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이리의 교사론 -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한 대학에 교직과목 특강을 나가면서 이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보았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 프레이리는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교사를 희망하지 않아도, 학생들에게는 필독서였던 기억이 있다. 특강에서 어떤 교직관을 세울 것인가라는 주제로 교육학 책들을 살피다가 이 책을 집어든 순간 역시 프레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이, 적어도 대한민국이 아직도 별로 변하지 않았거나 프레이리가 일찍이 혜안을 지녔던 것이거나일 터이다.

마침 젊은 교사에게라는 부제가 붙어있던 만큼 이 책은 쉽고 간결하게 교사들이 어찌 교단을 지켜야 할지를 설파한다. 그는 매우 진보적인 교육자였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완고해 보일 정도로 엄격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단호한 교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싸워야 함을 강조하지만 수업이나 생활지도에서도 교사 자신을 전문가로서 벼리는 데 부지런해야 함을 강조한다.

 

진보를 자처하는 교사들이 이 책을 다시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정치적 투쟁만이 교육적 개혁의 전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아이들을 존중하는 것과 교사의 본문을 헷갈리지는 않는지, 방임과 인권, 자유를 혼동하지는 않는지... 혹은 거꾸로 입으로는 인권과 진보를 말하면서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그런데 프레이리를 놓고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학자를 다루어서 불편했다고 강의평가에 쓴 학생이 한 명 있었다. 특강에 참여한 네 명의 교사들에 대해 진보적인 교사들만이 아니라 보수적인 입장의 교사도 특강에 참여했더라면이라고 쓰기도 했는데 사실 특강에 참여한 교사 중 소위 진보적 성향의 교사는 한 분이 더 있었을 뿐이고 다른 두 분은 어떤 정치적 입장도 가지지 않은 교사였다.

80명의 학생 중 단 한 명의 의견이니 무시해도 될 법하지만 나는 내내 그 의견이 마음에 걸렸다. 프레이리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으며 그를 중심으로 교직관 수업을 한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 중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섞이게도 마련이니 학생들 중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지닌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지간한 학생이었다면 굳이 진보적 교육학자가 불편하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학은 원래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라면 다양한 학자와 이론들을 접할 수 있고 그래야 하는 곳이니까. 예비교사들이 좀 더 진보적이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은 잘못된 것일까.

 

프레이리는 교사들에게 묻는다. ‘권위주의적인 학교 행정 아래 굴복하는 양육자보모가 될 것인가, 민주적인 학교를 꿈꾸는 저항하는 교사가 될 것인가.’그의 답은 교사의 역할은 행정가들의 거만함과 무한권력에 맞서 품위 있고 적극적으로 저항해서 학생들과 그 가족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전문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다.

프레이리는 철저히 공부하는 전문가로서의 교사가 되라고 젊은 교사들을 독려하면서 어설프게 보모노릇이나 하는 게 교사는 아니라고 말한다. 교실에서도 아이들을 방임하는 것을 자율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교육이 온정주의적 과업이 아니라 전문가적인 일임을 명심하라고 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보모교사는 행정의 시녀가 되어 아이들을 양치기처럼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으로 교사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교사들에 대한 비판의 의미이지, 아이들에게 무한사랑으로 열린 가슴을 가진 교사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었다. 양육자가 될 것인가, 저항하는 교사가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엄혹한 시기는 브라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지금은 또 다른 교사의 위상을 고민할 때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교사들은 사랑으로만 가득 찬 순종적인 보모도 거부하지만 저항하는 교사도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직업적 조건의 달콤함으로 교단의 모든 스트레스를 감내하려는 직업인들이 되어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요즘 젊은 교사들은 직업으로서 교사의 자리에 서서 아이들에 대한 헌신도, 자기를 희생해가며 정책을 변화시키려는 열정도 없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과거의 무기력한 대다수의 교사들이 그랬듯이 수업도 대충, 열의도 없음, 마지못해 월급날만 바라보며 가끔 들어오는 촌지에 대해 도덕적 감수성도 전혀 없었던 교사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진정한 교사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업에 최선을 다하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아이들을 대할 때는 지혜롭고 불의에 대해서는 정의로우며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되 싸울 때는 열정으로 나아가는.... 그런 교사들이 예나 지금이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나 지금이나 소수였고 게다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다음과 같은 프레이리의 주장은 21세기인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신선하다. 교사가 진정한 전문가가 되려면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프레이리는 어린 대학생에게만 아니라 26년차인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교사는 가르쳐야만 한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이 지식을 전수하는 일은 아니다. 학습자들이 사고하는 주체가 되고, 그들도 교사들만큼이나 많은 생각을 하는 존재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비로소 학습자들은 대상에 대한 지식이나 의미를 만들어내는 생산적 주체가 될 수 있다. 배우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몰랐던 바를 점차 알게 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전에 알았던 바를 새롭게 다시 알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리의 생활 좌파들 - 세상을 변화시키는 낯선 질문들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목수정 전작의 통통 튀는 분위기를 좋아해서 가볍게 읽을 마음으로 집어들었다. 목수정의 매력은 진보의 묵직한 이데올로기를 발랄한 필체로 감싸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최근에 읽은 책 중에 메모할 것이 가장 많은 책이 되었다. 직접 인터뷰한 내용에 특유의 매력적인 글빨(!)까지, 진정한 좌파정신이 돋보이는 책이다. 왜냐하면 유명인들이 아니라 활동가들을 인터뷰했기 때문이다. 그게 진짜 진보 아닌가? 권력이나 허명이 인터뷰의 이유가 되지 않는 것. 이름과 공적을 좇으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평범한 고수들을 놓친다.

