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아이처럼 - 아이, 엄마, 가족이 모두 행복한 프랑스식 육아
파멜라 드러커맨 지음, 이주혜 옮김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이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의 육아법을 알 수 있었던 점이 아니다. 미국엄마들이 아이의 ‘성취’에 그토록 관심이 많다는 점에서 한국엄마들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정작 저자는 육아법의 초점을 성취에 맞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이의 생활습관에 초점을 두고 바라보는 그 안목이 없었다면 프랑스 엄마들의 육아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 세 가지는 첫째, 우리나라 엄마들의 조급한 육아태도가 놀랍도록 미국과 닮았다는 것, 둘째, 프랑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엄격함 속에서 민주적인 열망과 관용적 태도, 사회의 변혁이라는 과제를 함께 해결해 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 셋째, 프랑스의 육아법은 곧 프랑스 전체의 교육과 복지 정책을 반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한국이 미국을 롤모델로 삼아 자의든 타의든,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전사회적으로 미국화가 되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외형적인 교육제도뿐 아니라 자녀 양육의 태도까지도 쏙 빼닮았다는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는 미국화의 역사가 참으로 효과를 제대로 보고 있다는 뜻인가 싶어 씁쓸하다. 80년대에는 종종 대학가에서 ‘신식민지’라는 표현을 썼었다. 미국의 영향력은 미국과 우리의 관계를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엄청났고 지금도 그러하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의 자주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덮으려는 일종의 “뺑끼칠”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80년 광주를 정점으로 미국의 제국주의는 조금씩이나마 극복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식민주의’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보다 더 무섭게 교육에 파고 들어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교육제도가 아닌 자녀 양육이라고 하면 더욱 무섭다. 적어도 미국학교 사회에서는 우리 나라의 사교육이나 엄마들 치맛바람은 없으며 학부모 회의도 훨씬 건강하게 돌아간다고 들었지만 기본적으로 자기 아이를 기죽이지 않으면서 아이 중심으로 생각하고 아이를 자발적으로가 아니라 자유분방하게 키워 청소년 인성교육에 많은 문제를 확대시킨다는 점과 아이의 인성이나 철학을 고민하기보다 성취를 고민하고 자본주의적 욕망의 대상으로서 키운다는 점에서 우리는 굉장히 미국화된 것이 분명하다. 돌아보면 우리의 30년 전은 적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자기 자녀가 돈을 많이 벌기를 바라더라도 적어도 훈육을 할 때는 인성 바른 아이가 되라고 먼저 말하고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가정교육조차도 드물어지는 세상이 되었으니.

 

프랑스 가정교육이 엄격하다는 것이 그들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진보성과 모순되는 듯이 느껴지는 부분이 분명 있다. 우리 나라의 소위 386 세대 부모들이 저지른 잘못 중에는 ‘민주적인 양육’이라는 미명하에 자녀들의 의사를 존중하다 못해 과보호하는 현상을 초래한 것이 있다. 물론 그 방식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기보다 사회 전체가 성장과 경쟁을 추구하는데 민주적 의사존중 방식을 가정의 자녀양육태도로 선택하면서 아이들이 혼란을 겪은 부분도 있다. 또한 많은 가정에서 정치의식과 상관없이 이전 부모세대(대개는 한국전쟁 직후의 보수성으로 자녀를 억압하던) 에 대한 반발로 자기 자녀에게 많은 자유와 기회를 주려했지만 방식에서는 별 고민없이 자녀들을 분방하게 열어놓았던 지금의 4,50대 부모들의 실패일 수도 있다.

하여간 우리가 그런 사회적, 가정적 교육의 실패와 정치와 교육의 모순된 혼란을 겪는데 비해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대체로 진보적이면서 가정교육에서는 대체로 보수적인 듯이 보이는 모순을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가정에서 부모가 너무 엄격하면 아이들이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오히려 행동거지의 틀‘(카드르)를 엄격하게 지워주고 사회정치적으로는 자유로운 발언의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여기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 흔한 말로, 사실은 보수정치권에 많이 악용되는 구호로써, ’자율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곡해만 하지 않는다면 엄격할 때 엄격하게 질서와 배려를 가르쳐야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견해를 가져본다.

나 역시 다른 교사나 부모에 비하면 너그러운 양육 교육태도를 지닌 사람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엄한 교사나 부모는 아니지만 아이들이 남을 배려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히 따지고 지도하려 애쓴다. 나의 교육방식은 정치의식에 비하면 좀 보수적인 것 같기도 하다. 가령 아이의 복장을 단정히 하기를 요구하고 어른에게 공손하기를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하지만 대체로 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을 존중하는 것과 훈육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공교육이라는 틀 자체가 가지고 있는 비민주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교육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입장인데 이런 모순 속에서 나는 어떻게 공교육의 질서 속에 아이들이 자본주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으면서도 배려의 규칙을 배우게 할까를 고민한다. 

 

어린 자녀의 양육이 다 끝난 나에게 이 책은 별 재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비록 탁아소나 유치원 수준의 언급에 불과하긴 해도 프랑스의 교육제도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극복이 되었다. 학교급식과 교사의 전문성은 그만큼 프랑스 사회가 교육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교사는 그다지 위상이 높은 직업이 아닌 것으로 안다. 교사가 전문성이 떨어지고 자존심이 떨어지는 사회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학교 시설이 다른 어떤 건물보다 후진 나라에서 교육이 잘 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나라는 아직도 교육후진국이 맞다. 좁고 더러운 교실에서 40명 가까운 아이들이 몰려 있고 비싸고 질낮은 밥을 먹으며 자존감이 낮은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는다. 초중등 교사들을 흔히 ‘방학과 철밥통’을 누리는 철면피들이라고 일반인들은 생각하지만 방학과 연금이 없다면 그리 교단에 서고 싶을 이유가 별로 없는 게 대한민국 교실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만큼 교육적 보람이나 전문가적 자존심을 지킬 수 없을 만큼 무너진 게 공교육 현장이다. 교사들의 잘못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시스템의 잘못이 더 크다.

누구라도 교무실에 와서 일년만 교사 노릇을 해보라. 아이들 다루기 힘든 것을 떠나 잘못된 관행과 무의미한 행정업무에 무너지는 수업을 온몸으로 아프게 겪을 것이다. 그것을 고쳐보려는 노력은 처절하게 짓밟힌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학교를 이렇게 망친 주범들은 모든 잘못을 교사들 개개인의 잘못으로 여기게끔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 교사들이 잘못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교사들이 잘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무엇보다 시스템의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어야 할 전교조가 가장 욕을 먹어 싸다. 성과없는 노력을 20년이나 해온 세월이 야속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뒤에 대안도 없다는 점이다. 그게 문제라면 문제이지 교사 개개인의 무력함이나 비리는 제도가 개선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될 문제라고 본다. 프랑스 어린이집 교사들의 전문가적 자존심, 그에 대한 학부모들의 신뢰가 이 책에서 가장 부러웠던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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