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기술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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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보수적이다. 당연하다. 지은이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는 18세기 프랑스의 세속사제란다. 그러니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관점으로 글을 해독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말과 글이 넘치는 지금 세상에, 되돌아보고 곱씹을 대목을 헤아려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요즘 나는 두 가지 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다. 하나는 한 동료의 말 많음에 대한 생각이다. 살면서 실패를 경험해 보지 못한 그는 말이 지나치게 많고 늘 누군가를 가르치려 든다. 그의 말은 거의 공해 수준이다. 가끔 그의 잘난 체와 말 많음의 심리학적 근거와 사회적 배경, 가정적 요인까지 헤아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데, 그의 말 많음이 이렇게 주변사람의 정신 영역까지 오염시킨다. 물론 반면교사가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면 안 되는 이유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그에게 감사를 전한다.

 

누군가가 얼토당토않은 짓을 하거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할 때, 그것을 들어주거나 동조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비웃기 위해 입을 닫는 것은 조롱형 침묵이다. 이때 상대는 자신이 칭찬과 동조를 이끌어낸다고 착각하면서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계속 이어가기 마련이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의 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 나는 가족 앞에서 남의 험담을 하지 않겠노라선언한 바 있다. 사실 살면서 남의 뒷이야기, 험담 따위를 하지 않고 살기란 참 어렵다. 그런 험담이 때로는 심리적 불안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기도 한다. 권력을 쥔 사람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침묵보다 더 절실하게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써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사실 수다나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험담은 정신의 배설에 불과할 때가 많다. 나는 그런 흔한 험담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과묵하고 진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번번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조롱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절망했다. 그렇게 수십 년 살았는데, 이제 오십이 넘어 아직도 내가 내 의지로 내 혀와 손(글쓰기)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참 부끄러운 일 아닌가.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겠다.

 

이 책에는 나로 하여금 뜨끔함을 느끼게 하는 구절로 가득 차 있다. 그런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은 다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런 말들. 가령,

 

나는 제대로 침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만약 그것만으로 족하다면 인간과 짐승이 서로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자기 입안의 혀를 다스릴 줄 아는 것, 혀를 잡아둘 때나 자유롭게 풀어줄 때를 정확히 감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일단 침묵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는 모든 대목에서 변치 않는 단호함을 유지하는 것.

 

지혜의 상책은 침묵하는 것, 중책은 말을 적당히, 적게 하는 것,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말이 아니더라도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하책이다.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입을 연다.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닫는 것은 나약하거나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입을 닫아야 할 때 말을 하는 것은 경솔하고도 무례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해 입을 닫을 줄 아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만약 무언가를 말하고픈 욕구에 걷잡을 수 없이 시달리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결코 입을 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침묵만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말을 하는 태도, 말이 너무 많은 태도, 말이 별로 없는 태도.... 다 나쁜 태도이다.

말을 적게 하되 제대로 된 발언을 하는 것이 완벽한 태도이다.

 

말을 전혀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정말 필요할 때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나쁜 태도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가 바로 말해야 할 그 때임을 어찌 알까. 누구나 자기는 그 말을 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 주장할 것이니 말이다.

