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아찌아 마을의 한글 학교 - 첫 번째 찌아찌아 한글 교사의 아주 특별한 일 년
정덕영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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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이 책을 읽을 즈음 찌아찌아 마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난관에 봉착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하긴 어떻게 순수하게 한글을 그들의 문자로 선택하게 되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던 나로서는 여기에도 어떤 정치적이고 정책적인 뒷이야기들이 있었구나, 그리고 그것의 진행과정이 삐걱거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한글이 누군가의 음성언어를 표기할 문자로서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2009년에 한국어교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사람들 말마따나 그걸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느냐고, 자원봉사 차원이라면 20년이 넘는 중등학교 국어교사 자격과 경력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외국에 나가거나 아주 특별한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할 것이 아니라면. 또 그런 기회가 쉽게 오는 것도 아닐 터이고 말이다. 물론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 국어 선생으로서 한국어 지식에 대한 총점검도 받을 겸 여러가지 목적으로 그 126시간의 자격연수를 받았고 시험을 치렀다. 교육과정이 매우 충실했던 것만으로도  만족할텐데 자격증을 어렵게 (시험이 어려웠고 합격률동 20% 정도밖에 되지 않았더랬다.) 얻었던 만큼 기쁨도 컸다. 중등교사자격증도 그렇지만 자격증을 얻는다고 해서 바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법을 아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에게 어떻게 한국어를 가르칠 것인가는 부딪치며 해결할 문제일 것이다. 가끔 우리 학교 원어민 교사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한국어 (특히 어미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많구나 스스로 깜짝깜짝 놀라곤 할 정도다.

 

이 책은 '교사로서의 자세'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어를 어떻게 가르쳤는지 구체적으로 많이 언급이 되지는 않는다. 저자의 경험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므로 외국에 나가 한국어를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정보를 주는 것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열정과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자세는 모든 일에서 그러하겠지만 교사로서의 자격에서도 제 1 순위인 것 같다. 학생들에 대한 애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책들을 때때로 읽어야만 지금 나는 이 정도면 교사로서 그럭저럭 괜찮지 뭐, 하는 따위의 안주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려울 때 열심히, 어려운 아이들을 열심히, 그렇게 가르쳐야 정말 선생이다. 말 잘 듣는 아이들에게 자기가 다 알고 있고 여러 번 가르쳐 본 것을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여 스스로 괜찮은 교사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세상 모든 것을 가르칠 수는 물론 없지만 말이다.

 

우리 아이들은 7차교육과정을 거치면서(지금은 개정 7차) 한국어의 문법적인 부분보다는 사회는 보는 눈을 기르는 방향으로 국어교육을 받고 있다. 지식이나 문법, 고전문학의 비중이 제법 있었던 6차교육과정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러다 보니 한국어지식을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다.(국어가 4,5차시로 다른 교과에 비해 많은 수업을 하면서도 늘 부족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문학도 더 가르치고 싶고, 말하기 듣기도 부족하고 , 뭐 그런 거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논리적으로 딱딱 맞아 떨어지는 한국어 조음, 발성의 원리나 문법 공부하는 시간에 오히려 흥미를 보이는 남학생도 많다. 나도 개인적으로 고전문법 등을 가르칠 때 재미있다.

 

