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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생활 좌파들 - 세상을 변화시키는 낯선 질문들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7월
평점 :
목수정 전작의 통통 튀는 분위기를 좋아해서 가볍게 읽을 마음으로 집어들었다. 목수정의 매력은 진보의 묵직한 이데올로기를 발랄한 필체로 감싸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최근에 읽은 책 중에 메모할 것이 가장 많은 책이 되었다. 직접 인터뷰한 내용에 특유의 매력적인 글빨(!)까지, 진정한 좌파정신이 돋보이는 책이다. 왜냐하면 유명인들이 아니라 활동가들을 인터뷰했기 때문이다. 그게 진짜 진보 아닌가? 권력이나 허명이 인터뷰의 이유가 되지 않는 것. 이름과 공적을 좇으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평범한 고수들을 놓친다.
프랑스 낙태 합법화의 역사
아직도 낙태가 불법인 우리나라에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프랑스의 역사가 있다. 그들은 낙태를 합법으로 만든 역사가 있다. 그 일을 유명한 여성 명사들이 나서서 했단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여자들은 외모만 여성이지 사회적으로는 남성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약자로서의 여성의 권리에는 관심조차 없는, 남자보다 더 가부장적인 여자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유명한 배우와 작가들이 낙태 합법화에 힘을 실었고 그 유명한 시몬 베이유도 최전선에 섰다. 얼마나 절묘한가, 당시의 보건부 장관이었다니! 이 책에는 전설적인 장관 이야기가 하나 더 나온다. 자크 랑이라는, 미테랑 당시의 전설적 문화부 장관이란다. 예술고에 자연계와 인문고 말고도 응용미술이라는 옵션을 만들었다 한다. 관료는 관료일 뿐이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하는데 아니다,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교장이든 교감이든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하면 세상은 달라지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괜찮은 사람이 일을 맡았을 때 맘껏 기량을 뽐낼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라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일하는 이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나, 관성에 발목 잡히지 않고 창의적으로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든가... 단지 우리에게는 저런 멋진 ‘인재’가 없다고 한탄할 일만은 아니겠지. 그래도 어쨌든 부러운 게 사실이다.
삶과 운동이 분리되지 않는 진보
또 하나는 ‘좌파들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 중에는 고급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 발레리가 있다. ‘장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더불어 자신의 뿌리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감동적이었다. 삶과 운동을 분리하여 정신은 진보나 생활은 자본주의적으로 하는 많은 한국의 진보처럼, 예술을 하면서도 상업성을 벗지 않는 것을 삶의 지혜인 양 포장하는 한국의 예술가들처럼 몸 따로 정신 따로, 이념 따로 현실 따로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솔직히, 사상과 현실이 다르면 사는 게 힘들다.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괴로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생태주의자들에게 자동차 같은 이기적 문명을 이용하는 일은 자기 신념이나 양심에 배치되는 일이라 마음이 괴로울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엄존하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타협 혹은 배신이고 어디부터가 지혜로운 공존인지를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차피 이 현실을 뒤집어엎거나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찌하면 내 영혼과 사상의 순결을 지키면서 현실을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마땅하다.
문화는 모두의 것
베르나르 아스크노프가 ‘문화는 모두의 것’이라는 구호 아래 펼친 ‘모두를 위한 루브르’ 운동도 재미있었다. 운동 자체보다도 그의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루브르 박물관 입장료를 받지 말라고 펼쳤던 이 운동이 정말 흥미로웠던 것은 그 결과로 실지로 ‘미술 관련’인들에게 입장료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싸움이라기보다 운동을 펼치고, 또 그만큼의 결과가 나온다니.... 늘 지는 싸움만 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마이너리티로서 참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무료입장이 되면 관람하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목수정은 말한다. 쫓기듯 본전 뽑듯 다니지 않고 산책하듯 다니며 영감을 얻는다고. 한때 학교가 아닌 시내 중심가의 ‘회사’에 다닌 적이 있었다. 몸은 늘 피곤하고 정신이 피폐하던 때, 나는 취재하러 나간다 하고 (우리는 마감 때가 아니면 미술관이나 전시회나 서점에 가는 일이 허용되어 당당히 중앙박물관에 간다고 말했다) 그때는 경복궁 옆에 있던 ‘국중’에 가곤 했다. 평일 낮 시간, 사람이 없는 박물관에서 내 발자국 소리만 들으면서 온갖 상념에 빠졌던 시간, 작은 스케치북에 유물을 옮겨 그리며 상상력을 펼치던 시간들. 그때는 다시 교단에 돌아올 일이 아득했지만 돌아보니 그 시간들이 나를 ‘교사’로 성장시키는 데 또 하나의 힘이 되었다. 문화를 가난한 자에게도 여는 일은 결국 국가의 재산을 늘리는 일이 될 것이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서도 인문과 철학을 가르치다