정치인에게 뭐라 할 것만이 아니다. 필부필부들의 하나마나한 말들(물론 삶을 다정하게 만들기 위한 오롱조롱한 말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말들의 90%는 할 필요 없는 말이거나 하지 말았어야 할 말 들일 것이다. 나로서는 그걸 알게 되는 일이 필생의 숙제이다특히 권력을 쥔 사람일수록, 나이가 많은 이일수록 듣기는 민첩하되 말하기는 더뎌야 한다.’ 모르는 문제를 만나면 미련 없이 입을 닫고, 나보다 많이 아는 이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에 대한 반전의 주장도 있다. 흔히 말은 즉자적이나 글은 그렇지 않으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존경받는 풍토가 있다. 하지만 서점에 가보면 이런 것도 책으로도 쓸까 싶은 허접한 책들이 널렸다. 나 역시 너무 많은 글을 쓰면 말이 많았던 지난 밤이 떠올라 괴로운 아침처럼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고 정신의 바닥, 내 지성의 얕음을 들킨 듯 하여 당분간 글을 쓰기 싫어질 때가 있다. 책을 찍어내듯 써대는 많은 작가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저자는 아주 좋은 내용이라도 미주알고주알 글로 풀어내는 것은 문제다.’라고 말한다. 예로 든 학식이 풍부한 이가 대중을 위해 글을 쓴다. 이미 나와 있는 산문집을 운문집으로 고쳐낸다든지... 이런 짓을 왜 하는가? 그 자체로 탁월한 저서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현대에도 적용이 가능한 이야기이다. 책을 내기 위한 책, 팔기 위한 책들, 요즘 상업적으로 만들어 팔고 있는 처세술 책, 필사 책, 재탕 책들을 꾸짖는 듯 들린다.

 

그리고 중요한 지적을 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작가 노릇을 하게 되면 쌓이는 책들로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것이 글로 표현되면 인간의 정신이 활동할 여지가 더 이상 남아 있겠는가?

 

말로도 글로도 표현되지 않은 인간의 깊은 영성의 세계, 그것을 남겨놓아야 할 것이다. 시나 그림을 명료한 비평으로 완벽하게 해석한 글을 읽고 싶지 않다. 궁금하지만 결코, 끝내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글의 침묵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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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윈터 리미티드 에디션) 세계문학의 천재들 1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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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야간열차를 타 본 적이 있다. 침대칸 열차는 좁고 불편해서 좋은 기억이 남지 않았다. 그래도 오밤중에 달려간 기차역은 아름다웠다. 바람이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네 식구가 사진을 찍으며 아름다운 리스본과 안녕을 고했다. 디젤 냄새 풍기는 기차역에 밤이 깊어도 아늑했던 것은 기차가 그날 밤은 우리의 집이었기 때문이었을까.

 

3일밖에 머물지 못한 리스본은 참 맑고 아름다워서 언젠가 꼭 다시 오고 싶었다.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던 기억들, 트램을 따라 광장을 뛰어다니던 일, 광장, 열차 타고 다녀온 페냐 성... 좋은 기억만 남은 몇 안 되는 여행지이다.

리스본에 대한 순전히 좋은 기억만으로도 이 책은 매력적이었다. 어쩌다 보니 영화를 먼저 보았는데 영화도 나쁘진 않았지만 책이 주는 특별한 깊이가 있다. 혁명의 향기, 문자향, 리스본의 향기, 바다 냄새, 비 냄새, 오래된 건물의 먼지 냄새 같은 것이 섞여 있는 아름다운 문학작품, 그러니까 일 년에 한두 편 볼까말까한, 그런 책이었다, 내게는.

 

주인공인 그레고리우스와 아마데우는 같은 자아를 가진 사람인 듯 보인다.

얼핏 보면 둘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내성적이고 학자적 성향이 강한, 고등학교 고문법 교사이다. 매우 고리타분한 삶을 살아왔다. 그에 비해 그가 좇는 아마데우는 아름다운 태양같은 사람이다. 숭고하고 화려한, 주목과 숭앙을 받는 사람. 그러나 아마데우는 그레고리우스의 페르소나이다. 그 둘은 탐구심, 도덕심, 본질 추구...등에서 공통적이다. 어쩌면 그레고리우스가 살고 싶었던 또 다른 삶을 산 사람이 아마데우가 아닐까.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에게 요구가 많은 사람이었다. 변덕이나 뒤틀린 허영심도 아니었다. 나중에 그는 가끔, 자신의 이런 태도는 잘난 척하는 세상을 향한 조용한 분노.. 라고 생각했다.

 

아마데우는 천박한 허영심을 대하면 잔인해졌소.. ‘천박한 허영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거예요.’