 

프랑스 낙태 합법화의 역사

아직도 낙태가 불법인 우리나라에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프랑스의 역사가 있다. 그들은 낙태를 합법으로 만든 역사가 있다. 그 일을 유명한 여성 명사들이 나서서 했단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여자들은 외모만 여성이지 사회적으로는 남성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약자로서의 여성의 권리에는 관심조차 없는, 남자보다 더 가부장적인 여자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유명한 배우와 작가들이 낙태 합법화에 힘을 실었고 그 유명한 시몬 베이유도 최전선에 섰다. 얼마나 절묘한가, 당시의 보건부 장관이었다니! 이 책에는 전설적인 장관 이야기가 하나 더 나온다. 자크 랑이라는, 미테랑 당시의 전설적 문화부 장관이란다. 예술고에 자연계와 인문고 말고도 응용미술이라는 옵션을 만들었다 한다. 관료는 관료일 뿐이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하는데 아니다,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교장이든 교감이든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하면 세상은 달라지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괜찮은 사람이 일을 맡았을 때 맘껏 기량을 뽐낼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라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일하는 이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나, 관성에 발목 잡히지 않고 창의적으로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든가... 단지 우리에게는 저런 멋진 인재가 없다고 한탄할 일만은 아니겠지. 그래도 어쨌든 부러운 게 사실이다.

 

삶과 운동이 분리되지 않는 진보

또 하나는 좌파들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 중에는 고급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 발레리가 있다. ‘장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더불어 자신의 뿌리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감동적이었다. 삶과 운동을 분리하여 정신은 진보나 생활은 자본주의적으로 하는 많은 한국의 진보처럼, 예술을 하면서도 상업성을 벗지 않는 것을 삶의 지혜인 양 포장하는 한국의 예술가들처럼 몸 따로 정신 따로, 이념 따로 현실 따로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솔직히, 사상과 현실이 다르면 사는 게 힘들다.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괴로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생태주의자들에게 자동차 같은 이기적 문명을 이용하는 일은 자기 신념이나 양심에 배치되는 일이라 마음이 괴로울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엄존하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타협 혹은 배신이고 어디부터가 지혜로운 공존인지를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차피 이 현실을 뒤집어엎거나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찌하면 내 영혼과 사상의 순결을 지키면서 현실을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마땅하다.

 

문화는 모두의 것

베르나르 아스크노프가 문화는 모두의 것이라는 구호 아래 펼친 모두를 위한 루브르운동도 재미있었다. 운동 자체보다도 그의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루브르 박물관 입장료를 받지 말라고 펼쳤던 이 운동이 정말 흥미로웠던 것은 그 결과로 실지로 미술 관련인들에게 입장료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싸움이라기보다 운동을 펼치고, 또 그만큼의 결과가 나온다니.... 늘 지는 싸움만 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마이너리티로서 참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무료입장이 되면 관람하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목수정은 말한다. 쫓기듯 본전 뽑듯 다니지 않고 산책하듯 다니며 영감을 얻는다고. 한때 학교가 아닌 시내 중심가의 회사에 다닌 적이 있었다. 몸은 늘 피곤하고 정신이 피폐하던 때, 나는 취재하러 나간다 하고 (우리는 마감 때가 아니면 미술관이나 전시회나 서점에 가는 일이 허용되어 당당히 중앙박물관에 간다고 말했다) 그때는 경복궁 옆에 있던 국중에 가곤 했다. 평일 낮 시간, 사람이 없는 박물관에서 내 발자국 소리만 들으면서 온갖 상념에 빠졌던 시간, 작은 스케치북에 유물을 옮겨 그리며 상상력을 펼치던 시간들. 그때는 다시 교단에 돌아올 일이 아득했지만 돌아보니 그 시간들이 나를 교사로 성장시키는 데 또 하나의 힘이 되었다. 문화를 가난한 자에게도 여는 일은 결국 국가의 재산을 늘리는 일이 될 것이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서도 인문과 철학을 가르치다

