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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 ㅣ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평점 :
2년 전에 계획하다 미루고 미룬, 어쩌면 포기할 뻔했던 스페인행 가족여행을 지난 7월 말 다녀왔다. 올해 대학 들어간 아들이 고등학생일 때 다녀오고 싶었지만 여러 문제로 해마다 못 갔었다. 사실 대학생을 데리고 가족여행을 간다 하면 아이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아 포기하려 했는데, 녀석이 1학년 마치고 군대를 가겠단다. 군대 다녀오면 더더욱 넷이 함께 여행을 가는 일은 수년 혹은 십수 년 후의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싶어 감행했다.
열 시간씩이 넘는 두 차례의 비행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 그리고 머리 아프지 않게 읽을 책을 고르다고르다 이 책을 들고 탔다. 남편이, 스페인 여행길에 어인 ‘나의’문화유산답사기냐고 웃는다. 그런데 신기한 건, 같은 여행기라 그런지 잘 어울리더라는 것.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우리 자리 근처의 패키지 여행 팀(경유지인 헬싱키까지 함께 갔던)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초로의 아저씨 한 분이 열심히 그 책을 읽고 있더라는 것이다. 여행 내내 잠자리에서 그 날의 일기를 쓰고 이 책을 읽으며 곤한 잠에 빠져들던 밤, 나쁘지 않았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3일을 지내고 마드리드로 야간열차를 타고 갔다. 날씨도 그렇고 풍광도, 사람들도 리스본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물론 순박한 듯 하면서도 어딘가 기품이 있는 거리거리나 건물들은 그들의 제국주의 역사를 반영한 것임을 잘 알기에 그냥 혹할 수만은 없다. 스페인도 마찬가지지만 유럽 여기저기에 거대한 왕궁이나 로마시대 유물뿐 아니라 일반 건축물까지도 거대하다 못해 위대해 보이는 자취들의 이면에는 그들이 공격자이고 침략자였던 역사가 있다. 꼭 유홍준이 아니었어도 우리 궁궐의 조촐하면서도 은근히 화려하고 권위가 살아있는 (그런 걸 기품이라 한다) 매력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런 미감의 차이를 차치하고라고 어쨌든 수백, 수천 년을 지나 여전히 건재한 유산들을 처처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스페인의 톨레도에 가서도 문이며 성이며 성당도 그러하지만 특히나 사람들의 주택이 그대로 보존되어 계속 살아있는 것이 참으로 부러웠다. 마을 통째로 그대로 과거가 살아 있으면서도 현재가 숨쉬는, 우리에게 그런 마을 혹은 도시가 과연 얼마나 있는가 말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 잘못만은 아니다. 식민 침탈과 전쟁의 역사가 있고 그런 걸 되새기면 어떤 인간적인 이유로도 용서하고 싶지 않은 일본에 대한 증오도 되살아난다. 돌이킬 수 없는 역사는 아프지만 할 수만 있다면 과거에 우리가 세웠던 건축물들, 거리들, 조형물들을 다시 살려내고만 싶다.
이번 여행에서는 궁은 거의 못 보았지만 책 속의 경복궁 이야기는 매우 공감하며 읽었다. “p17 세계 어느 나라 왕궁에 그런 산이 있는가. 자금성 주위에도 그런 산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자금성 북쪽에 우리의 북악산에 비하면 뒷간보다도 작은 가산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금성에 들어서면 나무 한 그루 없다. 자객이 들어올까봐 있던 나무도 없애버린 것이다. 그렇게 철저히 자연을 배제할 수가 없다. 경복궁의 각 권역을 이어주는 길에는 아름다운 소나무, 버드나무, 때죽나무, 마가목, 산딸나무 등 각 건물에 어울리는 나무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 종류가 100종이 넘는다. 경복궁과 자금성을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자연과의 어울림이다., 자금성은 자금성이고 경복궁은 경복궁이다.”
20년 전쯤이긴 하지만 자금성을 보고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때도 조선족이었던가 하는 가이드는 경복궁이 자금성을 본떠 만들었다는 둥 하는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딱히 자금성이 더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크고 복잡하지만 매력적이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의, 가위로 전정한 나무들이나 기하학적으로 조경된 정원도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어두운 밤의 궁궐은 경복궁도 결코 포근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나 베르사유 궁의 높은 천정 밑에 놓여있는 침대가 을씨년해서 여기서 잠들어야만 했을 공주들이 참 불쌍하게 여겨졌었다. 우리 경복궁도 백성의 피땀어린 노고로 지어진 건 마찬가지였겠지만 거대한 돌을 굴리다 깔려죽기도 수없이 깔려죽었을 제국의 궁궐과는 좀 다르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관촉사 해탈문을 언급하면서도 ‘문이 작아야 밖에서 보면 겸손해 보이고 안쪽으로 들어오면 공간이 훤해진다는, 평범하면서도 차원높은 건축미학’을 말하는데 이 ‘차원’을 거대미학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과연 이해할까 싶다.