 

아마데우는 허영심을 돌림병처럼 증오하던 사람이었다. 뛰어난 사람이 자기 안의 허영심을 경계하기란 쉽지 않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말 중 하나인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란 표현도 결국 아마데우가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벼리는 말이기도 했다. 타인은 나의 거울일 수 있다. 하지만 법정이라니! 이 엄혹함 앞에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은 게 사실이지, 나처럼 내성적인 사람들은 부끄러움도 부끄럽다. 나보다 더 부끄러워해야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특히나 아마데우처럼 뛰어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사회적 영향을 생각해서라도 좀 더 스스로에게 엄격해지기를... 여기서 엄격함은 사회적 성공에 대해 기능과 스펙을 키우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성, 겸손에 대한 엄격함이기를....     

 

그렇게 극과 극의 삶처럼 보이던 두 사람의 삶은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도 아마데우과 같은 종류의 병인) 뇌의 이상을 느끼면서 만나게 된다.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의 뇌종양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병원 벽에 있는, 뇌지도가 걸려 있던 사각형 모양의 빈자리를 생각했다.

삶의 양상은 전혀 달랐으되 어쩌면 죽음으로 가는 길이 비슷해지고 있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비극을 뇌종양으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레고리우스는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세상을 만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볼 때, 그 안에 열린 마음을 보는 게 중요하다. 존엄에 대하여 아마데우가 스스로에게 엄격히 요구했던 항목처럼 곧 스스로 군더더기 없이 허영 없이 살 때만이 스스로 인정하는 존엄성을 지닐 수 있다. 의사, 혹은 혁명가 혹은 열정적 사랑에 빠진 이는 모두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 아마데우는 그렇게 파란 불꽃으로 순정하게 살았던 사람이고, 그레고리우스는 그를 알아보는 영혼이었다.

 

(새 안경을 맞춘 그레고리우스) 새 안경으로 세상은 더 넓어졌고 공간은 실제로 3차원이 되어 사물들이 마음껏 몸을 펼 수 있었다. 타호 강은 더 이상 흐릿한 갈색 평면이 아니라 그야말로 강이었고, 상 조르지 성은 하늘을 향해 세 방향으로 솟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세상은 피곤했다. ... 새상은 더 가까워지고 강제적이 되었으며, 뭔가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보이지 않는 이 요구가 너무 커지면 모든 것과 거리를 유지하게 하고 단어와 글 저편에 과연 외부세계가 있기나 할까라는 의심 이 의심은 즐겁고 소중했다. 이런 의심이 없는 삶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 을 가능하게 했던...

 

본질적으로 둘 모두 지나치게 고귀한 성향 때문에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면모도 보인다. 아마데우는 끝끝내 자신의 고결함에 자신을 베이고 말지만 오히려 그레고리우스는 건강하게 현실을 벗어나 자아찾기에 성공한다. 아마데우를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또 다른 면을 궁금해 하지만 궁금해 한다고 해서 다 자아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 거울을 만난 그레고리우스는 행운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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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긍정훈육법 - 친절하며 단호한 교사의 비법 학급긍정훈육법
제인 넬슨 외 지음, 김성환 외 옮김, 김차명 그림 / 에듀니티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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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대로 따라만 하면 뭔가를 잘 하게 하는 일이 정말 있을까? 나도 실용서들을 애용하는 편이긴 하지만 단지 책으로만, 방법으로만 성공하는 일은 별로 없는 듯하다. 마음으로 필요성을 절감한 후에 현실 속에서 멘토를 만나고 실제로 해보는 과정을 거쳐야 그림이든 요리든 기술이든 잘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물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임에랴.

