기... 등등 부끄러워하지 않고 구사하려고 애쓴다. 뭐 사실 중학교 1학년 정도면 썰렁개그를 즐겨줄 정도의 순수성은 아직 갖고 있다. 거기다 유치개그를 섞으면 더더욱 순수하게 웃어준다.(앗, 우리랑 정신연령이 비슷한 아줌마다~! 라고 생각하는 듯)

유머, 중요한 건 마음이다
 책은 참으로 미국적이다. 별 거 아니어도 온갖 추임새를 섞어 격하게 반응하는 수업이 좋은 수업이라는 관점으로, 학생(청중)의 반응을 최대한 이끌어 내는 수업을 좋은 수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유머를 구사하는 방법론이라기보다 학생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수업법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읽다 보니 기교로서의 유머가 아니라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설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 유머도 그렇다, 웃기는 방법을 익히는 것보다 웃겨보겠노라고 마음을, ‘마음을’(우리는 그것을 의식, 혹은 마인드라고 하지 않나. 마인드가 안 돼 있다는 둥, 의식교육이 중요하다는 둥)제대로 갖추는 데 힘을 싣는다. 밝은 마음, 그리고 학생들을 존중하는 마음, 자기 강의를 충분히 즐기려는 태도, 그런 데서 유머가 나온다는 것. 맞다. 두려운 마음, 청중을 싫어하는 마음 가운데서 유머가 나올 리 없다. 나와도 상대를 깎아내리는 유머를 하겠지. 학생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들의 언어로 그들을 웃기기도 어렵다. 

지금 내가 수업을 들어가는 반 중에서 어떤 아이들은 내가 웃기려는 동작 또는 표정만 지어도 벌써 웃을 태세가 되어 있는 아이들이 있다. 내용이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웃길 거야, 라는 기대감이 그들을 웃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국어 선생님 참 재밌어, 오늘 수업에도 뭐가 하나 나오겠지? 하는 마음에 내가 눈만 똥그랗게 뜨고 과장된 억양만 해도 일단 웃어준다. 그러면 난 그렇게 웃어주는 애들이 예뻐서 또 별것도 아닌 말장난이라도 성의껏 해 보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잘 안 웃어주는 중3 교실에선 나도 그들과 똑같은 八자 입꼬리를 하고 이 무거운 대한민국 사회의 모든 문제를 우리 어깨에 짊어지고 비판적 문학의 사회성을 공부하게 된다.(얘들아, ‘비’웃지 말고 그냥 웃어줘~ TT)

재미있는 수업의 팁 하나. 교사가 먼저, 자주, 크게 웃어라.
아이들과 수업을 주고 받다가 보면 누가 재치있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 진짜 재미있게 웃어준다. 그러면 아이들이 질문, 대답, 발표를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사를 당연히 좋아하고 교사의 말에 역시 웃음으로 화답한다.
둘, 아이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잘 알고, 사용하라.
요즘 아이들은 졸라, 레알, 짱나, 빡쳐, 이런 말들을 많이 쓴다. 물론 고쳐주어야 하지만 사실 고쳐지지 않는다. 고치려고 덤비면 아이들은 어른들 앞에서 그런 용어를 쓰진 않겠지만 마음도 안 연다. 수업 중 이런 용어들을 거침없이 쓰면 거리감도 줄고 설명이 잘 이해되도록 돕기도 한다. (예: 구어체와 문어체 설명할 때, “너네, 친구한테 말할 때, 나 오늘 아침 홍마한테 머리 걸려서 졸라 빡쳤어,” 이렇게 말하지. 이게 구어체야. 하지만 국어시간에 수행평가로 생활문 쓰기를 할 때 그렇게 쓰는 친구는 없잖아. “오늘 아침 생활지도부 선생님께 걸려서 정말 화가 났다.” 이렇게 쓴다구, 이건 문어체야.) 물론 과하면 안 되고 비속한 표현을 권장하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건, 국어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언어를 가장 많이 알고 가장 많이 수업에 쓴다는 거 아닌가? 잘 알아야 가르치든 고치든 하지 뭐...
셋, 유머도 연습하면 는다.
아무리 해도 잘 안 되는 성대모사는 그렇다 치고 하다못해 개콘에 나오는 유행어도 잘 따라하면 수업에 쓸 수 있다. 연습하면 자신감도 붙는다. 사투리도 그렇다. 국어시간엔 사투리로 읽어야 하는 지문도 많이 나온다. 때론 아나운서처럼, 때론 충청도 할머니처럼, 어색하지 않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으면 아이들이 더 즐겁게 수업하겠지.

