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사드 카하트 지음, 정영목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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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놓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책의 분위기가 좋아서 샀다. 읽기 전까지 설레는 몇 안 되는 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무게가 있고 의미가 있는 책이 아니면 가끔 감성을 다스리는 책을 읽어야 모자라는 비타민과 무기질을 섭취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글쓴이는 파리에서 다시피아노 한 대와 조우하기를 바라 찾아 헤매다가 어느 뒷골목에서 피아노 공방을 만난다. 그 과정이 아름답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혼자 한가롭게 파리 뒷골목을 거닐다 피아노 소리를 듣고 공방에 들어가게 된다... 비록 짧은 여행이었지만 남편과 파리의 시떼 섬을 거닐었던 기억이 난다. 관광객이 아니라 생활인으로 파리를 살아간다면 어떤 기분일까....

공방에서 만나는 피아노의 장인 이야기는 낯설다. 우리에게 피아노는 연주가의 것이 아니었던가. ‘기술자가 피아노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 것인가, 라는 편견... 자신이 전문 연주가가 아닌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 집에 피아노 조율을 하러 온 분이 간단한 연주를 마치고 피아노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지 말고 늘 청결하게 다루어 줄 것을 부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 섬세한 감각과 애정이 없다면 단지 기술만 가지고 그 일이 가능할 리 없다.

 

나 역시 국민학교 4학년 때 몇 달을 배우고 바이엘 끝날 무렵 피아노를 때려치운 경험이 있다. 자력으로 노래 반주를 익혔으니 아주 음감이 없는 것은 아닐 터인데(중학교 때, 우리 삼남매 중어머니가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 사들인 슘멜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아이였다. 물론 고향의 봄수준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나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피아노를 다시 배우리라 생각했다.

직장을 옮기는 와중에 큰 아이를 아직 시댁에서 돌보고 있던 시기가 있었다. 남편이 퇴근하지 않은 저녁 시간에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다. 저녁 7시면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 비어 있는 연습실 열쇠를 주면서 선생님은 맘껏 연습하고 가라고 했다. 밤 열시까지 연습했어도 진도는 체르니 100번을 마치지 못했지만 그 혼자만의 시간은 아련하게 귀했다. 곧 둘째가 들어서고 첫 아이도 데려오느라 다음 책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피아노 강습은 그만두었고, 그때 실력이 늘긴 한 건지 긴가 민가 하지만 그 약 석 달 정도의 혼자만의 연습시간은 참 행복했다.

 

글쓴이가 피아노를 배우던 연습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건물 등 사이에 작은 광장 같은(우리의 마당 같은) 공간이 보인다고 했다. 군데군데 보이는 유럽의 풍경이 익숙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남의 것에 대한 동경이라니. 그런가 하면 이 책에는 그럼 문학적인 풍경 말고도 피아노에 대한, 피아노의 역사에 대한, 피아노의 기능적인 면에 대한 이야기가 묘하게 짜여져 있다. 전문지식이 없긴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장인들의 숨결이나 피아노를 다루는 사람들의 애정이 잘 읽힌다. ‘영창 피아노이름도 나온다. 지금 우리 집에 있는 피아노도 영창이다. 시집 올 때 엄마가 사주신 피아노. 태어날 아이가 치게 될 거라던 그 피아노를 정말로 우리 아이들이 즐겨 치고 있다. 아들이 치는 월광과 딸이 치는 플라워 댄스로 우리는 자주 행복해 한다. 그러고 보면 고급스럽고 우아하기만 했지 고향의 봄선구자를 넘어선 연주자를 만나지 못했던 1980년대의 그 슘멜은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그립고 미안하기도 하다. 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어린 귀에도 깊은 데서 울리는 듯 고상하던 그 까만 피아노의 소리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집이 어려워졌기도 했고 아무도 치는 이 없어 결국 어디론가 팔려갔던, 마당있는 집의 추억과 함께 사라졌던 우리 어린 날의 까만 슘멜... 이 책은 내게 그런 추억도 되살려 주었다. 감성의 비타민은 충분히 채워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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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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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아이들의 가장 큰 과제는 ‘학업’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아이들에게 진정한 배움일까. 사실 부모는 이것이 진정한 배움이라, 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아닐지 모른다. 그런 것은 ‘스승에게 가서 배워야겠지.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부모는 스승을 대신하여 배움이란 건 이런 것이다, 에서 출발하여 배움의 자세까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려 한다. 대부분은 잘못된 가르침일 뿐이고, 부모가 가르치지 않아도 될 그것들을 가르치게 되는 현실은 공교육의 부실함과 학교 선생들의 책임 방기에서 온 것이 사실이란 게 안타깝긴 하지만 말이다.