이주노동자나 다문화가정의 여성이나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면 그들이 말을 배워가는 그 과정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은퇴 후에 할머니들께 한글을 가르쳐 드리는 꿈도 꾼다. 무엇이 되었든 진정 글과 말로 세상을 활짝 여는 기쁨의 수업이 될 것이다. 배우는 기쁨, 가르치는 기쁨이 점점 사그라드는 '학교'는 그래서 점점 슬프다. 눈이 환해지고 뇌가 환해지고, 그래서 마음이 환해지는 진정한 배움의 학교는 이제 그 시대를 닫고 있는 것인가. 오래 공교육 한 가운데 우뚝 서서 이 길을 걸어온 내 등 뒤로 노을이 지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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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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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입 밖으로 내 놓은 말이 생각 혹은 영혼을 그대로 그려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혹은 마음 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담고 있어서 말이라는 작은 그릇으로 옮겨 담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극히 희박한 희망을 가져보다가, 그것이 한 생에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대로 떠날 요량이다. 물론  서로 다른 세계의 말을 할지라도 한 음절만으로도, 쉼표만으로도 전파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가끔 만나지기도 하기에 그런 만남을 위해 시를 쓰기도 한다. 대체로 이승의, 저잣거리의 말들은 너무 날것이거나 혹은 다 거짓인 고로 차라리 말을 않고, 아니 그저 듣고만 살려 드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작가는 자기 자신이 이 생활 속에서 말로는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자로서 또 다른 세계 속에 속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이해가 잘 되고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모국어 속에서 그런 답답함을 느낄 때, 우리는 때로 외국어로, 외계어로 도망간다. 시도 일종의 외계어다. 영적인 세계에 속하는 말.

 

소설 속의 그 여자는 상처 때문에 말을 잃어버린 사람이지만 아마도 어떤 달변도 삶의 고통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절망을 여고시절, 그리고 아이를 잃은 지금, 느꼈을 것이다. 말은 아무 소용이 없는 존재이다. 그녀의 크나큰 절망을 표현해 줄 수단도 되지 못한다. 실어는 병이겠으나 왠지 이 작품 속의 그 여자는 일부러 그것을 선택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녀는 희랍어로 도망쳐 들어간다. 지금 이 세상에는 이미 죽은 말. 말로는 쓰이지 않는 언어. 글만 남아 있는 언어. 때로 시인이나 소설가는 말로는 되지 않는 소통을 글로는 이루어 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러 모국어의 음성을 버리고 사어의 행간으로 자기를 숨기려드는 이 여자는 작가의 페르소나 같다.

 

희랍어 강사인 그 남자,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오래 모국어를 쓰지 못하고 이국에서 생활해야 했던 이력이 있다. 그러고 보면 그도 모국어로 시원하게 소통을 해 본 날들이 삶에서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랑은 늘 벽에 부딪친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소통하고 보통의 사람들처럼 사랑을 하더라도 세상살이는 100%의 이해가 불가능한 어떤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불완전한 사랑마저도 하지 못했다.  이제 그가 모국에 돌아와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새 사람은 말을 잃은 여인이다. 그래, 어쩌면 사랑이란 건 의사소통이 아닐지도 모른다. 달팽이들이 더듬이로 서로를 느끼는 것, 몸으로 부딪쳤을 때 가장 민감해지는 것, 그것이 사랑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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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 내 인생의 전환점
강상구 지음 / 흐름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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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플라톤도 읽고 묵자도 읽고 중구난방이지만 고전을 듬성듬성 읽고 있지만 뭔가 옳은 소리를 하는 책을 읽고 싶지 '혐의'가 보이는 책은 뒤로 미루게 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그렇게 미뤄지다가 최근에 내게 읽힌(?) 책이었고 나름 오해를 풀며 다가가게 된 책이었다면 손자병법도 그런 이유로 (아니 게다가 병법서니까) 아마도 이 생 전체에 걸쳐 읽을 책 목록에 아마 제일 뒤쪽 어디 있을 법하게 홀대받았던 책이었을 듯 싶다.

