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 - 배움이 있는 수업만들기
사토 마나부 지음, 손우정 옮김 / 에듀케어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미 배움의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통해 사토 마나부의 이름을 들었었다. 교단에 한때 불었던 열린교육, 발렌도르프 교육, 핀란드 교육 등 다양한 교육적 시도 등과 더불어 지금은 배움의 공동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알려든다.

이 책의 요지는 한 마디로 그것이다. ‘모든 교사가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라. 그리고 다른 교사들과 공유하라. 그러면 그것을 통해 학교의 개혁과 발전, 학생의 발전(학업성취라는 면과 인성 교육이라는 면 모두), 다 이룰 수 있다.

수업을 공개해야 한다 

나 역시 수업의 공개와 공유를 늘 주장해왔다. 일개 교사로서 나는 내 수업에 대해 공개할 의사가 (용기는 아니고) 늘 있었고 그 소심한 노력의 일환으로 자주 스스로의 수업을 녹음하거나 녹화하여 자기 검열을 해왔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에는 동료교사들에게 수업을 공유하자고 늘 주장해왔다. 그것이 교사의 본질인 수업을 학교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우뚝 세우고, 수업의 질을 발전시키는 데 가장 좋은 일임을 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장에서 교사로서 몸으로 그것을 체득했고 사토 마나부는 학자로서 그것을 이성적으로 체득했을 것이다. 나뿐 아니라 많은 일본과 한국의 교육현장의 교사들이 수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럼에도 얼마나 홀대받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나 그것을 바로잡기에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상황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잘 몰랐고, 알고 있다 해도 힘이 없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학자로서 사토 마나부는 그런 힘을 발휘해왔다. 많은 성과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많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수업’이 학교에서 가장 중요함을 각성하라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실 교사가 아이들을 만나는 장면은 수업만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수업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수업의 열의와 알맹이는 다른 업무와 생활지도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서는 우선 그러한 ‘수업’의 중요성에 대한 각성이 먼저 필요하다.

또 이 책을 통해 일본 교육에 관해 놀란 것은, 많은 교장들이 (그 막강한 영향력을 잘 활용하여) 수업 공개를 통해 학교 개혁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일본교육자들도 참으로 보수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친미적 성향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가장 보수적인 집단일 게 분명한 교장들 가운데 학교의 개혁에 그토록 적극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진정 부러웠다. 스스로 사회과 수업 시범을 자초했다는 교장 이야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더 보수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교장의 역할

또, 몰랐던 사실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공교육 현장에 얼마나 많은 일본의 흔적이 있는지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용어가 아직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칠판이며 육성회비 봉투 양식까지도 일본식을 그대로 쓰고 있었던 것들을 발견한다. 일제강점기 때 유산은 그렇다치고, 해방 이후의 교육현장의 변화를 겪고 난 후에도 여전히 따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일본이라서 싫다는 의식은 천박한 것일 수 있으므로 진보적인 경향과 방식을 도입하는 데에는 경계를 두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분명 80년대 말부터 참교육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수업의 변화에 대한 열망과 시도가 있었음에도 그것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흐지부지 되었다가 ‘배움의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그 여기저기 흩어졌던 참교육 열망이 그릇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운동은 있었으되 그것을 정리해 주는 학술적 ‘이름짓기’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토 마나부처럼 학교를 찾아다니며 수업을 함께 고민하던 ‘학자와 교장’이라는 권위 있는, 그리고 보장된 지지자가 없었던 것일까. 책은 고개를 많이 끄덕이게 했는데 또한 나를 슬프게도 했다. 다 내 안에 있던 것들인데, 누군가는 이미 잘 정리해서 자기것인 양하고 있다는 느낌, 나는 재능과 성실성을 다 갖춘 사람인데 조촐하고 괜찮은 부모를 갖지 못한 고아라서 그것들이 산산 흩어진 듯한 아쉬움....

  교육계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 좋은 것마저도...

일본 학교에서도 전후, 그리고 자본주의적 발전단계에서 성장과 경쟁을 많이 강조하였고 일본인들의 소극성을 극복하여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 적극적인 인성의 아이들을 기르기 위해 학교가 많은 노력을 했나 보다.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조용하고 소극적인 듯 보이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태도 속에서 배움을 내면화하는(그러니까 학습이 아닌 배움을 강조하는) 교육적 단계가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아마도, 원래 일본인의 것이었던 작은 목소리와 남에 대한 배려(조심성)이 자본주의적 공격성 때문에 폄하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 같다. 민족적 성향은 조금 다르니 우리로서는 공동체 의식과 보이지 않는 배려 같은 것들이 성장과 경쟁 속에서 파괴되어 온 것과 비슷할 것 같다. 그 반작용으로 발표가 아닌 듣기, ‘학’이 아닌 ‘습’, 가르침의 수용이 아닌 ‘배움’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고민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 책에서 가장 크게 수용해야 할 것은 수업공개를 통해 학교가 거듭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방법론이나 방향성에 대해서는 다른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친미적 성향, 서방선진국 따라 하기, 신자유주의적 성취 중심의 학교 현장의 문제뿐 아니라 식민잔재 청산과 반통일적 역사 왜곡과 이념대립이란 문제가 한국 사회에는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고 무너져가는 인성교육의 과제가 또한 시급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교육(중등 공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교장임을 지적하고 싶다. 물론 대통령이나 교과부 장관이 의지를 갖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대학입시 문제가 초중등 교육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일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 와 보라. 보신과 안일 혹은 성장중심주의에 서 있는 교장들이 어떻게 학교를 망치고 있는지... 교사의 책임은 없냐고? 물론 교사의 책임이 크다. 그런 교육현실을 타파하지 못하는, 그런 교장들을 개혁시키지 못하는, 교사들 스스로 건강하게 성장하여 스스로 좋은 교육관리자가 되지 못하는, 이런 현실 속의 교사들은 무능하다. 어떤 면에서는 교장 교감들과 함께 부패의 노선을 함께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무소불위한 교장의 권한 속에서는 어떤 건강한 노력들도 짓밟혀 버리고 결국 무언가 노력해 보려는, 그나마 존재하는 교사들의 희망마저도 체념과 비웃음으로 바뀌어 버린다. 비슷한 맥락에서 교육청과 교과부의 교육관료들 또한 그러하다. 장관조차도 오래 묵은 교과부 관료들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 엄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회사 사장도 잘못하면 물러나고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으려 애쓰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학교에서 교장들은 전혀 그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목소리 높여 교사들을 질타하는 학부모들과 조중동은 알고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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