 

손으로 익히는 일이든 글자를 익히는 일이든, 진정한 공부는 본인의 열망에서 비롯될 때 가장 빛을 발한다. <무지한 스승>에 보면 서로의 말을 알지 못하는 프랑스의 교사 자코토와 프랑스어를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의 학생들이 만난다. 학생들은 결국 대역판을 놓고 스스로 프랑스어를 깨우쳐 간다. 이 책을 보면서 <더 리더>를 사전을 놓고 읽어가던 내 모습이 떠오르긴 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과연 저런 과정이 가능할까, 에는 회의가 들었다. 그들에게는 그렇고 공부해야 하는 동기가 없는 것이다.

딸 아이 이야기를 하자. 6학년때부터 날라리 경계선에서 자그마치 4,5년을 놀기만 하다가 급기야 고2 봄, 자퇴를 할까까지 고민을 하던 아이가 여름방학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대학을 꼭 가고 싶다고 한다. 아이는 강남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쌓아올린 과정을 따라잡기 위해 맨땅에 헤딩을 한다. 전자사전에서 영어발음을 찾아듣는 과정은 느리고 답답했다. 저렇게 공부를 하다간 재수하기 딱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저것은 진정 공부이다. 목표가 왜곡되었든 어쨌든, 저렇게 머릿속에 넣는 지식들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든 어떻든. 그리고 아이는 자기 몸으로 스스로 깨치고 나온 알껍질의 아픔을 생생히 기억하여,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겼을 때 그렇게 부딪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딸아이가 자랑스럽다.

 

핀란드가 어떻고 미국교육이 어떻고, 지금 우리 교육의 탈출구를 찾기 위한 많은 대안을 찾는다. 어떤 방식을 들여와도 이 땅에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나만 잘 먹고 잘사는 것에 불과한 이상, 어떤 방식도 실패하고 만다. 다시 <무지한 스승>으로 가면 이런 구절이 있다.

 

만일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고 서로 측은히 여기는 평등한 능력이 없다면, 사람들은 곧 서로에게 낯선 존재가 될 것이다. .. 이 역량을 발휘하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모든 쾌락 중 가장 달콤하여 무리의 모든 욕구 중 가장 절박한 것이다.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전제되고, 거기서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존중받는 세상이 아닌 머리와 글로 하는 공부만을 성공의 열쇠로 삼는 세상에서는 진정한 공부가 가능하지 않다.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은 두레활동을 싫어한다. 특히 수행평가를 두레로 하면 많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많이 인용되는 이야기 중에 인디언의 공부방식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미국 사회에 겨우 편입이 된 체로키 족 아이들이, 시험을 본다 하니 자기들끼리 책상을 붙여 앉더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문제를 해결하라’ 할 때는 항상 ‘함께 힘을 합쳐’ 해왔다는 것이다. 평가의 개념 자체가 다르다. 국어 수행평가는 대개 뭔가를 해내야 하는 것인데 그 때 능력보다는 해내는 과정, 과정에서의 성취, 그리고 성실성을 본다. 그러니 수행평가 아닌가? 이미 많은 것을 습득한 아이들은 그 수행평가도 대체로 잘하긴 한다. 그러나 의외의 능력을 발휘하는 아이들이 있이 이 수행평가는 의미가 있다. 독해능력을 떨어지지만 토론을 잘 하는 아이, 토론을 주도하지는 않지만 중재능력이 뛰어난 아이, 시험은 못 보지만 글은 잘 쓰는 아이, 뭔가를 잘 만드는 아이...

두레가 공동 점수를 받으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이가 누구냐에 따라 점수 편차가 심하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폭탄인 아이가 자기 두레에 들러오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경우도 봤다. 그 아이들에게 먼저, 이 과정 자체가 진정한 공부임을 설득시키는 일에 주력한다. 공동으로 행하는 수행의 과정이 능력 있는 아이들에게 고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리더십을 고양시키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들이 진정 이 사회의 리더가 될 만한 아이들이라면 열심히 하지 않으려는 친구, 능력이 부치는 친구를 만나더라도 그들에게 맞는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독려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진정한 능력은 뭔가를 잘 만들고 발표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는 능력일 것이다.