유홍준의 경복궁 예찬은 잘못하며 낯간지럽게 들릴 수도 있다. 외국인이 이 설명을 듣고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면 ‘자뻑’이 아닐까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러나 아마도 제대로 한국의 건축문화를 들여다 볼 줄 아는 이라면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이 말이 결코 자위나 변명이 아님을 알 것이다. 무엇보다 위의 언사 중 마음에 드는 것은 ‘자금성은 자금성이고 경복궁은 경복궁’이라는 말이다. 비교를 하면 하나의 장점이 나의 단점이 될 것이요, 나의 자랑은 너의 부족함이 될 것이다. 각각에는 각각의 역사와 미적 축적이 있게 마련이리라.
스페인을 꼭 가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사실 가고 싶은 곳은 쿠바다. 남편과 언젠가 가보고 싶다. 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자유여행으로 쿠바를 가기엔 무리가 있지 싶다. 또한, 미술 공부하는 아들에게 꼭 가우디와 고야를 보여주고 싶다고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생각했다. 물론 나도, 오직 가우디를 보기 위해서만이라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역시 15,6년 전 어느 책에서 본 사진들 때문이었다. 이제 바르셀로나와 거기 가우디는 관광상품으로 더 말할 나위 없이 유명한 곳이 되었지만 관광객이 득실거린다고 해서 그것에 흠집이 나진 않는다.
가우디를 보면서 내내 나는 “그 사람 아마 외계인이었을거야. 도마뱀이나 파충류 따위를 형상화한 것이나 까사 밀라의 굴뚝에 외계인 모습을 만들어 놓은 것도 그렇고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도저히 지구인의 성소라 보기에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양도 그렇다. 구엘 공원 운동장 전체를 정수장치로 설계했다는 것도 신비하지만 태풍에도 끄떡없는 돌쌓기의 기술(혹은 치밀한 계산?)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까사 밀라의 옥상이나 성당 꼭대기 어딘가에는 외계인과의 통신 장치가 있을 것만 같다. 안토니오 가우디의 급작스러운 죽음도 그에게 어쩌면 급히 자기 별로 돌아가야 할 사유가 생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상상은 그의 놀라운 건축물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까사 밀라 안에 들어가 보면 100년 전 사람들의 주거공간을 볼 수 있는데 가우디 투어를 맡아주었던 가이드는 가우디가 주인들과 그들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메이드, 침모, 유모 등)의 동선이 겹치지 않게 설계했다고 말했는데 남편은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어느 공간을 돌아다녀도 다 햇살이 고르게 들더라, 가우디는 일하는 사람도 배려한 그런 설계를 한 것 같다...고. 그런데 가우디는 자기 건축물에 대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하니 그의 의중이 주인을 위한 동선인지 일하는 사람의 일조권인지 알 수 없다.
바르셀로나에 지금껏 그 도시를 먹여 살리는 천재가 살았다면 우리에게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장인들이 있었다. 유홍준은 p435 성주사터 낭혜화상비에 대한 언급에서 붓글씨의 리듬을 살려낸 각인의 묘미를 칭찬하며 ‘이쯤 되면 각수(刻手) 또한 대장인, 대예술가일 텐데 우리는 애석하게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아쉬워한다. 그가 자기 책의 부제로 ‘인생도처유상수’를 삼았는데, 노자(老子)식으로, 진정한 고수들은 자신이 이름을 남기는지 어떤지조차 유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자거리 거리마다에도 ‘상수’들이 살았었고 그들은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속을 알 수 없었던 가우디도 어쩌면 그런 ‘상수’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는 노자식으로 말하기엔 좀 비싼 사람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를 하고 갔던 곳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었다. 소장품이 많기도 하다지만 특히 고야를 꼭 보고 싶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4시간 넘게 머물면서 꼼꼼하게 보느라고 봤다. 중3 딸아이는 한 작품도 안 놓치겠다는 자세로, 그림그림마다 어떤 내용인지 표찰을 다 읽고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간혹 미술시간에 들은 설명을 들려주기도 했고. 아무래도 서양 미술의 두 줄기는 성경과 그리스 신화이다 보니 미술관을 전부 둘러보고 나니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거의 다 끄집어낸 듯했다. 그냥 혼자 좋아서 읽었던 미술평론집들, 뭐 이것은 그다지 실용적인 독서는 못 되겠군 했던 것들이 딸 앞에서 오디오가이드 노릇을 하게 될 줄이야... 딸은 딸대로, 아들은 또 저 혼자 알차게 감상하고 미술관 밖으로 나와서는 다들, 그런데 왜 우린 옷 입은 마야, 옷 벗은 마야를 못 보았을까 의아해했다. 어째 넷 다 못 보았나?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유명한 작품을 보았다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옆의 소피아 미술관 가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보았지만 어른들과는 달리 피카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들과 역사에 관심이 없는 딸은 그 작품을 시큰둥하니 대했다. 나 혼자 옆에서 자꾸만 저거 유명한 거라구~ 한 번 더 보고 가자, 이렇게 부추겼다가 뭘 또 봐~ 이런 핀잔만 들었다. 딸은 자기가 좋아하는 달리 그림에 오래오래 서 있었다. 그래, 화가의 명성을 과제로 여기는 나는 확실히 속물인 것이다. 우리 집 스무 살짜리 예술가 녀석도 그냥 자기 좋은 그림에 가서 오래오래 서 있곤 하더라.
