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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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여행기를 읽는 일,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서평을 읽는 일, 이것이 마치 파생상품처럼 또 하나의 책 읽기, 책 쓰기가 되는 것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 사실은 나 역시 서평과 여행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대중들의 심리가 궁금하다. 나의 경우, 다른 사람의 서평을 읽는 일은 책에 관한 정보를 얻는 일이며, 나의 시각이 편협에 빠지지 않았는지 자기 검열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마 다른 이들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대개 서평을 즐겨 읽는 이들은 본인 스스로 서평을 습관적으로 쓰는 이들일 것이고 책을 꽤 많이 읽는 이들일 것이다. 자기 수준과 경지에 대한 돌아봄, 점검, 검열(?)을 기꺼이 수행할 만큼 자신이 있는 것이거나 반대로 겸손한 것이거나.

 

그러나 내가 정희진을 읽게 된 것은 그저 그 사람의 문장과 생각을 풀어가는 방식에 매혹되어서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읽었다는 책들은 내가 읽고 싶어 하는 영역들이 아니다. 아주 간혹, 겹치는 책들이 나와도 새롭게 남들이 뭐라고 했나 궁금한 책들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느낀 것, 내가 가졌던 의문과 비슷한 감흥을 그 사람도 기록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와 내가 비슷한 정서와 의식을 지니고 비슷한 시기를 관통해 살고 있어서일 듯한데, 그걸 확인하는 일은 그다지 생산적이지는 않다. 가령 광화문에서 열리는 여러 집회에(늘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나가 보면 다른 이슈의 집회 때도 보았던 사람들을 또 만나게 되는 일, 후원금을 모금하고 책자를 팔아주고 서명을 할 때 돌려막기 하듯이 우리끼리 서로서로 품앗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일종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서로 돕고, 서로 먹고 살게 해주고, 서로 이해해주고 힘을 모으는 일이니까. 다만, 그리하여 지평이 넓어지기는 하는가? 하는 면에서 회의가 들 때가 있다. 뭔가 새로운 것의 발현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런 집회의 돌려막기에 비유할 만한, 읽으나마나한 서평은 그러나 그의 책에 거의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책은 내가 읽지 않았거나 앞으로도 읽을 생각이 없는 책들이 많다. 우리 집에도 같은 학교 같은 국문과 같은 학번 동기인 남편과 나의 책은 접점이 없이 책장을 차지하고 있다. 내가 읽는 책에 남편은 호기심을 보이지 않고 둘 다 교육이라는 공통 화두를 지니고 있음에도 교육문제에 관한 책도 공유하는 바가 별로 없다. 그렇다고 이상하거나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누구나 자기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가장 중요한 분야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이가 세상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핵문제와 미래의 대안으로써 농업을 고민하는 남편과, 공교육 내에서 변화를 꿈꾸는 나는 자기가 읽을 수 있는 한계 내에서도 넘칠 만큼 읽고 싶은 책이 많다. 옆에서 읽고 있는 책이나 말하고 있는 것에 끊임없이 관심을 놓지 않고 언젠가 읽어볼게, 혹은, 당장은 읽을 수 없지만 당신이 읽은 것을 이야기해줄래? 이럴 수는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정희진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사실 그의 관심영역은 매우 넓지만 특히’) 여성주의나 평화주의? 그리고 유난히 많은 우울과 자살에 관한 사회학적 고찰들이 사실은 내 관심 밖의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내게 책의 정보를 준다는 점에서 그다지 건질 게 없었다(그래도 알라딘 장바구니, 아니 보관함에 다 담아 두긴 했다. 마음을 열어둔다는 뜻이다). 나는 다만 정희진의 에 매혹되어 책을 읽었다. 책은 그저 매개일 뿐이다. 책을 통해 이 사람이 세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듣는 것이 좋았다.

 

우울과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사유는 공동체로 뻗어간다. 자기 자신의 기질과 가정사도 언뜻언뜻 비치지만 근자감이나 자괴감이나 왜곡된 겸손 따위로 흐르지 않고 사유의 확장’ ‘약자에 대한 공감으로 발전된다. 그러기가 쉽지 않다. 정희진처럼 기질적으로 내향적이고 자기 지향적이고 자칫 책상물림이 되기 쉬운 이가 사유를 밖으로, 약자로 돌린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 많은 글쟁이들, 책 많이 읽은 이들이 현학적인 사고를 자기철학인 양 호도(사실은 자기자신을 속이는 일이지만)하고 편향된 시각을 독특한 논리인 양 내세우기 쉬운데 정희진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문체나 글쓰기 방식도 독특하다. 말하듯이 짧게 툭 뱉기도 하고, 누군가의 말이나 글을 인용하되 흔히 글좀 쓴다는 이들이 자기 수첩에 찾아 쓰듯이 그렇게 현학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책에서 읽은 말들도 정희진의 몸을 관통했는지 자기만의 언어로 다시 태어난 듯하다. 그래서 내가 잘 모르는 내용인데도 정희진의 글은 쉽게 읽힌다. 나는 이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몰라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고 그래, 그런 견해도 있구나, 혹은 그리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자세로 읽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정희진의 서평집을 읽으면서 책을 읽는 자세를 배우고 책을 통해 세상을 해독하는 방법을 배우고, 자기만의 언어로 책과 세상을 이야기하는 태도를 배웠다고 해야겠다. 지금 머리 속에서 몇몇 서평가들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다들 말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며, 대중이 잘 읽지 않는 책, 혹은 어이없을 만큼 뻔한 책들에 대해 글들을 쓰기도 하는구나. 어떤 책을 읽어도 자기 안으로 귀결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책에 대해 이야기해도 자기자랑으로 끝나는 사람이 있고 보석 같은 책에 대해서도 결국 책에 대한 정보 이상을 주지 못하고 (본인이 읽지 못하고) 마는 이도 있다. 그러나 정희진처럼 어떤 책을 읽어도 이 세상의 약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연대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이는 없었던 것 같다. 누구나 자기의 안경을 가지고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읽는 책들은 어떻게든 학교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문제와 연결고리를 갖듯이 말이다. ‘고작 선생이든 일개 선생이든 선생의 시각으로 책을 읽는 나 같은 이가 있는가 하면 약자의 안경을 통해 책을 읽는 정희진 같은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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