 

이 책에는 훈육을 잘 할 수 있는 교사 훈련법들이 많이 나와 있다. 책을 보고 그대로 하려는 시도가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겠지만 기왕이면 동료교사들이나 주변 엄마들과 함께 이 책을 읽고 연습해 보고 실천하고, 실천한 내용을 서로 이야기 나누면서 피드백하는 과정을 꼭 거쳐보기를 권한다. 나는 교사상담연수의 교재로 이 책을 사용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긍정훈육의 골자는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긍정의 대화법이다. 이전에도 비폭력 대화 등 기존의 교사들의 잘못된 언어를 교정하는 방향의 대화법들이 있었다. 맥락은 같다. 학생을 개개인 소중한 존재로 인정하고 기다려주자는 것이다. 벌을 주고 자극하고 화나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상처 주지 않으면서 스스로 잘못된 행동의 원인을 헤아리게 하자는 것이다.

 

탁월한 교사는 학생들을 대할 때 한 인간으로서의 인격과 감정에 대해서는 친절하지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약속과 책임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긍정훈련법은 학생을 보상과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존재로 여긴다. 학생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면모를 헤아린다(행동 빙산 이론). 다음은 <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7가지 신념>이지만 교사들이 학생들을 바라볼 때 가져야 할 관점이기도 하다.

1. 나는 능력이 있다. 2. 나는 도움을 주는 꼭 필요한 사람이다. 3. 나는 학급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4. 나는 원칙이 있고 자기 조절력이 있다. 5. 나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행동한다. 6. 나는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안다. 7. 나는 꾸준한 연습을 통해 지혜와 판단력을 발달시킨다.

 

근본적으로 처벌은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반항, 보복, 후퇴(낮은 자기 평가) 등 부작용이 더 많다. 이는 심리학자 아들러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처벌을 하지 말라는 말은 훈육을 하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비폭력 대화법이나 상담을 통한 생활지도를 말하면 어떤 교사들은 왜 교사들이 학생들 눈치를 봐야 하냐, 친절한 교사가 좋은 교사냐? 엄격하지 않은 지도는 방임이 아닐까?”라고 질문하곤 한다. 체벌이나 처벌을 통한 학습이론으로 길들여진 교사들은 대화를 통해 학생 스스로 자기 통제력을 기르게 하는 교육방법을 낯설어 한다. 거기까지 걸리는 긴 시간을 기다리지도 못한다. 소리 지르고 벌을 주는 것만이 훈육이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학생을 처벌하지 않고 가르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책은 학생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답한다. 잘못의 원인을 깨닫게 한 후에는 잘못에 대한 대가, 혹은 이후의 행동 개선의 방향을 학생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다. ‘생각하게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나누어 본 교사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보스 교사 내 방식대로 갈 거야 너는 하라는 대로만 해

하인 - ‘나는 네 행복과 편안함을 위해 존재해, 원하는 건 내가 다 해줄게.’

유령 잘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몸은 여기 있지만 감정은 사라진 리더

놀랍게도 글을 읽는 순간 보스 같은 동료교사, 하인 같은 동료교사, 유령 같은 동료교사들이 떠올랐다. 나는 어느 쪽에 가까운가 헤아리게도 됐다.

 

그리하여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태도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 학생은 경험에서 배운다

- 실수는 배움의 기회다

칭찬과 보상 대신 격려 사용하기

- 학생들과 함께 학급일정 만들기

- 학급 역할 나누기

 

학교 현장에서 오래 아이들을 가르쳐본 교사들은 대개 여유가 있다. 학생의 일탈행동에 대해 쉽게 놀라거나 분노하지 않고 대응한다. 비슷한 일들을 많이 겪어보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다그치거나 야단치는 것이 결코 아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학생들 스스로 자기 잘못의 원인을 들여다보게 하지 않으면 일시적인 훈계나 체벌로 그 행동을 잠시 멈추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할 수는 없다. 혹은 어른들 눈에 보이는 곳에서는 그 행동을 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의 상처는 낫지 않고 세상과 어른들에 대한 분노가 안팎으로 더 거세질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교사가 지혜롭게 학생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올바르게 훈육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아무리 연수를 듣고 많은 책을 읽고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끝끝내 학생들에게 상처 없이 훈육하는 방법을 체득하지 못하는 교사들도 꽤 많다. 그들은,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한다. 교사라는 직업의 무게가 그렇다. 변화에 대한 자신이 없다면 아이들을 더 이상 망치지 말고 물러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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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 영혼의 치유자 - 눈으로 보는 융 심리학
클레어 던 지음, 공지민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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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 영혼의 치유자 클레어 던