“p136 미술품이란 본래 형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예술적 특징은 재료의 속성과 질감을 처리하는 디테일에서 그 성패가 좌우되는 법이다. 안목 없는 눈에는 형태만 보이지만 안목 있는 사람은 마띠에르와 텍스처에서 그 묘미를 찾는다. 특히 목조건축이나 목가구는 재료의 성질과 연륜이 그 미감에 크게 작용한다. 이미테이션 고가구가 낯설고 멋이 없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목가구의 아름다움은 ‘선과 땟물’이 결정한다는 말도 있다.”
이번에는 성당 같은 건물보다는 거리거리와 뒷골목들을 많이 다녔고 특히 리스본에서는 로시우 광장과 코메르시우 광장을 여러 번 들락거렸다. 잡상인도 많았지만 그 시원한 광장( 그 옆에도 또 광장, 신트라 같은 마을에 가도 규모는 작으나마 또 광장, 스페인에도 광장...), 거리거리의 분기점이 되는 광장 문화가 좋아 보이더라. 우리에겐 ‘거리’는 있는데 ‘광장’은 없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봐야지, 우리에게 광장이 없다고 부러워할 일만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유홍준 씨는 광장이 부러웠나보다. 광화문 광장 추진 이야기가 굉장히 재미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광화문 이야기도 그렇고 경복궁과 광화문과 총독부 건물의 풍수 이야기도 재미있다. 하지만 제일 재미있는 것은 그가 문화재청장으로서 광화문광장을 추진하려다 실패한 이야기다.
“p125 공무원 이야기
내가 문화재청장으로서 새로운 정책을 마련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실무국장과 과장들을 불러놓고 회의하면 이들은 두꺼운 노트에 나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메모한다. 그러나 이들은 나의 정책 방향을 적는 것이 아니라 그럴 경우 일어나는 문제를 그 사이에 연구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현할 수 없는 이유를 몇 가지씩 제시한다.
하도 기가 막혀 다소 긴장된 분위기에서 일언이폐지해서 이것은 청장의 방침이니까 그렇게 추진해 보라고 회의를 마치면 그 다음에 더욱 놀라운 일이 생긴다. 그렇게 안 되는 이유만 말하던 국장과 과장도 청장의 강력한 의지가 실려 있다는 사실을 동물적 감각으로 간취하면 태도가 일변한다. 회의를 끝내고 점심식사 후 돌아온 내 책상 위에는 청장의 방침대로 할 수 있는 방안이 아주 상세한 보고서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 광화문 광장안을 추진하는 과정을 말하며.
나는 준공무원이라 불리는 사립학교 교사다. 교사들에게도 공무원스러운 모습이 있다. 무엇보다고 창의적이어야 하는 ‘수업’을 담당하지만 학교가 ‘수업 잘하는 교사’보다 ‘행정업무 잘하는 교사’를 우대하는 풍토이고, 수업도 정해진 교육과정의 틀을 벗어나기 힘들다 보니 학교 현장에서 창의성을 가진 사람은 버티기가 참 힘들다. 있던 창의성도 잦아든다. 그래서 학교 현장의 회의는 유홍준이 묘사한 공무원의 회의와 많이 닮았다. 새로운 시도에 대해 많이 머뭇거린다. 하지만 교장의 절대적 권한에 대해서는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강하다. 여러 교사의 말에 귀기울이려는 교장이 있으면 자칫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말야...’ 이런 비판을 듣는 경우도 보았다. 교장이 강력한 의지로 밀어붙이려 한다는 것을 알면(물론 뒤에서 욕 많이 하지만) 교사들은 아무리 그것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되돌리려는 어떤 노력 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노력을 하는 교사들은 극소수다. 극소수나마 있다는 것이 (고위?)공무원들과 다른 점이려나?
