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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기술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은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보수적이다. 당연하다. 지은이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는 18세기 프랑스의 세속사제란다. 그러니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관점으로 글을 해독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말과 글이 넘치는 지금 세상에, 되돌아보고 곱씹을 대목을 헤아려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요즘 나는 두 가지 ‘말’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다. 하나는 한 동료의 말 많음에 대한 생각이다. 살면서 실패를 경험해 보지 못한 그는 말이 지나치게 많고 늘 누군가를 가르치려 든다. 그의 말은 거의 공해 수준이다. 가끔 그의 잘난 체와 말 많음의 심리학적 근거와 사회적 배경, 가정적 요인까지 헤아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데, 그의 말 많음이 이렇게 주변사람의 정신 영역까지 오염시킨다. 물론 반면교사가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면 안 되는 이유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그에게 감사를 전한다.
누군가가 얼토당토않은 짓을 하거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할 때, 그것을 들어주거나 동조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비웃기 위해 입을 닫는 것은 조롱형 침묵이다. 이때 상대는 자신이 칭찬과 동조를 이끌어낸다고 착각하면서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계속 이어가기 마련이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의 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 나는 가족 앞에서 ‘남의 험담을 하지 않겠노라’ 선언한 바 있다. 사실 살면서 남의 뒷이야기, 험담 따위를 하지 않고 살기란 참 어렵다. 그런 험담이 때로는 심리적 불안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기도 한다. 권력을 쥔 사람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침묵보다 더 절실하게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써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사실 수다나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험담은 정신의 ‘배설’에 불과할 때가 많다. 나는 그런 ‘흔한 험담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과묵하고 진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번번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조롱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절망했다. 그렇게 수십 년 살았는데, 이제 오십이 넘어 아직도 내가 내 의지로 내 혀와 손(글쓰기)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참 부끄러운 일 아닌가.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겠다.
이 책에는 나로 하여금 뜨끔함을 느끼게 하는 구절로 가득 차 있다. 그런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은 다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런 말들. 가령,
나는 제대로 침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만약 그것만으로 족하다면 인간과 짐승이 서로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자기 입안의 혀를 다스릴 줄 아는 것, 혀를 잡아둘 때나 자유롭게 풀어줄 때를 정확히 감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일단 침묵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는 모든 대목에서 변치 않는 단호함을 유지하는 것.
지혜의 상책은 침묵하는 것, 중책은 말을 적당히, 적게 하는 것,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말이 아니더라도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하책이다.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입을 연다.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닫는 것은 나약하거나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입을 닫아야 할 때 말을 하는 것은 경솔하고도 무례하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해 입을 닫을 줄 아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만약 무언가를 말하고픈 욕구에 걷잡을 수 없이 시달리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결코 입을 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침묵만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말을 하는 태도, 말이 너무 많은 태도, 말이 별로 없는 태도.... 다 나쁜 태도이다.
말을 적게 하되 제대로 된 발언을 하는 것이 완벽한 태도이다.
말을 전혀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정말 필요할 때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나쁜 태도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가 바로 말해야 할 그 때임을 어찌 알까. 누구나 자기는 그 말을 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 주장할 것이니 말이다.
정치인에게 뭐라 할 것만이 아니다. 필부필부들의 하나마나한 말들(물론 삶을 다정하게 만들기 위한 오롱조롱한 말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말들의 90%는 할 필요 없는 말이거나 하지 말았어야 할 말 들일 것이다. 나로서는 그걸 알게 되는 일이 필생의 숙제이다. 특히 권력을 쥔 사람일수록, 나이가 많은 이일수록 ‘듣기는 민첩하되 말하기는 더뎌야 한다.’ 모르는 문제를 만나면 미련 없이 입을 닫고, 나보다 많이 아는 이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글’에 대한 반전의 주장도 있다. 흔히 말은 즉자적이나 글은 그렇지 않으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존경받는 풍토가 있다. 하지만 서점에 가보면 이런 것도 책으로도 쓸까 싶은 허접한 책들이 널렸다. 나 역시 너무 많은 글을 쓰면 말이 많았던 지난 밤이 떠올라 괴로운 아침처럼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고 정신의 바닥, 내 지성의 얕음을 들킨 듯 하여 당분간 글을 쓰기 싫어질 때가 있다. 책을 찍어내듯 써대는 많은 작가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저자는 ‘아주 좋은 내용이라도 미주알고주알 글로 풀어내는 것은 문제다.’라고 말한다. 예로 든 ‘학식이 풍부한 이가 대중을 위해 글을 쓴다. 이미 나와 있는 산문집을 운문집으로 고쳐낸다든지... 이런 짓을 왜 하는가? 그 자체로 탁월한 저서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현대에도 적용이 가능한 이야기이다. 책을 내기 위한 책, 팔기 위한 책들, 요즘 상업적으로 만들어 팔고 있는 처세술 책, 필사 책, 재탕 책들을 꾸짖는 듯 들린다.
그리고 중요한 지적을 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작가 노릇을 하게 되면 쌓이는 책들로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것이 글로 표현되면 인간의 정신이 활동할 여지가 더 이상 남아 있겠는가?
말로도 글로도 표현되지 않은 인간의 깊은 영성의 세계, 그것을 남겨놓아야 할 것이다. 시나 그림을 명료한 비평으로 완벽하게 해석한 글을 읽고 싶지 않다. 궁금하지만 결코, 끝내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글의 침묵’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