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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 영혼의 치유자 - 눈으로 보는 융 심리학
클레어 던 지음, 공지민 옮김 / 지와사랑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카를 융 – 영혼의 치유자 –클레어 던
이 책은 융에 대한 설명서 혹은 전기문에 가까운 책이다. 나는 지금 융이 직접 저술한 <무의식의 원형><무의식 분석>을 함께 읽고 있으므로 이 책은 교과서에 대한 참고서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솔직히 융의 저작은 전문가가 아닌 이가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참고서’들이나 정여울이나 김서영 같은 이들이 쓴 서평 속에서 만난 파생상품이 더 매력적이기도 하다.
중학생 때 <데미안>을 처음 읽은 이래 지금까지 일곱 번쯤 그 책을 읽었다. 교사가 된 이후에는 사춘기의 제자의 눈으로 다시 읽고 선물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내 나이 열여섯에 만난 데미안을 쉰이 넘은 나이에 융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잘 몰랐다. 데미안은 가장 ‘융’적인 문학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에밀이 데미안을 통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듯, 내 안 어떤 곳에서 융의 손을 잡고 나 자신을 찾아가고 싶은한 간절한 욕망이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
융의 심오한 사상은 그의 저작을 통해 깊이 공부할 필요가 있겠으나, 이 책에서는 그가 일생을 통해 고민했던 무의식과 꿈, 자아의 탐색을 그의 인간적인 면모나 발언과 더불어 소개해 준다. 융의 입문서 정도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자아 탐구)
융은 자아탐구의 목적이 ‘높은 곳이 아니라 중심’이라고 말한다. 그는 주변사람들에게도 내면에서 원형적 친구와 동반자를 발견하라고 가르친다. <데미안>의 데미안이 바로 에밀에게 그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현실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겠지만 요즘 내 꿈에도 많은 조력자들이 등장한다. 그런 원형적 동반자에 대한 갈망일 수도 있고 감사일 수도 있으리라.
그은 자신의 내면의 일기인 <레드 북>을 썼다고 하는데 알라딘에서도 번역본은 물론 원본도 찾을 수가 없다. 그냥 막연하게 짐작으로 상상으로 그의 책을 그려본다. 융의 권유처럼 ‘나만의 레드 북’을 만들어 보고 싶다. 사춘기 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시와 노래와 그림들만 모은 공책을 가지고 싶었었다. 혹시 그게 레드 북과 같은 게 아니었을까? 융은 레드북을 ‘당신 스스로의 교회이자 대성당, 당신 영혼의 조용한 안식처’라고 표현했다. 나이가 들어도 그런 책 한 권이 필요하다. 이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내 어머니와 시어머니, 시아버지께 빈 공책 한 권씩을 드리고 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써 보시라 했다. 70년 넘는 생애, 내가 누군지를 돌아볼 기회도 없이 살아온 노인들은 자서전 공책을 소중히 안아들고 좋아하셨다. 그분들께 <레드 북>같은 역할을 하길 바라 본다.
융은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을 ‘개성화’라고 불렀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자아탐구’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융의 개성화에는 좀더 복잡한 의미가 있다. 내 안에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그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내가 나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무의식에는 긍정적인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둠과 악의 요소도 존재한다. 그것을 제거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그것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려 하는 것이 자기 스스로로 살아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 땅에 왔다 간 이 중에서 가장 완벽한 존재로 여기는 예수도, 사실은 자신 안에 선의 요소만이 아니라 그늘과 악마적 요소의 대극을 다 가졌다고 본다. 이런 관점이 기독교적 가치관과는 배치되지만 사실은 그 안에 담긴 고민에는 오히려 정확한 답을 던져줄지도 모른다. 인간은 선한 존재가 아님을, 내 안에는 내가 잘 모르는 요소가 너무 많음을, 기독교적 죄의식으로 설명하고 교화하려 해도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융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해준 것이다. 융이 그리스도를 언급한 대목에서 나는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을 떠올렸다.
