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 - 동양고전총서 12
묵적 / 홍익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신영복 선생의 ‘강의’에서 처음 묵자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제자백가 중 한 이름으로 들었을 뿐이지, 묵자가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없었다. 하지만 ‘강의에는 묵자를 ‘노동자 계급’의 한 지도자 , 혹은 어쩌면 지도자 1명이 아닌 지도이념의 현현으로도 해석을 했다. 또한 묵가 사상은 ‘노동중심 사상’으로 해석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로는 묵(墨)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일하는 사람의 검은 얼굴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지배계급의 최선호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유가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근거가 된다. 그래서 언젠가 제대로 원본(이 아니라 완역본)으로 읽겠노라 결심하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원본은 아니고 해석본이긴 하지만 말이다.

 

묵자의 사상은 ‘겸애’로 집약된다. 사상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들이 정치를 만나면 권력에 복무한다. 권력에 무릎 꿇지 않고 약자에게 봉사하는 사상은 없을까? 마르크스가 그런 역할을 하려 했다면 동양에서 묵자가 그것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고 싶어하는 것과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이 일치하지만은 않는다. 백성의 입장에서 혹은 또 다른 ‘올바른 권력 지향’의 입장에서 기득권에 맞섰던 사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나중에 오히려 권력자에게 악용된 사상이 얼마나 많은가. 읽을 때마다 헷갈리는 마키아벨리도 그렇다. 그람시는 마키아벨리가 결코 군주를 위한 군주론을 쓴 게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도 많은 권력자들이 금과옥조로 삼고 있고 글을 읽어보아도 군주의 통치법에 대한 코칭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그 반대의 목적을 분명히 밝혔더라도 권력에 이용되었을 게 분명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드문 피지배자의 사상으로서 묵자의 사상은 참으로 귀하기 짝이 없다. 교과서에서는 단 한 줄, 아니 단 한 구절로 언급되고 말지만 말이다. 그러나 책을 읽은 감흥이 감격스럽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군왕이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그야말로 ‘교과서적으로’ 나열한 데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로운 자를 가까이 하라 하고 사치하지 말라 하고 공평한 정치를 하라 한다. 간사한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쓴소리를 귀담아 들으라 한다. 물론 때로는 마키아벨리처럼 그리 하지 않으면 망하고 마는 다른 군왕의 예를 들어가며 협박(?)을 하기도 한다. 통치의 기술로서도, 군주의 도덕률로서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사상에서 신선함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수천 년 전, 민주주의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먼 봉건세상에서 노예나 다름없었던 백성에 대한 겸애를 주장했다는 것이 신선한 것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미 수천 년 전에 누군가(혹은 누군가들)이 주장했고 간절히 바랐던 세상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유가를 비판하는 부분이 신랄하고 참신해서 재미있었다. 공자를 비판하는 일도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서도 예수를 비판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불편한 일이다. 근본적으로 공자사상이 조선 이후 우리 역사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고 믿는 사람도 많다. 공부를 안 해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수긍이 되는 점이 많다. 여태까지는 유교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는 데 이용해 온 노론의 권력층이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근본적으로 유교는 지배계층에게 유리한 사상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 사이에 층하를 두고 그들 사이의 계율를 지켜야 도덕적인 것으로 강요하는 것이 충이요 효란 이름으로 미화되었다. 묵자는 그것을 대놓고 비판한다. 제사나 예악에 대한 비판은 형식적인 부분 같지만 중심에 놓고 보는 사람이 달라서 생긴 사상의 차이이다. 묵자가 ‘별애(차별)’하지 말라고 갈파하는 것은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전쟁을 반대하고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은 어찌 보면 참으로 단순하고 인간적인 생각 아닌가? 하긴 지금 세상에도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사람들, 노동은 ‘우리’를 위해 누군가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나 신성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당연함이 당연하지도 않은 세상인 게다.

 

누구나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뛰어넘어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거지만 나 역시 묵자에서 다음 구절이 눈에 띄었다.

 

현명해지는 방법 - 힘이 있는 사람은 남을 돕는 데 힘쓰고, 재물이 있는 사람은 남에게 나누어 주는 데 힘쓰고, 올바른 도를 지닌 사람은 남을 가르치는 데 힘쓰면 된다.

 

나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과연 올바른 도를 지닌 사람인가?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책이 주는 지식의 축적보다 나에겐 더 큰 울림의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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