진짜 재미있는 수업은 짜임새 있는 수업이지만
오해는 마시라. 오직 웃기기만 하려고 수업을 하겠는가? 수업을 잘 하고 싶어서 웃음을 고민하는 것일 뿐. 요즘 젊은 선생님들이 너무 미디어와 개그에 매달려 수업의 본질을 흐린다는 비판도 있지만 대개는 정말 자기 수업을 잘 하고 싶은 노력의 일환으로 그런 것들을 준비할 것이다. 하물며 나처럼 나이가 들어가는 교사들은 더더욱 수업방법을 개선하고 시대 흐름과 아이들의 정서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나. 유머는 그런 노력의 일부분과 관계있다. 아이들과 잘 소통하고 싶은 교사의 간절한 바람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한 시간 수업이 진정 재미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잘 구성된 수업, 잘 준비된 자료들이 필요하다. 그런 짜임새 있는 수업 앞에서는 아이들도 미안해서라도 열심히 하려고들 한다. 거기에 웃음은 고명이다. 통깨 약간. 혹은 후춧가루... 없으면 섭섭하다.

‘하하하 유머 교수법’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뽑아 보았다.
- 유머를 즐기면 상상력이 샘솟는다.
- 당신 스스로 학생들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팬이 되어라
- 모든 학생이 손을 들게끔 질문하라.
저자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좋은 유머는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유머이다. 깎아내리고 누군가를 바보 만들어서 나머지 사람들이 웃는 그런 유머를 하지 말라고 한다. 참 좋은 마음가짐이라 생각한다.
또, 유머에 실패했을 때 수업에 실수가 있었을 때에도 솔직한 태도와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를 보일 때 학생들은 너그러워지고 오히려 더 수업에 높은 참여도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럴 때의 표정, 몸가짐 하나하나는 사실 배워서라기보다 품성이나 마음가짐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경멸하고 있는 교사는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기도 모르게 경멸의 눈빛을 쏜다. 아이들은 정확히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뭐 선생님이 날 야단치거나 뭐라고 한 건 아니니까) 이상하게 주눅이 들고 기분 나빠지는 경험을 한다. 거꾸로 아이들을 존중하는 선생님 말에서는 여유가 있다. 아이들이 뭐라고 말하면 별 거 아닌 말에도 따스하고 재치있게 응대를 한다. 딸아이 담임 선생님도 내 또래 여선생님인데 아이들이 귀여운 짓을 하면 “아유, 지지배, 이쁜 척은...” 아이가 못마땅한 행동을 하면 “너 자꾸 그러면 나 오늘 너한테 삐친다.” 등 식의 반응을 한단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그런 말들에서 유머감각과 애들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것이다. 
 