그리고 정말 나에게 큰 감명을 준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에 들어온 청소년 이민자들에게 불어를 가르치는 에마뉴엘 선생님 이야기이다. 목수정은 자신의 경험에 빛어 이방의 언어로 말하는 일이 얼마나 자아를 위축시키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교육을 받아 자기를 성장시키는 일에서 자존감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나 외국어를 배우면 그럴 수가 없다. 에마뉴엘은 그래서 수업 시간에 각국에서 온 학생들에게 각자 자기 나라 말로 교재인 <오디세이>를 말할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그럴 때 그들의 그 빛나는 자존감을 포착한 것이다. 프랑스어를 가르칠 때도 <오디세이>를 교재로 삼아 뿌리 뽑히고 떠돌아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스스로 돌아보게 만들면서 문학적 향기도 놓치지 않게 했다 한다. 쉽게 생각하면 이방의 언어를 배우는 청소년들에게 철학이나 사상이나 정서가 담긴 교육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중학교 남자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칠 때마다 그 정서를 전하기 참 난감함을 느끼는 나다. 가장 기본적인 지식들을 전달하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이국에서 온 청소년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언어를 가르치면서도 에마뉴엘은 감성도 자아성찰도, 자존도 놓치지 않는단다. 나에게는 참 충격적인 각성의 시간이었다.

 

직업이 교사이다 보니 학교 이야기에 가장 귀가 솔깃해진다. 초등학교 수위 아저씨와 인터뷰한 내용이 참 재미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이는 69세란다. 65세 정년 후 의무는 사라지고, 오로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와 시간이 주어지는 시기란다. 정년을 앞둔 초등학교 수위인 토마가 임대주택을 못 구해 쩔쩔매자 500명 학부모 중 450명이 서명에 동참해 구청장에 청원서를 보냈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학부모들의 집단지성이 오직 자기 아이들의 이기적인 이익에만 국한되는 대한민국과 달라도 이렇게 다르구나 싶다.

 

가끔 학교에서 관리실이나 행정실 직원을 대하면 저이들은 우리 아이들이나 교사를 어찌 생각할까 궁금해진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금기처럼 여겨진다. 서로의 영역에 대한 존중 혹은 무관심일 수도 있다. 물론 뒤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겠지만 말이다. 수위아저씨 토마는 교사는 아니지만 학교 아이들한테 관심도 많고 교사들과 아이들의 관계도 밝은 눈으로 다 보고 있다.

 

전에는 교사가 결근하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교사들이 넉넉히 있었다. 그런데 5~6년 전부터는 그게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교육의 질이 저하되고 학부모가 더 이상 학교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이 학교에는 여전히 학교가 자랑하는 진주 같은 고학년 담당 교사들이 있다. 저학년 때 좀 부실하게 공부했던 아이들도 고학년이 되면 모두 완벽하게 자신감을 회복하고 이 학교를 떠나게 된다. ... 눈과 귀가 선생님에게 완벽하게 집중되어 있고 아이들의 눈은 선생님 앞에서 빛난다. 그걸 보면 그 아이들이 얼마나 지적인 열정으로 고양되어 잇는지 알게 된다. 교사들은 그 어떤 아이도 자포자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 얼마나 멋진 학교인가. 프랑스에 관한 다른 책을 읽으면서, 유치원 교사가 전문가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학부모들 역시 전적으로 교사를 신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탄탄한 사회는 이런 것이겠지 싶다.