 

 

이 책은 융에 대한 설명서 혹은 전기문에 가까운 책이다. 나는 지금 융이 직접 저술한 <무의식의 원형><무의식 분석>을 함께 읽고 있으므로 이 책은 교과서에 대한 참고서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솔직히 융의 저작은 전문가가 아닌 이가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참고서들이나 정여울이나 김서영 같은 이들이 쓴 서평 속에서 만난 파생상품이 더 매력적이기도 하다.

 

중학생 때 <데미안>을 처음 읽은 이래 지금까지 일곱 번쯤 그 책을 읽었다. 교사가 된 이후에는 사춘기의 제자의 눈으로 다시 읽고 선물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내 나이 열여섯에 만난 데미안을 쉰이 넘은 나이에 융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잘 몰랐다. 데미안은 가장 적인 문학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에밀이 데미안을 통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듯, 내 안 어떤 곳에서 융의 손을 잡고 나 자신을 찾아가고 싶은한 간절한 욕망이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

 

융의 심오한 사상은 그의 저작을 통해 깊이 공부할 필요가 있겠으나, 이 책에서는 그가 일생을 통해 고민했던 무의식과 꿈, 자아의 탐색을 그의 인간적인 면모나 발언과 더불어 소개해 준다. 융의 입문서 정도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자아 탐구)

융은 자아탐구의 목적이 높은 곳이 아니라 중심이라고 말한다. 그는 주변사람들에게도 내면에서 원형적 친구와 동반자를 발견하라고 가르친다. <데미안>의 데미안이 바로 에밀에게 그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현실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겠지만 요즘 내 꿈에도 많은 조력자들이 등장한다. 그런 원형적 동반자에 대한 갈망일 수도 있고 감사일 수도 있으리라.

 

그은 자신의 내면의 일기인 <레드 북>을 썼다고 하는데 알라딘에서도 번역본은 물론 원본도 찾을 수가 없다. 그냥 막연하게 짐작으로 상상으로 그의 책을 그려본다. 융의 권유처럼 나만의 레드 북을 만들어 보고 싶다. 사춘기 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시와 노래와 그림들만 모은 공책을 가지고 싶었었다. 혹시 그게 레드 북과 같은 게 아니었을까? 융은 레드북을 당신 스스로의 교회이자 대성당, 당신 영혼의 조용한 안식처라고 표현했다. 나이가 들어도 그런 책 한 권이 필요하다. 이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내 어머니와 시어머니, 시아버지께 빈 공책 한 권씩을 드리고 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써 보시라 했다. 70년 넘는 생애, 내가 누군지를 돌아볼 기회도 없이 살아온 노인들은 자서전 공책을 소중히 안아들고 좋아하셨다. 그분들께 <레드 북>같은 역할을 하길 바라 본다.

 

융은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을 개성화라고 불렀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자아탐구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융의 개성화에는 좀더 복잡한 의미가 있다. 내 안에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그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내가 나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무의식에는 긍정적인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둠과 악의 요소도 존재한다. 그것을 제거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그것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려 하는 것이 자기 스스로로 살아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 땅에 왔다 간 이 중에서 가장 완벽한 존재로 여기는 예수도, 사실은 자신 안에 선의 요소만이 아니라 그늘과 악마적 요소의 대극을 다 가졌다고 본다. 이런 관점이 기독교적 가치관과는 배치되지만 사실은 그 안에 담긴 고민에는 오히려 정확한 답을 던져줄지도 모른다. 인간은 선한 존재가 아님을, 내 안에는 내가 잘 모르는 요소가 너무 많음을, 기독교적 죄의식으로 설명하고 교화하려 해도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융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해준 것이다. 융이 그리스도를 언급한 대목에서 나는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을 떠올렸다.