써볼 만한 방법들도 많이 보인다.
특히 ‘그래 하지만 게임- ‘그래 그러면’, 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 버릇을 갖게 하는 게임’은 긍정적인 마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길러주는 좋은 게임이다. 수업이 지루할 때 정돈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난 너희들이 알고 있을 줄 알았어, 란 표정으로 진지하게 지어보이기. ’ 이것도 재미있다.
또 내가 수업 시간에 쓰는 ‘곰돌이에게 설명해주기’(꼭 외워야 하는 내용을 배우고 나면 1분 동안 외우기, 그 다음에 짝꿍을 곰돌이 인형이라고 생각하고 혹은 초3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쉬운 말로 설명해주기)와 매우 유사한 ‘스터디 듀엣’(짝꿍을 지금 막 들어온 지각생이라 생각하고 방금 배운 내용 가르쳐 주기)도 꽤 좋은 방법이다. ‘곰돌이 기법’은 서술형 시험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배운 내용을 자기 언어로 풀어 말하기 기법이고 가르치며 배운다는 점에서도 학습효과가 매우 높다. 학습능력이 낮거나 특히 잘하는 아이는 앞으로 불러서 교사와 짝꿍이 되어 해보기도 하고, 발표를 할 때도 “자, 선생님을 곰돌이라고 생각하고 내게 잘 설명해줘. 쉽게 설명해야 해? 말귀 못 알아듣는다고 곰돌이를 구박하진 마...” 이렇게 하면 발표의 긴장감을 풀고 할 수 있다.
 

 저자인 도니 탬블린이 ‘농담의 노하우’라고 밝힌 네 가지도 유용하다.
1. 짧게! 2. 구체적으로 3. 펀치 라인은 마지막에 4. 침묵!

마지막으로, 잠자리에서 이 책을 읽다가 혼자 너무 낄낄거려서 남편도 같이 웃었던 이 책 속의 유머 하나,
주차장에 서 있는 낡은 경차 뒤에 이런 스티커가 붙어 있다.
“ 나는 커서 그랜저가 될래요.”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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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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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에 계획하다 미루고 미룬, 어쩌면 포기할 뻔했던 스페인행 가족여행을 지난 7월 말 다녀왔다. 올해 대학 들어간 아들이 고등학생일 때 다녀오고 싶었지만 여러 문제로 해마다 못 갔었다. 사실 대학생을 데리고 가족여행을 간다 하면 아이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아 포기하려 했는데, 녀석이 1학년 마치고 군대를 가겠단다. 군대 다녀오면 더더욱 넷이 함께 여행을 가는 일은 수년 혹은 십수 년 후의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싶어 감행했다.

열 시간씩이 넘는 두 차례의 비행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 그리고 머리 아프지 않게 읽을 책을 고르다고르다 이 책을 들고 탔다. 남편이, 스페인 여행길에 어인 ‘나의’문화유산답사기냐고 웃는다. 그런데 신기한 건, 같은 여행기라 그런지 잘 어울리더라는 것.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우리 자리 근처의 패키지 여행 팀(경유지인 헬싱키까지 함께 갔던)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초로의 아저씨 한 분이 열심히 그 책을 읽고 있더라는 것이다. 여행 내내 잠자리에서 그 날의 일기를 쓰고 이 책을 읽으며 곤한 잠에 빠져들던 밤, 나쁘지 않았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3일을 지내고 마드리드로 야간열차를 타고 갔다. 날씨도 그렇고 풍광도, 사람들도 리스본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물론 순박한 듯 하면서도 어딘가 기품이 있는 거리거리나 건물들은 그들의 제국주의 역사를 반영한 것임을 잘 알기에 그냥 혹할 수만은 없다. 스페인도 마찬가지지만 유럽 여기저기에 거대한 왕궁이나 로마시대 유물뿐 아니라 일반 건축물까지도 거대하다 못해 위대해 보이는 자취들의 이면에는 그들이 공격자이고 침략자였던 역사가 있다. 꼭 유홍준이 아니었어도 우리 궁궐의 조촐하면서도 은근히 화려하고 권위가 살아있는 (그런 걸 기품이라 한다) 매력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런 미감의 차이를 차치하고라고 어쨌든 수백, 수천 년을 지나 여전히 건재한 유산들을 처처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스페인의 톨레도에 가서도 문이며 성이며 성당도 그러하지만 특히나 사람들의 주택이 그대로 보존되어 계속 살아있는 것이 참으로 부러웠다. 마을 통째로 그대로 과거가 살아 있으면서도 현재가 숨쉬는, 우리에게 그런 마을 혹은 도시가 과연 얼마나 있는가 말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 잘못만은 아니다. 식민 침탈과 전쟁의 역사가 있고 그런 걸 되새기면 어떤 인간적인 이유로도 용서하고 싶지 않은 일본에 대한 증오도 되살아난다. 돌이킬 수 없는 역사는 아프지만 할 수만 있다면 과거에 우리가 세웠던 건축물들, 거리들, 조형물들을 다시 살려내고만 싶다.

