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 삶에 질식당하지 않았던 10명의 사상가들
프레데리크 시프테 지음, 이세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굳이 분류하자면 ‘우울과’에 가까운 면이 있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슬픔이나 우울에 관한 책을 읽고 싶지는 않다. 다만 <시사IN>에서 ‘프랑스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쓴 10인의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소개를 읽고는 책이 궁금해졌을 뿐이다. 일단 프랑스의 교사의 눈으로 철학을 어찌 풀어낼 것인지 궁금했다. 게다가 ‘프랑스’의 철학교사라면, 그냥 중등교사들과는 다른 특이한 위치를 갖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이야기이긴 하지만 교사들에게는 철학이 부재하고 교수들에게는 현장과 현실이 부재하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아이들을 접하면서 살아있는 교육철학을 논할 수 있는 이 땅의 교사들에게는 대체로 성찰과 철학이 없다. 그 원인은 억압적인 교육과정과 학교 행정에 있다고 본다. 교사의 자율성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육과정과 평가에서 교사의 권한도 인정하지 않는 현실에서는 교사들이 자기 과목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고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할 이유가 없다. 교사가 아닌 사람들이 듣기에는 핑계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작금의 현실이기도 하다. 교사들 중에는 공부하기 좋아하는 사람, 생각이 깊은 사람도 많지 않느냐고? 그런 이들은 학교를 떠난다. 대학으로 가거나 다른 길을 선택한다. 나는 나처럼 현장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교사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처럼, 역량이 부족해 지혜의 깊이를 더하기 어려운 평범한, 고민과 반성은 많으나 평범한 교사들을 위해 좀더 통찰력 있는 교사들이 대학으로 도망가지 말고 학교에 남아 계속 공부를 지속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모범적 전형을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에게서 잠시 보았다. 물론 그는 또 다른 세계와 자아를 찾아 학교를 떠나가긴 했지만, 학교에 있는 동안에도 공부의 깊이를 더욱 깊게 했고 그로 인해 제자들과 동료들의 존경을 얻었다. 현실개혁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장의 깊이를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교사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프레데리크 시프테가 프랑스에서 그런 교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프랑스 특유의 토론 문화를 감안해볼 때 고등학교의 철학교사는 조금 특별할 것 같다. 게다가 이 책과 같은 철학 에세이를 쓸 수 있는 역량이 있는 교사라면 더더욱. 그러고도 대학으로 가거나 철학자가 되지 않은 이유가 – 물론 필자의 ‘멜랑꼴리’한 기질 상 다른 ‘성취’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아갈 의욕과 에너지가 없을 수도 있지만 – 반드시 학교현장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만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제목에 왜 ‘슬픔’을 집어넣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읽은 바로 이 책은 ‘슬픔’에 관한 책이 아니다. 지은이는 제목처럼 늘 슬픔에 젖어 훌쩍(혹은 ‘홀짝’)거리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쿨’하고 ‘시크’한 사람이다. 무뚝뚝한 느낌마저 든다. 슬픔이란 감정은 얼마나 촉촉한 건데...
이런 건 있다. 살짝 건조해진 우울이랄까, 그리고 칙칙함. 많은 상념에 빠져 있고 그 상념은 무작위라 비논리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몽상적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재기도 있고 논리적인 부분도 있지만 사회성이 좀 떨어지는 상념들... 약간 시니컬하고 조금 비생산적이기도 하고, 남의 평가따위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태도... 그런데 이런 것을 슬픔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루고 있는 열 명의 철학자들과 함께 생각하는 주제도 슬픔이 아니라 염세와 우울, 무의미, 이런 쪽에 더 가깝다. (내가 아는 아나키스트와는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필자가 스스로 인정했듯이) 조금 무심한 듯한 아나키한 태도가 필자에게 더 가깝다. 아나키스트에게 슬픔이라니?
물론 제목은 근사하다. 문학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원제(philosophie sentimentale)를 생각해 보면 올바른 제목이라기보다는 마케팅에 성공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목에 끌려 책을 집어든 사람들도 많을 터이니 말이다.