 

진정 프랑스가 부러운 이유

프랑스는 환상의 나라이다. 아마도 그야말로 환상일 가능성이 높다. 거기라고 부조리가 없을 수 없지. 그럼에도, 프랑스는 이 땅에서 100년 내 이루기 어려울 것처럼 보이는 혁명과 민주주의 가치를 품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그들의 문화이다. 혁명의 와중에서 아름다움을 버리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 때도 68혁명 때도, 테러를 당하는 와중에도 품격 있는 아름다움의 문화가 그들의 진정한 자부심을 채운다. 그건 값비싼 고급스러움과는 다른 것이다. 80년 광주항쟁 때, 열흘 동안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품격 높은 인간의 현장과 비슷한 느낌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역사가 적은 데 비해 프랑스는 언제나, 싸울 때도 정치를 할 때도 일상을 누릴 때도 늘 그것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게 진짜 부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무의식의 방 - 프로이트와 융으로 분석한 100가지 꿈 이야기
김서영 지음 / 책세상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꿈이 많다. 꿈 때문에 다음 날 수면부족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꿈을 즐긴다. 마치 또 하나의 세상을 사는 것 같다. 기억하건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서서히 색깔이 있는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것 같다. 동물의 시력이 진화하듯 나의 꿈의 선명도는 진화해 왔고 지금은 굉장히 섬세한 풍경과 느낌을 실감하며 꿈을 즐긴다.

꿈을 꾸면 다음 날 그 꿈의 의미를 해석하려 이것저것을 찾아보았다. 동양적 꿈 해석을 해보았지만 결론은 내 꿈이 예지몽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상황을 후반영하는 경우는 많았다. 그런 의문들이 이 책을 만나고 나서 많이 풀렸다. 이 책을 통해 꿈의 새로운 세계로 접어드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김서영은 프로이트를 연구한 심리학자이다. 자신의 꿈 일기를 쓰면서 융의 분석심리학에 관심을 갖는다. 전에도 내 꿈의 해석이 궁금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어 보았지만 내 심리상태를 해석해주는 접점을 만나지 못했다. 융을 읽으면서도 그가 말하는 꿈의 무의식 반영이 그저 학술이론으로만 읽혔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김서영을 만남으로써 나는 융을 다시 만난 기분이다. 그래, 아무 것도 예지해주지는 않지만 힘을 주기도 하고 들여다보게도 하고 위로해주기도 하던 내 꿈의 정체는,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일 수도, 그림자의 경고일 수도, 아니무스의 반영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늘 미진하고 찜찜하게 남았던 프로이트에 대한 의심은 이 책을 통해 명확해졌고 이후에 만난 다른 심리학 책을 통해 그 이해를 깊게 하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아무리 읽어도 허방다리를 짚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했던 것은 연대라든가 사회라든가 통시적 관점이라든가, 그런 부분들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연대와 배려를 통해 해결책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어야 안심이 되는 것이다. 만약 모든 학문을 연구한 결과 이 세상은 희망이 없으며 어떠한 노력도 무의미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과연 학문이라는 것이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프로이트를 읽으며 느껴졌던 갈등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이 책 직전에 읽었던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도 프로이트 이론의 사회성 결여에 대한 지적이 나온다. 저자 김서영이 과연 전공을 버리고 분석심리학으로 완전히 발을 옮길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융을 통해 공허함을 메우고 위로를 받았다는 지적에는 매우 공감을 한다. 나 역시 김서영을 통해 다시 만난 융으로 내 꿈을 재해석하면서 위로의 세계인 꿈의 세계로 다시 나아간다.

 

융은 대극을 통합하라고 조언하고 꿈에 나타난 무의식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말한다. 김서영은 프로이트와 융 모두를 끌어들여 자기 꿈을 해석하는데 자기 전공이 아닌 분석심리학에 더 끌린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이트의 꿈 해석은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고 (특히 동양인들에게는) 꿈이나 자의식을 난도질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비해 융은 보다 신화적이고 신비하면서도 위안이 되는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몇 권 안 되지만 융의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더 많이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김서영의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놀라운 것은 그와 내 꿈이 일치하는 바는 거의 없지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여자 아이남자를 해석할 수 있는 길이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왜 한국적 해몽에서 불길하다고 하는 여자아이 꿈을 자주 꾸는 건지 늘 궁금했는데 김서영은 그것을 자아라고 해석해준다. 근심이 아니라 자아인 것이다. 남자 역시 불안감이나 걱정거리가 아닌 나의 아니무스로 해석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남성적인 것들은 여자로서 내가 남성에 대해 갖는 성적인 욕구나 불안이 아닌 내 안에 숨은 남성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대개는 공격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나의 아니무스는 아마도 여자로 살아가면서 느꼈던 불안이나 억울감을 대신 표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남자로 태어난다면 나는 락 가수로 살고 싶다. 헤비메탈을 크게 틀고 빨간 록스타를 미친 듯이 몰고 가다 동해안 절벽 아래로 던져져 죽어버리는 상상 속의 나는 나의 그림자이다. 현실의 나는 존재감을 잘 드러내지 않는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지만 내 안에는 많은 열정과 욕구가 있다. 분노와 억울감도 많다. 안정적인 사람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이다.