서점에서 이책저책 뒤적이다, 직장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다가가는 생의 전략서인 듯 광고를 하길래 흥미를 가졌다. 머리 아플 때 읽으리라 하고 집어든다. 역시나 나는 학교에서 동료들과 아이들을 대할 때의 여러 상황들에 적용하면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인생을 통틀어 전쟁이라 보고 주변 사람들을 동료 장수, 내가 다스려야 할 병사, 혹은 적병, 적의 장수, 적의 군주로 바라보는 '색안경'을 일단 끼고, 내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이 전쟁 상황이 된다. 이건 결코 마음이 편한 상상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내 인생관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나 늘 고민하는 일이지만, 인생이 내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이 '몽상'이 되지 않으려면 현실감각이 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상주의자들은 그들 몫이 있다. 그들이 있어 세상이 더러워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아준다는 것, 인정! 게다가 그들 삶의 안락함을 담보로 하여! 대개는 고결한 삶을 살다'가는' 그들을 존경하면서도 또 한편 이 진흙탕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멋진 전략이 절대 필요함 또한 인정! 그것은 전투일수도 있도 정치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것조차 전략이 필요한 전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순수한 이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귀한 만큼 그들의 이상을 뒷받침해줄 현실주의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런 현실적 감각을 지니고 살고 싶은 까닭에 조금 지저분할지 몰라도 현실이라는 전쟁과 전투 속에서의 나를 상상하고 내가 갖춰야 할 지략과 비법이 조금이라도 이 책에 숨어 있나, 찾아보려 한다.

 

나의 학생들은 나의 병사가 결코 아니며 비록 내가 불편해 하더라도 교장, 교감은 적이 아니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책을 덮기는 했다. 학교가 전쟁터가 되어, 학부모를 구스를 수 있는 전략을 잘 알아야 하고 학생들을 엄히 다스릴 줄 알아야 하며 교장교감의 억지논리와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하는 현장이라면 지금 이 땅의 교사, 지금 학교 현장에 몸담은 나는 얼마나 비참한다. 그리고 여기서 소위 '승리'를 얻은들 그 얼마나 알량하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학교가 '사랑의 학교'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대개 사랑의 학교라는 말 안에 무수한 학생들의 희생과 방종, 교사들의 침묵과 굴종, 학부모들의 욕심과 주눅듦, 관리자들의 야망과 체념이 숨어있기 때문에 그 말이 순수하고 아름답지 않을 뿐이지, 말 그대로라면 학교는 사랑이 넘치는 학교여야 맞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이 책을 치열한 전투현장, 학교에 적용해 읽고 있었다. 가령,

 

형벌은 높은 사람에게, 상은 낮은 사람에게...  라는 구절이 있다. 지혜로운 군주나 장수라면 이렇게 할 터이지만 고래로, 지금 현재 어느 나라에서나 아마도 대개의 지도자들은 거꾸로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공정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칭찬하는 게 맞고 상을 주는 게 맞겠지만, 이미 출발부터 다른 아이들을 놓고 상과 칭찬은 결코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 성적이 바닥이던 아이가 힘겹게 오르는  자기 성적표의 고성에서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낮은 사람'이란 지위와 책임을 말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교무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관리자들은 일반적인 지도자들처럼 부장교사들에게 당근을 주면서 일반교사들을 '다스리고' 싶어 한다. 평교사들은 부장교사와 평교사의 관계에 대해 부장교사를 '상급자'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지로 승급이나 승진의 개념도 아니다. 하지만 위화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평교사도 자신이 부장교사가 되면 사람들 위에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 애매한 지위가 흔들릴까 불안해 하기도 한다. 그것을 관리자들은 이용하기도 하고. 하지만 어떤 젊은 교사의 말대로, 교장이든 교감이든, 앞으로 그런 관리자의 길로 나아갈 부장교사이든, 그들이 관리자가 될 '미래'에 함께 손잡고 일해야 하는 사람들은 '후배교사'들이고 동료교사들이다. 윗사람이 아니라. "당신 교감될 때 윗사람들 다 나가고 없어~! 후배들 마음 헤아리고 상처받지 않게 잘 하시라~!"

