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16
찰스 디킨스 지음, 바른번역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레 미제라블>을 읽는 것을 보고 지인이 <두 도시 이야기>를 소개했다. 같은 시기의 이야기를 런던과 파리를 오가는 시점으로 서술했다면서.

<레 미제라블>이 다루는 1832년은 <두 도시 이야기>의 배경인 1789년 즈음으로부터 한참 뒤이니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구한말에서 해방기까지를 묶어서 같은 근대 격동기라고 말하는 식으로 두 책 속의 장면을 같은 시기라 했을 수도 있겠지 싶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20세기 이후의 전 세계인들은 모두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시민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혁명 이후에 나폴레옹이 등장함으로써 프랑스 혁명 정신을 뒤로 돌린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의 역사발전 과정에서 으로 나아가기 위한 의 단계로서 의미 있게 볼 수도 있고, 나폴레옹이 오히려 유럽 전역의 구 왕정 체제를 외부로부터개혁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유럽의 공화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결과를 가져온 것을 생각하면 그 역시 프랑스 대혁명의 연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전반적인 역사적 평가는 긍정적인 데 비해 찰스 디킨스는 좀더 섬세한 눈으로 혁명의 깊숙한 속살, 혁명의 뒷골목을 더듬는다. 주인공인 마네뜨 박사 가족은 계급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의 주인공인 시민즉 부르주아일 텐데 오히려 혁명에서 조금 비껴있다. 구체제의 상징인 귀족의 악행을 목격하고 그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오히려 프랑스 혁명의 혼란에 희생양이 될 뻔함으로써 혁명의 주변부 인물들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혹시 찰스 디킨스는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역시 정확히 동시대인은 아닐뿐더러 영국인으로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긴장감을 가지고 대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넓게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공화 민주주의의 혜택을 입게 되면서 약간은 관조적인 입장에서 프랑스 혁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영국의 부르주아(찰스 디킨스)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한다.

 

민중이 언제나 옳을 리야 없다. 특히 혁명의 와중에 사적인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는 무지한 민중이 이상화되는 것도 경계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마담 드파르지가 보여주는 잔혹한 모습이 마치 이 소설 속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의 인민의 상징인 듯이 보여져서 안타깝기도 하다. 증오를 넘어선 혁명의 대의가 그들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혁명의 과정에서 변질되었다거나 자기논리의 모순에 빠져 살육과 정쟁을 거듭하게 되었다면 설득력이 있었을지 모른다. 혹은 그런 고뇌하는 인물, 진정한 혁명적 대의를 실천하려는 인물과 더불어 등장했다면 프랑스 대혁명의 허상을 깨면서도 본질을 생각해 보게 하는 기회도 되었을 것이다. 마담 드파르지와 루시의 대립이 마치 악과 선, 잔혹과 순결의 대립인 듯 보이게 한 것은 혁명 당시 두려움을 떨치고 거리에 나섰던 많은 또 다른 마담 드파르지를 비난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게 된 많은 루시들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주인공이 칼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급되는 비중이나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진 것도 오히려 찰스 다네이가 주인공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터넷 사전(특히 다음의 절대지식 백과사전)에서, 그리고 많은 이들의 리뷰에서, 특히 영화나 뮤지컬을 본 이들의 리뷰에서 칼튼을 주인공으로 여기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마네뜨 가족은 결국 칼튼의 희생을 알면서도 그의 목숨을 담보로 급히 파리를 떠나는 장면은 마담 드파르지가 찰스뿐 아니라 무고한 루시와 어린 딸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에서 묘사한 찰스를 포함한 마네뜨 가족의 모습은 고결하고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정의와 도덕의 상징이었다. 찰스 다네이는 구세대의 귀족으로서의 삶을 거부한다. 자기의 계급적 토대를 딛고 서는 대단히 혁명적인 태도다. 마네뜨 박사 역시 에버몽드 가문의 악행을 목격하면서 부조리에 눈뜨고 그로 인해 바스티유에 갇히게 되는 혁명의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들을 대신해 무고하게 죽어가는 칼튼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행복과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결국, 작가는 정의나 도덕, 합리성보다 사랑이 위대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넓게 보면 프랑스 혁명은 시민(부르주아)’ 혁명이었지만 혁명의 주요 동력은 인민, 즉 가난한 민중에게서 나왔다. 이 소설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정쟁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혼란기의 잔혹한 희생들에 초점을 맞춘 것은 찰스 디킨스가 그야말로 정치역사가 아닌 문학의 입장에서 이 시대를, 아니 사람들을 다루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혁명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빼고 내가 주목한 부분은 오히려 찰스 디킨스의 재기발랄한 문체와 소설적 구성의 뛰어남이다. 장면 장면들의 필연성은 뒤로 가면서 명확해진다. 그런 퍼즐 맞추기의 절묘함에 무릎을 치게 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설명적 문체는 약간 고리타분하면서도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데 나 역시 포스트모던한 문체보다는 이런 서사적 문체에 익숙한 구세대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약간 비꼬는 듯한 문체가 재미있었다. 가령, p223 : 시인이 공공장소에 걸상을 놓고 앉아 사람 구경을 하며 시상을 떠올리덩 시절이 있었다. 제리도 공공장소에 걸상을 놓고 앉아 있기는 했지만 그는 시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상을 떠올리는 행위를 최대한 삼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등등 읽다가 큭큭 웃음이 나오는 기발한 말투(특히 전반부에서)가 많이 보여서 재미있었다.

 

알라딘 서평의 대부분은 웅진에서 나온 펭귄클래스에 집약되어 번역의 문제점을 많이 지적하고 있는데 내가 읽은 더클래스 본은 오히려 번역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읽었다. 누가 이런 문체까지 잘 살려 번역을 했나 하고 다시 돌아보았다가 바른번역으로 돼 있어서 오히려 황당했을 정도다. 여럿이 번역했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책임번역자가 있을 텐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고 오히려 좋은 번역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찰스 디킨스를 포함해 18, 19세기의 소설가들은 장황한 문체가 일반적이어서 우리말로 번역을 하다 보면 반드시 껄끄럽게 읽히는 부분이 있거나 의역을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감안해 보아도 이 책은 번역이 잘 되었다고 본다. 어떤 <두 도시 이야기>를 읽을지 고민할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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