<데미안>의 아프락사스가 인간 모두가 가진 이중성과 무의식의 원형적 표현으로 신이면서 악마의 얼굴을 동시에 가졌듯 예수 역시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완벽하게 개성화의 길을 걸은 존재인 것이다. ‘개성화’라는 단어를 쓸 때 떠오르는 또 다른 인물도 있다. 체 게바라와 장발장. 삶의 방식은 달랐지만 에밀과 체 게바라는 모두 끊임없이 자기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예수와 체 게바라는 모두 자기 안의 고뇌를 이겨낸 존재로써 완벽한 개성화의 여정을 보여준다.
(무의식)
개성화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것은 융이 그림자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통 자신에 대해 좋아하지 않거나 모르거나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층이다. 이 그림자는 종양과 같이 우리 안에 억눌려 있거나 우리가 다른 사람 또는 사람들에게 대해 싫어하는 점을 외부로 투사하기도 한다. 부정적인 그림자는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단점일 수 있다. 반면에 긍정적인 그림자는 우리가 인식하고 실현해야 하는 의미 있는 부분을 보여줄 수 있다. 융은 그림자도 인격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그림자를 알아야만 우리는 정신의 다음 층인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에 이를 수 있다. 아니마는 남성 속의 여성성, 아니무스는 여성 속의 남성성이다. 융은 건강한 아니마가 세상에 끼칠 수 있는 긍정성에도 주목했다. 융은 가부장적인 종교들에서 여성성이 침몰한 것을 개탄했지만 카톨릭에서 마리아를 중재자로 인식한 것이 이를 부분적으로 회복했다고 보았다.
(꿈)
꿈은 우리 무의식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꿈은 우리 정신의 많은 층들을 반영한다. 표면층에서 꿈은 우리가 알지 못한 사이에 흡수했거나 의식에서 무의식의 상단으로 밀어냈던 개인적인 내용을 보여준다. 꿈은 우리 자신, 다른 사람 또는 사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수도 있다. 과거나 미래를 투사할 수 있다. 더 깊은 층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내용이 등장해서 우리 정신 속의 창의적인 사고 또는 미래의 감정을 발생시키는 씨앗이 드러난다.
(문화, 원형)
융은 원래 프로이트의 동료였다. 하지만 결국 그와 결별하면서 ‘분석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프로이트는 성욕으로 직접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정신성욕 psychosexuality’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융은 이에 반대하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문화는 단지 억압된 성욕의 병적인 결과라는 광대극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융은 음악은 소리를 통해 집단 무의식을 표현한다고 생각했고 술에 대해서는 ‘완전성을 위한 우리 존재의 영적 갈증’이 술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술에 취했을 때와 음악에 몰입할 때의 기분은 어딘가 닮아 있다. 사랑의 감정도 비슷하고 종교적인 기쁨도 닮았다.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라고 표현했지만 융적으로 말하자만 ‘집단 무의식’일 수도 있다. 합일의 충만감은 가장 저급하게는 술로써, 가장 드높게는 종교로써도 경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융은 그것들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말하지 않는다. 헤세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싯다르타> 같은 작품에서 일반적인 도덕률에서는 벗어난 듯 보이나 자기 안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주인공들을 응원한다.
처음에 막연하게 융을 읽을 때는 그가 말하는 ‘원형, 그림자, 집단 무의식’은 신비주의의 함정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융은 불가지론, 무신론, 물질주의, 신비주의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신비주의의 음울한 그림자가 아니라 치밀하고 체계적인 심리학으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학문적 경쾌함을 무릎을 치게 된다.
그의 방대한 저서들을 하나씩 읽어가는 기쁨은 당분간 내가 나에게 준 과제이기도 하지만 이 여정이 좀 더 즐거우려면 ‘번역’의 함정을 극복할 필요도 있다. 독어본이나 영어본을 읽어보지 못해 이것이 융의 문장력의 문제인지 어떤지를 알아낼 도리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어설픈 번역의 문제가 분명 존재함은 사실인 것 같다. 무의식에 관한 두 책을 번갈아가며 읽고 있는데 일관된 융의 문체가 읽히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변역 방식과 역자의 색깔이 느껴진다. 둘 다 좋지 않다. 새롭게 번역에 도전해 줄 사람이 아직 없어서인지 ‘재해석한 융’이 알고 싶다면 정여울의 <헤세에게 가는 길>을 읽는 것도 괜찮다. 물론 <사람과 상징>은 그런 고민 없이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대중적이고 잘 정돈된 융 이론서임도 밝혀둔다.