 

하나 더,

책에서 나는 꿈 속의 치유자존재에 대해 주목했다. 김서영은 꿈속에서 좋은 남자, 좋은 여자들의 존재를 자주 만난다. 힘들 때 치유자 역할을 하는 어떤 존재가 꿈에 그렇게 발현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치유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내가 재작년에 책을 출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책을 쓰기 이전에 소소한 글쓰기 작업을 독려했던 안준철 선생님과 이상대 선생님에서 시작하여 잠깐의 만남에 그칠지도 모를 매체의 기자들까지... 내 책을 통해 만나게 된 (대개는 여성들인) 활동가들, 어머니들... 그리고 그때부터 내 꿈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꿈 속 세상의 배경도 많이 달라졌고 등장인물도 달라졌다. 늘 너무 넓어서 문이 다 닫혀 있는 건지 불안했던 집, 정리가 안 되어 있고 잠금장치가 확인되지 않았던 미로 같던 집은 넓고 깔끔한 집으로 바뀌었다. 낯선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내게 호의적이다. 그들을 김서영 말대로 조력자들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바꿔 생각해 보자.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치유가 조력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후배들이 나를 만나서 교사로서의 자기 삶이 달라졌다고 말한다면, 보수적이고 무력한 교사가 아닌 창의적이고 맞서 싸울 줄 아는 사람으로 발전했다고 말한다면 나 역시 그런 역할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제자들은 어떤가. 선생님은 제가 어디서 무엇을 한다고 해도 넌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저를 믿어줄 것이라 생각한다는 제자들. 그들에게 나는 든든한 조력자일 것이다. 그들이 불안과 걱정의 꿈을 꿀 때 나는 그들 꿈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어깨를 잡아주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아 주고 어두운 복도에 불을 밝히며 앞장을 서줄지도 모른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이유가 참 많지만 긍정적 해석이 제일 마음에 든다. 꿈이야 늘 꿈보다 해몽이지만 상담도 그러하듯이 중요한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어떤 피드백이 가며, 앞으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꿈 때문에 내 삶이 더욱 칙칙해질 것이라면 그런 해석은 듣지 않느니만 못하지 않을까. 김서영이 꿈의 긍정적 분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석심리학적 해석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대학생 때 읽었던 융을 다시 공부하기로 했다. 융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힘과 긍정적인 피드백에서 어떤 길잡이 등불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김서영 책은 따뜻했다. 다른 이의 꿈 분석 사례이기는 하지만 가출한 아이를 만나려는 사회복지사 이야기는 교사인 내게 새삼 나의 역할을 일깨워 주었다. 또 마지막에 세월호를 언급하며 아파했던 부분을 읽으며 자기 공부를 사회적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보았다. 가끔 공부는 공부, 이론은 이론이지만 삶과 실천과는 무관한 사람들을 많이 본다. 현실에서 아팠던 것을 공부로 찾고, 배운 것은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러한 언급이 고마운 것이다.

 