여행 내내 날씨가 좋았다. 누구는 스페인이 폭염이라고 걱정을 해주었지만 그건 남부지방의 일이었는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27, 8도를 넘지 않았고 숙소로 돌아오는 밤시간도 내내 걷기에 쾌적했다.
여행을 마치고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1시간 전까지도 영자신문에 예고된 비는 보이지 않았다. 착륙 십여 분 전 엄청난 구름 속으로 우리 비행기가 내리꽂히는 걸 보면서 비가 오긴 오겠네 했는데, 웬걸, 그냥 비가 아니었다. 우리가 도착한 7월 27일은 대치역이 침수되고 우면산이 붕괴된 바로 그 날이다. 인천공항에서 집까지 5시간이 걸렸고 집이 코앞인 서초동 남부터미널 부근에서는 가로세로 길을 가로막고 거꾸로 서있는 차들 때문에 길이 막힌 걸 보았다. 사고가 난 게 아니고 물이 급히 밀려들어왔을 때 떠밀려온 주정차 차량들이었다.
무서운 비 피해에 대해 인재니 천재니 말이 많지만 ‘나의 문화유산’ 속에선가, 과거의 왕들은 수해와 같은 천재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했고 신하들도 왕이 하늘에 부끄러운 점 없는지를 반성하라고 촉구했다는 내용을 본 것 같다. 그게 왕의 탓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권위주의적인 ‘왕’조차도, 위정자라면 무릇, 다스리려는 태도가 아니라 돌보려는 태도여야 하고 하늘 아래 자신을 낮추는 자세여야 백성의 존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말 아닌가. 엄청난 수해 앞에서 서울시와 나라의 수장들은 어느 도시도 이런 비를 피할 수는 없겠다는 둥, 이건 100년만의 비라 어쩔 수 없다는 둥 하는 소리만 하고 있었다. 적어도 가슴 아파 하기라도 하라!
p64 자선당 이야기
경복궁의 왕세자 동궁의 이름 자선당(資善堂) - 착한 성품을 기른다(왕도란 원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삼가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현인을 높이고 덕 있는자를 벗 삼는다는 말은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 이황의 상량문 중)
책 뒤쪽으로 가면 부여문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충청도 사람들의 기질을 아주 재미나게 묘사한다. 나의 아버지도 충북 괴산이 고향이라 나는 그 기질을 잘 안다.(충북은 ~유 하는 억양은 별로 안 쓰지만). 이곳 사람들은 절대부정적 표현을 거의 안 쓰지만 ‘넘 염려 말어’ 하면 긍정이고, ‘글씨유’, ‘바쁜디 어서 가봐유’ ‘냅둬유’, ‘소용읎슈’ 하면 부정이다. ‘절단나는겨, 틀렸슈’ 이 정도면 강력한 부정이다.
“이런 디서 살아두 짐작이 천리구, 생각이 두바퀴 반이란 말여. 말 안 허면 속두 읎는중 알어” 이것이 백성의 깊은 속이다.
유홍준 씨에게는 ‘뽕끼’가 있다. 그는 지긋한 연세와 교수, 문화재청장, 유명한 학자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예쁜, 매력적인, 신비한, 귀여운과 같은 가벼운 표현들을 아낌없이 쓴다. 보는 것마다 ‘이뻐죽는’ 이 매사에 긍정적인 눈이야말로 그의 능력이다. 또한, 사소한 이야기도 재미나게 엮을 수 있는 말빨(여행 가이드들의 대중영합적인 구라 비슷한), 말을 글로 그대로 옮기는 필력이 재미를 돋우지만 만약 그것으로 끝났다면 즐거운 여행길에 만난 수다스러운 가이드의 말들처럼 전부 ‘재미는 있으나 믿을 수는 없는’ 뜬구름잡는 이야기라 생각될 수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그 뽕끼와 말빨의 겉재미를 진중하게 아래에서 잡아주는 학문적 바탕과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덮어줄 수 있는 미적인 시력이 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90년대에) 옆구리에 그의 책을 끼고 전국을 누볐고 21세기에는 고상하게 그의 책을 펼쳐들고 외국행 비행기도 타는 것이다. 역시 힘은, 진정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