 

사정이 급하면 상벌을 남발한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 대목을 읽고 많이 웃었다. 물론 그 상벌은 역시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상벌에 연연하지 않는 분위기(받는 사람들이)야말로 태평성대인지도 모른다. 상은, 받는 사람은 기쁠지 모르나 사실 그 안에 상을 받지 않은 사람(특히 받고 싶어 했고 자신이 그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받는 상은 벌이 될 수도 있다)을 아프게 하는 전략도 내재되어 있다는 면에서 벌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지도자들은 이것을 무기로 쓰기도 한다. 교사들도 칭찬과 훈육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기술적으로 잘 쓰라고 배우고 있지만 상도 벌도, 누군가에게 다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깊이 헤아리지 않는다면 몇몇에게는 좋은 선생님일지 몰라도 많은 아이들에게 아픈 교사가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때론 칭찬이 받는 이에게도 못 받는 이에게도 모두 독만 될 수도 있다.

 

잘 싸우는 장수는 불친절하다.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다만 내 경우에 이렇게 적용해서 반성을 해보긴 했다. 나는 대체로 친절한 교사라는 평을 듣는다.(엄격한 동료교사들이 그런 부분을 불편해 한 적도 있었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서 엄격하고 때로는 폭력을 통해 아이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동료교사들을 '비교육적'이라고 못마땅해 한 적이 많다. 하지만 요즘은 과연 친철함과 깊은 이해가 반드시 아이들을 발전시키기만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한다. 엄마같은 마음으로 안쓰럽게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미처 아이들의 진면목(사실은 매우 성숙할 수도 있고 사실은 매우 사악할 수도 있는)을 못보고 어리고 여리고 착한(지금은 잘못을 저질러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가르치면 잘할 것이다,) 아이들이라고 순진하게 잘못 판단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한다. 아이들은 악마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다. 교육으로 그들이 좋아지고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선에서 아이들을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냉철하게(100% 그런 건 있을 수 없겠지만) 판단하고 잘 키울 수 있어야 하는데 때로는 지나친 엄격함만큼이나 지나친 배려와 이해가 그것을 가로막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특히 예체능 교사들 중에 아주 엄격한 교사들을 많이 보면서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때로는 깊은 사랑이 깔린 엄격함은 아이들을 강하게 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이해는,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와 다른 교사들에 대해 폭넓게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지 결코 나의 교육방식이나 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배려와 칭찬 속에서 더 잘할 수 있는 학생이었던 것처럼, 푸근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즐거워서 더 많이 배우고 싶게 만드는 따뜻하고 친절한 교사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위엄이 있되 사납지 않고, 분노하되 화내지 않으며, 근심하되 두려워 않고 즐겁되 기뻐하지 않는다. 라는 구절이 있다. 와, 이건 정말 멋진 표현이다. 교사나 부모의 미덕 중에 '엄격함'도 있다. 아무리 자애로운 부모라도 엄격할 땐 엄격할 수 있어야 한다. 교사의 권위도 그렇다. 늘 다정한 선생님이지만 원칙에 어긋나거나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한결같은 기준으로 엄격해야 한다. 엄격하다는 것이 무섭고 사납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들이 큰 소리를 지르고 매를 들고 욕을 하는 사나운 교사나 부모의 말을 잘 듣는 것은 아니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흔들리지 않고 훈계를 하거나 약속을 지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교사나 부모가 저 경지가 되려면 보통 인간은 아니다. 일반적인 사람 중에 평생을 갈고 닦아도 저런 경지에 완벽하게 이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변의 훌륭한 사람도 그렇고. 하지만 적어도 스승이고 부모이려면 제자나 자녀들에게 저 비슷하게는 보이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무실에서 아이를 야단칠 때 야단을 쳐야 할 때인데 짜증을 내고 있는 교사가 있다. 그 짜증이 듣기 싫어서 그런 행동을 덜 할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은 되지 않는다. 물론 무섭게 화를 내면서 야단을 치는 경우도 있다. 아이가 무서워서 조심을 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행동이 달라진다면 그건 교육이 아니라 '사육'이다. 효과라는 면에서는 그런 것도 필요할지도 모른다.(요즘 학교폭력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류의 엄격함도 때론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실 병사를 지휘하거나 짐승을 사육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학생과 자녀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니까.