많은 책들은 스며들 듯 내 인생을 가만가만 다독였지만 이 책처럼 인생의 방향을 바꿔주는 책들도 더러 만났다. 이 책 덕분에 나는 다시 융을 읽는다. 어쩌면 겉핥기로만 공부했던 심리학이 내 인생에 중요한 방향키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중요한 역할을 김서영이 했다. 책 속의 그는 늘 책상에만 앉아 있는 서생(書生)인 듯이 자신을 묘사했지만 만약 내가 그의 책으로 비롯해 심리학을 조금이나마 깊게 공부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승화시킨다면 결국 그는 씨앗을 심은 사람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 삶에 질식당하지 않았던 10명의 사상가들
프레데리크 시프테 지음, 이세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굳이 분류하자면 우울과에 가까운 면이 있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슬픔이나 우울에 관한 책을 읽고 싶지는 않다. 다만 <시사IN>에서 프랑스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쓴 10인의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소개를 읽고는 책이 궁금해졌을 뿐이다. 일단 프랑스의 교사의 눈으로 철학을 어찌 풀어낼 것인지 궁금했다. 게다가 프랑스의 철학교사라면, 그냥 중등교사들과는 다른 특이한 위치를 갖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이야기이긴 하지만 교사들에게는 철학이 부재하고 교수들에게는 현장과 현실이 부재하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아이들을 접하면서 살아있는 교육철학을 논할 수 있는 이 땅의 교사들에게는 대체로 성찰과 철학이 없다. 그 원인은 억압적인 교육과정과 학교 행정에 있다고 본다. 교사의 자율성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육과정과 평가에서 교사의 권한도 인정하지 않는 현실에서는 교사들이 자기 과목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고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할 이유가 없다. 교사가 아닌 사람들이 듣기에는 핑계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작금의 현실이기도 하다. 교사들 중에는 공부하기 좋아하는 사람, 생각이 깊은 사람도 많지 않느냐고? 그런 이들은 학교를 떠난다. 대학으로 가거나 다른 길을 선택한다. 나는 나처럼 현장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교사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처럼, 역량이 부족해 지혜의 깊이를 더하기 어려운 평범한, 고민과 반성은 많으나 평범한 교사들을 위해 좀더 통찰력 있는 교사들이 대학으로 도망가지 말고 학교에 남아 계속 공부를 지속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런 모범적 전형을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에게서 잠시 보았다. 물론 그는 또 다른 세계와 자아를 찾아 학교를 떠나가긴 했지만, 학교에 있는 동안에도 공부의 깊이를 더욱 깊게 했고 그로 인해 제자들과 동료들의 존경을 얻었다. 현실개혁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장의 깊이를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교사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프레데리크 시프테가 프랑스에서 그런 교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프랑스 특유의 토론 문화를 감안해볼 때 고등학교의 철학교사는 조금 특별할 것 같다. 게다가 이 책과 같은 철학 에세이를 쓸 수 있는 역량이 있는 교사라면 더더욱. 그러고도 대학으로 가거나 철학자가 되지 않은 이유가 물론 필자의 멜랑꼴리한 기질 상 다른 성취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아갈 의욕과 에너지가 없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학교현장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만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제목에 왜 슬픔을 집어넣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읽은 바로 이 책은 슬픔에 관한 책이 아니다. 지은이는 제목처럼 늘 슬픔에 젖어 훌쩍(혹은 홀짝’)거리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하고 시크한 사람이다. 무뚝뚝한 느낌마저 든다. 슬픔이란 감정은 얼마나 촉촉한 건데...

이런 건 있다. 살짝 건조해진 우울이랄까, 그리고 칙칙함. 많은 상념에 빠져 있고 그 상념은 무작위라 비논리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몽상적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재기도 있고 논리적인 부분도 있지만 사회성이 좀 떨어지는 상념들... 약간 시니컬하고 조금 비생산적이기도 하고, 남의 평가따위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태도... 그런데 이런 것을 슬픔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루고 있는 열 명의 철학자들과 함께 생각하는 주제도 슬픔이 아니라 염세와 우울, 무의미, 이런 쪽에 더 가깝다. (내가 아는 아나키스트와는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필자가 스스로 인정했듯이 조금 무심한 듯한 아나키한 태도가 필자에게 더 가깝다. 아나키스트에게 슬픔이라니?

물론 제목은 근사하다. 문학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원제(philosophie sentimentale)를 생각해 보면 올바른 제목이라기보다는 마케팅에 성공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목에 끌려 책을 집어든 사람들도 많을 터이니 말이다.

 

필자는 애도와 우울에 대해 애도하는 자가 누군가를 잃은 거라면 우울한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었거나 혹은 그럴 가능성을 보여줬던 존재를 잃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잃은 것이다. 누군가를 애도할 때는 세상이 초라하고 공허하게 느껴지지만, 우울증에 빠지면 자기 자신이 초라하고 공허하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이때 애도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고인의 부재를 보상할 만큼 흥미로운 대상들을 찾음으로써 우울을 극복하고 세상 속에 다시 편입될 수 있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는 사랑할 만한 자아, 결코 나타나지 않거나 영원히 사라져버린 자아에 대한 애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아를 천천히든 급작스럽게든 제거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채 자아가 밉상으로 시들어가게 내버려둔다.’고 서술한다.

 

학교에서 상담을 할 때도 보면 단지 슬픔에 빠져 있는 아이와 우울한 아이는 다르다. 물론 우울한 아이들이 더 힘들다. 우울은 깊은 상처이다. 치유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이 힘들고 오래 걸린다.