그리고 정말 나에게 큰 감명을 준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에 들어온 청소년 이민자들에게 불어를 가르치는 에마뉴엘 선생님 이야기이다. 목수정은 자신의 경험에 빛어 이방의 언어로 말하는 일이 얼마나 자아를 위축시키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교육을 받아 자기를 성장시키는 일에서 자존감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나 외국어를 배우면 그럴 수가 없다. 에마뉴엘은 그래서 수업 시간에 각국에서 온 학생들에게 각자 자기 나라 말로 교재인 <오디세이>를 말할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그럴 때 그들의 그 빛나는 자존감을 포착한 것이다. 프랑스어를 가르칠 때도 <오디세이>를 교재로 삼아 뿌리 뽑히고 떠돌아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스스로 돌아보게 만들면서 문학적 향기도 놓치지 않게 했다 한다. 쉽게 생각하면 이방의 언어를 배우는 청소년들에게 철학이나 사상이나 정서가 담긴 교육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중학교 남자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칠 때마다 그 정서를 전하기 참 난감함을 느끼는 나다. 가장 기본적인 지식들을 전달하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이국에서 온 청소년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언어를 가르치면서도 에마뉴엘은 감성도 자아성찰도, 자존도 놓치지 않는단다. 나에게는 참 충격적인 각성의 시간이었다.
직업이 교사이다 보니 학교 이야기에 가장 귀가 솔깃해진다. 초등학교 수위 아저씨와 인터뷰한 내용이 참 재미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이는 69세란다. 65세 정년 후 의무는 사라지고, 오로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와 시간이 주어지는 시기란다. 정년을 앞둔 초등학교 수위인 토마가 임대주택을 못 구해 쩔쩔매자 500명 학부모 중 450명이 서명에 동참해 구청장에 청원서를 보냈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학부모들의 집단지성이 오직 자기 아이들의 이기적인 이익에만 국한되는 대한민국과 달라도 이렇게 다르구나 싶다.
가끔 학교에서 관리실이나 행정실 직원을 대하면 저이들은 우리 아이들이나 교사를 어찌 생각할까 궁금해진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금기처럼 여겨진다. 서로의 영역에 대한 존중 혹은 무관심일 수도 있다. 물론 뒤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겠지만 말이다. 수위아저씨 토마는 교사는 아니지만 학교 아이들한테 관심도 많고 교사들과 아이들의 관계도 밝은 눈으로 다 보고 있다.
“전에는 교사가 결근하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교사들이 넉넉히 있었다. 그런데 5~6년 전부터는 그게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교육의 질이 저하되고 학부모가 더 이상 학교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이 학교에는 여전히 학교가 자랑하는 진주 같은 고학년 담당 교사들이 있다. 저학년 때 좀 부실하게 공부했던 아이들도 고학년이 되면 모두 완벽하게 자신감을 회복하고 이 학교를 떠나게 된다. ... 눈과 귀가 선생님에게 완벽하게 집중되어 있고 아이들의 눈은 선생님 앞에서 빛난다. 그걸 보면 그 아이들이 얼마나 지적인 열정으로 고양되어 잇는지 알게 된다. 교사들은 그 어떤 아이도 자포자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 얼마나 멋진 학교인가. 프랑스에 관한 다른 책을 읽으면서, 유치원 교사가 ‘전문가’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학부모들 역시 전적으로 교사를 신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탄탄한 사회는 이런 것이겠지 싶다.
진정 프랑스가 부러운 이유
프랑스는 환상의 나라이다. 아마도 그야말로 환상일 가능성이 높다. 거기라고 부조리가 없을 수 없지. 그럼에도, 프랑스는 이 땅에서 100년 내 이루기 어려울 것처럼 보이는 혁명과 민주주의 가치를 품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그들의 문화이다. 혁명의 와중에서 아름다움을 버리지 않았다. 프랑스 대혁명 때도 68혁명 때도, 테러를 당하는 와중에도 품격 있는 아름다움의 문화가 그들의 진정한 자부심을 채운다. 그건 값비싼 고급스러움과는 다른 것이다. 80년 광주항쟁 때, 열흘 동안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품격 높은 인간의 현장과 비슷한 느낌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역사가 적은 데 비해 프랑스는 언제나, 싸울 때도 정치를 할 때도 일상을 누릴 때도 늘 그것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게 진짜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