필자는 애도와 우울에 대해 ‘애도하는 자가 누군가를 잃은 거라면 우울한 자는 –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었거나 혹은 그럴 가능성을 보여줬던 존재를 잃음으로써 – 자기 자신을 잃은 것이다. 누군가를 애도할 때는 세상이 초라하고 공허하게 느껴지지만, 우울증에 빠지면 자기 자신이 초라하고 공허하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이때 애도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고인의 부재를 보상할 만큼 흥미로운 대상들을 찾음으로써 우울을 극복하고 세상 속에 다시 편입될 수 있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는 사랑할 만한 자아, 결코 나타나지 않거나 영원히 사라져버린 자아에 대한 애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아를 천천히든 급작스럽게든 제거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채 자아가 밉상으로 시들어가게 내버려둔다.’고 서술한다.
학교에서 상담을 할 때도 보면 단지 슬픔에 빠져 있는 아이와 우울한 아이는 다르다. 물론 우울한 아이들이 더 힘들다. 우울은 깊은 상처이다. 치유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이 힘들고 오래 걸린다.
슬픔과 한 편이라 할 수 있는 ‘애도’는 상실,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슬픔을, 그 감정과 감정의 극복 과정을 포함하는 말이지만 반드시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에너지인 것이다. 아이 안에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약간의 상담을 통해 건강하게 이겨내는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깊은 상처에 의한 우울이나 기질적인 우울을 가진 아이들을 만나면 상담자도 힘겹다. 우울에 게으름이 함께 오면(대개는 함께 온다) 대책이 없고, 우울이 폭력과 더불어 나타나면 위험하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모나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더라도 깊어지기 전에 그것을 해소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어른들이 할 일이 된다.
시프테는 ‘철학이란 삶과 죽음을 가르치거나 우리의 유한성을 위로하는 학문이 아니라 다만 명백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개념들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요란하지만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까발리며 우상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정치적 허무주의’, ‘존재론적 허무주의자’라고 인정한다. 물론 많은 작가나 예술가들처럼 시프테는 그런 허무주의와 우울을 글을 쓰는 자양분으로 삼는다. 우울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안이 ‘글쓰기’, ‘그림그리기’, ‘음악 듣기’와 같은 예술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필자야말로 그런 기질과 대안이 행복하게(?) 만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안에 침잠할 때 가장 편안한 영혼들... 그런 자들의 표정과 평안을 나는 안다.‘내가 독서를 정신적 이동 기술로 삼는 이유는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내게 가장 친밀한 거처를 되찾기 위해서다.’
시프테는 스스로를 무주론자라고 한다. 무주론은 우주 및 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사상으로 실재하는 것은 신이나 자아 같은 절대적 관념뿐이며 낱낱의 사물을 비롯한 모든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를 다시 읽을 때면 시프테는 자신이 여전히 아나키스트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아나키즘은 필자에게 이데올로기적 선택이나 도달해야 할 이상이 아니라 그들이 반대하는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대안적 유토피아라고, 무질서가 정치의 현실 그 자체라고 본다.
사실 나는 아나키즘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 스펙트럼이 꽤 넓은 것으로 안다. 적어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아나키즘이 단지 허무주의에 그치지 않음을 안다. 히피나 염세주의자와는 또 다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정치적 입장이기도 하다. 다만 시프테는 지상의 모든 정치 형태를 거부하는 허무주의적 관점으로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부르는 것 같다.
허무주의자처럼 보이는 시프테에게서 에너지를 발견한다면 호세 오르테 이 가세트의 말로써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생은 각자의 생이다. 그래서 생에 대해 진지하게 철학을 하고자 한다면 속에서부터, 유일무이하게 자기자신을 논한다는 조건으로 철학해야 한다.”
조금은 우울하게, 무심한 듯 시크하게, 자신만의 철학의 세계로 구부정하게 걸어 들어가는 프레데리크 시프테 선생의 고등학교 철학교실은 어떠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