 

이번 여행에서는 궁은 거의 못 보았지만 책 속의 경복궁 이야기는 매우 공감하며 읽었다. “p17 세계 어느 나라 왕궁에 그런 산이 있는가. 자금성 주위에도 그런 산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자금성 북쪽에 우리의 북악산에 비하면 뒷간보다도 작은 가산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금성에 들어서면 나무 한 그루 없다. 자객이 들어올까봐 있던 나무도 없애버린 것이다. 그렇게 철저히 자연을 배제할 수가 없다. 경복궁의 각 권역을 이어주는 길에는 아름다운 소나무, 버드나무, 때죽나무, 마가목, 산딸나무 등 각 건물에 어울리는 나무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 종류가 100종이 넘는다. 경복궁과 자금성을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자연과의 어울림이다., 자금성은 자금성이고 경복궁은 경복궁이다.”

 

20년 전쯤이긴 하지만 자금성을 보고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때도 조선족이었던가 하는 가이드는 경복궁이 자금성을 본떠 만들었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딱히 자금성이 더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크고 복잡하지만 매력적이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의, 가위로 전정한 나무들이나 기하학적으로 조경된 정원도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어두운 밤의 궁궐은 경복궁도 결코 포근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나 베르사유 궁의 높은 천정 밑에 놓여있는 침대가 을씨년해서 여기서 잠들어야만 했을 공주들이 참 불쌍하게 여겨졌었다. 우리 경복궁도 백성의 피땀어린 노고로 지어진 건 마찬가지였겠지만 거대한 돌을 굴리다 깔려죽기도 수없이 깔려죽었을 제국의 궁궐과는 좀 다르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관촉사 해탈문을 언급하면서도 ‘문이 작아야 밖에서 보면 겸손해 보이고 안쪽으로 들어오면 공간이 훤해진다는, 평범하면서도 차원높은 건축미학’을 말하는데 이 ‘차원’을 거대미학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과연 이해할까 싶다.

유홍준의 경복궁 예찬은 잘못하며 낯간지럽게 들릴 수도 있다. 외국인이 이 설명을 듣고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면 ‘자뻑’이 아닐까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러나 아마도 제대로 한국의 건축문화를 들여다 볼 줄 아는 이라면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이 말이 결코 자위나 변명이 아님을 알 것이다. 무엇보다 위의 언사 중 마음에 드는 것은 ‘자금성은 자금성이고 경복궁은 경복궁’이라는 말이다. 비교를 하면 하나의 장점이 나의 단점이 될 것이요, 나의 자랑은 너의 부족함이 될 것이다. 각각에는 각각의 역사와 미적 축적이 있게 마련이리라.

 

스페인을 꼭 가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사실 가고 싶은 곳은 쿠바다. 남편과 언젠가 가보고 싶다. 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자유여행으로 쿠바를 가기엔 무리가 있지 싶다. 또한, 미술 공부하는 아들에게 꼭 가우디와 고야를 보여주고 싶다고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생각했다. 물론 나도, 오직 가우디를 보기 위해서만이라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역시 15,6년 전 어느 책에서 본 사진들 때문이었다. 이제 바르셀로나와 거기 가우디는 관광상품으로 더 말할 나위 없이 유명한 곳이 되었지만 관광객이 득실거린다고 해서 그것에 흠집이 나진 않는다.

