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안단테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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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냥 병석에서 삶을 고즈넉히 관조하는 수필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그래, 겨울만 되면 쓸쓸한 지옥이 되는 내 마음에 맑은 바람같은, 시같은 그 무엇이 필요하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뭔가 무게감 있고 공부가 되는 것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이 책을 읽을 당위성을 부여하며 읽었다. (읽고 있는 여러 책 중에서 제일 가볍게 손이 가더라는 변명을 이렇게 해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병, 도대체 뭘까 싶은 그 병 때문에 달팽이를 깊이깊이 들여다 보게 된다. 생명을 사랑하게 되고 생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달팽이를 관찰하면서 조금은 병의 시름을 잊고....

그런데 아니다. 이 책은 그런 관조적인 달달한 인생에세이가 아니었다. 깊은 사랑만이 해낼 수 있는 관찰과 탐구의 끝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과학서적이냐?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문장과 풍경들이 거기 있다. 달팽이가 사는 작은 유리 상자 안의 세상도, 베일리가 원래 살던 숲근처 시골 집도,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참 아름답다.

 

나는 풀꽃이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지만 누차 말하듯 '내가 풀꽃이다, 내가 풀꽃처럼 곱다, 풀꽃처럼 아름답게 살겠노라'는 뜻이 아니다. 풀꽃 같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뜻이다.  스스로 나는 전생에 이끼였을 거라고 자주 생각한다.(좀 먼먼 전생이었겠지만) 한여름 장마철의 습기를 즐길 만큼, 숲속 계곡 물거품이 만들어내는 이온 냄새와 비 온 뒤의 땅 냄새를 즐길 만큼 건조한 걸 못 참는 나, 숲의 청정 상태를 알려주는 지표식물인 이끼에 스스로 비유한다. 사람들은 그 미끌한 몸짓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끼라는 존재가 사실은 깨끗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발길 닿지 않는 숲 계곡에 바위에 깔린 비단이끼의 모습... 가끔 나는 나의 존재가 한없이 낮아져 이끼 같다고 느낀다.

 

이 책은 뒤로 갈수록 감동적이다.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어서 감동적인 게 아니라 생명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자꾸 보여서 그렇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를 잊게 되는  게 흔한 일인데 자꾸 달팽이를 바라보고 있는 작가를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창 속에 창 속에 또 어떤 장면을 보듯이, 이야기 속에 이야기 속에 또 어떤 이야기를 보듯이, 우주의 시선으로 지구를, 지구 안의 어떤 대륙을, 그 안에 사는 어떤 사람을, 그의 침상과 머리맡의 유리상자를, 그 안에 사는 달팽이를, 달팽이의 느린 움직임 속의 성찰을 따라가둣 그렇게 읽게 된다. 무슨 힘일까. 한없이 안으로 돌돌 말려 들어가는 이 지독히 미시적인 세계가 우주적 성찰에 맞닿아 있는 것은.

 

마침 이 책을 다 읽은 날, 친구의 전시회에 가게 되었다. 그는 뫼비우스 형태의 촛대를 도예로 만들어 전시를 하고 있었다. 내 손바닥 만한 뫼비우스 하나를 오래 들여다 본다. 제주도 여행 중에 가 보았던, 태곳적에 형성된 아주 오래된 바닷가 절벽 그 까마득한 높이를 바라 보고 있다는 기분으로. 벽을 타고 오르다 보면 어느 새 밖으로 나간다. 넓은 바다 혹은 우주의 하늘이 거기 있을 것이다. 달팽이가 짓는 집의 황금비율은 자기 안으로도 통하고 밖으로도 나아간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따뜻한 집이지만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집인 것이다.

 

내게는 도영이란 제자가 있다. 올해 열네 살의 소년이다. 녀석이 책도 많이 읽고 글을 잘 써서 요즘 만나기 드문 문학소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영의 가장 큰 관심사는 '곤충'이다. 진심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곤충의 생태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다. 이대로 자라면 생물학을 공부할 가능성이 높다.(아직 어리지만 그만큼 집중력이 강한 아이다.) 도영은 방과후수업에도 내가 진행하는 '청소년인문학토론반'에 들어와서 그의 인문학적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과학과 문학이 온몸으로 만나는 소년이다. 나는 개학하고 우리 아이들이 중2로 올라가는 종업식날 도영에게 이 '달팽이 안단테'를 선물하려 한다. "훗날, 도영이 이토록 과학적이면서도 자연을 성찰하는 철학을 담은 아름다운 글을 쓰게 되리라고 믿는다. - 풀꽃선생님이-" 라고 써서 줘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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