<데미안>의 아프락사스가 인간 모두가 가진 이중성과 무의식의 원형적 표현으로 신이면서 악마의 얼굴을 동시에 가졌듯 예수 역시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완벽하게 개성화의 길을 걸은 존재인 것이다. ‘개성화라는 단어를 쓸 때 떠오르는 또 다른 인물도 있다. 체 게바라와 장발장. 삶의 방식은 달랐지만 에밀과 체 게바라는 모두 끊임없이 자기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예수와 체 게바라는 모두 자기 안의 고뇌를 이겨낸 존재로써 완벽한 개성화의 여정을 보여준다.

 

(무의식)

개성화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것은 융이 그림자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통 자신에 대해 좋아하지 않거나 모르거나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층이다. 이 그림자는 종양과 같이 우리 안에 억눌려 있거나 우리가 다른 사람 또는 사람들에게 대해 싫어하는 점을 외부로 투사하기도 한다. 부정적인 그림자는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단점일 수 있다. 반면에 긍정적인 그림자는 우리가 인식하고 실현해야 하는 의미 있는 부분을 보여줄 수 있다. 융은 그림자도 인격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그림자를 알아야만 우리는 정신의 다음 층인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에 이를 수 있다. 아니마는 남성 속의 여성성, 아니무스는 여성 속의 남성성이다. 융은 건강한 아니마가 세상에 끼칠 수 있는 긍정성에도 주목했다. 융은 가부장적인 종교들에서 여성성이 침몰한 것을 개탄했지만 카톨릭에서 마리아를 중재자로 인식한 것이 이를 부분적으로 회복했다고 보았다.

 

()

꿈은 우리 무의식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꿈은 우리 정신의 많은 층들을 반영한다. 표면층에서 꿈은 우리가 알지 못한 사이에 흡수했거나 의식에서 무의식의 상단으로 밀어냈던 개인적인 내용을 보여준다. 꿈은 우리 자신, 다른 사람 또는 사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수도 있다. 과거나 미래를 투사할 수 있다. 더 깊은 층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내용이 등장해서 우리 정신 속의 창의적인 사고 또는 미래의 감정을 발생시키는 씨앗이 드러난다.

 

(문화, 원형)

융은 원래 프로이트의 동료였다. 하지만 결국 그와 결별하면서 분석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프로이트는 성욕으로 직접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정신성욕 psychosexuality’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융은 이에 반대하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문화는 단지 억압된 성욕의 병적인 결과라는 광대극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융은 음악은 소리를 통해 집단 무의식을 표현한다고 생각했고 술에 대해서는 완전성을 위한 우리 존재의 영적 갈증이 술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술에 취했을 때와 음악에 몰입할 때의 기분은 어딘가 닮아 있다. 사랑의 감정도 비슷하고 종교적인 기쁨도 닮았다.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라고 표현했지만 융적으로 말하자만 집단 무의식일 수도 있다. 합일의 충만감은 가장 저급하게는 술로써, 가장 드높게는 종교로써도 경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융은 그것들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말하지 않는다. 헤세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싯다르타> 같은 작품에서 일반적인 도덕률에서는 벗어난 듯 보이나 자기 안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주인공들을 응원한다.

 

처음에 막연하게 융을 읽을 때는 그가 말하는 원형, 그림자, 집단 무의식은 신비주의의 함정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융은 불가지론, 무신론, 물질주의, 신비주의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신비주의의 음울한 그림자가 아니라 치밀하고 체계적인 심리학으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학문적 경쾌함을 무릎을 치게 된다.