가우디를 보면서 내내 나는 “그 사람 아마 외계인이었을거야. 도마뱀이나 파충류 따위를 형상화한 것이나 까사 밀라의 굴뚝에 외계인 모습을 만들어 놓은 것도 그렇고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도저히 지구인의 성소라 보기에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양도 그렇다. 구엘 공원 운동장 전체를 정수장치로 설계했다는 것도 신비하지만 태풍에도 끄떡없는 돌쌓기의 기술(혹은 치밀한 계산?)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까사 밀라의 옥상이나 성당 꼭대기 어딘가에는 외계인과의 통신 장치가 있을 것만 같다. 안토니오 가우디의 급작스러운 죽음도 그에게 어쩌면 급히 자기 별로 돌아가야 할 사유가 생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상상은 그의 놀라운 건축물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까사 밀라 안에 들어가 보면 100년 전 사람들의 주거공간을 볼 수 있는데 가우디 투어를 맡아주었던 가이드는 가우디가 주인들과 그들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메이드, 침모, 유모 등)의 동선이 겹치지 않게 설계했다고 말했는데 남편은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어느 공간을 돌아다녀도 다 햇살이 고르게 들더라, 가우디는 일하는 사람도 배려한 그런 설계를 한 것 같다...고. 그런데 가우디는 자기 건축물에 대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하니 그의 의중이 주인을 위한 동선인지 일하는 사람의 일조권인지 알 수 없다.

바르셀로나에 지금껏 그 도시를 먹여 살리는 천재가 살았다면 우리에게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장인들이 있었다. 유홍준은 p435 성주사터 낭혜화상비에 대한 언급에서 붓글씨의 리듬을 살려낸 각인의 묘미를 칭찬하며 ‘이쯤 되면 각수(刻手) 또한 대장인, 대예술가일 텐데 우리는 애석하게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아쉬워한다. 그가 자기 책의 부제로 ‘인생도처유상수’를 삼았는데, 노자(老子)식으로, 진정한 고수들은 자신이 이름을 남기는지 어떤지조차 유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자거리 거리마다에도 ‘상수’들이 살았었고 그들은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속을 알 수 없었던 가우디도 어쩌면 그런 ‘상수’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는 노자식으로 말하기엔 좀 비싼 사람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를 하고 갔던 곳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었다. 소장품이 많기도 하다지만 특히 고야를 꼭 보고 싶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4시간 넘게 머물면서 꼼꼼하게 보느라고 봤다. 중3 딸아이는 한 작품도 안 놓치겠다는 자세로, 그림그림마다 어떤 내용인지 표찰을 다 읽고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간혹 미술시간에 들은 설명을 들려주기도 했고. 아무래도 서양 미술의 두 줄기는 성경과 그리스 신화이다 보니 미술관을 전부 둘러보고 나니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거의 다 끄집어낸 듯했다. 그냥 혼자 좋아서 읽었던 미술평론집들, 뭐 이것은 그다지 실용적인 독서는 못 되겠군 했던 것들이 딸 앞에서 오디오가이드 노릇을 하게 될 줄이야... 딸은 딸대로, 아들은 또 저 혼자 알차게 감상하고 미술관 밖으로 나와서는 다들, 그런데 왜 우린 옷 입은 마야, 옷 벗은 마야를 못 보았을까 의아해했다. 어째 넷 다 못 보았나?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유명한 작품을 보았다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옆의 소피아 미술관 가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보았지만 어른들과는 달리 피카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들과 역사에 관심이 없는 딸은 그 작품을 시큰둥하니 대했다. 나 혼자 옆에서 자꾸만 저거 유명한 거라구~ 한 번 더 보고 가자, 이렇게 부추겼다가 뭘 또 봐~ 이런 핀잔만 들었다. 딸은 자기가 좋아하는 달리 그림에 오래오래 서 있었다. 그래, 화가의 명성을 과제로 여기는 나는 확실히 속물인 것이다. 우리 집 스무 살짜리 예술가 녀석도 그냥 자기 좋은 그림에 가서 오래오래 서 있곤 하더라.