 

 

고속도로 하이패스가 도입되면서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반면 독일에서는 일부러 지하철 등에 매표창구를 자동화하지 않는다고 한단다. 일정 수준 인간이 일을 해야 할 자리를 남겨두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한단다. 일자리 창출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리라. 랑시에르는 평등한 공동체라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하냐는 주장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 ‘어쩌면’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그 의견을 믿는 자들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쩌면‘ 덕분에 인간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끊임없이 위와 같은 문제제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식채널의 <공부 못하는 나라> 독일은 공부 좀 못하면 어떤가, 묻는다. 학업성적이 높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그럼 잘 사는 나라를 왜 만들어야 하는가? 행복하려고? 그래서 대학진학률이 높고 아이들 학업성적이 높은 우리나라는 행복한가? 아니, 잘 살기는 하는가 말이다. 결국은 몇몇 소수의 잘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우리 모두 놀아나는 것이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나라. 공부 잘하는 아이도, 중간인 아이도, 못하는 아이도 모두 불행한 나라. 여기서 대입시를 위해 매진하라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교육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엄마들이 이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이들이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막아줘야 하고, 적어도 엄마가 스스로 아이가 지치도록 채찍질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사실 좋은 세상이라면 엄마들이 자기 자식들만 잘 갈무리하면 사회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막 돌아가고 있다면 내 자식만 잘 자라도록 바라는 모성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권력이나 힘이란 게 진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휘둘러지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권력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자들이 권력을 지녔다고 ‘믿어지는 자’에 대한 두려움과 부러움을 가질 때, 즉 환상 속에서 극대화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말하자면 교육과 권력의 상관관계가 그런 환상 속의 두려움으로 극대화되고 있는 사회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열패감은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 근원에는 가진 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퍼트린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공포에 우리 모두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성은 힘이 세다고 하지만, 자기 자식을 살리기 위해 진정 수퍼맨의 파워를 발산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모성이라면 그 힘을, 자기 자식을 채찍질하고 다른 자식들을 밀어내는 데 써서는 안 된다. 우리 머리 위를 뒤덮은 거짓 이데롤로기를 걷어내는 데에 그 모성파워를 써야 할 것이다. 평등의 공동체, 나눔으로써 배우는 세상, 무지해서 부끄러운 게 아니라 지식을 잘못 써먹어서 부끄러운 세상을 인식하는 그런 올바른 배움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에 써야 그것이 진정한 모성애인 것이다.

 

문제는 식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스스로 지능에서 열등하다고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그들이 빠져 있던 늪에서 빼내는 것이다. 무지의 늪이 아니라 자기 무시의 늪, 이성적 피조물로서의 자기에 대한 즉자적 무시의 늪에서 말이다. 문제는 해방된 인간들과 해방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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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라 다른 교육
하승우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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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다. 이렇게 좋은 책이, 출판 마케팅 시스템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교육공동체 벗에서 나온 책들이 좋은 책이 많지만 서점에 판매대에 깔리지 않고 광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알음알음으로 팔리고 읽힌다. 교육공동체 벗의 정신은, 작은 모임들이 모이고 모여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역량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의식적으로 상업적 판매에 매진하지 않는다.

 

'벗'의 책들은 동료교사들에게 자주 선물하기도 하고 독서토론회에서 읽기도 한다. 그러면 대개의 반응이 이렇게 재미 있으면서도 의미 있는 책 어디 더 없느냐 한다. <생각해 봤어?><외면하지 않을 권리>가 바로 그런 책들이다. 특히 교사들이라면 <불온한 교사 양성과정>의 시리즈는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1권에 저자로 (사실은 강좌를 진행한 내용으로 책을 엮은 것이므로 강사로) 참여한 나도 책을 받아본 후 다른 저자들의 글을 읽으며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제목이 선정(?)적이어서 그런지 책은 생각만큼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그 2탄인 <상상하라, 다른 교육>은 제목도 참 멋지다.

 

교육공동체 벗은 작금의 교육이 더 이상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불가능'해졌다고 선언했다. 우린 망했다, 끝! 이런 선언이 아니다. 병든 환자에게 냉철하고 엄혹하게 현재의 상태를 알리는 것이다.아니다. 누가 환자고 누가 알린단 말인가. 우리 스스로가, 내 스스로가 나는 아파서 죽을 지경이라는 것을 냉정하게 말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딛고 일어날 수 없으니까. 여태껏 많은 언론과 교육관료들과 교육학자들이 교육이 문제가 많다고 말했지만 교사들과 학부모들, 청년들 입으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어설픈 문제제기와 지적질은 혀 끌끌차고 돌아서 버리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묻는다.

