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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톨로지 (반양장)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강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글투가 싫지 않다. 학문이란 게 딱딱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글이든, 말이든. 그리고 유쾌 발랄함 가운데 진지함이 뼈대 있게 들어있는 것, 좋아한다. 그리고 솔직히 서점에 베스트 셀러 가판대에 깔려 있는 이 책이 진짜 읽고 싶었다. 호기심이 끌린 것이다. 그런데 마침 ‘심리학 책’이란다. 솔직히 신문에서 김정운의 글을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그가 심리학 전공인 줄은 몰랐다. 한겨레에 글을 쓰더니 조선일보에도 글을 쓴다고 했을 때나 방송에 나와 말하는 것을 들을 때나, 저 사람의 정체는 무얼까 매우 궁금했지만 말이다. 교수이지만 인생을 즐기며 사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이 살면 세상에 무언가 작은 것이라도 기여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유쾌발랄’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발랄한 진보라면 최상이다.
부자이고 서구 혹은 외래 지향적이고 자기 삶을 누리는 진보는 나쁜가? 사람의 삶은 자기 경험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다. 그걸 해낼 수 있는 이는 진정한 ‘선각자’, ‘지도자’일 수 있지만 현대는 그런 영웅의 시대가 아니다. 각자 자기 삶의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가능한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정도만 해도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나 역시 삶의 한계를 많이 느끼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는 누려도 되고 어디부터는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지금도 늘 부끄러워한다. 그러면서도 이 정도도 인생을 즐기지 못하면 어떻게 사는가, 그런 생각도 한다. 그러니까 김정운에게 꼭 의식 있는 투사, 혹은 석학에게 기대할 만한 학문적 진지함이 없다고 해서 그를 탓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책은 재미있다. 공감하는 바, 가지고 있는 지식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도 달라질 수 있다. 내가 가장 잘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수업’인데, 수업도 알고 보면 ‘교육과정 + 교사의 지식’이 만나는 예술이다. 교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어떻게 교육과정과 결합하고 편집하느냐에 따라 멋진 수업이 탄생하기도 한다. 가끔 어딘가 가서 강연을 해야 할 일이 있다. 공부가 부족함을 느끼지만 어쨌든 해내야 하는 과제이니 충실히 준비를 하려 애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총량을 끌어 모아 잘 구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내가 여태 ‘구성’, ‘수업 준비’라고 생각했던 것을 김정운은 ‘편집’이라고 명명한다. 그럴 수도 있다. 사실 책을 내는 일도 가끔 감탄할 때가 있다. 우리나라는 도서 편집자의 가치를 별로 못 알아주는 곳이지만 어떤 매체에 글을 실어보거나 책을 내 본 사람은 안다. 자기 글이 책자에 실리기까지의 과정, 그 편집의 미학을 말이다. 편집이 예술임을 완성된 책을 품에 안고 여러 번 느낀다.
책이나 매체를 통해 글을 발표하다 보면 보잘 것 없는 글들이 편집자와의 논의를 통해 멋지게 다듬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편집자의 의도와 독자의 반응을 통해 글이 ‘자란다’. 필자는 나이지만 그들이 원하는 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 안의 생각과 정보들이 재편집된다. 좋은 편집자를 만나면 더 좋은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럴 땐 ‘편집이 창조다’라는 김정운의 말이 맞다.
하지만 편집이 가능하려면 그에 앞서 정보의 수집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질문! 단순한 정보의 수집은 ‘공부’인가, 아닌가? 정희진은 독서를 ‘몸을 관통하는 일’이라고 했다. 책 하나를 읽고 거기에서 얻을 정보를 메모하고 디베이스화하는 일과, 온 몸으로 그 책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사유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어떤 ‘읽기’는 ‘필요에 의해’ 하게 되며 언젠가 유용하기에 정리할 뿐 받아들여지지 않는, 즉, ‘독서’가 아닌 말 그대로 ‘정보 수집’에 불과한 행위에 불과한 것도 있다. 만약 강사나 여행 가이드나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정보수집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몇몇 정보가 아닌 자기 분야에서 꽤 많은 정보를 수집한 후 자기 것으로 편집하는 일이 꼭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공부는 그보다 본질적인 것에 닿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성’이라 부르는 것은 어떤 정보를 습득하는 일이 자기 몸과 밀착되는, 체화되는 과정을 거쳤을 때라야만 나오게 된다. 저 사람 아는 것이 많구나, 가 아니라 저 사람 진짜구나, 라는 느낌은 그런 데서 오는 것이다. 진정성이 알맹이라면 그것을 잘 전달하기 위한 많은 에피소드들, 근거 자료들, 더 멋지게 표현하는 방법은 전략과 기술에 해당하는 일이리라. 그렇다면 김정운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전략’으로써 ‘편집’을 이야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님들과 상담 공부를 하기 위한 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이 책이 ‘심리학’ 책이라기에 목록에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분들이 이 책의 매력을 선택했다. 그런데 묻고 싶다. 어디에 심리학 이론이 있는지? 어떻게 사람의 심리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는 그 ‘자세에 대한 철학’이 있는지? 아이폰 광고가 소비자의 심리를 잘 이용했다는 이야기나 일본인들의 청결함이 프로이트적 항문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해석이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것이 ‘심리학’이라는 것인가? 심리학 책들이 새로운 이론까지는 제시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심리를 바라보는 철학, 혹은 초점을 두는 부분을 강조하는데 비해 이 책은 어떤 심리를 어떻게 바라본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요즘 여러 책들과 함께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다시 읽고 있다. 이 책도 지루하거나 무거운 책은 아니건만 아무래도 침대머리에서 <에디톨로지>에 손이 더 많이 가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프롬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에게 ‘자유’라는 개념이 주어지자 사람들이 느낀 게 그야말로 ‘자유’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고 고찰했을 때의 무게와 김정운이 ‘삶을 편집하라’고 주장할 때의 무게는 다르다. 두 ‘사람’의 무게가 다르지 않느냐고? 김정운은 주변국 지식인의 억울함을 실컷 말했는데? 그 뼈대있는 농담, 즉 자신이 주변국의 이름없는 학자라서 소외받는다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이전에 자기자신의 학문적 깊이와 진중함을 먼저 돌아보라 하고 싶다. 아니면 유쾌발랄한 에세이로서 자기 책에 가치를 두든지.
‘석학’은 가지고 있는 정보를 ‘편집’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정보들을 모아 ‘철학’을 정립한다. 편집이 잘 되면 더 잘 팔리긴 하지만 내용은 없고 편집과 마케팅만 잘 된 책과, 잘 팔리지는 않지만 진정성 있는 책, ‘진짜인 책’은 다르다.
저자가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그렇게 살아가라는 의도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라고 본다. 관점을 바꾸라는 의미이고 발랄하게, 세상을 창조적으로 살자는 취지에서 재미난 책을 썼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또 감사히 여기는 바이지만 그래도 뭔가 2%, 아니 20% 부족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