 

“p136 미술품이란 본래 형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예술적 특징은 재료의 속성과 질감을 처리하는 디테일에서 그 성패가 좌우되는 법이다. 안목 없는 눈에는 형태만 보이지만 안목 있는 사람은 마띠에르와 텍스처에서 그 묘미를 찾는다. 특히 목조건축이나 목가구는 재료의 성질과 연륜이 그 미감에 크게 작용한다. 이미테이션 고가구가 낯설고 멋이 없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목가구의 아름다움은 ‘선과 땟물’이 결정한다는 말도 있다.”

 

이번에는 성당 같은 건물보다는 거리거리와 뒷골목들을 많이 다녔고 특히 리스본에서는 로시우 광장과 코메르시우 광장을 여러 번 들락거렸다. 잡상인도 많았지만 그 시원한 광장( 그 옆에도 또 광장, 신트라 같은 마을에 가도 규모는 작으나마 또 광장, 스페인에도 광장...), 거리거리의 분기점이 되는 광장 문화가 좋아 보이더라. 우리에겐 ‘거리’는 있는데 ‘광장’은 없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봐야지, 우리에게 광장이 없다고 부러워할 일만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유홍준 씨는 광장이 부러웠나보다. 광화문 광장 추진 이야기가 굉장히 재미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광화문 이야기도 그렇고 경복궁과 광화문과 총독부 건물의 풍수 이야기도 재미있다. 하지만 제일 재미있는 것은 그가 문화재청장으로서 광화문광장을 추진하려다 실패한 이야기다.

 

“p125 공무원 이야기

내가 문화재청장으로서 새로운 정책을 마련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실무국장과 과장들을 불러놓고 회의하면 이들은 두꺼운 노트에 나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메모한다. 그러나 이들은 나의 정책 방향을 적는 것이 아니라 그럴 경우 일어나는 문제를 그 사이에 연구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현할 수 없는 이유를 몇 가지씩 제시한다.

하도 기가 막혀 다소 긴장된 분위기에서 일언이폐지해서 이것은 청장의 방침이니까 그렇게 추진해 보라고 회의를 마치면 그 다음에 더욱 놀라운 일이 생긴다. 그렇게 안 되는 이유만 말하던 국장과 과장도 청장의 강력한 의지가 실려 있다는 사실을 동물적 감각으로 간취하면 태도가 일변한다. 회의를 끝내고 점심식사 후 돌아온 내 책상 위에는 청장의 방침대로 할 수 있는 방안이 아주 상세한 보고서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 광화문 광장안을 추진하는 과정을 말하며.

 

나는 준공무원이라 불리는 사립학교 교사다. 교사들에게도 공무원스러운 모습이 있다. 무엇보다고 창의적이어야 하는 ‘수업’을 담당하지만 학교가 ‘수업 잘하는 교사’보다 ‘행정업무 잘하는 교사’를 우대하는 풍토이고, 수업도 정해진 교육과정의 틀을 벗어나기 힘들다 보니 학교 현장에서 창의성을 가진 사람은 버티기가 참 힘들다. 있던 창의성도 잦아든다. 그래서 학교 현장의 회의는 유홍준이 묘사한 공무원의 회의와 많이 닮았다. 새로운 시도에 대해 많이 머뭇거린다. 하지만 교장의 절대적 권한에 대해서는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강하다. 여러 교사의 말에 귀기울이려는 교장이 있으면 자칫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말야...’ 이런 비판을 듣는 경우도 보았다. 교장이 강력한 의지로 밀어붙이려 한다는 것을 알면(물론 뒤에서 욕 많이 하지만) 교사들은 아무리 그것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되돌리려는 어떤 노력 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노력을 하는 교사들은 극소수다. 극소수나마 있다는 것이 (고위?)공무원들과 다른 점이려나?

 

여행 내내 날씨가 좋았다. 누구는 스페인이 폭염이라고 걱정을 해주었지만 그건 남부지방의 일이었는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27, 8도를 넘지 않았고 숙소로 돌아오는 밤시간도 내내 걷기에 쾌적했다.