 

맹목적으로 따르게 만들어라.라는 구절이 있다.  매력 혹은 신뢰? 삿된 방법으로가 아니라면 마음으로 알아서 따르게 만드는 것은 사실 가장 큰 능력일 수 있다.  본문에는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 이익, 위엄, 명분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만약 장수나 교사나 부모가 마음으로 철저히 따르게 만든 뒤에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춰 다가간다면 최고의 만남이 될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익이 없어도, 명분이 없어도 함께 움직여야 할 때도 많다. 하기 싫은데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능력일 터이다.

 

<육도> 장수의 결함 10가지가 나온다.

1. 용맹하지만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자

2. 매사에 급히 서두르는 자

3. 돈을 좋아하는 자

4. 마음이 약해서 다른 사람을 혼내지 못하는 자

5, 지혜롭지만 겁 많은 자

6. 스스로 신의가 있다고 여겨 남의 말을 잘 믿는 자.

7. 스스로 깨끗하다고 여겨 다른 사람을 챙기지 않는자 (이런 자는 누명을 씌워도 누구 하나 변호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8. 똑똑하지만 결단력이 부족한 자.

9.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자(이런 자는 띄워주면 좋아한다.)

10. 나약해서 남에게 모든 일을 맡기는 자.(속이기 쉽다)

나에게 해당되는 내용도 몇 있는 것 같다. 아니, 나 자신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그렇게 볼 수 있는 면도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체크리스트로 삼아 읽어 보았다.

 

손자병법 안에 비겁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한다. 영화나 소설 속 장수처럼 자기가 죽을 것을 뻔히 알고 돌진하거나 적의 왕에게 기개 좋게 호통을 치는 모습 대신, 때로는 후퇴하고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전략을 구사한다. 내 옆에도 자기 입으로 스스로 '비겁'이 교육철학이라고 말하는 동료교사가 있다. 물론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농담만은 아니다. 교장이 부당한 지시를 내릴 때 그는 교무실에 와서 몹시 괴로워했지만, 그에게 저항하지 않은 것에 대해 자신은 떳떳하다고 말했다. 왜냐면, 생존이 걸린 문제니까.(뭐, 좀 대든다고 학교에서 쫓겨나진 않지만 앞으로 당분간 혹은 오래도록 학교에서 괴로운 일을 많이 당하겠지.) 가장으로서 자신의 행동은 떳떳하다는 항변이다. 칼자루 쥐고 있다고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 저들이 잘못이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는 내가 비겁한 건 아니라는 논리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나라면 불이익을 감수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겠다. 하지만 정말 목숨이 걸린 문제라면 다를 수도 있다. 또, 굳이 싸울 필요가 없는 문제에 대해 핏대를 올릴 필요도 없다. 또, (아까 말한대로) 교장은 반드시 '적'은 아니므로 그와 오래 공존하기 위해 적어도 서로의 자존심에 상처가 날 사태는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정도를 전략이라고 말한다면 전략도 필요하다. 또 정말 큰 싸움을 위해 작은 싸움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 여기까지 써놓고 사실 좀 반성이 된다. 사실은 내 마음 속에 위의 사항들을 되새기려고 스스로 많이 애쓰지만 난 교장이 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고 언성 높이고 싸울 때가 많다. 싸울 수밖에 없다면 지혜로운 싸움을 하고 싶고, 성과를 얻어 내는 싸움을 하고 싶고, 싸워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적을 죽이지 않고 상처 입히지 않고 무릎 꿇게 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턱없이 부족한 나의 그릇이 알량한 정의감 혹은 자존심 때문이라면 손자병법의 '비겁의 철학'은 배울 필요가 있는 꽤 유용한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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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안단테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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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냥 병석에서 삶을 고즈넉히 관조하는 수필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그래, 겨울만 되면 쓸쓸한 지옥이 되는 내 마음에 맑은 바람같은, 시같은 그 무엇이 필요하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뭔가 무게감 있고 공부가 되는 것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이 책을 읽을 당위성을 부여하며 읽었다. (읽고 있는 여러 책 중에서 제일 가볍게 손이 가더라는 변명을 이렇게 해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병, 도대체 뭘까 싶은 그 병 때문에 달팽이를 깊이깊이 들여다 보게 된다. 생명을 사랑하게 되고 생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달팽이를 관찰하면서 조금은 병의 시름을 잊고....

