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전형적인 문제 제기형책이다. 주장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으로 나아가는 길이 순탄치가 않다. 친절하지도 않다. 나 역시 이 책이 말하는 바가 이게 정확히 맞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다. 내가 읽은 바로는 이렇다. “사진은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을 가장한 사진의 기만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얼핏 사진(을 포함하여 소위 말하는 사실 보도라고 하는 보도나 뉴스류)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으로도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주장이 단순히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거나 보도하지 말라고? 소위 말하는 객관적 보도라는 것의 거짓을 까발렸다고?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은 읽기 쉽지 않고 그래서 손택은 생각거리를 많이 제공하는 작가라고 하나 보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교전 당시, 폭격으로 죽은 어린아이 모습을 동일한 사진이 설명만 바뀐 채 양국의 선전전에 차례로 사용된 일처럼, 사진이 진실만을 말하지 않고 심지어는 사태를 오도시키거나 왜곡하기도 한다는 것을 치밀하게 제시하지만 오히려 그런 면들 때문에 사진은 더더욱 진실을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진작가들은 전쟁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의 본분이라고 생각한다. 래리 버로우스가 촬영했고 라이프가 1962년부터 지면에 담기 시작했던 사진(고통 받던 베트남 농부들과 부상당한 미군 병사들)이 미군의 베트남 주둔에 반대하는 항의의 목소리를 촉발했던 일처럼 사진의 진실성이 해내는 사회적 역할이 분명히 있다. 사진을 통해 직시하게 되는 타인의 고통을 처절하게 고통을 느껴야만 하기에, 사진을 찍고 배포하는 이들은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고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도 보다 윤리적이어야 한다.

 

또한 사진의 왜곡은 단지 사진 한 장이 갖는 선정성이나 편집으로 인한 왜곡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주의나 애국주의, 집단의 이익에 따라서도 일어날 수 있다.

미국에 노예사 박물관이 없는 이유는 흑인노예를 둘러싼 기억은 사회의 안정에 지나치게 위험하기 때문에 그 기억을 자극하거나 새롭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됐을 것이다. 미국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이나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박물관은 있지만 흑인노예 박물관이 없는 이유는 홀로코스트는 미국에서는 일어날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미국인들에게 미국이 벌인 베트남 전쟁이나 일본 원폭투하 박물관을 세우는 일은 비애국적인 일로 여겨질 것이다

 

참혹한 사진의 이중의 메시지는 잔악하고 부당한 고통, 반드시 치유해야만 할 고통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미개하고 뒤떨어진 곳)’ 에서야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하기도 한다.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참혹한 일을 사진으로 접하는 것이 묘하게도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그런 부당한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왜곡된 우월감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로 나아가기 위한 많은 생각들을 수전 손택은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보여준다. 명료하지 않아서 더더욱 철학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의 글은 르뽀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세상살이의 양면성 속에서 정말 옳은 게 무얼까를 깊이 고민하지 않는 안이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반성하게 만든다. 사진의 진실성과, 사진이기 때문에 진실의 외피를 쓰고 더욱 더 깊이 사기를 칠 수 있는, 그 양면성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고 사진을 소화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본의 아니게 남의 고통을 즐기고 세상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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