 

그의 방대한 저서들을 하나씩 읽어가는 기쁨은 당분간 내가 나에게 준 과제이기도 하지만 이 여정이 좀 더 즐거우려면 번역의 함정을 극복할 필요도 있다. 독어본이나 영어본을 읽어보지 못해 이것이 융의 문장력의 문제인지 어떤지를 알아낼 도리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어설픈 번역의 문제가 분명 존재함은 사실인 것 같다. 무의식에 관한 두 책을 번갈아가며 읽고 있는데 일관된 융의 문체가 읽히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변역 방식과 역자의 색깔이 느껴진다. 둘 다 좋지 않다. 새롭게 번역에 도전해 줄 사람이 아직 없어서인지 재해석한 융이 알고 싶다면 정여울의 <헤세에게 가는 길>을 읽는 것도 괜찮다. 물론 <사람과 상징>은 그런 고민 없이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대중적이고 잘 정돈된 융 이론서임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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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전형적인 문제 제기형책이다. 주장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으로 나아가는 길이 순탄치가 않다. 친절하지도 않다. 나 역시 이 책이 말하는 바가 이게 정확히 맞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다. 내가 읽은 바로는 이렇다. “사진은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을 가장한 사진의 기만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얼핏 사진(을 포함하여 소위 말하는 사실 보도라고 하는 보도나 뉴스류)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으로도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주장이 단순히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거나 보도하지 말라고? 소위 말하는 객관적 보도라는 것의 거짓을 까발렸다고?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은 읽기 쉽지 않고 그래서 손택은 생각거리를 많이 제공하는 작가라고 하나 보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교전 당시, 폭격으로 죽은 어린아이 모습을 동일한 사진이 설명만 바뀐 채 양국의 선전전에 차례로 사용된 일처럼, 사진이 진실만을 말하지 않고 심지어는 사태를 오도시키거나 왜곡하기도 한다는 것을 치밀하게 제시하지만 오히려 그런 면들 때문에 사진은 더더욱 진실을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진작가들은 전쟁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의 본분이라고 생각한다. 래리 버로우스가 촬영했고 라이프가 1962년부터 지면에 담기 시작했던 사진(고통 받던 베트남 농부들과 부상당한 미군 병사들)이 미군의 베트남 주둔에 반대하는 항의의 목소리를 촉발했던 일처럼 사진의 진실성이 해내는 사회적 역할이 분명히 있다. 사진을 통해 직시하게 되는 타인의 고통을 처절하게 고통을 느껴야만 하기에, 사진을 찍고 배포하는 이들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고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도 보다 윤리적이어야 한다.

 

또한 사진의 왜곡은 단지 사진 한 장이 갖는 선정성이나 편집으로 인한 왜곡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주의나 애국주의, 집단의 이익에 따라서도 일어날 수 있다.

미국에 노예사 박물관이 없는 이유는 흑인노예를 둘러싼 기억은 사회의 안정에 지나치게 위험하기 때문에 그 기억을 자극하거나 새롭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됐을 것이다. 미국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이나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박물관은 있지만 흑인노예 박물관이 없는 이유는 홀로코스트는 미국에서는 일어날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미국인들에게 미국이 벌인 베트남 전쟁이나 일본 원폭투하 박물관을 세우는 일은 비애국적인 일로 여겨질 것이다

 

참혹한 사진의 이중의 메시지는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미개하고 뒤떨어진 곳)’ 에서야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하기도 한다.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참혹한 일을 사진으로 접하는 것이 묘하게도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그런 부당한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왜곡된 우월감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로 나아가기 위한 많은 생각들을 수전 손택은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보여준다. 명료하지 않아서 더더욱 철학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의 글은 르뽀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세상살이의 양면성 속에서 정말 옳은 게 무얼까를 깊이 고민하지 않는 안이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반성하게 만든다. 사진의 진실성과, 사진이기 때문에 진실의 외피를 쓰고 더욱 더 깊이 사기를 칠 수 있는, 그 양면성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고 사진을 소화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본의 아니게 남의 고통을 즐기고 세상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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