슬픔과 한 편이라 할 수 있는 애도는 상실,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슬픔을, 그 감정과 감정의 극복 과정을 포함하는 말이지만 반드시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에너지인 것이다. 아이 안에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약간의 상담을 통해 건강하게 이겨내는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깊은 상처에 의한 우울이나 기질적인 우울을 가진 아이들을 만나면 상담자도 힘겹다. 우울에 게으름이 함께 오면(대개는 함께 온다) 대책이 없고, 우울이 폭력과 더불어 나타나면 위험하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모나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더라도 깊어지기 전에 그것을 해소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어른들이 할 일이 된다.

 

시프테는 철학이란 삶과 죽음을 가르치거나 우리의 유한성을 위로하는 학문이 아니라 다만 명백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개념들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요란하지만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까발리며 우상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정치적 허무주의’, ‘존재론적 허무주의자라고 인정한다. 물론 많은 작가나 예술가들처럼 시프테는 그런 허무주의와 우울을 글을 쓰는 자양분으로 삼는다. 우울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안이 글쓰기’, ‘그림그리기’, ‘음악 듣기와 같은 예술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필자야말로 그런 기질과 대안이 행복하게(?) 만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안에 침잠할 때 가장 편안한 영혼들... 그런 자들의 표정과 평안을 나는 안다.‘내가 독서를 정신적 이동 기술로 삼는 이유는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내게 가장 친밀한 거처를 되찾기 위해서다.’

    

시프테는 스스로를 무주론자라고 한다. 무주론은 우주 및 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사상으로 실재하는 것은 신이나 자아 같은 절대적 관념뿐이며 낱낱의 사물을 비롯한 모든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를 다시 읽을 때면 시프테는 자신이 여전히 아나키스트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아나키즘은 필자에게 이데올로기적 선택이나 도달해야 할 이상이 아니라 그들이 반대하는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대안적 유토피아라고, 무질서가 정치의 현실 그 자체라고 본다.

사실 나는 아나키즘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 스펙트럼이 꽤 넓은 것으로 안다. 적어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아나키즘이 단지 허무주의에 그치지 않음을 안다. 히피나 염세주의자와는 또 다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정치적 입장이기도 하다. 다만 시프테는 지상의 모든 정치 형태를 거부하는 허무주의적 관점으로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부르는 것 같다.

 

허무주의자처럼 보이는 시프테에게서 에너지를 발견한다면 호세 오르테 이 가세트의 말로써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생은 각자의 생이다. 그래서 생에 대해 진지하게 철학을 하고자 한다면 속에서부터, 유일무이하게 자기자신을 논한다는 조건으로 철학해야 한다.”

조금은 우울하게, 무심한 듯 시크하게, 자신만의 철학의 세계로 구부정하게 걸어 들어가는 프레데리크 시프테 선생의 고등학교 철학교실은 어떠할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도시 이야기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16
찰스 디킨스 지음, 바른번역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레 미제라블>을 읽는 것을 보고 지인이 <두 도시 이야기>를 소개했다. 같은 시기의 이야기를 런던과 파리를 오가는 시점으로 서술했다면서.

<레 미제라블>이 다루는 1832년은 <두 도시 이야기>의 배경인 1789년 즈음으로부터 한참 뒤이니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구한말에서 해방기까지를 묶어서 같은 근대 격동기라고 말하는 식으로 두 책 속의 장면을 같은 시기라 했을 수도 있겠지 싶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20세기 이후의 전 세계인들은 모두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시민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혁명 이후에 나폴레옹이 등장함으로써 프랑스 혁명 정신을 뒤로 돌린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의 역사발전 과정에서 으로 나아가기 위한 의 단계로서 의미 있게 볼 수도 있고, 나폴레옹이 오히려 유럽 전역의 구 왕정 체제를 외부로부터개혁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유럽의 공화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결과를 가져온 것을 생각하면 그 역시 프랑스 대혁명의 연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전반적인 역사적 평가는 긍정적인 데 비해 찰스 디킨스는 좀더 섬세한 눈으로 혁명의 깊숙한 속살, 혁명의 뒷골목을 더듬는다. 주인공인 마네뜨 박사 가족은 계급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의 주인공인 시민즉 부르주아일 텐데 오히려 혁명에서 조금 비껴있다. 구체제의 상징인 귀족의 악행을 목격하고 그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오히려 프랑스 혁명의 혼란에 희생양이 될 뻔함으로써 혁명의 주변부 인물들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혹시 찰스 디킨스는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역시 정확히 동시대인은 아닐뿐더러 영국인으로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긴장감을 가지고 대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넓게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공화 민주주의의 혜택을 입게 되면서 약간은 관조적인 입장에서 프랑스 혁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영국의 부르주아(찰스 디킨스)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한다.