교육불가능이라고?

이제 희망은 없다는 말인가?

희망을 불어넣어 주어도 겨우 일으켜 세울까 말까 한 지금 시점에서 불가능이라니!

대안은 없단 말인가?

라고. 그리고 그 불가능의 선언이 불편한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외면하고 싶어한다.

용기가 있어야 이 단호한 선언에 귀를 닫지 않는다. 용기란 게, 꼭 앞장서 싸울 때만 필요한 게 아니다. 듣고 싶지 않은 말도 들어야 하고, 사랑하는 이의 몰락도 지켜봐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처절한 인정을 딛고서야 뭔가 하나라도 한다.

 

<상상하라 다른 교육>은 그렇게 폐허에서 조금씩 돋아나는 새싹 같은 것이다. 우리는 아주 작은 일도 할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중학교 교사인 내가, 가장 많이 아픈 우리 중등교육 현장에 선 내가 내일모레 죽을지라도 여기서 내 아이들과 하루하루를 버틸 수밖에 없다면 뭐라도 해야 한다. 청소라도 해야 하고 앉아서 우는 아이를 달래기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필자들 중에서도 나와 같은 교사인 이영주, 김수현 선생 같은 이들의 글에 많이 공감했다. 교사들 중에 똑똑한 이들은 학교를 떠난다. 더 의미 있는 공부를 하러, 더 영향력 있는 운동을 하러. 그래서 아무도 남지 않았을까? 아니다. 학교에는, 평범하지만 끊임없이 고민하는 교사들이 무수히 많다. 무기력하지만 싸울 의지를 버리지 않은 날달걀 같은 이들이 아직 꽤 있다. 그들은 '저처럼 평범한 교사가 뭘 많이 알아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고 겸허하게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그런 이야기에 많이 공감이 된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려 한다. 내가 학교에서 겪은 일들, 해낸 일들이 비록 시시한 것들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통해 서로 위안을 받는다. 나 혼자만 그런 거 아니었구나, 하고. 그래서 나도 자꾸 이야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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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 동양고전총서 12
묵적 / 홍익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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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의 ‘강의’에서 처음 묵자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제자백가 중 한 이름으로 들었을 뿐이지, 묵자가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없었다. 하지만 ‘강의에는 묵자를 ‘노동자 계급’의 한 지도자 , 혹은 어쩌면 지도자 1명이 아닌 지도이념의 현현으로도 해석을 했다. 또한 묵가 사상은 ‘노동중심 사상’으로 해석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로는 묵(墨)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일하는 사람의 검은 얼굴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지배계급의 최선호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유가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근거가 된다. 그래서 언젠가 제대로 원본(이 아니라 완역본)으로 읽겠노라 결심하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원본은 아니고 해석본이긴 하지만 말이다.

 

묵자의 사상은 ‘겸애’로 집약된다. 사상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들이 정치를 만나면 권력에 복무한다. 권력에 무릎 꿇지 않고 약자에게 봉사하는 사상은 없을까? 마르크스가 그런 역할을 하려 했다면 동양에서 묵자가 그것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고 싶어하는 것과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이 일치하지만은 않는다. 백성의 입장에서 혹은 또 다른 ‘올바른 권력 지향’의 입장에서 기득권에 맞섰던 사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나중에 오히려 권력자에게 악용된 사상이 얼마나 많은가. 읽을 때마다 헷갈리는 마키아벨리도 그렇다. 그람시는 마키아벨리가 결코 군주를 위한 군주론을 쓴 게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도 많은 권력자들이 금과옥조로 삼고 있고 글을 읽어보아도 군주의 통치법에 대한 코칭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그 반대의 목적을 분명히 밝혔더라도 권력에 이용되었을 게 분명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드문 피지배자의 사상으로서 묵자의 사상은 참으로 귀하기 짝이 없다. 교과서에서는 단 한 줄, 아니 단 한 구절로 언급되고 말지만 말이다. 그러나 책을 읽은 감흥이 감격스럽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군왕이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그야말로 ‘교과서적으로’ 나열한 데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로운 자를 가까이 하라 하고 사치하지 말라 하고 공평한 정치를 하라 한다. 간사한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쓴소리를 귀담아 들으라 한다. 물론 때로는 마키아벨리처럼 그리 하지 않으면 망하고 마는 다른 군왕의 예를 들어가며 협박(?)을 하기도 한다. 통치의 기술로서도, 군주의 도덕률로서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사상에서 신선함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수천 년 전, 민주주의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먼 봉건세상에서 노예나 다름없었던 백성에 대한 겸애를 주장했다는 것이 신선한 것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미 수천 년 전에 누군가(혹은 누군가들)이 주장했고 간절히 바랐던 세상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유가를 비판하는 부분이 신랄하고 참신해서 재미있었다. 공자를 비판하는 일도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서도 예수를 비판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불편한 일이다. 근본적으로 공자사상이 조선 이후 우리 역사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고 믿는 사람도 많다. 공부를 안 해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수긍이 되는 점이 많다. 여태까지는 유교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는 데 이용해 온 노론의 권력층이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근본적으로 유교는 지배계층에게 유리한 사상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 사이에 층하를 두고 그들 사이의 계율를 지켜야 도덕적인 것으로 강요하는 것이 충이요 효란 이름으로 미화되었다. 묵자는 그것을 대놓고 비판한다. 제사나 예악에 대한 비판은 형식적인 부분 같지만 중심에 놓고 보는 사람이 달라서 생긴 사상의 차이이다. 묵자가 ‘별애(차별)’하지 말라고 갈파하는 것은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전쟁을 반대하고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은 어찌 보면 참으로 단순하고 인간적인 생각 아닌가? 하긴 지금 세상에도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사람들, 노동은 ‘우리’를 위해 누군가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나 신성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당연함이 당연하지도 않은 세상인 게다.