그런데 아니다. 이 책은 그런 관조적인 달달한 인생에세이가 아니었다. 깊은 사랑만이 해낼 수 있는 관찰과 탐구의 끝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과학서적이냐?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문장과 풍경들이 거기 있다. 달팽이가 사는 작은 유리 상자 안의 세상도, 베일리가 원래 살던 숲근처 시골 집도,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참 아름답다.

 

나는 풀꽃이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지만 누차 말하듯 '내가 풀꽃이다, 내가 풀꽃처럼 곱다, 풀꽃처럼 아름답게 살겠노라'는 뜻이 아니다. 풀꽃 같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뜻이다.  스스로 나는 전생에 이끼였을 거라고 자주 생각한다.(좀 먼먼 전생이었겠지만) 한여름 장마철의 습기를 즐길 만큼, 숲속 계곡 물거품이 만들어내는 이온 냄새와 비 온 뒤의 땅 냄새를 즐길 만큼 건조한 걸 못 참는 나, 숲의 청정 상태를 알려주는 지표식물인 이끼에 스스로 비유한다. 사람들은 그 미끌한 몸짓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끼라는 존재가 사실은 깨끗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발길 닿지 않는 숲 계곡에 바위에 깔린 비단이끼의 모습... 가끔 나는 나의 존재가 한없이 낮아져 이끼 같다고 느낀다.

 

이 책은 뒤로 갈수록 감동적이다.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어서 감동적인 게 아니라 생명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자꾸 보여서 그렇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를 잊게 되는  게 흔한 일인데 자꾸 달팽이를 바라보고 있는 작가를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창 속에 창 속에 또 어떤 장면을 보듯이, 이야기 속에 이야기 속에 또 어떤 이야기를 보듯이, 우주의 시선으로 지구를, 지구 안의 어떤 대륙을, 그 안에 사는 어떤 사람을, 그의 침상과 머리맡의 유리상자를, 그 안에 사는 달팽이를, 달팽이의 느린 움직임 속의 성찰을 따라가둣 그렇게 읽게 된다. 무슨 힘일까. 한없이 안으로 돌돌 말려 들어가는 이 지독히 미시적인 세계가 우주적 성찰에 맞닿아 있는 것은.

 

마침 이 책을 다 읽은 날, 친구의 전시회에 가게 되었다. 그는 뫼비우스 형태의 촛대를 도예로 만들어 전시를 하고 있었다. 내 손바닥 만한 뫼비우스 하나를 오래 들여다 본다. 제주도 여행 중에 가 보았던, 태곳적에 형성된 아주 오래된 바닷가 절벽 그 까마득한 높이를 바라 보고 있다는 기분으로. 벽을 타고 오르다 보면 어느 새 밖으로 나간다. 넓은 바다 혹은 우주의 하늘이 거기 있을 것이다. 달팽이가 짓는 집의 황금비율은 자기 안으로도 통하고 밖으로도 나아간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따뜻한 집이지만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집인 것이다.