 

민중이 언제나 옳을 리야 없다. 특히 혁명의 와중에 사적인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는 무지한 민중이 이상화되는 것도 경계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마담 드파르지가 보여주는 잔혹한 모습이 마치 이 소설 속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의 인민의 상징인 듯이 보여져서 안타깝기도 하다. 증오를 넘어선 혁명의 대의가 그들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혁명의 과정에서 변질되었다거나 자기논리의 모순에 빠져 살육과 정쟁을 거듭하게 되었다면 설득력이 있었을지 모른다. 혹은 그런 고뇌하는 인물, 진정한 혁명적 대의를 실천하려는 인물과 더불어 등장했다면 프랑스 대혁명의 허상을 깨면서도 본질을 생각해 보게 하는 기회도 되었을 것이다. 마담 드파르지와 루시의 대립이 마치 악과 선, 잔혹과 순결의 대립인 듯 보이게 한 것은 혁명 당시 두려움을 떨치고 거리에 나섰던 많은 또 다른 마담 드파르지를 비난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게 된 많은 루시들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주인공이 칼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급되는 비중이나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진 것도 오히려 찰스 다네이가 주인공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터넷 사전(특히 다음의 절대지식 백과사전)에서, 그리고 많은 이들의 리뷰에서, 특히 영화나 뮤지컬을 본 이들의 리뷰에서 칼튼을 주인공으로 여기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마네뜨 가족은 결국 칼튼의 희생을 알면서도 그의 목숨을 담보로 급히 파리를 떠나는 장면은 마담 드파르지가 찰스뿐 아니라 무고한 루시와 어린 딸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에서 묘사한 찰스를 포함한 마네뜨 가족의 모습은 고결하고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정의와 도덕의 상징이었다. 찰스 다네이는 구세대의 귀족으로서의 삶을 거부한다. 자기의 계급적 토대를 딛고 서는 대단히 혁명적인 태도다. 마네뜨 박사 역시 에버몽드 가문의 악행을 목격하면서 부조리에 눈뜨고 그로 인해 바스티유에 갇히게 되는 혁명의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들을 대신해 무고하게 죽어가는 칼튼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행복과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결국, 작가는 정의나 도덕, 합리성보다 사랑이 위대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넓게 보면 프랑스 혁명은 시민(부르주아)’ 혁명이었지만 혁명의 주요 동력은 인민, 즉 가난한 민중에게서 나왔다. 이 소설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정쟁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혼란기의 잔혹한 희생들에 초점을 맞춘 것은 찰스 디킨스가 그야말로 정치역사가 아닌 문학의 입장에서 이 시대를, 아니 사람들을 다루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혁명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빼고 내가 주목한 부분은 오히려 찰스 디킨스의 재기발랄한 문체와 소설적 구성의 뛰어남이다. 장면 장면들의 필연성은 뒤로 가면서 명확해진다. 그런 퍼즐 맞추기의 절묘함에 무릎을 치게 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설명적 문체는 약간 고리타분하면서도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데 나 역시 포스트모던한 문체보다는 이런 서사적 문체에 익숙한 구세대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약간 비꼬는 듯한 문체가 재미있었다. 가령, p223 : 시인이 공공장소에 걸상을 놓고 앉아 사람 구경을 하며 시상을 떠올리덩 시절이 있었다. 제리도 공공장소에 걸상을 놓고 앉아 있기는 했지만 그는 시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상을 떠올리는 행위를 최대한 삼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등등 읽다가 큭큭 웃음이 나오는 기발한 말투(특히 전반부에서)가 많이 보여서 재미있었다.

 

알라딘 서평의 대부분은 웅진에서 나온 펭귄클래스에 집약되어 번역의 문제점을 많이 지적하고 있는데 내가 읽은 더클래스 본은 오히려 번역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읽었다. 누가 이런 문체까지 잘 살려 번역을 했나 하고 다시 돌아보았다가 바른번역으로 돼 있어서 오히려 황당했을 정도다. 여럿이 번역했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책임번역자가 있을 텐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고 오히려 좋은 번역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찰스 디킨스를 포함해 18, 19세기의 소설가들은 장황한 문체가 일반적이어서 우리말로 번역을 하다 보면 반드시 껄끄럽게 읽히는 부분이 있거나 의역을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감안해 보아도 이 책은 번역이 잘 되었다고 본다. 어떤 <두 도시 이야기>를 읽을지 고민할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