 

누구나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거지만 나 역시 묵자에서 다음 구절이 눈에 띄었다.

 

현명해지는 방법 - 힘이 있는 사람은 남을 돕는 데 힘쓰고, 재물이 있는 사람은 남에게 나누어 주는 데 힘쓰고, 올바른 도를 지닌 사람은 남을 가르치는 데 힘쓰면 된다.

 

나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과연 올바른 도를 지닌 사람인가?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책이 주는 지식의 축적보다 나에겐 더 큰 울림의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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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이처럼 - 아이, 엄마, 가족이 모두 행복한 프랑스식 육아
파멜라 드러커맨 지음, 이주혜 옮김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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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의 육아법을 알 수 있었던 점이 아니다. 미국엄마들이 아이의 ‘성취’에 그토록 관심이 많다는 점에서 한국엄마들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정작 저자는 육아법의 초점을 성취에 맞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이의 생활습관에 초점을 두고 바라보는 그 안목이 없었다면 프랑스 엄마들의 육아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 세 가지는 첫째, 우리나라 엄마들의 조급한 육아태도가 놀랍도록 미국과 닮았다는 것, 둘째, 프랑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엄격함 속에서 민주적인 열망과 관용적 태도, 사회의 변혁이라는 과제를 함께 해결해 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 셋째, 프랑스의 육아법은 곧 프랑스 전체의 교육과 복지 정책을 반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한국이 미국을 롤모델로 삼아 자의든 타의든,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전사회적으로 미국화가 되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외형적인 교육제도뿐 아니라 자녀 양육의 태도까지도 쏙 빼닮았다는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는 미국화의 역사가 참으로 효과를 제대로 보고 있다는 뜻인가 싶어 씁쓸하다. 80년대에는 종종 대학가에서 ‘신식민지’라는 표현을 썼었다. 미국의 영향력은 미국과 우리의 관계를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엄청났고 지금도 그러하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의 자주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덮으려는 일종의 “뺑끼칠”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80년 광주를 정점으로 미국의 제국주의는 조금씩이나마 극복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식민주의’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보다 더 무섭게 교육에 파고 들어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교육제도가 아닌 자녀 양육이라고 하면 더욱 무섭다. 적어도 미국학교 사회에서는 우리 나라의 사교육이나 엄마들 치맛바람은 없으며 학부모 회의도 훨씬 건강하게 돌아간다고 들었지만 기본적으로 자기 아이를 기죽이지 않으면서 아이 중심으로 생각하고 아이를 자발적으로가 아니라 자유분방하게 키워 청소년 인성교육에 많은 문제를 확대시킨다는 점과 아이의 인성이나 철학을 고민하기보다 성취를 고민하고 자본주의적 욕망의 대상으로서 키운다는 점에서 우리는 굉장히 미국화된 것이 분명하다. 돌아보면 우리의 30년 전은 적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자기 자녀가 돈을 많이 벌기를 바라더라도 적어도 훈육을 할 때는 인성 바른 아이가 되라고 먼저 말하고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가정교육조차도 드물어지는 세상이 되었으니.