 

내게는 도영이란 제자가 있다. 올해 열네 살의 소년이다. 녀석이 책도 많이 읽고 글을 잘 써서 요즘 만나기 드문 문학소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영의 가장 큰 관심사는 '곤충'이다. 진심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곤충의 생태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다. 이대로 자라면 생물학을 공부할 가능성이 높다.(아직 어리지만 그만큼 집중력이 강한 아이다.) 도영은 방과후수업에도 내가 진행하는 '청소년인문학토론반'에 들어와서 그의 인문학적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과학과 문학이 온몸으로 만나는 소년이다. 나는 개학하고 우리 아이들이 중2로 올라가는 종업식날 도영에게 이 '달팽이 안단테'를 선물하려 한다. "훗날, 도영이 이토록 과학적이면서도 자연을 성찰하는 철학을 담은 아름다운 글을 쓰게 되리라고 믿는다. - 풀꽃선생님이-" 라고 써서 줘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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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꼭 써야 할까? - 십대를 위한 폭력의 심리학 사계절 지식소설 3
이남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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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느낌이 나는 건 왜였을까? 아무튼 재미있게 읽었다. 학교에서 접할 수 있는 폭력적인 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가진 사람으로서 정말 흥미가 가는 책이었다. 우리 학교에는 이렇게 교사에게 4가지 없이 굴 정도로 막돼 먹은 녀석은 별로 없었다. 아니 없진 않다. 기간제 교사나 강사, 아주 젊거나 나이가 많은 선생님께 무례를 범하는 녀석들이 있긴 하다. 또, 일반적으로 선생님 앞에서는 고분고분한 척해도 교실에 들어가 약한 아이들을 대할 땐 악마 못지 않은 녀석들이 사실 많은 현실이다.

 

사실 이 책을 내년 학급문고에 꽂아둘 요량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읽으면서 학생들보다는 교사들에게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주인공인 종훈이는 요즘 신문에 많이 나오는 학교폭력 가해자이다., 학교 1짱으로 학교 생활 제대로 하지 않고 아이들 괴롭히면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는 아이다. 왕따 피해자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을 토로하는 책, 어떻게 그들의 상처를 감쌀까를 거론하는 책은 가끔 있었다.(사실, 그토록 많은 아이들이 왕따에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데 비하면 나온 책은 매우 적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가해자 입장에서 그 속을 들여다 보는 책은 거의 없었다. 그런 면이 이 책의 미덕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 학교폭력을 일으킨 아이들을 감옥으로 보내 극한 처벌을 하자고 여론몰이를 하는 모습은 심히 우려스럽다. 내가 중학교 선생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그런 가해자들도 사실은 보듬어 안고 가야 하는 우리의 아이들이다. 그들을 두둔하자는 말이 아니고 그렇게 못된 행동을 하게 된 데에는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 그 아이들의 상처가 폭력으로 왜곡되어 나타났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아이들은 우리가 범죄자로 낙인 찍어 어디론가 버릴 아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다. 인터넷 댓글에 가해학생들을 죽이라는 둥, 자기가 피해자 부모라면 낫 가지고 다니면서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둥 거친 말들이 난무한다. 그런 댓글을 다는 자들의 자식들이 학교에서 폭력을 행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학교에서도 가해학생의 부모와 상담을 하면 자기 아이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축소하려 들고 반대로 피해를 보았을 때(대개 가해자와 피해자가 맞물려 있는 경우가 많다.)는 피해보상을 악착같이 받아내려 들거나 심지어 가해학생을 직접 손찌검하려 드는 경우가 많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세상이 우리 아이들을 학교폭력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종훈이도 그 중 하나다. 얌전하게 '짜져' 지내야 했던 종훈이 어느 날 갑자기 신체적 성장을 겪으면서 그 동안 억눌렸던 감정이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은 결코 소설적 비약이 아니다. 왕따를 오래 당하는 아이들은 그 분노의 감정이 안에 내재되어 있어 또한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괴성을 지르거나 울부짖거나, 힘이 약한 대신 샤프 같은 것으로 주변 아이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또한 가해 학생들도 또 다른 자신의 조직에서는 더 강한 존재(선배나 더 힘 센 아이들)에게 피해를 당하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런 고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두 죽일 놈 취급을 해서야 학교 폭력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책 속의 종훈이는 행운아다. 인생의 멘토를 만났다. 그는 지혜롭고 힘도 센 태껸 사범이다. 몸의 논리도 잘 알고 아이들 심리도 잘 읽는 사람이다. 올바른 가치관까지 지닌 사람이다. 자기 자신이 폭력의 세계를 극복한 경험이 있어 더더욱 완벽한 지도자 노릇을 할 수 있다. 후기에 보니 종훈이의 실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저자의 제자가 있었다니 이 책의 진정성이 더해진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이렇게 정신적인 지도자나 따스한 보호자를 만날 수는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책을 많은 교사들, 어른들이 읽고 어떤 아이인가의 '사범님'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참 감사할 일이다.

