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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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다.

 

2014416, 세월호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결국 304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그중 254명은 열일곱 살 먹은 단원고 2학년 아이들이었다. 이것은 사고인가, 사건인가?

전 국민은 기울어 가는 세월호를 바라보면서 처음에는 왜 저 배가 기울게 되었는지를 궁금해 했지만 곧 그 의문은 왜 구하러 들어가지 않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당시 해경은 물살이 거세서 들어가기 힘들었다고 하는데, 이후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후에는 그 차가운, 그 깊은 바다 속으로 수많은 잠수사들이 들어갔다. 물위에 떠 있는 배에 산 목숨은 위험해서 구하러 못 들어가는데 40여 미터 아래로 가라앉아 무너져가는 배에 죽은 시신은 건지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세월호가 기울어진 원인이 과연 다 밝혀졌다고 할 수 있을까? 과적, 평형수 부족, 노후 선박, 무능한 선원... 그런 요인들은 다른 많은 배들도 안고 있는 문제점이다. 저러다 침몰하지, 그러나 그건 운일 뿐이지, 세월호는 운일 뿐이지.... 어디선가 음산한 마녀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것을 (추정) 원인이라고 내놓았지만 그마저 선주가 변사하는 바람에 밝힐 수가 없단다. 원인 없는 결과라는 것이 있는가? 과연 밝힐 수 없을 만큼 규명이 어려운 일인가?

 

생때같은 어린 자식이 죽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겪은 부모들이 원인을 알고 싶다’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알려 달라, 처음에는 읍소했고, 나중에는 잠긴 목으로 요구했고, 더럽고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절을 해가며 빌었다. 그들은 뭘 그리 잘못했는가?

 

법과 국가는 개인들의 보복과 불합리한 문제해결로 인해 생기게 될 사회적 문제, 사회적 손실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그나마 합리적인 제도이다. 그래서 세월호가 침몰해 갈 때 구조는 국가가 할 일이라고 모두 말했다. 그래서 해경이 출동했고 민간잠수사들은 그것이 자기들 책임이 아닌 국가의 책임이기 때문에 물에 뛰어들지 않는다 했다. 세월호가 침몰한 것은 선주와 회사와 선장과 선원들 때문이라고 치자. 아이들은 배가 침몰했기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살아서 탈출한 사람들이 그 증거이다. 구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죽었다. 구조는 국가의 의무였다. 헌법 346,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 조항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왜 구조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에 국가는 대답을 했는가?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장면 중에는, 무고하게 죽은 자식의 원한을 갚거나 죽은 원인을 밝히기 위해 사회도 국가도 법도 편이 되어주지 않자 부모가 직접 나서는 이야기들이 있다. 탈법을 저지르더라도 관객이 그 복수의 전선에 나서는 부모를 응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회가 부조리하다면 그것을 고치는 과정도 부조리할 수밖에 없다. 영화 속의 부모는 분노를 모아 없던 능력을 발휘한다. 수사도 하고 변호사 역할도 하고 정보기관과도 싸우고 조폭들을 파헤치고 다니고 살인마와도 맞선다. 하지만 영화 속의 그 유능한 부모는 현실에는 없다. 아이를 잃은 부모가 300집이 모여 원망과 분노를 끌어 모아도 무력하기 짝이 없다. 원인을 알고 싶다고, 같이 조사하고 싶다고, 애원해도 들어주지 않자 그들은 심지어 곡기를 끊었다. 그것은 싸움인가? 단식이 어찌 투쟁이 될 수 있는가. 투쟁이란 창을 들고 벽을 부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만큼 죽어간 아이들 못지않게 부모들도 약하디 약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제 그만하란다. 당신들이라면 그만할 수 있겠는가? 백년이 흘러 그 부모마저 죽어 백골이 된다 한들 그 원통함이 가실 수 있겠는가? 모든 원인이 다 밝혀지고 모든 책임자들이 다 벌을 받고 모든 배상과 보상을 다 받는다 한들 그래, 이제는 다 되었다. 마음 편히 내 자식을 저승으로 보낼 수 있겠다. 이제 내 마음에서 떠나거라.’ 할 수 있는 부모는 없다. 그런데 하물며 그 어떤 것도 되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 하란다. 무얼 그만 하라는 것인가?

 

다시 묻는다. 이것은 사고인가?

사고가 났는데 생떼를 부리는 것인가?

잊지 말자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은가?

짐승들도 새끼를 잃은 모정을 서로 어루만진다. ‘인간성을 잃었네라고 말하지만 그저 본성만으로라도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

남의 눈물을 비웃어도 되는가? 하늘은 무섭지 않은가? 혹시 그 아이들은 당신이 죽인 것은 아닌가? 나는 오늘도 묻고 싶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묻게 될 것이다. 그러고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고, 묻고 또 물을 것이다.

 

올해 어쩌다 보니 이러저러한 자리에 세월호 이야기를 많이 썼다.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많이 이야기하고 많이 쓸 것이다. 애도는 충분해야 하지만 세월이 가도 추모가 바래지지는 않는다. 억울한 죽음이라면 더더욱.

 

박민규는 시인, 소설가, 문학인들과 모여 세월호를 글로 애도하는 자리에서 눈 먼 자들의 국가라는 글을 썼다. 잘 쓴 글이란 이런 것이다. 이것은 시가 아니지만 글을 읽으며 절창(絶唱)’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잘 쓴 시를 뜻하는 이 말은, 그 한국어 어감 때문에 (창자)’를 끊어내는 느낌이 있다. 간절하게 내 마음을 표현한 듯한 시를 읽고 같이 울다 보면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공감을 느낀다. 문학이란 바로 이럴 때 필요한 것이다. 그런 시가, 그런 글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시인이 될 필요가 없고, 그래서 세상에는 시인이 필요한 것이다.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박민규의 글은 간결하고 강력하고, 그래서 슬프고 아름답고 처절하다. 그의 마지막 말을 내 마음 대신 전한다.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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