여행을 마치고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1시간 전까지도 영자신문에 예고된 비는 보이지 않았다. 착륙 십여 분 전 엄청난 구름 속으로 우리 비행기가 내리꽂히는 걸 보면서 비가 오긴 오겠네 했는데, 웬걸, 그냥 비가 아니었다. 우리가 도착한 7월 27일은 대치역이 침수되고 우면산이 붕괴된 바로 그 날이다. 인천공항에서 집까지 5시간이 걸렸고 집이 코앞인 서초동 남부터미널 부근에서는 가로세로 길을 가로막고 거꾸로 서있는 차들 때문에 길이 막힌 걸 보았다. 사고가 난 게 아니고 물이 급히 밀려들어왔을 때 떠밀려온 주정차 차량들이었다.

무서운 비 피해에 대해 인재니 천재니 말이 많지만 ‘나의 문화유산’ 속에선가, 과거의 왕들은 수해와 같은 천재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했고 신하들도 왕이 하늘에 부끄러운 점 없는지를 반성하라고 촉구했다는 내용을 본 것 같다. 그게 왕의 탓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권위주의적인 ‘왕’조차도, 위정자라면 무릇, 다스리려는 태도가 아니라 돌보려는 태도여야 하고 하늘 아래 자신을 낮추는 자세여야 백성의 존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말 아닌가. 엄청난 수해 앞에서 서울시와 나라의 수장들은 어느 도시도 이런 비를 피할 수는 없겠다는 둥, 이건 100년만의 비라 어쩔 수 없다는 둥 하는 소리만 하고 있었다. 적어도 가슴 아파 하기라도 하라!

p64 자선당 이야기

경복궁의 왕세자 동궁의 이름 자선당(資善堂) - 착한 성품을 기른다(왕도란 원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삼가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현인을 높이고 덕 있는자를 벗 삼는다는 말은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 이황의 상량문 중)

 

책 뒤쪽으로 가면 부여문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충청도 사람들의 기질을 아주 재미나게 묘사한다. 나의 아버지도 충북 괴산이 고향이라 나는 그 기질을 잘 안다.(충북은 ~유 하는 억양은 별로 안 쓰지만). 이곳 사람들은 절대부정적 표현을 거의 안 쓰지만 ‘넘 염려 말어’ 하면 긍정이고, ‘글씨유’, ‘바쁜디 어서 가봐유’ ‘냅둬유’, ‘소용읎슈’ 하면 부정이다. ‘절단나는겨, 틀렸슈’ 이 정도면 강력한 부정이다.

“이런 디서 살아두 짐작이 천리구, 생각이 두바퀴 반이란 말여. 말 안 허면 속두 읎는중 알어” 이것이 백성의 깊은 속이다.

 

유홍준 씨에게는 ‘뽕끼’가 있다. 그는 지긋한 연세와 교수, 문화재청장, 유명한 학자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예쁜, 매력적인, 신비한, 귀여운과 같은 가벼운 표현들을 아낌없이 쓴다. 보는 것마다 ‘이뻐죽는’ 이 매사에 긍정적인 눈이야말로 그의 능력이다. 또한, 사소한 이야기도 재미나게 엮을 수 있는 말빨(여행 가이드들의 대중영합적인 구라 비슷한), 말을 글로 그대로 옮기는 필력이 재미를 돋우지만 만약 그것으로 끝났다면 즐거운 여행길에 만난 수다스러운 가이드의 말들처럼 전부 ‘재미는 있으나 믿을 수는 없는’ 뜬구름잡는 이야기라 생각될 수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그 뽕끼와 말빨의 겉재미를 진중하게 아래에서 잡아주는 학문적 바탕과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덮어줄 수 있는 미적인 시력이 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90년대에) 옆구리에 그의 책을 끼고 전국을 누볐고 21세기에는 고상하게 그의 책을 펼쳐들고 외국행 비행기도 타는 것이다. 역시 힘은, 진정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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