 

책은 참 잘 쓰여졌다. 소설적 구성도 그렇지만 (정말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 - 놀이터에서 무리지어 다툼이 일어난다든지 온라인 상에서 성적인 부당거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든지, 교실에서 물고 물리는 관계가 된다든지 등등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런 일들을 벌이는 아이들 심리를 제대로 읽고 있다. 그에 대한 대처 방안도 매우 흥미롭다. 자기 위시 감정을 스스로 알아채도록 하기 위해 "청소년이 인터넷에 폭력 동영상을 올리는 이유 알아내기' 과제를 내준다. 또한 아무리 책 읽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밖에 없는 두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우상의 눈물'(실제로 내가 수업 시간에 활용하는 소설들이다. 인물의 심리, 성격 파악, 학교 폭력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실마리 제공, 사회 구조적 문제, 역사적 안목 기르기까지,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아이들 입으로 술술 쏟아내게 만드는 소설들이다.)을 읽게 하고 토론하게 한다. 사범의 태도는 소설 내용을 요약해 주거나 그러므로 너희는 어떠해야 한다는 훈계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진정한 '폭력의 폭력성'을 종훈이 스스로 깨닫게 한다.

 

아이들은 인정받고 싶고 과시하고 싶어서 일진짓을 하곤 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깨닫는 순간 참으로 부끄러워한다. 사춘기 아이들이 그 시기를 벗어나면 '후까지' 잡고 다녔던 그 시절이 얼마나 유치했는지를 깨닫게 되는 이치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당시에는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스스로 깨닫지는 못한다. 그걸 깨우쳐 주는 것이 능력 있는 교사, 부모, 지도자의 몫일 것이다. 또한 폭력이 얼마나 사람을 (남도, 자신도) 망가뜨리는지도 역시 말로써는 깨달아지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폭력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 그걸 아이가 스스로 해내도록 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렇게 강력한 폭력의 굴레에 빠졌던 아이를 단번에 구제해 본 경험이 없다. 나의 방식은, 오래 지켜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가 겪은 일, 한 일을 숨기지 않고 말하게 하는 방식이다. 외롭고 힘들 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믿어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사실 현장에서 교사들이 할 수 있는 더 이상의 방법도 없다. 이 책 속의 사범은 지혜로운 사람이기도 했지만 사실 아이를 제압할 만큼(남자 아이들이 혹하는 가장 큰 매력인 '무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여자의 몸으로 20년 넘게 남자중학생들만 가르쳐 오면서 때론 무력으로 아이들을 제압할 수 있는 젊은 남자교사가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생명의 원천인 물처럼, 따스한 햇살처럼, 대지처럼, 영원한 모성으로 아이들의 눈물을 받아내는 것이 내 방식이다. 세상엔 아버지도 있고 어머니도 있어야 하니까 이 세상 모든 어른들이 그렇게 아이들을 지켜 보아 준다면 학교폭력도 눅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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