 

프랑스 가정교육이 엄격하다는 것이 그들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진보성과 모순되는 듯이 느껴지는 부분이 분명 있다. 우리 나라의 소위 386 세대 부모들이 저지른 잘못 중에는 ‘민주적인 양육’이라는 미명하에 자녀들의 의사를 존중하다 못해 과보호하는 현상을 초래한 것이 있다. 물론 그 방식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기보다 사회 전체가 성장과 경쟁을 추구하는데 민주적 의사존중 방식을 가정의 자녀양육태도로 선택하면서 아이들이 혼란을 겪은 부분도 있다. 또한 많은 가정에서 정치의식과 상관없이 이전 부모세대(대개는 한국전쟁 직후의 보수성으로 자녀를 억압하던) 에 대한 반발로 자기 자녀에게 많은 자유와 기회를 주려했지만 방식에서는 별 고민없이 자녀들을 분방하게 열어놓았던 지금의 4,50대 부모들의 실패일 수도 있다.

하여간 우리가 그런 사회적, 가정적 교육의 실패와 정치와 교육의 모순된 혼란을 겪는데 비해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대체로 진보적이면서 가정교육에서는 대체로 보수적인 듯이 보이는 모순을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가정에서 부모가 너무 엄격하면 아이들이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오히려 행동거지의 틀‘(카드르)를 엄격하게 지워주고 사회정치적으로는 자유로운 발언의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여기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 흔한 말로, 사실은 보수정치권에 많이 악용되는 구호로써, ’자율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곡해만 하지 않는다면 엄격할 때 엄격하게 질서와 배려를 가르쳐야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견해를 가져본다.

나 역시 다른 교사나 부모에 비하면 너그러운 양육 교육태도를 지닌 사람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엄한 교사나 부모는 아니지만 아이들이 남을 배려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히 따지고 지도하려 애쓴다. 나의 교육방식은 정치의식에 비하면 좀 보수적인 것 같기도 하다. 가령 아이의 복장을 단정히 하기를 요구하고 어른에게 공손하기를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하지만 대체로 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을 존중하는 것과 훈육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공교육이라는 틀 자체가 가지고 있는 비민주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교육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입장인데 이런 모순 속에서 나는 어떻게 공교육의 질서 속에 아이들이 자본주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으면서도 배려의 규칙을 배우게 할까를 고민한다. 

 

어린 자녀의 양육이 다 끝난 나에게 이 책은 별 재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비록 탁아소나 유치원 수준의 언급에 불과하긴 해도 프랑스의 교육제도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극복이 되었다. 학교급식과 교사의 전문성은 그만큼 프랑스 사회가 교육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교사는 그다지 위상이 높은 직업이 아닌 것으로 안다. 교사가 전문성이 떨어지고 자존심이 떨어지는 사회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학교 시설이 다른 어떤 건물보다 후진 나라에서 교육이 잘 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나라는 아직도 교육후진국이 맞다. 좁고 더러운 교실에서 40명 가까운 아이들이 몰려 있고 비싸고 질낮은 밥을 먹으며 자존감이 낮은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는다. 초중등 교사들을 흔히 ‘방학과 철밥통’을 누리는 철면피들이라고 일반인들은 생각하지만 방학과 연금이 없다면 그리 교단에 서고 싶을 이유가 별로 없는 게 대한민국 교실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만큼 교육적 보람이나 전문가적 자존심을 지킬 수 없을 만큼 무너진 게 공교육 현장이다. 교사들의 잘못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시스템의 잘못이 더 크다.

누구라도 교무실에 와서 일년만 교사 노릇을 해보라. 아이들 다루기 힘든 것을 떠나 잘못된 관행과 무의미한 행정업무에 무너지는 수업을 온몸으로 아프게 겪을 것이다. 그것을 고쳐보려는 노력은 처절하게 짓밟힌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학교를 이렇게 망친 주범들은 모든 잘못을 교사들 개개인의 잘못으로 여기게끔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 교사들이 잘못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교사들이 잘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무엇보다 시스템의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어야 할 전교조가 가장 욕을 먹어 싸다. 성과없는 노력을 20년이나 해온 세월이 야속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뒤에 대안도 없다는 점이다. 그게 문제라면 문제이지 교사 개개인의 무력함이나 비리는 제도가 개선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될 문제라고 본다. 프랑스 어린이집 교사들의 전문가적 자존심, 그에 대한 학부모들의 신뢰가 이 책에서 가장 부러웠던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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